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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 –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동생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로 떠나자 그리스의 왕과 영웅들을 불러 모아 거대한 원정군을 이끈다. 그러나 출정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결단해야 했고, 트로이에서는 아킬레우스와 충돌하여 그리스군을 위기에 빠뜨린다. 십 년 전쟁 끝에 트로이를 무너뜨리고 승리한 왕으로 귀환하지만, 미케네 왕궁에서는 또 다른 복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1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은 펠롭스의 아들 아트레우스와 아에로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은 훗날 스파르타의 왕이 되는 메넬라오스였다. 두 형제가 태어난 집안에는 이미 오래된 다툼이 이어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펠롭스의 시대부터 시작된 불화는 아트레우스와 그의 동생 튀에스테스의 왕위 다툼으로 번졌고, 미케네의 왕좌를 둘러싼 싸움은 형제 사이의 배신과 복수로 얼룩졌다.
아트레우스는 튀에스테스의 아들들을 죽여 그 살로 음식을 만들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에게 먹였다고 전해진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튀에스테스는 형과 그 후손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그는 자신의 딸 펠로페이아와의 사이에서 아이기스토스를 얻었고, 이 아이는 자라면서 아트레우스 가문의 또 다른 복수를 이어갈 인물이 되었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바로 이 불길한 왕궁에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왕궁 안에는 언제 다시 복수가 시작될지 알 수 없는 긴장이 감돌았다. 어린 아가멤논에게 미케네의 왕위는 평온하게 물려받을 자리가 아니었다. 훗날 그가 차지할 왕좌에는 이미 아버지와 숙부가 서로에게 남긴 피의 기억이 깊게 얽혀 있었다.
미케네 왕궁의 어린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 형제
1.2 미케네에서 쫓겨난 형제
튀에스테스의 복수는 마침내 아트레우스에게 돌아왔다. 전승에 따르면 아이기스토스는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알게 된 뒤 아트레우스를 죽였고, 튀에스테스는 다시 미케네의 권력을 차지했다. 아버지를 잃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에게 더 이상 왕궁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왕자의 신분이었던 두 형제는 한순간에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후대의 신화집에서는 유모가 두 형제를 먼저 시키온의 왕 폴리페이데스에게 데려갔으며, 다시 칼리돈의 왕 오이네우스에게 보내졌다고 전한다. 그렇게 여러 곳을 떠돌던 형제에게 힘이 되어 준 사람은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였다. 자신 역시 한때 왕위를 빼앗기고 망명한 경험이 있었던 틴다레오스는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을 받아들여 보호했다.
아가멤논은 미케네를 떠나면서 아버지의 왕위를 잃었지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망명 생활은 동생 메넬라오스와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잃어버린 왕좌를 되찾아야 했다. 훗날 한 사람은 미케네의 왕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스파르타의 왕이 되어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형제 왕으로 성장하지만, 그 출발은 왕궁이 아니라 쫓겨난 왕자들의 피난길이었다.
미케네를 떠나 피난길에 오른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
1.3 스파르타에서 얻은 새로운 삶
스파르타에 머물게 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틴다레오스의 보호 아래 다시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미케네에서 쫓겨날 때에는 목숨을 건지는 것만으로도 급했지만, 이제 두 형제에게는 아버지의 왕위를 되찾을 기회가 생겼다. 틴다레오스는 두 왕자를 단순한 망명객으로 대하지 않았고, 그들이 튀에스테스에게 맞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에서 지내는 동안 두 형제는 틴다레오스의 왕가와도 가까워졌다. 아가멤논에게 스파르타는 단순히 목숨을 피한 피난처가 아니라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을 힘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그에게는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라는 두 딸이 있었고, 훗날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은 이 자매와 각각 혼인하여 스파르타 왕가와 더욱 깊이 연결된다.
아가멤논은 이제 쫓겨난 왕자에 머물지 않았다. 틴다레오스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얻었고, 동생 메넬라오스와 함께 미케네로 돌아갈 때를 기다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빼앗겼던 왕좌가 다시 그의 앞에 놓이고 있었다. 그러나 왕위를 되찾은 뒤 이루어질 클리타임네스트라와의 혼인은 훗날 그의 왕가를 이어 가는 동시에 마지막 비극으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인연이 된다.
스파르타에서 두 왕자를 보호하는 틴다레오스
1.4 미케네의 왕
틴다레오스의 도움을 받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마침내 미케네로 돌아왔다. 두 형제는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죽은 뒤 미케네의 권력을 차지했던 튀에스테스를 몰아냈고, 아가멤논은 아버지가 차지했던 왕좌를 되찾았다. 한때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향에서 달아났던 왕자가 다시 미케네의 성채에 들어와 왕이 된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형이 미케네의 왕좌를 되찾는 일을 도운 뒤 다시 스파르타로 향했다.
아가멤논은 뒤이어 틴다레오스의 딸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아내로 맞았다. 이 혼인의 과정에는 어두운 전승도 있다. 일부 이야기에서는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이미 탄탈로스라는 남편과 어린아이가 있었으며, 아가멤논이 그들을 죽이고 그녀와 혼인했다고 전한다. 다른 전승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 크리소테미스, 이피게네이아 등이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왕위를 되찾은 아가멤논의 세력은 미케네 성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주변 여러 도시를 거느리는 강대한 왕으로 성장했고, 동생 메넬라오스도 헬레네와 혼인하여 뒤에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한때 고향에서 쫓겨났던 두 형제가 이제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두 왕국을 이끄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를 찾아오면서 두 형제의 운명은 다시 하나의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되찾은 미케네 왕좌에 오르는 아가멤논
2.1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맹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를 방문했을 때 메넬라오스는 그를 손님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메넬라오스가 잠시 크레타로 떠난 사이 파리스는 헬레네와 함께 스파르타를 떠났다. 헬레네가 스스로 따라갔는지 파리스에게 납치되었는지는 전승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지만, 메넬라오스에게 일어난 일은 아내와 왕비를 트로이에 빼앗긴 사건이었다.
메넬라오스는 곧 미케네의 형을 찾아갔다. 헬레네가 혼인하기 전, 그리스 각지에서 수많은 왕과 영웅들이 그녀의 구혼자로 모였고, 틴다레오스는 선택된 남편의 혼인을 모두가 지켜 주겠다는 맹세를 받아 두었다. 결국 헬레네의 남편으로 메넬라오스가 선택되었으므로 이제 그 오래된 맹세를 요구할 때가 온 것이었다.
아가멤논은 동생의 일을 스파르타 한 왕가의 문제로만 두지 않았다. 그는 각지의 왕들에게 사자를 보내 틴다레오스 앞에서 했던 맹세를 상기시켰다. 한 사람의 왕비가 손님의 손에 이끌려 다른 나라로 떠난 일을 그대로 둔다면 어느 왕가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메넬라오스가 되찾으려 했던 한 사람의 아내를 위해 그리스 전역의 왕과 영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넬라오스와 원정을 의논하는 아가멤논
2.2 왕들을 불러 모으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을 준비하자 그리스 각지의 왕과 영웅들이 하나둘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다. 필로스에서는 늙은 네스토르가 군대를 준비했고, 크레타에서는 이도메네우스가 배를 모았다. 살라미스의 대 아이아스와 아르고스의 디오메데스도 나섰으며, 프티아에서는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와 미르미돈 전사들이 원정군에 가세했다. 서로 다른 왕국의 영웅들이 하나의 전쟁을 위해 모여들었다.
모두가 기꺼이 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헬레네의 옛 구혼자들에게는 틴다레오스 앞에서 맺은 맹세가 있었지만, 원정에 참여한 모든 영웅이 그 맹세에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타카의 오디세우스는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를 두고 떠나기를 꺼려 광기를 가장했다고 전해지며, 아킬레우스 역시 별도의 과정을 거쳐 원정에 합류했다. 아가멤논은 맹세와 동맹, 왕가들의 관계를 바탕으로 흩어진 세력을 하나로 모아 갔다.
마침내 수많은 배가 아울리스에 집결했다. 각 지휘관은 자신의 군대와 배를 거느린 독립된 왕이었고 누구도 아가멤논의 신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전체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왕들에게 명령하면서도 그들의 명예와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어려운 임무는 적과 싸우는 일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왕과 영웅들을 하나의 군대로 묶어 두는 일이었다.
아울리스에 모인 그리스 왕들을 이끄는 아가멤논
2.3 아울리스에 멈춘 함대
출정을 준비한 그리스 함대는 아울리스에 집결했지만 바다는 좀처럼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 수많은 배가 항구를 떠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은 줄어들고 전사들의 불만은 커졌다. 수많은 왕과 영웅을 불러 모은 아가멤논도 바람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예언자 칼카스에게 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칼카스는 아르테미스가 아가멤논에게 노하여 항해를 막고 있다고 말했다. 그 분노의 까닭에는 여러 전승이 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서는 아가멤논이 사슴을 사냥한 뒤 아르테미스조차 자신보다 잘 쏘지 못할 것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여신에게 약속한 제물을 바치지 않은 일까지 원인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칼카스가 전한 해결책은 왕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풀어 함대를 움직이려면 아가멤논의 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아가멤논은 아버지와 총사령관이라는 두 자리 사이에 서게 되었다. 딸을 지키면 원정 전체가 멈추고, 원정을 계속하려면 자신의 딸을 제단으로 보내야 했다.
멈춰 선 함대를 바라보며 칼카스의 예언을 듣는 아가멤논
2.4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아가멤논은 오래 망설였지만 마침내 원정을 선택했다. 그는 이피게네이아를 아울리스로 데려오기 위해 아킬레우스와 혼인시키겠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딸이 그리스 최고의 영웅과 혼인하게 된다고 믿고 이피게네이아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아울리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혼례가 아니라 제단이었다. 속임수를 알게 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에게 딸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이피게네이아의 마지막 순간은 전승마다 다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아가멤논이 결국 딸을 희생시켰다고 전한다. 반면 다른 전승에서는 칼이 내려오기 직전 아르테미스가 이피게네이아를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에 사슴을 놓았다고 한다. 여신은 소녀를 멀리 타우로이의 땅으로 옮겨 자신의 사제로 삼았다. 그러나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 순간 서로에게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제사가 끝나자 마침내 바람이 일었다. 돛이 부풀고 그리스의 함대는 하나씩 아울리스 항구를 빠져나갔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바라던 전쟁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가족에게 남겨졌다. 트로이로 가는 배들이 멀어지는 동안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미케네로 돌아갔다. 아가멤논에게는 전쟁의 시작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훗날 남편에게 돌려줄 복수의 시작이었다.
제단 앞 이피게네이아와 고뇌하는 아가멤논
3.1 트로이 앞의 십 년
그리스군은 바다를 건너 트로이 앞에 진을 쳤지만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은 한 해를 넘기고 또 한 해를 넘겼다. 그리스군은 트로이 주변의 도시들을 공격하여 식량과 전리품을 확보했고, 트로이군은 헥토르를 중심으로 성문 밖으로 나와 맞섰다. 그렇게 아가멤논이 이끄는 원정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십 년의 긴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가멤논은 전군의 총사령관이었지만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왕은 아니었다. 그는 직접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전장에 나섰다. 『일리아스』에서는 전쟁 마지막 해의 격전에서 아가멤논이 트로이군을 몰아붙이며 여러 전사를 쓰러뜨리고, 부상을 입은 뒤에야 전선에서 물러나는 모습도 그려진다. 그는 왕들을 지휘하는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영웅들과 함께 싸우는 전사였다.
그러나 아가멤논이 거느린 군대는 하나의 왕국 군대가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미르미돈을, 대 아이아스는 살라미스군을, 디오메데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었고,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왕과 장수들은 회의를 열었다. 아가멤논은 그 중심에서 명령하고 설득하며 때로는 다른 영웅들과 충돌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리품과 명예를 공정하게 나누는 일도 중요해졌고, 바로 그 문제를 둘러싼 그의 선택이 마침내 가장 강한 전사 아킬레우스를 전장에서 떠나게 만든다.
갑옷을 입고 트로이군과 싸우는 아가멤논
3.2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다
트로이 주변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그리스군은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얻었다. 그 가운데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의 딸 크리세이스는 아가멤논의 몫이 되었다. 크리세스는 딸을 되찾기 위해 막대한 몸값을 가지고 그리스군 진영을 찾아왔다. 그는 아폴론의 표지를 든 채 여러 왕들에게 간청했지만, 아가멤논은 몸값을 거절하고 그를 모욕하여 돌려보냈다.
딸을 되찾지 못한 크리세스는 아폴론에게 그리스군을 벌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를 들은 신은 진영에 역병을 내렸다. 날마다 병사들이 쓰러지고 장례의 불길이 이어지자 아킬레우스가 회의를 열자고 요구했다. 예언자 칼카스는 아폴론의 분노가 크리세이스 때문이라고 밝히며 그녀를 아무 대가 없이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아가멤논은 마침내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 전리품을 잃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다른 영웅들은 각자의 몫을 가지고 있는데 총사령관인 자신만 빈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킬레우스가 전쟁이 끝난 뒤 충분히 보상하겠다고 맞서자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거칠어졌다. 역병을 끝내려던 회의는 어느새 그리스군의 두 강자가 서로의 명예를 겨루는 자리로 변했다.
크리세스를 물리치는 아가멤논과 지켜보는 그리스군
3.3 아킬레우스와의 결별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는 대신 다른 영웅의 전리품을 가져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아킬레우스가 차지한 브리세이스를 선택했다. 사자들이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찾아가자 그는 분노했지만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브리세이스를 내준 뒤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모욕한 아가멤논을 위해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며 미르미돈 전사들과 함께 전장에서 물러났다.
그 결과는 곧 나타났다. 그리스군에서 가장 두려운 전사가 사라지자 트로이군은 헥토르를 앞세워 거세게 밀고 나왔다. 그리스군은 방벽까지 밀려났고 배들이 불탈 위험에 놓였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내린 결정이 가져온 결과를 보며 흔들렸다. 그는 한때 원정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말까지 꺼냈지만 디오메데스와 네스토르를 비롯한 장수들이 군대를 붙들었다.
결국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화해를 청하기로 했다. 브리세이스를 돌려주고 금과 보물, 도시와 자신의 딸과의 혼인까지 약속하는 큰 보상을 제시했다. 오디세우스와 대 아이아스, 포이닉스가 사절로 찾아갔지만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재물보다 자신이 받은 모욕을 기억했다. 총사령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시작된 다툼은 이제 그리스군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처가 되어 있었다.
브리세이스를 두고 격렬하게 맞서는 두 영웅
3.4 다시 전장으로
아킬레우스가 싸우지 않는 동안 트로이군은 헥토르를 앞세워 그리스군의 배 가까이까지 밀려왔다. 이를 지켜보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미르미돈을 이끌고 출전했다. 처음에는 트로이군을 몰아냈지만 지나치게 깊이 추격하다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에게 이제 아가멤논을 향한 분노보다 헥토르에게 복수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싸우기로 하면서 오랫동안 이어진 두 사람의 다툼도 끝을 향했다. 그리스군이 모인 자리에서 아가멤논은 제우스와 운명,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미혹의 여신 아테가 자신을 그릇된 선택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전에 약속했던 금과 보물을 내놓고 브리세이스를 돌려주었다. 또한 자신은 브리세이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맹세하며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 했다.
두 사람의 화해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되찾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지난 모욕을 두고 싸움을 늦출 때는 아니었다. 새 갑옷을 입은 아킬레우스는 다시 미르미돈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가 마침내 헥토르를 쓰러뜨렸다. 가장 강한 전사가 돌아오면서 그리스군은 다시 힘을 얻었고, 아가멤논도 총사령관의 자리를 지켰다. 십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이제 트로이의 마지막 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와 화해하며 브리세이스를 돌려주는 아가멤논
4.1 불타는 트로이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트로이는 곧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마저 파리스의 화살을 맞고 죽었고, 그리스군은 다시 여러 영웅의 힘과 계략을 모아야 했다. 필록테테스가 전장으로 돌아왔고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도 트로이에 도착했다. 마침내 오디세우스가 중심이 되어 거대한 목마를 이용한 계략이 준비되면서 십 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트로이의 성벽을 넘어설 길이 생겼다.
트로이인들이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인 밤, 그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영웅들이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었다. 바다로 물러난 것처럼 보였던 그리스군이 다시 돌아왔고, 아가멤논이 이끄는 군대가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며 프리아모스의 왕궁도 무너졌다. 십 년 동안 그리스군을 막아 냈던 트로이는 마침내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모아 온 원정군의 승리를 보았다. 헬레네를 되찾겠다는 동생의 요청에서 시작된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도시에서는 또 다른 비극들이 이어졌다. 왕족과 전사들은 죽고 살아남은 여인들은 포로가 되어 그리스군에게 분배되었다. 승리의 전리품 가운데에는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도 있었다. 그녀는 미케네로 돌아가는 아가멤논과 함께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불타는 트로이 성을 바라보는 승리한 아가멤논
4.2 카산드라와 함께 떠나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딸이자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트로이의 파멸을 여러 차례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목마가 성 안으로 들어올 때에도 위험을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트로이는 무너졌고, 왕녀였던 카산드라는 승리한 그리스군의 포로가 되어 아가멤논의 몫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귀향을 놓고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의견도 갈렸다. 메넬라오스는 지체하지 말고 고향으로 떠나기를 원했지만, 아가멤논은 트로이 함락 과정에서 노여움을 산 아테나에게 먼저 제사를 올려 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형제의 의견이 맞서면서 함께 싸웠던 그리스군도 서로 다른 길을 택하게 되었고, 메넬라오스는 먼저 바다로 나아갔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에 남아 제사를 올린 뒤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미케네를 향했다. 그의 배에는 멸망한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도 함께 타고 있었다. 전승 속의 카산드라는 자신과 아가멤논에게 닥칠 죽음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지만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십 년 전 수많은 왕과 영웅을 거느리고 트로이로 떠났던 아가멤논은 이제 승리한 왕으로 고향을 향했지만, 그의 귀환길 끝에는 전쟁보다 더 가까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산드라와 함께 트로이를 떠나는 아가멤논
4.3 미케네로 돌아온 왕
아가멤논이 전쟁을 치르는 십 년 동안 미케네에서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왕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울리스에서 딸 이피게네이아를 잃었다고 믿었던 그녀의 마음에는 남편을 향한 원한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 아트레우스를 죽였던 아이기스토스도 다시 미케네 왕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연인이 되었고, 두 사람은 트로이에서 돌아올 왕을 기다렸다.
마침내 멀리서 트로이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고 아가멤논의 귀환이 알려졌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는 산에서 산으로 이어진 봉화가 트로이의 승리를 미케네까지 알린다. 얼마 뒤 아가멤논은 전차를 타고 왕궁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오랜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남편을 반갑게 맞으며 값비싼 자줏빛 천을 그의 발 앞에 펼쳐 놓았다.
아가멤논은 처음에는 신에게나 어울리는 천을 밟기를 꺼렸지만 아내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그 위를 걸어 왕궁으로 들어갔다. 뒤에는 카산드라가 남아 있었다. 카산드라는 눈앞의 왕궁이 아트레우스 가문의 오래된 살육으로 가득한 집이며, 안에서 다시 피가 흐르게 될 것을 보았다. 승리한 왕은 자신의 성과 왕궁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트로이에서 피했던 죽음은 이미 집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줏빛 천 위로 왕궁에 들어가는 아가멤논
4.4 승리한 왕의 최후
아가멤논이 왕궁 안으로 들어간 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마침내 오랫동안 준비한 복수를 실행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는 아가멤논이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 같은 천에 얽히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를 여러 차례 내리쳐 죽인다. 트로이에서 십 년 동안 수많은 전투를 견뎌 낸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은 자신의 왕궁 안에서 무기를 제대로 잡아 보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그의 죽음을 전하는 방식은 전승마다 조금씩 다르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서는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을 잔치에 초대하여 살해하는 역할이 크게 나타나며, 후대의 비극에서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직접 남편을 죽이는 모습이 강조된다. 그러나 어느 이야기에서나 두 사람의 복수에는 오래된 원한이 얽혀 있다. 아이기스토스에게는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한 복수가,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는 이피게네이아를 빼앗긴 원한이 있었다. 카산드라 역시 그날 왕궁에서 죽임을 당한다.
한때 나라를 잃고 떠돌던 아가멤논은 미케네의 왕위를 되찾았고, 그리스의 수많은 왕과 영웅을 모아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내렸던 결정과 아버지 세대에서 이어진 복수는 결국 그의 왕궁까지 따라왔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총사령관의 일생은 그렇게 미케네에서 끝났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아트레우스 가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아들 오레스테스가 언젠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돌아오게 된다.
그물 같은 천에 갇힌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