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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8.21. 10:23 (2026.08.21. 10:23)

낭선군 이우, 예서와 진서에 능해 청나라 연행후 정세보고 왕에게 보고...삼척부사 허목, 금석학과 고동서화 수집, 예술적 동반자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3- 허목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쓴 전서체(篆書體) 비석을 여러 번 보았지만, 비석 좌측면에 적혀 있는 형산비(衡山碑)를 자세히 알려고 고대 문헌을 펼쳐놓고 다시 공부했다.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3- 허목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쓴 전서체(篆書體) 비석을 여러 번 보았지만, 비석 좌측면에 적혀 있는 형산비(衡山碑)를 자세히 알려고 고대 문헌을 펼쳐놓고 다시 공부했다.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는 남악(南岳)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愚手篆) 77자 비문 탁본을 얻어 삼척부사 허목에게 올렸다. 허목은 탁본에 임금의 은총과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을 붙여 가로 19cm, 세로 88cm 목판에 새겨 삼척 읍사(邑司)에 보관했다. 목판은 삼척시립박물관에 있으며 유물번호는 삼척시립 001014-000이다.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4면 글자 합성(사진;삼척시립박물관)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네 면을 보면 좌측면에는 비의 출처를 형산비(衡山碑)라고 밝혔다. 비에는 대우수전(大愚手篆) 77자 비문 중 허목이 48자를 고르고 모아 임금의 명을 받들어 뽑아 죽관도에 건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우측면에는 대한제국기 광무 8년(1904) 9월에 칙사(勅使) 종(從) 2품 강홍대(康洪大), 군수 정운석(鄭雲晳), 감동(監董) 강홍도(康洪道), 별감동(別監董) 이도면(李道勉), 권병수(權丙壽), 이세진(李世鎭), 강정주(康鼎柱), 조제관(趙濟寬), 임순태(임순태)의 이름이 있다. 이들이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목판의 글씨를 돌에 새겨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를 건립했다.
 
강홍도(康洪道)는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건립 당시 공사를 감독하고 관리한 감동 직책을 맡았던 인물로 구한말 북청군수를 지냈다. 강홍도는 독립투사 백용성(白相奎, 震鍾, 1864~1940) 스님에게 만주 지역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북청 금광 개발을 조언하여 백용성은 1917년부터 3년간 북청에서 금광을 운영하며 만주 및 연해주 등지의 독립군과 홍범도 장군에게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출처】 디지털삼척문화대전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久旅忘家翼輔承帝
勞心營智裒事興制
泰華之定池凟其平
處水犇麓魚獸發形
+ 而罔弗亨伸鬱疏塞
明門與庭永食萬國
 
내 집을 잊고 떠나 오랫동안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마음을 쓰고 지혜를 짜내, 열심히 일하고 제도를 흥성하게 하니
세상이 안정되고, 바다와 하천이 모두 평온하구나,
에도 땅에도 물고기와 짐승이 제 모습을 나타내니
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답답한 것이 해결되고 막힌 것이 뚫리리니
은 사회 이룩해 만국 백성 영원토록 잘 살리라.
 
 
또한, 이 비문의 내용은 성호 이익(李瀷)의 저서인《성호사설(星湖僿說)》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책에는 “내 집 묵은 책 상자 속에 구루(岣嶁) 비문이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벌레가 갉아 먹는 듯하고 새가 지나간 자국 같아서 얽히고 맺히고 깎여 황홀하고 기괴하다. 다만 간혹 이를 분별하는 이도 있으므로 이에 따라 기록한다.”라고 서술하였다.
 
구루(岣嶁) 비문은 영축산 통도사 산내 암자 사명암 스님들 숙소 주련으로 걸려있다. 사명암은 전망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과거 민간에서는 가정집의 문액이나 액막이 부적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朗善君 筆 書帖 蹲鴟帖(사진;국립중앙박물관)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 1637~1693)는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 1604~1651)의 아들로 전서와 예서에 능했다. 그는 조선왕조 제14대 왕 선조의 손자로 1663년(현종 4) 진위(陳慰) 겸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연행하고, 중국 남명(南明) 정권의 잔영과 관련된 정세 보고를 왕에게 올렸다. 이우는 연행을 다녀와 청에서 구한 탁본을 69세 허목에게 드렸다. 허목은 놀라운 글자를 보고 “그 글자가 용사(龍蛇) 조수(鳥獸) 초목(草木)같이 빛나고 신괴(神怪)하여 어떻게 형용할 수 없다.”라고 무척 감격했다.
 
이우는 1671년 문안사(問安使) 자격으로 청나라에 두 번째 연행해 심양과 연경을 방문했다. 1686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세 번째 연행하여 청나라에서 고대 금석문과 서화 탁본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계묘연행록(癸卯燕京錄)》을 남겼다. 그는 특히 중국의 유명한 고대 비문 탁본을 조선에 들여와 국내 서예 및 금석문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이우는 역대 왕들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필》 간행을 주도하고, 자서전인 《백년록(百年錄)》을 통해 종친으로서의 살아온 삶과 사행(使行) 소회를 상세히 기록했다.황정연 교수는 2012년 발표한 〈朗善君 李俁(1637-1693)의 《百年錄》 硏究〉 논문에서 “낭선군이 교유한 여러 인물 중 그에게 학문적인 영향력을 가장 크게 끼친 인물은 허목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후난성 남악(南岳) 형산(衡山)(사진;바이두백과)
 
나는 중국 오악(五嶽)의 하나인 남악(南岳)에 가보지 못했다. 남악(南岳) 형산(衡山)은 중국의 전설적인 명산 중 하나로 장수를 뜻하는 ‘수산(壽山)’으로도 불린다. 최고봉인 축융봉의 높이는 해발 1,300m이며 산 주변에 72개의 수려한 봉우리가 이어져 절경을 이룬다. 이곳은 불교와 도교의 성지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늘 수많은 탐방객으로 몹시 붐빈다.
 
남악 형산비(衡山碑)는 禹碑, 禹王碑, 大禹功德碑, 구루비(岣嶁碑), 神禹碑, 夏碑, 夏禹碑 등으로 불리는데, 구루비(岣嶁碑) 명칭은 구루봉(岣嶁峰)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 남악(南岳) 형산비(衡山碑)(사진;바이두百科)
 
2007년 6월~7월, 중국 CC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走遍中国》 제작진과 호남성 문물국 전문가들이 남악 형산의 구루봉 자락인 호남성 형산현 푸톈푸향 운봉촌(云峰村) 마을을 조사하면서 벽체에 박혀 있는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 비석은 매우 커서 무게가 10여 톤에 이르는데, 1980년대 초 한 농민이 집을 지을 때 비석을 담장으로 사용했다. 거대한 복숭아 모양의 바위로, 표면에 인위적으로 새긴 기이한 문양과 글자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호남성 문물국 고고학 전문가들과 남악구 문물관리처의 콰앙광후이(匡光辉, 1953~ ) 원로의 오랜 추적 조사가 더해져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수차례 현장 감정을 거쳐 “이 거석의 위치, 형태, 크기 및 주변 환경이 사료와 일치함이 확인되어 역사 속에서 천년 간 실종되었던 구루비(禹王碑)의 모본(母本) 원본이 맞다.”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요(堯) 임금이 우(禹)를 불러 치수의 명을 내려 우는 홍수로부터 민초(民草)들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년간 필사의 노력 끝에 큰물을 터서 바다로 흘려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우는 치수를 할 때 한동안 물길을 트는 방식을 알지 못해 몹시 힘든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천지신명에게 묘책을 묻고자 남악 형산(衡山)에 올라 백마(白馬)의 피로 제례를 올렸다. 그날 밤 꿈에 천제의 명을 받은 붉은 옷을 입은 수사(水使)가 나타나 금간옥서(金簡玉書)를 얻어 천하의 물길을 바로 잡는 데 성공하였다. 구루비(岣嶁碑)는 우가 금간옥서를 받은 형산에 치수 공덕을 기린 비석이다.
 
근래 들어 일부 학자들은 〈구루비〉가 하나라 우왕의 공적을 기리는 비가 아니라고 다른 주장을 펴는 학자도 있다. 고문자 학자인 조금염(曹锦炎, 1949~ )은 “이 비는 전국시대 월나라의 태자 주구(朱勾, 월왕 옹)가 자신의 아버지인 월왕 불수(不壽)를 대신하여 남악에 올라 산에 제사 지낸 찬송하는 시다.”라고 보았다. 반면 후난공업대학의 류쥬이(刘志一) 교수는 비가 기원전 611년(초 장왕 3년)에 초 장왕(禹王)이 용나라를 멸망시킨 역사적 과정과 공훈을 찬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류쥬이 교수는 비의 글자는 하대 관방문자(官方文字)이며 상주 시대의 금문(金文)보다 앞선다고 보았다. 그는 10년 걸려 비문을 해독했다.
 
이렇게 여러 설이 엇갈리는 것은 비문의 내용이 지나치게 기이하기 때문입니다. 비문은 모두 77자, 9행이며, 제1행부터 제8행까지는 한 행에 9자, 마지막 행은 5자입니다. 자형은 올챙이처럼 생겼으며, 갑골문과 종정문에도 다르고 주문의 올챙이문에도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도가의 일종의 부적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명대 중기의 대학자이며 문학가인 양신(楊慎, 1488~1559)이 비문의 내용을 번역했다. 이 가장 오래된 비각은 중국 역사에서 역대 서예가와 문학가들에게 귀중한 보물로 여겨졌다. 남송 가정(嘉定) 5년(1212년)에 하치(何致)가 남악을 유람할 때, 비를 발견하고 전문을 복각하여 당시 지방관이었던 조언약(曹彦約)에게 탁본을 전하고, 창사의 악록산 운록봉(雲麓峰)에 글자를 새겼다. 명대에 장사 태수 판일(潘鎰)이 악록산에서 이 비석을 찾아 각지에 탁본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구로비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남송의 탁본을 위해 명나라 가정 30년(1551년)에 장사 태수 장서명(張西銘)이 호비정(護碑亭)을 세웠고, 명나라 숭정(崇禎) 3년(1630년)에는 병도(兵道) 石維岳이 정자를 중수하고 돌난간을 증축했으며,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에는 주소남(周召南)과 정사공(丁司孔)이 중수했다.
 
해서체 〈대관(大觀)〉 석각(사진;新湖南)
 
비 양쪽에는 명대 형부(刑部) 유여남(劉汝南)의 〈과신우비가(誇神禹碑歌)〉와 청대 건륭 연간에 악록서원의 산장을 지낸 학자 구양정환(歐陽正煥, 1709~1760)이 해서체 〈대관(大觀)〉 석각을 추가했다. 1935년(중화민국 24년)에 호남경비사령부 참모장 주한(周翰)이 비정(碑亭)을 중수하면서 〈우비(禹碑)〉 편액을 추가로 새겼다.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악록산(岳麓山) 우비(禹碑)(사진;신화위키)
 
또한 윈난 다리(雲南大理), 쓰촨 베이촨(四川北川), 장쑤 난징 치샤산(江蘇南京棲霞山), 허난 위저우(河南禹州), 산시 시안 베이린(陝西西安碑林), 저장 사오싱(浙江紹興), 후베이 우한(湖北武漢)에도 모두 번각(翻刻)이 있다.
 
중국에는 호수가 정말 많다, 둥팅호(洞庭湖, 동정호)는 중국에서 2번째로 큰 담수호로 6월에서 10월은 양쯔강에서 흘러온 물로 호수의 높이가 높아지고 면적이 더 확대된다. 중국에서는 지명을 만들 때 큰 산맥이나 강, 호수를 기준으로 삼는 데 둥팅호 밑에 있는 성이라고 해서 후난성(湖南省)이 되었다. 후난성에는 장자제(張家界)와 형산이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원주민 토가족이 거주하며, 천문산, 원가계, 양가계, 무릉원의 경관이 좋아 관광객이 많이 방문한다.
 
《오월춘추(吳越春秋)》(사진;바이두백과)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박현규 교수는 2013년에 중국 남부 후난성(湖南省) 헝산현에 있는 남악 형산(衡山, 1300m, )을 방문하고 모각본(模刻本)이 있는 중요 지역을 돌아보고 돌아와 2014년 2월 중국사연구 제88집 〈중구에서의 구루비(岣嶁碑) 전래와 모각에 관한 고찰〉을 발표했다. 박 교수의 논문을 읽으며 구루비(岣嶁碑)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얻었다.
 
후한(後漢)의 조엽(趙曄, ?~ 83?)은 춘추전국시기(春秋戰國時期) 吳와 越 두 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오월춘추(吳越春秋)》 12권을 저술해 10권이 전해온다. 권4의 〈월왕무여외전(越王無餘外傳)〉은 하(夏)나라의 시조이자 월나라의 선조로 기록된 우(禹)왕과 그의 6세손인 무여(無餘)의 전설과 기원을 다루었다. 이 책은 우왕의 아버지 곤(鯀)과 어머니 여희(女嬉)의 이야기로 시작하며, 곤의 후손이자 서강(西羌)의 석뉴(石紐) 지역에 터를 잡은 하우(夏禹)의 탄생 배경을 전한다. 요(堯) 임금 시절에 대홍수가 발생하자, 사악(四嶽)의 추천으로 곤(鯀)이 치수(治水)에 나섰으나 해결하지 못했다. 이후 그의 아들 우(禹)가 대업을 이어받아 천하의 물길을 다스리는 전설적인 업적을 쌓았다.
 
우왕이 30세가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다가, 도산(塗山)에 이르러 백색 구미호(九尾狐)를 만나 아내가 될 징조로 여기고 도산씨(塗山氏)의 딸과 결혼하게 되는 신화적 일화를 담고 있다. 구미호는 본래 요괴로 묘사되었지만, 후대에는 태평성대, 婚姻, 多産, 풍요, 왕의 德治를 상징하는 동물로 성격이 변한다. 이 책은 하우(夏禹)의 말기 봉토이자, 우왕의 후손인 무여(無餘)가 월나라의 군주로 봉해진 연원을 설명하며, 오·월 지역의 신화적 뿌리를 연결했다.
 
학포 이상좌(李上佐)의 나한도 불화묵초(佛畵墨草)(사진;국가유산청)
 
삼척부사 허목(許穆)과 낭선군 이우(郞善君 李俁, 1637~1693)는 비록 나이 차가 크지만 17세기 후반 금석학과 고동서화(古董書畫: 옛 서화 및 골동품) 수집을 함께 향유하고 교류한 예술적 학문적 동반자 관계였다. 조선 최고의 전서체 대가였던 남인 학자 허목과 서화가였던 낭선군 이우는 신분을 넘어 예술적 취향을 매개로 깊이 교감했다.
 
두 사람은 옛 비석이나 기물에 새겨진 글씨를 연구하는 금석학적 취향을 깊이 공유하며 서로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허목이 수집해 소장하고 있던 16세기 화가 학포 이상좌(李上佐)의 불화묵초(佛畵墨草) 초본 12점 중 2점을 낭선군 이우가 가져가 소장했을 정도로 긴밀하게 소장품을 나누었다. 미수 허목은 1671년(현종 12) 8월 2일에 불화묵초(佛畵墨草) 초본에 “그가 그린 불화는 천고의 절화(絶畵)로 귀신의 묘경(妙境)에 들어갔다.”라는 발문을 썼다.
 
화가 이상좌는 천인 노예 출신의 궁정 화원으로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려 중종의 특명으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도화서에 화원으로 들어오게 되고 인종 1년에 중종의 어진을 그렸다. 어진을 그린 이후 전주 이씨로 성울 사성(賜姓)했다. 그는 호가 공우, 이배련, 학포(學圃)로 불리며 격찬을 받을만큼 인물화는 놀라울 정도로 신묘했다. 작품에 〈송하보월도〉, 〈한강조어도〉 등이 있다. 화가 이상좌의 가계가 조선 회화사에서 끼친 영향은 정말 대단하다.
 
허목 전서(篆書) 함취당(含翠堂)(사진:국가유산청)
 
허목 전서(篆書) 함취당(含翠堂) 편액 아래에는 함취당 주인 홍수보(洪秀輔, 1723~1799)가 1791년( 정조 15년) 4월에 지은 발문이 딸려 있어 글씨의 전래내력을 알 수 있다. 문신 홍수보는 조선 정조 때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편액에는 허목의 인장 네 개(眉老, 和, 九疇人, 叟)가 찍혀 있으며, 2010년 보물 제592-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수 허목은 주자학에서 벗어나 원시 유학을 중시했다. 그의 학문은 고경(古經), 고례(古禮), 고문(古文), 고전(古篆)을 총괄하는 고학(古學)으로 주자학 해석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공맹유학 본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현실문제에 대한 답 역시 고학(古學)에서 구하려 애썼다. 미수는 성리학 위주의 사서(四書)인 《大學》, 《中庸》, 《論語》, 《孟子》 외에 6가지 근본 고전 육경(六經)을 중요시했다. 학문의 중심 방향을 육경으로 삼아 조선에서 실학파가 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육경은 고대 중국의 시가 모음인 시경(詩經)과 고대 정치와 역사 기록인 서경(書經), 주역, 음양의 변화 원리인 역경(易經), 인간의 예절과 실천 규범인 예기(禮記), 음악과 조화의 원리인 악경(樂經), 魯나라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 춘추(春秋)이다. 미수는 고적(古迹)을 즐기고 옛 명필의 필적을 모으던 이우의 수집 활동과 지향점이 거의 일치했다.
 
근대 중국의 역사학자인 궈모러(郭沫若, 1897~1978)은 “남악 형산(衡山)에 있는 고대 전서체인 구루산 신우비(岣嶁山神禹碑, 일명 형산비)의 77자 중 해독이 정말 극도로 어려워 3년을 연구해도 겨우 3글자만 알아냈다.”라고 한탄할 정도로 파악하기 힘든 글씨였다.
 
애군우국(사진:국립부산박물관)
 
2010년 10월 25일 문화재위원회는 허목 선생의 전서 편액 글씨 한 점을 보물 제592-3호로 지정했다. 그런데 1년 6개월이 지나 2012년 4월 한 시민이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표기 글자가 잘못됐다.”라고 글을 적었다. 문화재위원회는 시민 제보를 받아들여 글자의 오독(誤讀)을 인정하고, 보물 제592-3호 명칭을 ‘애군민국(愛君民國)’에서 ‘애군우국(愛君憂國)’으로 바로 잡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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