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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4(이승휴)
조선왕조 숙종 때 문신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지은 한글 소설 《九雲夢》의 배경 무대가 바로 중국 후난성(湖南省) 남악 형산이다. 소설 구운몽의 구(九)는 성진과 팔선녀를 가리키고, 운(雲)은 인간의 짧은 삶이 높은 하늘에 슬며시 나타났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金益兼, 1614~1637)은 병자호란 당시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했다.
남한산성이 청군에 의해 포위되자 강화산성을 사수하려고 애썼다. 청나라 군사가 산성을 공격해 함락되게 되자 김상용 등과 함께 화약 더미에 불을 붙여 순절했다. 이때 24세로 동반해 자결한 이가 30여 명이 넘는다. 이후 유복자로 피란선 배에서 태어난 김만중은 아명이 선생(船生)이었다. 어머니 해평 윤씨가 아들에게 세 살 때부터 글을 가르쳐 1648년 12세에 과문(科文)을 쓸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고, 14세에 향시에 합격했자. 17세에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후 관리로 등용되어 홍문관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87년 장희빈의 가문과 연관된 인사문제를 비판하다가 평북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귀양지에서 소설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한글 소설 《구운몽》를 저술했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한글 소설 《九雲夢》
삼척의 두 비석은 모두 전서체(篆書體)의 대가인 허목 선생의 독창적 글씨이다. 비석이 있던 죽곶도(竹串島)는 조선에서 외적을 막기 위한 수군을 관장하던 진영지였다. 《삼척군지》 등 고문헌에는 정라진 앞의 섬으로 표시가 되어있고, 삼척항 건설할 때 육지와 연결되었다.
삼척기줄다리기(사진;삼척시)
미수 허목은 삼척부사 재직시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오랜 역사를 지닌 대동 민속놀이 ‘삼척 기줄다리기’를 크게 권장했다. 이 놀이는 조선 현종 3년(1662년경) 삼척에 제방과 저수지를 만들 때 시작되었다고 전해온다.
민속학자인 중앙대 김선풍(1940~ ) 명예교수는 관동대학 부설 강릉무형문화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1883년 《강원민속학》 창간호를 발간하고 강원도민속학회를 창립했다. 김 교수는 1976년 〈강릉지방 詩歌의 민속학적 연구〉로 고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삼척의 기줄다리기’를 집필하였다. 《삼척구지(舊誌)》에 의하면 “정월대보름을 맞아 농신과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 제사가 끝나면 한해의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놀이를 하였다. 큰길 광장으로 나와 농악을 선두로 행진을 거듭하여 명절을 맞이하는 흥겨운 행사를 시작했다.”
정월대보름 행사가 다가오면 어린이들이 양편으로 갈라져 북이며 꽹과리 등을 두드리며 기줄다리기를 하는데, 이를 ‘솔닥기줄’ 또는 ‘속닥기줄’이라 한다. ‘솔닥’은 오늘날의 ‘쏙달거리다’, ‘쏙닥거리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하고, 광산촌에서 좁고 작은 굴을 ‘솔닥굴’이라 하듯, 중줄이나 큰 줄에 비해 크지 않고 작은 줄을 뜻하기도 한다.
삼척기줄다리기(사진;삼척시)
‘기줄’이나 ‘게줄’은 한자어로 해삭(蟹索) 또는 해현(蟹鉉)에 해당하는 삼척의 토속어이다. 기줄은 그 큰 줄에 매달린 작은 줄이 마치 게의 발과 비슷한 까닭에 그를 형용하여 일컫는 말이다. 게를 문에 달아놓으면 잡귀가 물러난다는 해안 속신(俗信)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게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1차적으로는 축귀(逐鬼)하는 데 있지 않았나 보았다. 또한, 땅을 밟아줌으로써 지하의 잡신을 눌러주고 진압시킨다는 지신밟기의 역할도 했다.
삼척기줄다리기는 1976년 강원도 시도무형유산(당시 시도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12월 2일, 유네스코 제10차 무형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기지시줄다리기, 영산줄다리기, 남해선구줄끗기, 감내게줄당기기, 의령큰줄땡기기 5개 종목 및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의 줄다리기 종목 등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이사부독도기념관(사진;궁인창)
새로 개관한 이사부독도기념관에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언덕 위 나릿골 감성마을과 선박이 많이 있는 정라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 식당을 찾던 중에 건너편에 CU 편의점이 보여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사서 항구 근처로 향했다. 잔잔한 항구의 정박한 배들을 바라보며 김밥을 먹고, ‘삼척항 지진 해일 안전타워’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었다.
나릿골 감성마을(사진;삼척시)
최근 삼척시는 정라동 7·10·11·13통 일대를 골목마다 낭만이 피어나는 ‘나릿골 감성마을’로 새롭게 조성했다. 골목길을 따라 특색있는 보행길과 감성을 통하는 희망길, 추억길, 바람길, 바다길 등을 만들고 언덕 위에는 핑크빛 갈대가 무성한 바람의 화원과 꽃동산을 조성했다. 비록 언덕이 가팔라 오르기가 조금 힘들지만, 배에서 머물다 시간이 나면 언덕에 올라 바다전망대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나릿골 감성마을(사진: 궁인창 AI 이미지 생성)
삼척 정라항은 범선 코리아나호를 타고 울릉도와 독도를 항해할 때 자주 들르던 항구라 유독 정감이 있고, 마주하는 주민들의 따뜻한 온기가 푹신하게 느껴진다. 입항할 때 바다에서 육지를 보면 언덕에 1970년대 풍경의 언덕 마을이 보인다. 필자는 정라항에서 범선을 타고 출항하기 전에 동해를 바라보면서 삼척의 역사적 숨결을 간직한 인물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떠올리곤 했다.
삼척 정라항(사진;궁인창)
삼척을 빛낸 역사 인물로는 우산국을 복속한 이사부 장군 이외에 삼척 김씨의 시조인 실직군왕 김위옹(金渭翁)이 있다. 또한,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 승려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의 제자인 염관 제안 선사를 만나 “평상의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는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여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강릉 사굴산파를 개창하고, 신흥사, 두타산 영은사, 삼화사를 창건한 범일 국사(810~889)가 있다. 그리고 삼척부사로 부임해 주민에게 선정을 베푼 대학자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제왕운기》를 저술한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1224~1300) 등이 있다.
몽골의 고려 침입과 항쟁(사진;나무위키)
강원도 동해안은 몽골의 침입과 이에 맞선 지역민들의 항쟁이 서린 현장이라 동안거사 이승휴의 생애를 자세히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승휴가 어릴 때 어떤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강원도 깊은 심산계곡에 은거하고, 어떤 시대적 사명과 목적으로 《제왕운기》를 저술했는지 궁금했다. 그리하여 《고려사》와 《동안거사집》을 비롯해 선학(先學)의 훌륭한 연구 논문들을 차근차근 읽어보며 그의 전 생애를 조용히 따라가 보았다.
이승휴 표준영정(사진;전통문화포털)
이승휴는 고려왕조 고종 11년(1224)에 태어났다. 본관은 고려 경산부 가리현(현 경북 성주)이다. 그의 선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부모의 이름도 알 수 없지만, 《고려사》 열전 이승휴 편에는 그가 14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승휴가 지은 〈병과시(病課詩)〉 서문에 의하면, 9살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살에 고려 제21대 왕인 희종(1181~1237)과 성평왕후의 4남 경지(鏡智) 왕자의 거처로 들어가 왕자와 함께 유학자 신서(申諝) 문하에서 《춘추좌씨전》과 《주역》 등을 깊이 있게 배웠다. 왕자 경지는 1220년(고종 7년)에 출가하여 보경사 주지, 희양산문의 고승으로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인 원진국사 승형(1171~1221)의 제자가 되었다. 고종 때에는 진구사의 주지와 대선사를 지냈으며, 사후에 원정국사(圓靜國師)에 봉해졌다. 고려왕조는 불교를 국교로 받들고 신앙으로 숭배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문헌에 등장하는 국사(國師) 및 사후 추봉자는 대략 60여 명이다.
고려왕조 강화도 천도(사진: 궁인창 AI 이미지 생성)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행록 권1(行錄卷一)에 따르면 이승휴의 아버지가 중앙관료로 등용되어 가족이 개경으로 상경하였다. 1231년 최씨 무인 정권이 집권할 때 몽골이 침입하여 전쟁이 벌어졌다. 이승휴가 9살이 되는 1232년(고종 19)에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여 그의 가족도 강화로 이주하였다. 14살에 부친상을 당해, 어머니는 아들의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 태복경 임천부의 부인이자 종조모(從祖母)인 북창군부인 원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본향인 삼척으로 돌아갔다.
문재(文才)가 뛰어난 이승휴는 강화도에서 재건된 사학 12도 중의 하나인 낙성재(樂聖齋)에서 교육을 받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시와 문장을 짓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루는 여름철 유생들의 논문 평가 행사인 하과장(夏課場) 기간에 과거 시험을 함께 준비하던 유생 박항(朴恒), 박추(朴樞)와 함께 연미루(燕尾樓)라는 빼어난 누각에 갔다가 타향에서의 외로움과 유학 생활의 고단함이 겹쳐 술에 취해 정자 주변을 돌다 울면서 귀가한 적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교도(敎導) 홍렬(洪烈)이 이승휴를 이백(李白)에 빗대어 놀리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가 강화도 도성 내에 널리 퍼져 그는 ‘술에 취해 호기롭고 광기 어린 글재주를 부리는 문인’이란 뜻의 ‘주광(酒狂)’이란 명성 높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선생이 길가에서 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게, 적선(謫仙, 이태백)이 취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라네. 아양 떠는 말소리는 어린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하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춤추는 봉황이 뛰는 듯하구나. 명성은 비단 같은 시 덕분에 더욱 높아졌고, 온 세상을 술집 고향으로 몰아넣었네. 당나라 개원(開元) 때의 버릇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혹시 황궁의 궁녀가 얼굴에 물을 뿌려 깨우던 그 소년(李太白)이 아닌가?”
[원문]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행록 권1(行錄卷一)
自注夏課場時。僕與朴生恒朴生樞持公牒遊樂聖齋都會所燕尾樓。童冠歡然。綢繆慰送。因醉不覺行泣而還。洪敎導烈以詩嘲之曰。莫怪先生泣路傍,謫仙酣醉是尋常。嬌言帶澁雛鶯囀,軟步多狂舞鳳蹌。聲價更高詩錦繡,乾坤驅入酒家鄕。開元餘習今猶在,莫是宮娥洒面郞。此詩流傳都下。因得酒狂名。
당시 몽골과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던 고려 최씨 무신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지만, 송나라와 대외교역하며 남부지방에서 조운선을 타고 올라오는 각종 곡식과 물자를 풍족하게 공급받아 왕족들은 비교적 여유가 있고 화려한 생활이 가능했다. 최고 권력자들은 섬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장기적인 항쟁을 생각하며 곡식을 더 생산하려고 섬 지형을 연구해 간척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삼별초군 호국항몽유적비(사진:강화뉴스)
필자는 과거 강화도에서 10여 년간 지내며, 시간이 날 때마다 13세기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대몽항쟁기 역사적인 사건들을 추적하곤 했다. 고려왕조의 강화 천도와 개경 천도, 삼별초의 항쟁, 군사정권의 흥망성쇠, 팔만대장경 이운 등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였으며, 고려 고종의 홍릉, 석릉, 곤릉, 가릉, 이규보 묘, 마니산(摩尼山), 강화 고려궁지와 제포(승천포), 갑곳진, 그리고 삼별초 군대가 진도로 떠났다고 추정되는 내가면 구하리 구포(仇浦) 등 유적지와 포구를 자주 찾아가 옛날을 회상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