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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우스 – 바다의 예언자
이집트 앞바다의 파로스 섬에는 포세이돈의 물개 떼를 돌보는 늙은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가 살고 있었다. 그는 과거와 현재,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고, 붙잡히면 사자와 뱀, 물과 나무로 모습을 바꾸어 달아났다. 트로이에서 돌아오던 메넬라오스와 벌 떼를 잃은 아리스타이오스는 저마다 답을 얻기 위해 그를 찾아온다. 끝까지 붙잡힌 뒤에야 프로테우스는 감추어져 있던 진실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들려준다.
1.1 파로스 섬의 바다 노인
이집트의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파로스라는 섬이 있었다. 거센 파도가 둘러싼 섬에는 배들이 잠시 머물 만한 항구가 있었고, 그 너머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가 펼쳐졌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해안과 바위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바다를 드나드는 한 늙은 신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프로테우스라 불렀다. 그는 바다처럼 오래되었고, 바다처럼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존재였다.
프로테우스는 포세이돈을 섬기며 깊은 바다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푸른 물결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고, 어느 날은 물살을 헤치며 먼 곳까지 나아갔다. 육지의 왕들이 성벽과 궁전 안에서 백성을 다스린다면, 프로테우스가 맡은 것은 물결 아래에서 살아가는 짐승들이었다. 그는 그 가운데서도 포세이돈에게 속한 물개 떼를 돌보며 하루하루 바다를 오갔다.
그러나 프로테우스가 평범한 목자와 다른 것은 그가 바라보는 것이 눈앞의 바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도 알고 있었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도 꿰뚫어 보았다. 아직 닥치지 않은 운명까지 그의 눈앞에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쉽게 말하지 않았다. 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답을 원한다면 먼저 이 늙은 신을 찾아내야 했다.
파로스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프로테우스
1.2 포세이돈의 물개 떼
해가 높이 오를 무렵 프로테우스의 물개들은 깊은 바다에서 하나둘 파로스의 해안으로 올라왔다. 물에 젖은 몸들이 모래 위와 낮은 바위에 자리를 잡으면 해안은 금세 수많은 물개로 가득 찼다. 프로테우스도 그 뒤를 따라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물개들 사이를 걸으며 자신의 무리가 모두 돌아왔는지 살폈다.
한 마리씩 지나가며 수를 세는 일은 그가 날마다 되풀이하는 일이었다. 먼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나면 프로테우스는 바위 그늘을 찾아 몸을 눕혔다. 한낮의 햇빛이 바다 위에서 희게 부서지고, 물개들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바다의 비밀을 모두 안다는 늙은 예언자도 이때만큼은 눈을 감고 조용히 쉬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바로 이 시간이 가장 중요했다. 넓은 바다에서는 프로테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그가 먼저 사람의 기척을 알아차리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물개들을 세고 난 뒤 잠든 순간에는 손을 뻗어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프로테우스는 몸을 붙잡혔다고 해서 순순히 질문에 대답하는 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그의 가장 놀라운 힘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개 떼의 수를 세는 프로테우스
1.3 붙잡히지 않는 예언자
프로테우스가 미래를 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에게서 예언을 듣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제물을 바치고 간절히 부탁한다고 해서 그가 입을 여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테우스는 자신이 아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고,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아무 말 없이 바다로 돌아가 버리곤 했다. 그의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다면 먼저 달아날 수 없도록 붙잡아야 했다.
그러나 프로테우스를 붙잡는 순간부터 더욱 어려운 일이 시작되었다. 늙고 힘없는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들며, 도저히 같은 존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모습을 바꾸었다. 때로는 손으로 붙들기 힘든 것으로 변해 빠져나가려 하기도 했다. 무엇으로 변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를 붙든 사람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견디며 계속 힘을 주어야 했다.
그 모든 변신에도 끝은 있었다. 붙잡은 사람이 놀라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견디면 프로테우스는 마침내 도망치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처음의 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을 붙잡은 까닭을 물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한번 질문을 받으면 자신이 아는 진실을 그대로 말했다. 프로테우스에게서 예언을 얻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힘뿐 아니라 무엇을 보더라도 손을 놓지 않는 끈기였다.
붙잡힌 채 모습을 바꾸려는 프로테우스
1.4 딸 에이도테아
프로테우스에게는 에이도테아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 역시 바다와 가까운 존재였으며, 아버지가 깊은 물속에서 언제 돌아오고 어느 해안에서 물개들과 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피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프로테우스와 달리 에이도테아는 때때로 파로스의 해안으로 나와 바다와 섬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낯선 배가 들어오거나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머물면 자연스럽게 그 사정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해안을 홀로 거닐며 깊은 근심에 잠긴 한 남자를 발견했다. 오랜 항해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평범한 선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헬레네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던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였다. 그의 배들은 파로스에 머물러 있었고, 아무리 날이 지나도 다시 바다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도테아는 한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오랜 항해에 지친 왕의 얼굴에는 이 섬을 떠날 길을 찾지 못한 근심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이 낯선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했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메넬라오스의 귀향길에 새로운 실마리가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해안에서 메넬라오스를 바라보는 에이도테아
2.1 파로스에 갇힌 함대
트로이가 무너진 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와 함께 스파르타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순탄하지 않았다. 바람과 파도에 밀려 여러 바다를 떠돌던 함대는 이집트까지 내려갔고, 다시 고향을 향하려다가 이집트 앞바다의 파로스 섬에 머물게 되었다. 처음에는 며칠이면 다시 바람이 불 것이라 생각했지만, 돛을 밀어 줄 순풍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스무 날이 흘렀다. 배에 싣고 온 식량은 점점 줄어들었고, 선원들은 해안을 돌아다니며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허기를 달래야 했다. 십 년 동안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견디고 수많은 위험을 헤쳐 온 메넬라오스였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바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신이 자신의 귀향을 가로막고 있는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근심에 잠긴 메넬라오스가 홀로 해안을 거닐던 어느 날, 한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프로테우스의 딸 에이도테아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파로스를 떠나지 못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며 어째서 이곳에 머물고 있느냐고 물었다. 메넬라오스가 신들의 뜻을 알지 못해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하자, 에이도테아는 그 답을 알려 줄 존재가 가까이에 있다고 말했다. 바로 바다의 모든 일을 아는 자신의 아버지 프로테우스였다.
바람 없는 파로스에 묶인 메넬라오스의 함대
2.2 에이도테아의 계책
에이도테아는 메넬라오스에게 아버지를 정면으로 찾아가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프로테우스는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면 곧바로 바닷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한번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오 무렵에는 기회가 있었다. 바다에서 돌아온 프로테우스는 물개들이 해안에 모이면 그 수를 하나씩 세고, 일을 마친 뒤 그들 가운데 누워 잠시 잠이 들곤 했다.
그녀는 메넬라오스에게 가장 믿을 만한 부하 세 사람을 고르게 했다. 그리고 네 사람이 물개들 사이에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물개 가죽 네 장을 준비했다. 문제는 가죽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였다. 가까이 누워 있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에이도테아는 신들의 음식인 향기로운 암브로시아를 네 사람의 코 가까이에 발라 주었다. 그러자 악취를 견디며 움직이지 않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에이도테아는 아버지를 붙잡은 뒤가 가장 중요하다고 거듭 경고했다. 프로테우스는 사나운 짐승으로 변해 위협할 것이고,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물이나 땅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모습을 바꾸기도 할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절대로 손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모든 변신이 끝나고 처음 보았던 늙은 모습으로 돌아올 때까지 붙잡고 있으면, 마침내 프로테우스도 달아나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것이었다.
물개 가죽을 건네는 에이도테아와 메넬라오스
2.3 물개들 사이에 숨다
다음 날 아침 메넬라오스와 세 부하는 에이도테아가 알려 준 곳으로 갔다. 네 사람은 모래 위에 나란히 누운 뒤 물개 가죽을 뒤집어썼다. 파도 소리만 들리는 해안에서 그들은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에서 물개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젖은 몸을 흔들며 해변을 채운 물개들은 그들 곁에도 아무 의심 없이 몸을 눕혔다.
해가 머리 위까지 올라왔을 무렵 바다가 갈라지듯 흔들리더니 프로테우스가 나타났다. 늙은 신은 익숙한 모습으로 물개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한 마리씩 수를 세었고 물개 가죽 아래 숨어 있는 네 사람까지 자신의 무리에 포함해 헤아렸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프로테우스는 마침내 바위 가까이에 몸을 눕혔다. 잠시 뒤 그의 눈이 감기고 해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메넬라오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신호와 함께 네 사람이 벌떡 일어나 프로테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여러 팔이 늙은 신의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놀란 프로테우스가 몸을 비틀었지만 그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늙은 신은 곧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인간들이 자신에게 예언을 얻으려 한다는 것을 깨닫자 그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넬라오스가 기다리던 가장 위험한 순간이 찾아왔다.
물개 가죽을 쓰고 해안에 숨은 메넬라오스 일행
2.4 사자와 뱀과 물과 나무
메넬라오스가 붙잡고 있던 늙은 몸이 갑자기 거대한 사자로 변했다. 갈기가 솟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지만 네 사람은 팔을 풀지 않았다. 사자가 빠져나가지 못하자 이번에는 몸이 길게 늘어나 뱀이 되었고, 이어 표범과 거대한 멧돼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눈앞에서 계속 모습을 바꾸는 신을 붙들고 있는 것은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는 것보다도 기이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프로테우스는 그래도 벗어날 수 없자 전혀 다른 방법을 썼다. 그의 몸이 갑자기 물로 변해 네 사람의 팔 사이로 흘러내렸다. 메넬라오스와 부하들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물줄기까지 놓치지 않으려 몸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 곧 물이 사라진 자리에서 굵은 줄기가 솟아오르더니 가지와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에이도테아의 말을 기억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마침내 프로테우스의 변신이 멈추었다. 나무가 사라지고 처음 보았던 늙은 바다의 신이 다시 네 사람의 팔 안에 나타났다. 그는 더 이상 달아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메넬라오스를 바라보며 어느 신이 자신을 붙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무엇을 알고 싶어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메넬라오스는 자신이 파로스에 갇힌 까닭과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이제 예언자가 대답할 차례였다.
메넬라오스에게 붙잡혀 변신하는 프로테우스
3.1 신들의 노여움을 풀 길
프로테우스는 먼저 메넬라오스가 파로스 섬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을 밝혔다. 메넬라오스는 이집트에서 다시 고향으로 떠나려 할 때 제우스와 여러 신들에게 올려야 할 희생 제사를 충분히 치르지 않았다. 긴 방랑에 지쳐 하루라도 빨리 스파르타로 돌아가려 한 나머지 신들에게 마땅히 바쳐야 할 예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 때문에 신들은 그의 항해를 순조롭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프로테우스는 곧바로 북쪽으로 돛을 올리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먼저 다시 이집트의 나일강으로 돌아가 신들에게 정해진 제물을 바치고 완전한 희생 제사를 올려야 했다. 그들이 만족하고 노여움을 거두어야만 메넬라오스에게 순풍이 허락될 것이었다. 이미 지나온 길을 다시 거슬러 가야 한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메넬라오스에게는 달리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귀향할 길을 알아낸 메넬라오스에게는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다. 트로이를 함께 공격했던 그리스 장수들은 귀환길에 서로 흩어진 뒤 소식이 끊겨 있었다. 누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고 누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의 프로테우스라면 그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늙은 신을 놓아주기 전에 함께 전쟁을 치른 동료들의 운명을 하나씩 물었다.
귀향의 길을 알려 주는 프로테우스와 메넬라오스
3.2 전우들의 운명
프로테우스가 들려준 소식은 대부분 무거운 것이었다. 먼저 소 아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난 뒤 바다에서 재앙을 맞았다. 거센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아 바위에 몸을 의지했지만, 끝내 신의 분노를 피하지 못하고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아가멤논은 그와 달리 오랜 항해 끝에 고향 땅까지 무사히 돌아갔다. 그러나 기다리던 것은 평온한 왕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아직 살아 있으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프로테우스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가 먼 섬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님프 칼립소에게 붙잡혀 있었고, 고향 이타카를 그리워하면서도 바다로 나설 배와 노, 함께 항해할 선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이에서 수많은 위기를 함께 넘겼던 지혜로운 동료가 여전히 바다 너머에 남아 있다는 말에 메넬라오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에는 메넬라오스 자신의 운명도 밝혀졌다. 프로테우스는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아르고스 땅에서 죽음을 맞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헬레네의 남편이며 제우스의 사위인 그는 훗날 세상 끝의 엘리시온으로 옮겨져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될 운명이었다. 질문을 모두 마친 메넬라오스가 마침내 손을 풀자 프로테우스도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늙은 예언자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더니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전우들의 운명을 듣는 메넬라오스
3.3 벌 떼를 잃은 아리스타이오스
또 다른 전승에서는 프로테우스를 찾아온 사람이 메넬라오스만이 아니었다. 목축과 농사, 양봉에 뛰어났던 아리스타이오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재앙이 닥쳤다. 정성껏 돌보던 벌들이 잇달아 죽어 벌통이 텅 비어 버린 것이다. 무엇이 이런 일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슬픔과 답답함을 안고 어머니 키레네를 찾아갔다. 강과 샘의 님프인 키레네는 물속 깊은 곳에서 아들의 하소연을 들었다.
키레네는 벌 떼의 죽음에는 아들이 알지 못하는 까닭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있는 존재로 바다의 늙은 예언자 프로테우스를 알려 주었다. 프로테우스는 이미 지나간 일과 지금 벌어지는 일, 앞으로 닥칠 일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넬라오스에게 그랬듯 스스로 진실을 말해 주는 신은 아니었다. 답을 얻으려면 먼저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힘으로 붙잡아야 했다.
키레네의 가르침을 받은 아리스타이오스는 프로테우스가 쉬는 바닷가의 동굴 가까이에 몸을 숨겼다. 정오가 되어 늙은 신이 돌아와 몸을 눕히자 그는 뛰쳐나가 프로테우스를 단단히 붙잡았다. 프로테우스는 멧돼지와 호랑이, 뱀과 암사자로 모습을 바꾸었고, 불길이 되었다가 흐르는 물처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아리스타이오스는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변신을 멈춘 프로테우스는 다시 늙은 모습으로 돌아와 그가 무엇을 알고 싶어 자신을 찾아왔는지 물었다.
변신하는 프로테우스를 붙잡은 아리스타이오스
3.4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말하다
프로테우스는 아리스타이오스의 벌 떼가 사라진 까닭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아리스타이오스를 피해 달아난 일이 있었다. 다급히 강가의 풀숲을 지나던 그녀는 풀 사이에 숨어 있던 뱀을 미처 보지 못했고, 뱀에게 물려 끝내 목숨을 잃었다.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살아 있는 자가 갈 수 없는 명계까지 내려갔지만, 마지막 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해 에우리디케를 다시 잃고 말았다.
에우리디케와 함께하던 님프들은 그녀의 죽음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아리스타이오스가 비극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여기고 분노했으며, 그 벌로 그가 정성껏 기르던 벌 떼를 죽게 했다. 프로테우스의 말을 들은 아리스타이오스는 그제야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우연한 병이나 불운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감추어져 있던 원인을 모두 밝힌 프로테우스는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그는 늙은 모습 그대로 아리스타이오스를 떠나 다시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아리스타이오스가 어머니 키레네에게 돌아오자 그녀는 님프들의 노여움을 풀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는 가르침에 따라 수소와 암소를 제물로 바치고, 아홉째 날에는 오르페우스를 위한 제사를 올린 뒤 에우리디케에게도 예를 갖추었다. 얼마 뒤 숲에 남겨 둔 희생 짐승의 몸에서 갑자기 수많은 벌이 솟아나 날갯소리로 주위를 가득 채웠다. 벌들은 구름처럼 날아올라 나뭇가지에 큰 무리를 이루었다. 아리스타이오스는 그렇게 잃었던 벌을 되찾았고, 프로테우스가 밝혀 준 진실은 마침내 재앙을 끝낼 길이 되었다.
희생 짐승의 몸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벌 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