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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포보스 – 헥토르와 파리스의 형제
데이포보스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아들로, 헥토르와 파리스의 형제이자 트로이를 지킨 뛰어난 전사였다. 그는 그리스군의 함선 앞에서 싸우며 여러 장수와 맞섰고,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무너져 가는 트로이에 남았다. 파리스가 죽자 헬레네의 새 남편이 되었지만, 목마가 성 안으로 들어온 마지막 밤 메넬라오스의 손에 죽는다. 훗날 아이네이아스는 명계에서 그를 만나 그날 밤의 이야기를 듣는다.
1.1 프리아모스의 아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에게는 많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 가운데 데이포보스는 헥토르와 파리스, 헬레노스와 같은 왕자들과 함께 자랐다. 형 헥토르는 트로이 최고의 전사였고, 파리스는 헬레네를 데려와 전쟁의 불씨를 당긴 인물이었다. 예언의 능력을 지닌 헬레노스와 달리 데이포보스는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 전사의 길을 택했다.
그리스 연합군이 바다를 건너와 트로이를 포위하자 왕자들은 저마다 성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나갔다. 데이포보스 역시 왕궁에 머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헥토르와 함께 전열에 서고, 파리스·아이네이아스·헬레노스 등과 더불어 트로이군을 이끄는 주요 전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싸웠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프리아모스의 아들들은 하나씩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데이포보스는 살아남아 싸움을 이어 갔다.
《일리아스》에서 그의 이름은 여러 차례 격전의 한가운데에 나타난다. 그는 형 헥토르처럼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영웅은 아니지만, 트로이군이 그리스군의 함선까지 밀어붙이는 가장 치열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쟁이 끝을 향해 갈수록 데이포보스는 점차 헥토르와 파리스 뒤에 가려진 왕자가 아니라, 무너지는 왕가를 끝까지 지키는 전사로 남게 된다.
프리아모스 왕가의 왕자들 사이에 선 데이포보스
1.2 함선 앞의 전투
트로이군이 그리스군의 방벽을 넘어 함선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갔을 때, 전장은 하루 종일 먼지와 함성으로 뒤덮였다. 헥토르는 병사들에게 물러서지 말라고 외쳤고, 그 사이에서 데이포보스도 커다란 방패를 앞세운 채 전진했다. 크레타의 전사 메리오네스가 그를 겨누어 창을 던졌지만, 창끝은 데이포보스의 튼튼한 방패를 뚫지 못한 채 자루가 부러졌다.
데이포보스는 계속 전열을 지켰다. 이도메네우스가 트로이 편의 장수 아시오스를 쓰러뜨리자 그는 죽은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창을 던졌다. 이도메네우스는 몸을 낮춰 피했지만, 창은 그 뒤에 있던 힙세노르의 몸에 꽂혔다. 데이포보스는 아시오스가 홀로 명계로 가지 않게 되었다며 승리를 외쳤고, 그의 외침에 그리스군은 더욱 거세게 맞섰다.
곧 이도메네우스가 다시 트로이 전사 알카토오스를 죽이자 데이포보스는 그와 정면으로 맞설지 고민했다. 그는 혼자 돌진하기보다 아이네이아스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아이네이아스는 데이포보스와 함께 군사를 모았고, 파리스와 아게노르도 그 전열에 합류했다. 데이포보스는 힘만 믿고 싸우는 전사라기보다, 동료를 불러 모아 전열을 다시 세울 줄 아는 왕자였다.
함선 앞에서 방패를 앞세우고 전진하는 데이포보스
1.3 메리오네스의 창
아이네이아스와 데이포보스가 이끈 트로이 전사들은 다시 이도메네우스의 부대와 맞부딪쳤다. 데이포보스는 물러나는 이도메네우스를 향해 창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창끝은 목표를 비껴가 아레스의 아들 아스칼라포스의 어깨를 꿰뚫었다. 아스칼라포스가 쓰러지자 양쪽 군사들은 그의 시신과 무구를 차지하려고 뒤엉켰고, 데이포보스는 앞으로 뛰어들어 죽은 전사의 투구를 벗기려 했다.
바로 그때 메리오네스가 달려들었다. 그의 창은 데이포보스의 팔을 깊게 찔렀고, 손에 들고 있던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메리오네스가 창을 뽑아 들고 물러나자 데이포보스의 팔에서는 피가 흘렀다. 계속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된 그에게 친형제 폴리테스가 달려와 허리를 붙잡고 전장에서 끌어냈다. 뒤쪽에서 기다리던 전차가 그를 성 안으로 실어 날랐다.
그날 데이포보스는 큰 부상을 입으며 트로이 왕가가 치르고 있던 전쟁의 대가를 몸으로 겪었다. 같은 전투에서 헬레노스도 손을 다쳐 물러났고 여러 트로이 장수들이 쓰러졌다. 헥토르는 전장을 돌며 데이포보스와 헬레노스를 찾았으나 둘 다 부상을 입고 이미 전선에서 빠진 뒤였다. 데이포보스는 그날 목숨을 건졌고, 이후에도 트로이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전쟁을 이어 간다.
메리오네스의 창에 팔을 다친 데이포보스
1.4 헥토르가 믿은 동생
아킬레우스가 전장으로 돌아온 뒤 트로이군은 성벽 안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헥토르는 홀로 성문 밖에 남았다. 프리아모스와 헤카베가 성벽 위에서 들어오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못했다. 아킬레우스가 다가오자 헥토르는 한동안 성벽 둘레를 달아났고, 그때 아테나는 데이포보스의 모습을 빌려 그의 곁에 나타났다.
가짜 데이포보스는 형에게 이제 함께 아킬레우스와 맞서 싸우자고 말했다. 헥토르는 성 안에 있어야 할 동생이 자신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왔다고 믿었다. 그는 용기를 되찾아 달아나기를 멈추고 아킬레우스에게 맞섰다. 하지만 던진 창이 빗나간 뒤 헥토르가 동생에게 새 창을 달라고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헥토르는 자신이 신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진짜 데이포보스는 성벽 안에 있었고, 아테나는 헥토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장 믿을 만한 형제의 모습을 이용한 것이었다. 헥토르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마지막 싸움에 나섰고 결국 아킬레우스의 창에 쓰러졌다. 데이포보스는 형의 마지막 순간 곁에 없었지만, 헥토르가 최후에 의지했다고 믿은 사람의 얼굴은 바로 그의 것이었다.
데이포보스로 변한 아테나를 믿는 헥토르
2.1 헥토르 없는 트로이
헥토르가 죽자 트로이는 가장 강한 수호자를 잃었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진영까지 찾아가 아들의 시신을 되찾았고, 성 안에서는 장례가 치러졌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군은 여전히 성 밖에 있었고, 살아남은 왕자와 장수들은 다시 성문과 성벽을 지켜야 했다. 데이포보스에게도 이제 헥토르가 맡아 왔던 싸움의 일부가 남겨졌다.
트로이를 돕기 위해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가 군대를 이끌고 왔고, 뒤이어 에티오피아의 왕 멤논도 원군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리스군을 몰아붙였지만 결국 모두 아킬레우스에게 쓰러졌다. 트로이는 새로운 원군이 올 때마다 희망을 걸었고, 그들이 죽을 때마다 다시 성 안으로 밀려났다. 데이포보스와 파리스, 아이네이아스 등 살아남은 전사들은 점점 줄어드는 병력으로 전쟁을 이어 갔다.
마침내 아킬레우스마저 파리스의 화살과 아폴론의 도움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트로이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영웅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를 잃은 뒤에도 트로이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았고, 오래전 렘노스섬에 버려 두었던 필록테테스와 그가 지닌 헤라클레스의 활이 다시 전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제 데이포보스 앞에는 또 다른 형제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헥토르 없는 성벽을 지키는 데이포보스
2.2 파리스의 죽음
그리스군은 오래전 렘노스섬에 버려 두었던 필록테테스를 다시 전쟁으로 불러왔다. 그는 헤라클레스에게서 물려받은 활과 독화살을 지닌 뛰어난 명궁이었다. 상처를 치료한 필록테테스는 다시 전장에 나섰고, 파리스와 맞서 싸운 끝에 그에게 치명적인 화살을 명중시켰다. 오래된 서사시 전승에서는 파리스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파리스의 마지막이 조금 다르게 전해진다. 화살에 맞아 죽어 가던 그는 이다산으로 올라가 옛 아내 오이노네를 찾아가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이노네는 한때 그를 사랑했지만 헬레네 때문에 버림받은 뒤였고, 처음에는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파리스가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마음을 돌렸으나 이미 늦었고, 그녀 역시 슬픔 속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소일리아스》 계열에서는 메넬라오스가 파리스의 시신을 모욕했으나, 트로이군이 끝내 그의 몸을 되찾아 성 안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고 전한다. 십 년 동안 전쟁의 원인으로 불렸던 왕자가 그렇게 사라졌다. 헥토르에 이어 파리스까지 죽으면서 프리아모스의 왕궁에는 또 하나의 빈자리가 생겼고, 이제 헬레네의 새로운 남편을 정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는 파리스
2.3 헬레네를 둘러싼 형제들
파리스의 장례가 끝난 뒤 헬레네를 누가 아내로 맞을 것인지를 두고 데이포보스와 헬레노스가 다투었다. 두 사람은 모두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아들이었지만 성격은 달랐다. 데이포보스가 창과 방패를 든 전사였다면, 헬레노스는 신들의 뜻과 예언을 아는 왕자였다. 결국 선택된 사람은 데이포보스였고, 그는 죽은 형 파리스의 뒤를 이어 헬레네와 결혼하게 되었다.
헬레노스는 이 결정에 크게 상심했다. 그는 트로이를 떠나 이다산으로 물러났고, 그리스군의 예언자 칼카스는 헬레노스가 트로이의 운명을 지키는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디세우스는 그를 붙잡아 그리스 진영으로 데려갔다. 포로가 된 헬레노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그리스군에게 알려 주었고, 그 정보는 전쟁의 마지막 국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데이포보스가 헬레네와 결혼한 것은 겉으로 보면 왕가 안에서 그의 지위가 더욱 높아진 일이었다. 그 선택을 계기로 헬레노스는 성을 떠났고, 얼마 뒤 트로이의 운명에 관한 비밀은 그리스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데이포보스는 이를 알지 못한 채 헬레네의 남편이 되어 왕궁에 남았다. 그러나 헬레노스가 떠난 뒤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하나씩 갖추기 시작했다.
헬레네를 두고 맞서는 데이포보스와 헬레노스
2.4 헬레네의 새로운 남편
데이포보스와 헬레네의 결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전승마다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소일리아스》의 내용을 전하는 기록에서는 파리스가 죽은 뒤 데이포보스가 헬레네와 결혼했다고 간단히 말한다. 후대의 비극과 전승에서는 헬레네가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파리스가 사라진 뒤 헬레네는 그의 형제 데이포보스의 아내가 되어 다시 트로이 왕궁에 머물렀다.
그러나 두 사람이 평온한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헬레노스를 붙잡아 트로이를 함락시킬 조건을 알아낸 그리스군은 하나씩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펠롭스의 유골을 그리스 진영으로 가져왔고, 이어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를 전쟁에 불러들였다. 마지막으로 오디세우스는 변장하여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갔고, 디오메데스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지켜 준다고 여겨지던 팔라디온까지 훔쳐냈다.
데이포보스는 헬레네의 남편이자 살아남은 프리아모스의 왕자로 성 안에 남았다. 헥토르도 파리스도 이미 죽었고 많은 형제들이 전장에서 사라진 뒤였다. 왕궁에서 그의 자리는 이전보다 커졌지만, 그것은 승리 뒤에 얻은 권력이 아니었다. 파리스가 차지했던 자리를 이어받은 데이포보스가 물려받은 것은 헬레네와의 결혼만이 아니라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던 전쟁이었다. 그리고 성 밖에서는 그리스군이 마지막 계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헬레네 곁에 선 새 남편 데이포보스
3.1 목마 곁의 헬레네
어느 날 트로이 사람들이 성 밖을 바라보자 십 년 동안 해안을 가득 메웠던 그리스군의 함선과 진영이 사라져 있었다. 해변에는 거대한 목마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리스군이 마침내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믿은 사람들은 기뻐했고, 트로이인들 앞에 나타난 시논의 거짓말까지 더해지면서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봉헌물로 여겨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목마 속에는 오디세우스와 메넬라오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정예 전사들이 숨어 있었다. 목마가 성 안으로 들어온 뒤 헬레네는 데이포보스와 함께 그 곁으로 갔다. 훗날 《오디세이아》에서 메넬라오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헬레네는 목마 주위를 세 차례 돌며 그 표면을 손으로 만지고,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리스 장수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더욱이 그들의 아내와 닮은 목소리까지 흉내 냈다.
목마 안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메넬라오스와 디오메데스는 순간 대답하거나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오디세우스가 그들을 막았다. 안티클로스만은 끝내 대답하려 했고, 오디세우스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 목마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파리스의 뒤를 이어 헬레네의 남편이 된 데이포보스와 헬레네가 함께 등장하는 드문 장면이었다. 거대한 목마는 이미 트로이 한가운데 서 있었고, 십 년 동안 버틴 성의 마지막 밤이 그들 곁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목마 곁을 함께 도는 헬레네와 데이포보스
3.2 다시 열린 성문
밤이 깊어지자 트로이 사람들은 오랜 전쟁이 끝났다고 믿으며 잠들었다. 그러나 바다로 떠난 것처럼 보였던 그리스 함대는 가까운 테네도스섬에 숨어 있었다. 시논이 신호를 보내자 함선들은 다시 트로이 해안으로 돌아왔고, 목마의 문도 열렸다. 오디세우스와 메넬라오스, 네오프톨레모스 등 안에 숨어 있던 전사들이 밧줄을 타고 하나씩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성문을 열어 돌아온 그리스군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트로이 사람들은 무기를 제대로 갖출 겨를도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곳곳에서 집과 신전이 불타고, 십 년 동안 그리스군을 막아 냈던 성 안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프리아모스의 왕궁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트로이 전사들은 흩어진 채 각자의 집과 가족을 지키며 싸워야 했다.
데이포보스에게 이 밤은 전쟁의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성 밖에서 적을 막아 오던 싸움은 이제 왕궁과 집 안으로 들어왔다. 헥토르와 파리스가 살아 있을 때 지키려 했던 도시가 눈앞에서 불타고 있었고, 그리스군 가운데에는 헬레네의 첫 남편 메넬라오스도 있었다. 메넬라오스가 찾고 있던 것은 트로이의 왕궁과 보물만이 아니었다. 그는 헬레네와 그녀의 새 남편 데이포보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불타는 트로이 왕궁으로 향하는 데이포보스
3.3 데이포보스의 마지막 싸움
트로이의 거리가 불길과 함성으로 뒤덮인 가운데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는 데이포보스의 집으로 향했다. 훗날 《오디세이아》에서 음유시인 데모도코스는 오디세우스가 메넬라오스와 함께 그 집으로 들어가 트로이 최후의 밤 가운데서도 매우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노래한다. 파리스에게 헬레네를 빼앗긴 뒤 십 년 동안 전쟁을 치른 메넬라오스가 향한 곳에는 이제 파리스의 형제이자 헬레네의 새 남편이 된 데이포보스가 있었다.
그 뒤 데이포보스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는 전승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해진다. 아폴로도로스의 전승에서는 메넬라오스가 데이포보스를 죽였다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데이포보스가 마지막 순간 어떻게 싸웠는지는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트로이의 마지막 밤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가 그의 집으로 향했고, 그날 데이포보스는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데이포보스가 쓰러진 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되찾아 그리스 함선으로 데려갔다. 헥토르와 파리스의 형제로 태어나 오랫동안 트로이를 위해 싸웠던 데이포보스의 삶도 도시와 함께 끝났다.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성을 지켰고 파리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마지막에는 파리스 때문에 시작된 전쟁의 상대였던 메넬라오스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데이포보스의 집으로 들이닥친 메넬라오스
3.4 명계에서 만난 아이네이아스
트로이가 무너진 뒤 여러 해가 지나, 아이네이아스는 새로운 땅을 찾아 이탈리아로 향하다 쿠마이에 도착했다. 그는 무녀 시빌라의 안내를 받아 명계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옛 동료들의 혼령을 만났다. 그러던 중 얼굴과 몸에 끔찍한 상처가 남은 데이포보스를 알아보았다. 아이네이아스는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뒤 로이테온 해안에 이름과 무구를 두고 빈 무덤을 세워 주었다고 말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데이포보스는 아이네이아스에게 트로이의 마지막 밤을 들려준다. 그는 헬레네가 성채에서 그리스군에게 횃불로 신호를 보내고, 자신이 잠든 사이 집 안의 무기를 치워 버렸다고 말한다. 이어 메넬라오스가 집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었고, 오디세우스도 함께 찾아왔다. 데이포보스는 제대로 무장할 틈도 없이 공격을 받아 죽었으며, 그때 입은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명계에 남아 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옛 동료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지만 시빌라는 갈 길이 남았다며 서둘러 떠나야 한다고 재촉했다.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살아남아 새로운 나라를 찾아가야 하는 아이네이아스와 불타는 트로이의 마지막 밤에 삶이 끝난 데이포보스의 길은 그곳에서 다시 갈라졌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트로이가 무너지던 밤에서 끝나지 않고, 훗날 명계에서 살아남은 동료에게 자신의 최후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마지막을 맺는다.
명계에서 아이네이아스와 마주한 데이포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