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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르 – 트로이 전쟁의 노왕
필로스의 왕 네스토르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 영웅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전쟁을 겪은 그는 아흔 척의 배를 이끌고 트로이로 향하여 아가멤논을 보좌하고, 다투는 장수들을 중재하며 그리스군을 이끌었다. 때로는 직접 전차를 몰고 전장에 나섰으며, 파트로클로스에게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싸울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전쟁 말기에는 아들 안틸로코스를 잃었지만 살아서 필로스로 돌아왔고, 훗날 자신을 찾아온 텔레마코스에게 트로이 전쟁과 영웅들의 귀환을 들려주었다.
1.1 넬레우스의 아들
네스토르는 필로스의 왕 넬레우스와 클로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넬레우스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네스토르는 아직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한 젊은 왕자였다. 그러나 필로스 왕가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넬레우스가 헤라클레스와 원한을 맺으면서 강대한 영웅의 공격이 왕국을 향했고, 필로스는 큰 전쟁에 휩싸였다.
헤라클레스가 성을 공격하자 넬레우스의 아들들이 맞서 싸웠다. 변신의 능력을 지녔다고 전해지는 페리클리메노스를 비롯한 형제들이 차례로 쓰러졌지만 네스토르는 살아남았다. 후대 전승에서는 그가 당시 게레니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참화를 피했다고 전한다. 한편 호메로스의 이야기에서는 이 사건 뒤에도 늙은 넬레우스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필로스 왕가의 운명이 전승에 따라 조금 다르게 전해진다.
어느 이야기에서든 네스토르에게 헤라클레스의 공격은 젊은 시절을 갈라놓은 큰 사건이었다. 수많은 형제를 잃은 뒤 필로스에는 이전과 같은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네스토르는 한때 여러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무너진 왕가에서 살아남아 나라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훗날 트로이에서 수많은 젊은 영웅들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노왕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살아남은 자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를 알고 있었다.
불타는 필로스에서 살아남은 젊은 네스토르
1.2 홀로 살아남은 왕자
헤라클레스의 공격 뒤 약해진 필로스를 이웃 나라들은 가볍게 보았다. 특히 엘리스의 에페이오이 사람들과는 오래전부터 원한과 빚이 얽혀 있었다. 엘리스의 왕 아우게이아스는 필로스에서 경기에 보낸 말과 전차를 돌려주지 않았고, 여러 필로스 사람들도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었다. 젊은 네스토르는 이러한 빚을 되찾기 위한 보복 원정에 나섰다.
네스토르는 엘리스의 평야로 들어가 가축 떼를 몰아왔다. 그 과정에서 가축을 지키러 나온 이튀모네우스가 앞을 막아섰고, 네스토르는 창을 던져 그를 쓰러뜨렸다. 필로스군은 소와 양, 염소와 돼지는 물론 수많은 암말까지 몰고 밤길을 지나 돌아왔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서 넬레우스는 젊은 아들이 처음 전장에 나가 거둔 막대한 전리품을 보고 기뻐한다.
며칠 뒤 에페이오이군이 보복을 위해 필로스를 공격했다. 넬레우스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며 네스토르가 싸우는 것을 막고 그의 말까지 숨겼지만, 네스토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걸어서 군대를 따라나서 전투에 참가했고, 마침내 필로스의 전사들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훗날 트로이에서 노인이 된 네스토르가 젊은 장수들에게 자신의 옛 전쟁을 이야기할 때 자주 떠올린 것도 바로 이 시절의 싸움이었다.
이튀모네우스를 쓰러뜨리는 젊은 네스토르
1.3 수많은 전쟁을 겪은 젊은 날
젊은 네스토르는 엘리스와의 싸움뿐 아니라 당대의 여러 영웅들과 함께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다. 훗날 그는 페이리토오스와 드뤼아스, 카이네우스, 테세우스 같은 옛 영웅들과 어울려 싸웠던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이 충돌했을 때에도 그는 그들과 함께 싸웠다고 전해진다. 네스토르에게 그들은 힘만 강한 전사들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듣고 함께 싸울 줄 아는 영웅들이었다.
그가 자신의 젊은 무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사건은 에레우탈리온과의 결투였다. 아르카디아의 전사 에레우탈리온은 뤼쿠르고스에게 물려받은 아레이토오스의 무구를 걸치고 나타나 필로스 사람들에게 일대일 승부를 요구했다. 그의 거대한 모습에 아무도 쉽게 나서지 못했지만, 당시 가장 어린 전사 가운데 하나였던 네스토르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한 상대와 맞서 싸웠고 끝내 에레우탈리온을 쓰러뜨렸다.
세월이 지나 트로이의 전장에 선 네스토르는 더 이상 그때처럼 힘으로 적을 압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직접 강한 적과 맞서 보았기에 용맹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영웅이 죽거나 사라지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는 젊은 장수들에게 용기를 요구하면서도 무모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타일렀다. 트로이에서 그의 말에 무게가 실렸던 것은 긴 세월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한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던 전사였기 때문이다.
에레우탈리온과 일대일로 맞서는 네스토르
1.4 필로스의 왕이 되다
세월이 흐르자 네스토르는 필로스의 확고한 왕으로 자리 잡았다. 무너졌던 왕가는 다시 일어섰고, 궁전에는 자식들과 신하들이 모였다. 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안틸로코스와 트라쉬메데스는 훗날 아버지와 함께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막내 세대의 자식들이 성장할 무렵 네스토르는 이미 그리스 여러 왕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에 속했다.
그의 머리는 희어졌지만 왕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젊은 시절처럼 가장 먼저 창을 들고 적에게 뛰어드는 나이는 지나갔으나,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고 군대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필로스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왕좌를 지킨 그를 단순한 늙은 왕이 아니라 과거 여러 세대의 일을 기억하는 살아 있는 증인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 스파르타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바다를 건넜고, 예전에 헬레네에게 구혼했던 왕들이 맹세에 따라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오래전 수많은 전쟁을 겪은 네스토르에게 다시 한 번 출정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번 전쟁에서는 젊은 영웅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조언해야 할 늙은 왕으로 싸워야 했다.
출전을 앞두고 아들들과 함께 선 늙은 네스토르
2.1 다시 찾아온 전쟁
헬레네가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떠나자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은 그리스 여러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필로스의 네스토르도 원정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군대만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았다. 여러 왕국이 함께 싸워야 하는 전쟁인 만큼 가능한 많은 영웅을 모아야 했다. 네스토르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왕과 전사들에게 트로이 원정에 참가해 달라고 권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프티아에 있는 펠레우스의 궁전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젊은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있었다. 출전을 앞두고 펠레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앞서 이름을 떨치라고 당부했다. 파트로클로스의 아버지 메노이티오스도 아들에게 말을 남겼다. 아킬레우스가 혈통과 힘에서는 뛰어나지만 파트로클로스가 나이가 더 많으니, 필요할 때 좋은 말을 해 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라는 것이었다. 네스토르는 그 자리에서 두 아버지의 당부를 직접 들었다.
그때에는 누구도 그 말이 훗날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지 알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다른 젊은 영웅들과 함께 트로이로 향했고, 네스토르도 아들 안틸로코스와 트라쉬메데스를 거느리고 출정을 준비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전쟁을 겪은 노왕은 이제 직접 영웅들을 모아 또 하나의 거대한 전쟁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십 년 뒤, 그는 위기에 빠진 그리스군을 구하기 위해 파트로클로스에게 바로 그날 메노이티오스가 남겼던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하게 된다.
펠레우스의 궁전에서 아킬레우스를 만난 네스토르
2.2 아흔 척의 배를 이끌다
그리스군이 아울리스에 집결했을 때 필로스의 함대는 아흔 척에 이르렀다. 네스토르는 필로스뿐 아니라 아레네와 트리온, 여러 주변 지역에서 모인 병사들을 지휘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이름만 걸어 둔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배와 병사들을 직접 이끌었고, 아들들도 각자의 무장을 갖추고 군대 속에 섰다.
아울리스 해안에는 천 척이 넘는 배와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젊은 장수들은 자신의 군대가 가장 강하다고 자랑했고, 왕들은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네스토르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 원정에서 가장 위험한 적이 트로이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군이 스스로 갈라진다면 아무리 많은 배와 영웅이 있어도 성벽에 도달하기 전에 무너질 수 있었다.
마침내 바람이 열리고 함대가 에게해로 나아갔다. 네스토르의 아흔 척도 다른 배들과 함께 긴 항렬을 이루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가장 앞에서 전장을 향해 달렸지만 이제 그의 곁에는 아들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용기를 보이되 지나친 자만은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세대를 달리하는 아버지와 아들들은 같은 전쟁을 향해 트로이 해안으로 나아갔다.
아흔 척의 필로스 함대를 이끄는 네스토르
2.3 아가멤논 곁의 조언자
트로이 전쟁이 길어지면서 네스토르는 자연스럽게 아가멤논의 가까운 조언자가 되었다.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은 아가멤논이었지만, 수많은 왕과 영웅을 언제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잘 풀릴 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패배가 이어지면 서로 책임을 돌렸고, 작은 다툼도 군대 전체를 흔들었다. 그때마다 네스토르가 장수들 사이에 나섰다.
전투를 앞두고 그는 군대를 어떻게 배치할지도 조언했다. 전차병은 앞에 세우고 보병은 그 뒤를 따르게 하며, 가장 믿기 어려운 병사들은 가운데 두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병사들을 출신과 부족에 따라 묶어 서로 아는 사람끼리 싸우게 하자는 생각도 내놓았다. 아가멤논은 늙은 왕의 말을 귀담아들었고, 다른 장수들 역시 그의 경험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네스토르는 자신의 조언을 할 때마다 종종 옛날 영웅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젊은 장수들에게는 지나치게 긴 옛날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의 말에는 늘 목적이 있었다. 강한 사람도 혼자서는 승리할 수 없으며, 왕은 명예만 요구해서는 안 되고, 전사는 명령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트로이 전쟁에서 네스토르가 맡은 가장 중요한 역할은 창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서로 다른 영웅들을 하나의 군대 안에 붙들어 두는 일이었다.
그리스군의 전열을 아가멤논에게 설명하는 네스토르
2.4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을 말리다
전쟁 십 년째, 그리스군을 뒤흔드는 가장 큰 다툼이 일어났다.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의 딸 크뤼세이스를 돌려보내게 되자 자신의 보상을 잃었다며 아킬레우스의 포로 브리세이스를 빼앗겠다고 선언했다. 아킬레우스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을 듯 분노했고, 두 사람의 말싸움은 군대 전체가 듣는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때 네스토르가 두 사람 사이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함께 싸웠던 옛 영웅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조차 조언을 들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아가멤논에게는 아킬레우스의 여인을 억지로 빼앗지 말라고 했고, 아킬레우스에게도 여러 왕을 거느린 총사령관의 권위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라고 타일렀다. 어느 한쪽만 편드는 대신 두 사람 모두에게 물러설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네스토르의 말도 두 사람의 자존심을 꺾지 못했다. 아가멤논은 브리세이스를 데려갔고, 아킬레우스는 전투에서 물러나 자신의 막사에 머물렀다. 그리스군은 가장 강한 전사를 잃은 채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늙은 왕은 그날 처음부터 이 싸움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었다. 이제 그의 일은 두 사람을 타이르는 데서 끝나지 않고, 무너져 가는 군대를 아킬레우스 없이 버티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
두 영웅 사이에서 다툼을 말리는 네스토르
3.1 노왕도 전차에 오르다
네스토르는 조언만 하는 왕이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갑옷을 입고 전차에 올라 병사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갔다. 젊은 시절처럼 누구보다 빠르게 창을 던질 수는 없었지만, 그는 어느 부대가 밀리고 어디에 빈틈이 생기는지를 살피며 전열을 움직였다. 필로스의 전사들은 희끗한 머리의 왕이 전차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켰다.
그는 전차병들에게 적을 향해 제멋대로 달려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앞선 사람이 물러서면 뒤의 사람이 받아 주고, 여러 전차가 서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뛰어난 전사 한 사람의 용맹보다 전열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젊은 장수들은 적장의 목을 베어 명예를 얻으려 했지만, 네스토르는 군대가 살아남아야 다음 싸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노왕에게도 위험은 가까이 다가왔다. 트로이의 창과 화살은 나이를 가려 날아오지 않았다. 네스토르는 때로 부상한 전사를 전차에 태워 후방으로 옮겼고, 때로는 직접 적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그의 몸은 늙었지만 전쟁터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젊은 전사들에게 싸우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그들과 같은 위험 속에 서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차 위에서 필로스군을 지휘하는 노왕 네스토르
3.2 디오메데스와 함께 전선을 달리다
어느 날 제우스가 트로이군에 힘을 실어 주자 그리스군의 전열이 크게 흔들렸다. 장수들이 차례로 물러나는 가운데 네스토르의 전차는 전장에 남겨졌다. 파리스가 쏜 화살이 전차를 끌던 말 한 마리의 머리를 꿰뚫었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말이 다른 말과 전차까지 뒤엉키게 했다. 네스토르는 급히 전차에서 내려 칼로 고삐를 끊으려 했지만 헥토르의 전차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디오메데스가 방향을 돌려 네스토르에게 달려왔다. 그는 노왕을 자신의 전차에 태웠고, 네스토르는 고삐를 잡았다. 두 사람은 도망치는 대신 헥토르를 향해 말을 몰았다. 디오메데스가 던진 창은 헥토르를 빗나갔지만 그의 마부 에니오페우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마부가 전차에서 떨어지자 헥토르의 돌진도 잠시 멈추었다. 늙은 왕과 젊은 전사가 한 전차에서 트로이군의 선봉과 맞선 순간이었다.
그러나 제우스가 벼락을 두 사람의 전차 앞에 떨어뜨리자 상황이 바뀌었다. 말들이 놀라 몸을 움츠렸고 네스토르의 손에서 고삐가 미끄러졌다. 그는 디오메데스에게 지금은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디오메데스는 헥토르의 조롱을 두려워했지만 결국 노왕의 판단을 따랐다. 네스토르는 명예를 위해 신의 뜻까지 거스를 수는 없다고 보았다. 싸울 때를 아는 것만큼 물러날 때를 아는 것도 전쟁에서 살아남는 지혜였다.
디오메데스와 한 전차에서 헥토르와 맞서는 네스토르
3.3 아킬레우스를 돌아오게 하려는 밤
아킬레우스가 싸움을 거부한 뒤 트로이군의 공격은 점점 거세졌다. 마침내 헥토르의 군대가 그리스군의 방벽 가까이까지 밀려오자 아가멤논은 절망했다. 그는 장수들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꺼냈다. 그때 다시 네스토르가 나섰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망칠 준비가 아니라 아킬레우스와의 다툼을 끝내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네스토르는 아가멤논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충분한 보상을 보내라고 권했다. 아가멤논도 결국 고집을 꺾었다. 황금과 가축, 여인들, 여러 도시를 약속하고 브리세이스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네스토르는 그 제안을 들고 아킬레우스에게 갈 사람들을 골랐다. 오디세우스와 대 아이아스, 그리고 아킬레우스를 어린 시절부터 돌보았던 포이닉스가 밤길을 걸어 그의 막사로 향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선물을 거절하고 전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절단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네스토르는 다시 어려운 선택 앞에 놓였다. 아킬레우스를 강제로 움직일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리스군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늙은 왕은 이제 아킬레우스 자신이 아니라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파트로클로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
밤의 회의에서 사절 파견을 제안하는 네스토르
3.4 파트로클로스에게 건넨 말
전투 중 네스토르는 화살에 맞은 의사 마카온을 자신의 전차에 태워 막사로 데려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는 부상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라고 파트로클로스를 보냈다. 파트로클로스가 찾아오자 네스토르는 그리스군이 처한 상황을 숨기지 않았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 아가멤논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다쳤고, 트로이군의 공격은 함선 가까이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네스토르는 오래전 프티아에서 출전을 준비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메노이티오스는 아들에게 아킬레우스가 힘과 혈통에서는 뛰어나지만 자신이 나이가 더 많으니 좋은 말로 그를 이끌어 주라고 당부했다. 네스토르는 이제 그 말을 기억하라고 했다. 먼저 아킬레우스를 설득해 다시 싸우게 하고, 그래도 그의 분노가 풀리지 않는다면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미르미돈군을 이끌고 나가라고 권했다. 트로이군이 아킬레우스가 돌아온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리스군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 말을 마음에 품고 아킬레우스에게 돌아갔다. 얼마 뒤 트로이군이 그리스 함선에 불을 지르자 그는 마침내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고 미르미돈군을 이끌어 출전했다. 계책은 성공했고 트로이군은 함선에서 멀리 밀려났다. 그러나 기세를 몰아 계속 적을 추격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가 정해 준 선을 넘어 트로이 성벽 가까이까지 나아갔다. 그리스군을 구하기 위해 시작된 그의 출전은 뜻밖의 비극으로 이어졌고, 파트로클로스는 끝내 헥토르에게 쓰러졌다.
막사에서 파트로클로스에게 출전을 권하는 네스토르
4.1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경기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우스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헥토르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승리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먼저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뼈를 거두어 봉분을 세웠다. 이어 그리스 장수들을 불러 모아 파트로클로스를 기리는 장례 경기를 열었다. 전차 경주와 권투, 씨름, 달리기와 무기 경기가 차례로 이어졌다.
전차 경주에는 네스토르의 아들 안틸로코스도 참가했다. 그의 말은 디오메데스나 메넬라오스가 이끄는 말보다 빠르지 않았다. 네스토르는 아들을 불러 힘보다 지혜로 승부하라고 가르쳤다. 회전 표지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돌고, 고삐와 채찍을 정확하게 다루며, 좁은 길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다. 안틸로코스는 아버지의 조언을 이용해 메넬라오스를 앞질렀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추월 때문에 경기 뒤 항의를 받았고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경기가 계속되자 아킬레우스는 직접 겨룰 수 없는 네스토르에게도 특별한 상을 건넸다. 이제 노왕은 권투도 씨름도 달리기도 할 수 없었지만,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기억할 기념품으로 두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를 주었다. 네스토르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들고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여러 경기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전장에서 쌓은 그의 경험은 이제 아들에게 전해지고, 노왕에게는 지나간 젊은 날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전차 경주를 앞둔 안틸로코스를 가르치는 네스토르
4.2 안틸로코스의 죽음
그러나 네스토르가 아들과 함께할 시간은 오래 남지 않았다.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트로이는 항복하지 않았고, 성을 돕기 위한 새로운 군대가 계속 도착했다. 그 가운데에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 멤논이 이끄는 에티오피아군도 있었다. 멤논은 아킬레우스와도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전사였으며, 그의 군대가 전장에 나타나자 한동안 기세를 잃었던 트로이군도 다시 힘을 얻었다.
후대 전승에서는 이 전투에서 네스토르가 다시 전장 한가운데 위험에 빠졌다고 전한다. 파리스가 쏜 화살에 그의 말이 쓰러지면서 노왕은 멤논의 공격 앞에 놓였다. 아버지가 위험한 것을 본 안틸로코스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그는 네스토르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멤논에게 맞섰지만 상대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안틸로코스는 아버지를 살려 내는 대신 자신이 멤논의 손에 쓰러졌다. 젊은 시절 수많은 형제를 잃고 살아남았던 네스토르는 이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아들마저 먼저 보내야 했다.
안틸로코스는 아킬레우스와도 가까운 전우였다.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분노하여 멤논에게 맞섰고, 치열한 결투 끝에 그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승리해도 안틸로코스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네스토르는 수많은 젊은 전사에게 싸우고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왔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안전한 귀향을 약속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안틸로코스의 죽음은 노왕에게 트로이 전쟁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가 되었다.
멤논 앞에서 아버지를 지키는 안틸로코스
4.3 필로스로 돌아온 네스토르
트로이가 함락된 뒤에도 그리스 장수들은 한마음으로 고향을 향하지 못했다. 귀환을 앞두고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신들의 분노를 어떻게 달랠 것인지를 두고 갈라졌고, 군대도 여러 무리로 나뉘었다. 네스토르는 더 머물지 않고 출항하는 쪽을 택했다. 디오메데스 역시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그와 함께 바다로 나섰고, 오디세우스는 한때 그들을 따르다가 다시 아가멤논에게 돌아갔다.
네스토르와 디오메데스의 함대가 테네도스를 지나 항해를 계속하자 뒤늦게 출항한 메넬라오스도 레스보스에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장수들은 어느 항로로 가야 가장 안전하게 그리스로 돌아갈 수 있을지 신에게 징조를 구했다. 마침내 에우보이아 쪽으로 바다를 가로질러 가라는 뜻을 얻자 그들은 넓은 에게해를 건넜다. 순풍이 불었고, 함대는 게라이스토스에 닿아 포세이돈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 뒤 디오메데스는 아르고스로 향했고 네스토르는 항해를 계속해 필로스로 돌아왔다. 다른 영웅들에게 폭풍과 난파, 살해와 긴 방랑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달리 그의 귀향은 놀라울 만큼 순조로웠다. 그러나 궁전으로 돌아온 노왕 곁에는 안틸로코스가 없었다. 십 년의 전쟁에서 수많은 영웅을 지켜본 네스토르는 살아서 고향에 도착했지만, 함께 떠났던 아들을 트로이의 땅에 남겨 두고 돌아와야 했다.
필로스 해안으로 귀환하는 네스토르와 함대
4.4 텔레마코스가 찾아온 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필로스의 해변에 낯선 배 한 척이 도착했다. 그날 네스토르와 그의 백성들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큰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젊은이는 이타카의 왕자 텔레마코스였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는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고향 밖의 세계에 나온 것이었다.
네스토르는 젊은 손님을 자신의 식탁으로 불러 음식을 나누고 나서야 이름과 목적을 물었다.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우스의 아들이라고 밝히자 노왕의 기억은 다시 트로이로 돌아갔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고,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장수들이 어떻게 갈라져 귀향했는지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그 뒤 어디로 갔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네스토르는 텔레마코스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더 많은 소식을 알고 있을 메넬라오스를 만나도록 권하고, 자신의 아들 페이시스트라토스를 길잡이로 붙여 스파르타로 보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영웅들과 함께 전장을 달렸던 네스토르가 이제는 그 영웅의 아들에게 옛일을 들려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트로이의 전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필로스의 노왕은 살아남아 그들의 이름과 싸움, 귀환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해 주었다.
텔레마코스에게 트로이 전쟁을 들려주는 네스토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