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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노스 – 트로이의 예언자
헬레노스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아들로, 트로이에서 가장 뛰어난 예언자로 꼽힌 왕자였다. 그는 신들의 뜻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무기를 들고 전장에 섰으며, 헥토르에게 신탁을 전해 위기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파리스가 죽은 뒤 헬레네를 둘러싼 갈등으로 트로이를 떠났고, 그리스군에게 붙잡혀 성을 무너뜨릴 조건을 밝히게 된다. 멸망 뒤에는 에페이로스로 가서 새 삶을 꾸리고, 아이네이아스에게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을 예언했다.
1.1 예언의 능력을 지닌 왕자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에게는 수많은 아들과 딸이 있었고, 그 가운데 헬레노스는 다른 왕자들과는 조금 다른 재능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누이 카산드라와 마찬가지로 앞날을 내다보고 신들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예언자였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신들의 뜻과 여러 징조를 살피며 트로이군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조언했다. 호메로스는 그를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자 트로이에서 가장 뛰어난 점술가로 소개한다.
헬레노스의 예언은 왕궁 안에서 미래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리스군이 성벽 가까이 밀려오고 전황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전장을 살피며 트로이의 장수들에게 필요한 행동을 일러주었다. 그의 예언과 조언은 실제 전투의 판단으로 이어졌고,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를 비롯한 장수들도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왕자이면서 예언자였던 헬레노스는 신들의 뜻을 전쟁터의 선택으로 이어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예언의 능력이 있다고 해서 헬레노스가 트로이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앞으로 닥칠 일을 헤아리고 신들의 뜻을 읽을 수 있었지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힘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수많은 형제와 동료가 쓰러졌고 트로이의 운명도 점차 어두워졌다. 헬레노스는 그렇게 왕가의 한복판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도시의 미래를 누구보다 가까이 바라보는 예언자가 되었다.
전장을 바라보며 징조를 읽는 헬레노스
1.2 헥토르에게 전한 신탁
전쟁이 격렬해지던 어느 날, 디오메데스를 앞세운 그리스군이 트로이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병사들이 성 안으로 달아날 듯 흔들리자 헬레노스는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를 찾아갔다. 그는 두 장수가 성문 앞에서 병사들을 붙들어 세우고 무너진 대열을 다시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헥토르에게는 자신과 아이네이아스가 전장에 남아 싸울 테니 성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 헤카베에게 신들의 도움을 청하도록 하라고 일렀다.
헬레노스가 특히 두려워한 이는 디오메데스였다. 그는 헤카베가 트로이의 귀부인들을 이끌고 아테나 신전으로 가서 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여신의 무릎에 바치고, 아직 멍에를 메지 않은 어린 암소 열두 마리를 제물로 약속하게 하라고 했다. 헥토르는 동생의 말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갔고, 헤카베와 여인들은 아테나의 신전에서 트로이를 구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여신은 그들의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뒤 헬레노스는 다시 신들의 뜻을 알아차렸다. 아폴론과 아테나가 그날의 전투를 잠시 멈추게 하려 하자 그는 헥토르에게 그리스군의 가장 뛰어난 전사를 일대일 결투로 불러내라고 권했다. 또한 아직 헥토르가 죽을 운명은 아니라고 말해 그를 안심시켰다. 헥토르가 도전을 받아들이자 여러 그리스 영웅이 결투에 자원했고, 제비뽑기 끝에 대 아이아스가 상대자로 뽑혔다. 헬레노스의 예언은 이렇게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병사와 장수들의 움직임을 실제로 바꾸었다.
헥토르에게 신들의 뜻을 전하는 헬레노스
1.3 활과 칼을 든 예언자
헬레노스는 신탁만 전하는 왕자가 아니었다. 트로이 왕가의 다른 형제들처럼 갑옷을 입고 직접 전장에 나가 싸웠으며, 칼과 활도 능숙하게 다루었다.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이 함선 부근에서 격렬하게 맞붙었을 때 그는 트라키아식 긴 칼을 휘둘러 그리스 장수 데이피로스를 쓰러뜨렸다. 트로이에서 가장 뛰어난 예언자로 불렸던 그의 손에도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적을 겨누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동료의 죽음을 본 메넬라오스가 헬레노스에게 달려들었다. 헬레노스는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날렸고, 화살은 메넬라오스의 가슴에 맞았지만 단단한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곧이어 메넬라오스가 던진 창이 헬레노스가 활을 쥐고 있던 손을 꿰뚫었다. 헬레노스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전열에서 물러났고, 아게노르가 달려와 창을 뽑은 뒤 양털 띠로 상처 입은 손을 감싸 주었다.
그날 헬레노스는 목숨을 건졌지만 전장에서는 빠져야 했다. 얼마 뒤 헥토르가 여러 장수의 행방을 찾자 파리스는 데이포보스와 헬레노스가 각각 팔과 손에 부상을 입고 성 안으로 물러났다고 알려주었다. 이 싸움에서 헬레노스는 왕궁에서 미래만 점치는 인물이 아니라 직접 목숨을 걸고 트로이를 지킨 왕자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운명을 읽는 예언자인 동시에 그 운명 속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싸워야 했던 트로이의 전사였다.
메넬라오스와 맞서 활을 겨누는 헬레노스
2.1 파리스가 죽은 뒤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무렵, 필록테테스가 쏜 화살에 파리스가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헬레네를 데려와 전쟁의 불씨를 만든 왕자가 사라지자 트로이 왕가에는 뜻밖의 문제가 남았다. 이제 헬레네를 누구의 아내로 삼을 것인가 하는 일이었다. 후보로 나선 이는 파리스의 두 형제, 헬레노스와 데이포보스였다. 두 사람은 같은 왕가의 왕자였지만 전쟁에서 맡아 온 역할은 크게 달랐다.
헬레노스는 자신도 헬레네의 남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택은 데이포보스에게 돌아갔다. 전승은 누가 최종 결정을 내렸는지를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데이포보스가 헬레네의 새 남편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전한다. 전장에서 함께 싸웠던 형제 사이에 깊은 틈이 생겼다. 헬레노스에게 그것은 단순히 한 여인을 잃은 일이 아니라 왕가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밀려난 모욕이었다.
그때 트로이의 상황은 이미 절망에 가까웠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가 모두 죽었고, 수많은 영웅이 쓰러진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헬레노스는 도시를 지키는 신탁과 멸망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왕가와 등을 지게 된 것은 트로이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파리스의 죽음 뒤 시작된 형제의 다툼은 트로이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예언자가 성 밖으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헬레네를 두고 맞서는 헬레노스와 데이포보스
2.2 트로이를 떠난 왕자
데이포보스가 헬레네의 남편으로 선택되자 헬레노스는 트로이를 떠났다. 그는 그리스군에게 투항하지도 않았고 곧장 적진으로 향하지도 않았다. 성을 등지고 이다산으로 올라가 그곳에 머물렀다. 자신을 밀어낸 왕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지, 이미 트로이의 멸망을 내다보고 도시에서 멀어지려 했던 것인지는 전승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다만 트로이의 중요한 신탁을 알고 있던 예언자가 성벽 밖에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군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리스 진영의 예언자 칼카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키려면 헬레노스가 알고 있는 신탁을 알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십 년 가까이 싸우고도 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그리스군에게 헬레노스는 반드시 붙잡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었다. 오디세우스는 헬레노스를 붙잡기 위해 이다산으로 향했고,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그리스 진영으로 데려왔다. 한때 트로이의 병사들과 함께 그리스군을 상대했던 왕자는 이제 자신이 싸워 온 적들의 손에 붙잡힌 신세가 되었다.
그리스군이 원한 것은 성문의 위치나 트로이군의 병력이 아니었다.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신들이 트로이의 함락을 허락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적의 진영에 끌려온 헬레노스는 자신이 알고 있던 신탁을 말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결국 트로이를 지키던 여러 조건과 그 보호를 무너뜨릴 방법을 밝히게 된다. 그렇게 이다산에서 붙잡힌 한 예언자의 말은 오랫동안 교착되어 있던 전쟁을 마지막 단계로 움직이게 했다.
이다산에서 헬레노스를 붙잡는 오디세우스
2.3 트로이의 운명을 말하다
그리스군의 포로가 된 헬레노스는 결국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밝혔다. 한 전승에 따르면 첫째, 펠롭스의 뼈를 그리스 진영으로 가져와야 했다. 둘째,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전쟁에 참가해야 했다. 셋째, 하늘에서 내려와 트로이를 지켜 준다는 신상 팔라디온을 성 안에서 훔쳐내야 했다. 팔라디온이 성 안에 있는 한 트로이는 함락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그리스군은 헬레노스의 말을 하나씩 실행하기 시작했다. 펠롭스의 유골을 가져오고, 오디세우스와 포이닉스를 스키로스로 보내 네오프톨레모스를 데려왔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밤에 트로이로 잠입해 팔라디온을 훔쳐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편 다른 전승에서는 사건의 순서도 달라진다.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서는 붙잡힌 헬레노스의 예언에 따라 필록테테스가 트로이로 돌아와 전쟁에 다시 참여한다. 전승마다 조건과 사건의 순서는 다르지만, 트로이 함락에 헬레노스의 신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같다.
이제 전쟁은 성벽을 힘으로 넘어서는 싸움에서 신탁의 조건을 완성하는 싸움으로 바뀌었다. 조건들이 하나씩 갖추어진 뒤 그리스군은 마지막 계책인 트로이 목마를 준비했다. 헬레노스가 직접 목마의 계략을 알려 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밝힌 비밀은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트로이의 보호막을 하나씩 걷어냈다. 자신의 고향을 지키던 예언자의 신탁은 그렇게 역설적으로 트로이의 최후를 앞당기는 데 쓰이게 되었다.
그리스 장수들에게 트로이의 비밀을 밝히는 헬레노스
3.1 네오프톨레모스를 따라가다
트로이가 불타고 프리아모스의 왕가가 무너진 뒤에도 헬레노스는 살아남았다. 그리스군이 전리품과 포로를 나누면서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돌아갔다. 헬레노스 역시 전쟁이 끝난 뒤 네오프톨레모스와 함께 트로이를 떠났다. 한때 그리스군의 포로가 되어 트로이의 멸망에 필요한 신탁을 말해야 했던 그는 이제 잿더미가 된 고향을 뒤로하고 새로운 땅으로 향하게 되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다른 그리스 영웅들과 함께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귀향 함대와 떨어져 헬레노스와 함께 육로를 택해 몰로시아로 향했다. 전승에 따라 테티스의 조언으로 귀향을 늦추었다고도 하고, 헬레노스의 신탁에 따라 에페이로스에 정착했다고도 전한다. 두 사람은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 북서쪽의 새로운 땅에 이르렀다.
몰로시아에서 네오프톨레모스는 새로운 왕국의 주인이 되었고 헬레노스의 처지도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적에게 붙잡힌 트로이 왕자에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땅에서도 그의 예언 능력은 인정받았고, 헬레노스는 몰로시아에 자신의 도시를 세워 정착했다. 트로이의 성벽과 왕궁은 사라졌지만 헬레노스의 삶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멸망한 도시의 미래를 바라보던 예언자는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네오프톨레모스와 육로를 떠나는 헬레노스
3.2 안드로마케와 새로운 나라
에페이로스에서 헬레노스의 삶은 다시 크게 바뀌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와의 사이에서 몰로소스를 비롯한 아들들을 얻었지만, 뒤에 델포이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 뒤 헬레노스는 형 헥토르의 아내였던 안드로마케와 결혼하고 에페이로스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전승에 따라 과정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트로이가 무너진 뒤 고향을 잃고 떠나온 두 사람이 새로운 땅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전해진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는 두 사람이 다스리는 곳에 옛 트로이의 모습과 이름이 하나씩 되살아난 것으로 그려진다. 부트로툼에는 옛 트로이를 닮은 작은 도시와 페르가몬을 본뜬 성채가 세워졌고, 주변의 물줄기에는 크산토스와 시모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붙었다. 성문 역시 트로이의 스카이아이 성문을 연상시켰다. 안드로마케는 헥토르를 기리는 빈 무덤과 제단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죽은 남편과 사라진 가족들을 기억하며 제물을 바쳤다.
그곳은 무너진 트로이를 그대로 되살린 나라는 아니었다. 프리아모스도 헥토르도 돌아오지 않았고 옛 성벽을 다시 세울 수도 없었다. 그러나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는 먼 이국 땅에 고향의 이름과 기억을 남겼다. 한때 트로이를 무너뜨릴 조건을 적에게 말해야 했던 헬레노스가 이제는 트로이의 흔적을 간직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된 것이다. 그렇게 에페이로스에는 멸망한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작은 트로이가 자리 잡았다.
작은 트로이를 바라보는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
3.3 아이네이아스의 길을 예언하다
세월이 흐른 뒤 또 다른 트로이의 생존자가 헬레노스의 나라를 찾아왔다. 불타는 트로이에서 아버지 안키세스를 모시고 탈출했던 아이네이아스였다. 새로운 터전을 찾아 바다를 떠돌던 그는 에페이로스의 부트로툼에 도착해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가 다스리는 나라를 바라보았다. 트로이의 성문을 닮은 문과 크산토스의 이름을 지닌 물줄기, 헥토르를 위한 제단까지 갖춘 모습은 긴 방랑 끝에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만난 듯한 광경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다시 길을 떠나기 전에 헬레노스에게 앞으로의 운명을 물었다. 헬레노스는 아폴론의 성소에서 제사를 올리고 예언자의 의례를 갖춘 뒤 긴 항해에서 피해야 할 위험들을 알려주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기다리는 해협을 피해 시칠리아를 돌아가고, 그리스인들이 자리 잡은 해안을 조심하라고 했다. 또한 먼 강가에서 흰 암퇘지가 서른 마리의 흰 새끼와 함께 누워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곳이 새로운 정착과 관련된 중요한 징표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헬레노스는 이탈리아에 닿은 뒤에는 쿠마이의 시빌라를 찾아가 앞으로 닥칠 전쟁과 시련에 대한 신탁을 들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아이네이아스에게 선물과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며 길을 떠나보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트로이의 멸망을 살아남았다. 헬레노스는 에페이로스에 작은 트로이를 세워 머물렀고, 아이네이아스는 아직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나라를 향해 떠났다. 트로이의 멸망을 알고 있던 예언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또 다른 트로이인의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으로 끝난다.
아이네이아스에게 항해의 길을 알려주는 헬레노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