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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 프리아모스의 왕국
트로이는 처음부터 프리아모스의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이다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다르다노스에서 시작해 에리크토니오스와 트로스, 일로스, 라오메돈을 거치며 왕국은 넓어지고 성벽도 세워졌다. 한 차례 헤라클레스에게 함락된 뒤 살아남은 프리아모스는 왕위를 이어받아 트로이를 다시 일으킨다. 수많은 왕자와 공주가 자란 그의 왕궁은 마침내 파리스가 헬레네와 함께 돌아오면서 거대한 전쟁의 중심이 되고, 오래된 왕국은 마지막 왕과 함께 멸망을 맞는다.
1.1 다르다노스가 세운 나라
트로이 왕가의 이야기는 아직 트로이라는 이름조차 없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우스와 엘렉트라의 아들 다르다노스는 형제 이아시온을 잃은 뒤 사모트라케를 떠나 바다 건너 소아시아 북서쪽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스카만드로스 강과 이다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다르다노스는 이 땅의 왕 테우크로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의 딸 바테이아와 혼인해 새로운 왕가의 뿌리를 내렸다.
그는 평원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샘이 많고 숲이 우거진 이다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훗날 트로이 성이 세워질 장소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다르다노스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 다르다노이, 곧 다르다니아 사람들이라 불렸고, 그가 세운 나라도 다르다니아라 불리게 되었다. 아직 높은 성벽도 거대한 왕궁도 없었지만 훗날 트로이로 이어질 왕국의 첫 터전이 이곳에 마련되었다.
다르다노스의 뒤를 이은 것은 아들 에리크토니오스였다. 그는 넓은 목초지와 수많은 말을 거느린 부유한 왕으로 기억되었다. 왕국은 이다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비옥한 평원을 바탕으로 점차 힘을 키웠고, 다르다노스가 세운 작은 왕가는 다음 세대에 이르러 트로아스 일대의 중심 세력으로 자라났다. 훗날 프리아모스의 왕가뿐 아니라 아이네이아스의 가문 역시 모두 이 다르다노스의 혈통에서 갈라져 나온 후손들이었다.
이다산 기슭에 터전을 잡는 다르다노스
1.2 트로스의 이름을 얻은 땅
에리크토니오스가 죽은 뒤 왕위는 그의 아들 트로스에게 이어졌다. 트로스는 자신이 다스리는 땅을 자신의 이름을 따라 트로이아라 불렀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트로이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훗날 수많은 영웅이 싸우게 되는 ‘트로이’라는 이름은 성벽보다 먼저 이 왕의 이름에서 태어난 셈이었다.
트로스에게는 일로스와 아사라코스, 가니메데스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가니메데스는 제우스에게 선택되어 올림포스로 올라가 신들의 술을 따르는 시종이 되었다. 아사라코스의 혈통은 따로 이어져 카퓌스와 안키세스를 거쳐 아이네이아스에게 닿았다. 훗날 트로이가 멸망한 뒤 살아남아 새로운 길을 떠나는 아이네이아스 역시 프리아모스 왕가와 같은 다르다노스의 후손이었다.
왕위를 이어받은 일로스는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도시를 세울 곳을 찾았다. 이때까지 왕가의 오래된 근거지는 이다산 가까운 다르다니아에 있었다. 그러나 일로스의 선택으로 왕국의 중심은 산기슭에서 스카만드로스와 시모에이스 강이 흐르는 넓은 평원으로 옮겨가게 되고, 그곳에 훗날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성도 일리오스가 세워지게 된다.
세 아들과 함께 왕국을 바라보는 트로스
1.3 평원에 세운 일리오스
일로스는 프리기아에서 열린 경기대회에 참가해 씨름에서 우승했다. 프리기아의 왕은 상으로 젊은 남녀 오십 명씩을 내주고, 신탁에 따라 얼룩무늬 암소 한 마리도 함께 주었다. 그리고 그 암소가 걸음을 멈추고 땅에 누우는 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라고 일렀다. 일로스는 사람들을 이끌고 암소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암소는 마침내 스카만드로스 평원의 한 언덕에 이르러 몸을 눕혔다. 일로스는 그 자리를 신들이 정해 준 터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곳에 성채와 집들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 도시를 일리오스라 불렀다. 다르다노스가 이다산 기슭에 마련한 다르다니아와 트로스의 이름을 얻은 나라 위에, 이제 왕국 전체를 이끌 새로운 중심 도시가 세워진 것이다.
일리오스는 평원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했고 가까이에는 스카만드로스와 시모에이스 두 강이 흘렀다. 남쪽으로는 이다산이 솟아 있었고 북쪽으로는 헬레스폰토스로 이어지는 길이 놓여 있었다. 비옥한 평원과 목초지를 지키면서 바다로 향하는 길에도 가까운 자리였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일대를 트로이아라 부르고 중심 도시를 일리오스라 불렀으며, 트로이라는 이름은 점차 나라뿐 아니라 그 중심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함께 쓰이게 되었다.
암소가 멈춘 언덕에 도시를 세우는 일로스
1.4 하늘에서 내려온 팔라디온
새 도시를 세운 일로스는 자신이 택한 자리가 정말 신들의 뜻에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제우스에게 징표를 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한 뒤, 그의 천막 앞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목상이 놓여 있었다. 창과 물레도구를 든 아테나의 신상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팔라디온이라 불렀다. 일로스는 이것을 도시를 지켜 줄 신성한 표징으로 받아들였다.
전승에 따르면 팔라디온은 아테나가 죽은 벗 팔라스를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이었다. 여러 사연을 거친 뒤 제우스에 의해 일리오스 땅으로 떨어졌고, 일로스는 그 신상을 위해 아테나의 신전을 세웠다. 도시 사람들은 팔라디온이 성 안에 머무르는 한 일리오스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왕국의 힘은 성벽과 군사뿐 아니라 신들이 보내 준 수호물에도 기대고 있었다.
일로스가 죽은 뒤 왕위는 아들 라오메돈에게 이어졌다. 이제 트로이는 다르다노스 시대의 산기슭 왕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평원 위에는 도시가 자리했고, 높은 곳에는 왕궁과 신전이 세워졌으며, 왕가의 혈통도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아직 그 도시를 누구도 넘지 못할 거대한 성벽이 둘러싼 것은 아니었다. 그 성벽은 다음 왕 라오메돈의 시대에 두 신의 손으로 세워지게 된다.
천막 앞의 팔라디온을 발견하는 일로스
2.1 신들이 쌓은 성벽
라오메돈이 왕이 되었을 때 트로이는 이미 넓은 평원을 지배하는 중요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은 일리오스를 더욱 강하게 지키고 싶었다. 이 무렵 포세이돈과 아폴론이 인간의 모습으로 트로이에 와 라오메돈에게 일정한 보수를 받기로 하고 일을 맡았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그렇게 왕과 두 신 사이에는 도시를 위한 약속이 맺어졌다.
전승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다. 포세이돈이 성벽을 쌓는 동안 아폴론은 이다산에서 왕의 가축을 돌보았다고도 하고, 두 신이 함께 방벽을 세웠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이기나의 왕 아이아코스도 공사에 참여했다. 성벽이 완성되자 뱀 세 마리가 기어올랐는데, 두 마리는 신들이 만든 부분에서 떨어져 죽고 한 마리는 아이아코스가 세운 곳을 넘어 들어갔다. 이는 훗날 그의 후손들이 트로이를 무너뜨리게 될 징조로 여겨졌다.
마침내 일리오스는 신들의 손길이 닿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그러나 일이 끝나자 라오메돈은 약속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오히려 포세이돈과 아폴론을 위협하며 쫓아냈다고도 전해진다.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방벽을 얻은 왕이 그 방벽을 세워 준 이들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강한 성벽은 남았지만 두 신의 분노도 함께 남았고, 트로이에는 새로운 재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트로이 성벽을 쌓는 포세이돈과 아폴론
2.2 라오메돈이 두 번 저버린 약속
약속을 받지 못한 포세이돈과 아폴론은 트로이에 재앙을 내렸다. 아폴론은 역병을 보내고 포세이돈은 바다에서 괴물을 불러 올려 해안과 평원을 위협하게 했다. 사람들이 죽고 가축과 농토까지 피해를 입자 라오메돈은 신탁을 구했다. 재앙을 멈추려면 그의 딸 헤시오네를 바닷가 바위에 묶어 괴물의 제물로 내놓아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마침 그 무렵 아마존 땅에서 돌아오던 헤라클레스가 트로이에 들렀다. 그는 바위에 묶인 헤시오네를 보고 왕에게 그녀를 구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대가로 제우스가 가니메데스를 데려간 보상으로 트로이 왕가에 주었다는 신성한 말들을 요구했다. 라오메돈은 이번에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대답했고, 헤라클레스는 바다 괴물을 쓰러뜨려 공주와 도시를 구했다.
그러나 위험이 사라지자 라오메돈은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헤라클레스에게 약속했던 말들을 내주지 않았다. 이미 포세이돈과 아폴론에게 대가를 주지 않아 큰 재앙을 겪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한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당장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그 약속의 값을 받겠다고 선언하고 트로이를 떠났다. 라오메돈의 왕국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바다 너머에서는 또 한 번의 공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바닷가 바위에 묶인 헤시오네와 헤라클레스
2.3 헤라클레스가 무너뜨린 트로이
시간이 흐른 뒤 헤라클레스는 약속대로 돌아왔다. 그는 텔라몬을 비롯한 여러 영웅을 모아 배를 타고 일리오스에 상륙했다. 라오메돈도 군대를 이끌고 맞섰지만 헤라클레스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신들이 쌓았던 성벽 앞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텔라몬이 가장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간 뒤 헤라클레스와 동료들이 뒤따랐다.
트로이는 함락되었다. 라오메돈과 그의 아들들은 포다르케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목숨을 잃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과 함께 싸운 텔라몬에게 헤시오네를 주었고, 헤시오네에게는 포로들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헤시오네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어린 동생 포다르케스를 선택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포로가 된 사람을 그냥 풀어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헤시오네는 머리에 두르고 있던 베일을 벗어 몸값으로 내놓았고, 그 대가로 동생을 자유롭게 했다. 이렇게 포다르케스는 무너진 왕가에서 살아남아 다시 왕위를 이어 갈 사람이 되었다. 훗날 그가 불린 이름이 바로 프리아모스였다. 트로이는 한 번 완전히 패배했지만, 라오메돈의 죽음으로 왕국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성벽을 넘어 트로이에 진입하는 텔라몬
2.4 폐허에서 왕이 된 프리아모스
헤라클레스의 군대가 떠난 뒤 트로이에 남은 것은 무너진 성과 흩어진 백성들이었다. 라오메돈의 아들들 가운데 살아남은 포다르케스는 누이 헤시오네가 베일을 몸값으로 내놓은 덕분에 자유를 되찾았다. 이후 그는 프리아모스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 이름을 ‘몸값을 치르고 되찾은 사람’과 연결하는 전승은 새로운 왕이 어떤 처지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 준다.
프리아모스는 무너진 도시를 복구하고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성 안에는 집과 신전이 다시 들어섰고 왕궁도 재건되었다. 트로아스의 여러 지역과 이다산 주변의 세력들도 다시 일리오스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아버지 라오메돈의 시대에 한 차례 무너졌던 왕국은 프리아모스의 손에서 다시 힘을 되찾았고, 트로이는 주변 나라들과 관계를 맺는 강한 왕국으로 성장해 갔다.
프리아모스에게는 왕국 밖에서 싸웠던 기억도 있었다. 훗날 그는 자신이 오래전 프리기아로 가 오트레우스와 미그돈의 군대와 함께했던 일을 회상한다. 상가리오스 강가에는 수많은 프리기아 전사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프리아모스도 그들의 동맹으로 아마존들과 맞섰다. 한 차례 폐허가 되었던 트로이는 그의 시대에 다시 일어섰고, 재건된 왕궁에는 이제 왕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 수많은 자녀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무너진 트로이를 바라보는 프리아모스
3.1 다시 번성한 트로이
세월이 흐르면서 프리아모스의 트로이는 다시 강하고 풍요로운 왕국으로 자리 잡았다. 높은 성벽 안에는 왕궁과 아테나의 신전이 있었고, 성 아래로는 넓은 평원과 목초지가 펼쳐졌다. 이다산의 숲과 스카만드로스의 물줄기는 사람들의 삶을 떠받쳤으며, 헬레스폰토스 가까운 위치는 바다 건너 여러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왕궁에는 주변 나라의 사절과 친족들이 드나들었다.
프리아모스는 먼저 메롭스의 딸 아리스베와 혼인해 아들 아이사코스를 두었고, 뒤에 헤카베와 혼인해 수많은 자녀를 두었다. 헤카베가 낳은 첫아들 헥토르는 성장하여 왕가의 가장 든든한 왕자가 되었고, 킬리키아 테베의 공주 안드로마케와 혼인했다. 데이포보스와 헬레노스도 자랐으며 카산드라는 예언의 능력을 지닌 공주가 되었다. 크레우사는 전승에 따라 같은 다르다노스 혈통의 아이네이아스와 혼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리아모스의 왕궁은 그렇게 트로이의 여러 이야기가 한곳에서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왕자들은 전사와 예언자로 성장했고 공주들은 혼인을 통해 다른 가문과 이어졌다. 한 차례 폐허가 되었던 트로이는 많은 자녀와 친족, 동맹을 거느린 왕국으로 되살아난 듯했다. 그러나 헤카베가 또 한 아이를 낳으려 할 무렵 그녀가 꾸었던 불길한 꿈은, 번성하는 왕가의 한가운데에 이미 훗날의 재앙을 불러올 운명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자녀들로 가득한 왕궁의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3.2 불길을 품은 왕자
헤카베가 둘째 아이를 낳으려 할 무렵, 그녀는 자신이 횃불을 낳는 꿈을 꾸었다. 그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트로이 성 전체를 태워 버렸다. 프리아모스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듣고 예언에 밝은 아들 아이사코스를 불렀다. 외조부 메롭스에게 꿈을 해석하는 법을 배운 아이사코스는 곧 태어날 아이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하며, 아이가 태어나면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프리아모스는 하인 아겔라오스에게 아이를 맡겨 이다산에 버리게 했다. 아겔라오스는 명령대로 아기를 산에 두고 떠났지만 닷새 뒤 다시 찾아가 보았다. 놀랍게도 아이는 죽지 않았고 암곰의 젖을 먹으며 살아 있었다. 아겔라오스는 살아 있는 아기를 데려다가 자신의 농장에서 아들처럼 길렀다. 파리스라 불린 소년은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목자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힘과 아름다움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파리스는 훗날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래전 왕국을 태울 아이라며 버려졌던 왕자는 다시 트로이 왕가로 돌아왔다. 헥토르와 데이포보스, 카산드라와 헬레노스 곁에 파리스가 자리한 뒤, 그의 삶은 이다산에서 세 여신을 만나 황금사과의 주인을 고르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 선택은 마침내 트로이를 멀리 스파르타와 연결하게 된다.
암곰의 젖을 먹고 살아남은 어린 파리스
3.3 스파르타에서 온 헬레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바다를 건너 스파르타로 갔다. 그곳에서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만나고, 얼마 뒤 그녀와 함께 트로이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떠났는지는 전승마다 다르게 전하지만, 헬레네가 일리오스의 왕궁에 들어온 뒤 프리아모스의 나라는 그리스 여러 왕들의 원정과 맞서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형 아가멤논은 옛 구혼자들과 그리스의 여러 영웅들을 모았다. 대군이 바다를 건너 트로아스에 상륙하자 프리아모스의 아들들과 주변 동맹군도 성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왕궁의 아들들과 사위, 친족들은 차례로 전장으로 나갔고, 프리아모스가 오랜 세월 다시 일으켜 세운 왕국 전체가 전쟁 속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일리오스의 성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신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높은 방벽과 헥토르를 중심으로 한 방어 때문에 그리스군은 오랫동안 성 밖에 머물렀다. 성 안에서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헬레네와 왕가의 여인들이 전쟁의 소식을 기다렸다. 십 년 동안 트로이는 거대한 전장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가족이 성 안에서 끝까지 삶을 이어 가야 했던 왕국이었다.
헬레네와 함께 트로이 성으로 돌아오는 파리스
3.4 프리아모스와 함께 끝난 왕국
전쟁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면서 프리아모스의 왕가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든든했던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었고, 늙은 프리아모스는 한밤중 그리스 진영으로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을 맞추며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후 파리스와 다른 왕자들도 차례로 사라졌다. 한때 수많은 자녀와 친족으로 가득했던 왕궁에는 빈자리가 늘어났다.
마침내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겨 두고 물러난 것처럼 꾸몄다. 트로이인들은 그것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고, 밤이 되자 목마 속에 숨어 있던 전사들이 나와 성문을 열었다. 돌아온 그리스군이 도시로 밀려들면서 오랫동안 버텨 온 일리오스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프리아모스는 왕궁 뜰의 제우스 제단으로 피신했지만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죽었고, 헤카베와 안드로마케, 카산드라를 비롯한 왕가의 여인들은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다르다노스에서 시작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진 트로이 왕국은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와 함께 무너졌다. 그러나 다르다노스의 혈통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사라코스의 후손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 안키세스와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불타는 도시를 빠져나갔고,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에게도 또 다른 삶이 이어졌다. 트로이의 성은 무너졌지만 그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에페이로스와 이탈리아를 향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불타는 트로이에서 최후를 맞는 프리아모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