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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8.23. 10:34 (2026.08.23. 10:22)

고려의 대몽항쟁과 이승휴의 《제왕운기》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5〉
삼척을 빛낸 역사 인물로 《제왕운기》를 저술한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있다. 이승휴는 몽골과의 전쟁 중 당대 최고 문장가인 최자(崔滋, 1188~1260)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최자는 해동공자로 불린 문헌공 최충(崔沖, 984~1068)의 6대 손으로 시문에 뛰어났다. 최자는 충청안찰사와 전라안찰사를 역임하고 1250년에는 몽골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52년(고종 39) 최자가 과거를 주관해 이승휴가 29세 늦은 나이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고려는 관직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고, 과거에 급제하여도 관직을 받을 수 없어 온갖 청탁과 뇌물이 만연했다. 이승휴는 잠시 시간을 내어 삼척 두타산 구동(천은사 일대)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갔다.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5〉
 
 
삼척을 빛낸 역사 인물로 《제왕운기》를 저술한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있다. 이승휴는 몽골과의 전쟁 중 당대 최고 문장가인 최자(崔滋, 1188~1260)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최자는 해동공자로 불린 문헌공 최충(崔沖, 984~1068)의 6대 손으로 시문에 뛰어났다. 최자는 충청안찰사와 전라안찰사를 역임하고 1250년에는 몽골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52년(고종 39) 최자가 과거를 주관해 이승휴가 29세 늦은 나이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고려는 관직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고, 과거에 급제하여도 관직을 받을 수 없어 온갖 청탁과 뇌물이 만연했다. 이승휴는 잠시 시간을 내어 삼척 두타산 구동(천은사 일대)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갔다.
 
제35회 처인성문화제(사진:용인문화원)
 
승장 김윤후 장군은 1232년 용인 백현원의 승려로 있었다. 고려 정부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자. 몽골제국은 이를 구실로 제2차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제국의 총사령관 살리타이(撒禮塔)가 공격해오자 승장은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란해 부락민들을 지휘하고,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여 몽골군은 패배하여 퇴각했다.
 
고종이 높은 직위를 주자, 김윤후는 사양하고 절로 다시 돌아갔다. 1253년(고종 40), 몽골제국이 야굴의 지휘로 고려를 제5차 침략하여 충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승장 김윤후 장군은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근무했다. 장군은 70여 일간 성을 사수하며 9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해 몽골군은 패배해 철수했다. 고려 무신정권은 충주산성 전투의 공로로 1254년 충주목을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했다.
 
충주시는 2003년 종민동 계명산 초입 마즈막재에 ‘대몽항쟁 전승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의 접근이 어려워 2023년 3월에 조길형 충주시장이 충주 자긍심을 높이고자 충주시청 앞 넓은 광장으로 이전을 검토했으나, 여론 악화로 이전을 취소했다.
 
충주 대몽항쟁 전승기념탑(사진:충주시)
 
몽골 침략은 날이 갈수록 대대적이었고 그 참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이승휴는 몽골과의 전쟁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겨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10년 동안 발이 묶였다. 과거 급제의 영광은 정말 짧았다. 그는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삼척 구동 용계에 띠집을 짓고, 직접 밭에 물을 주며 농사를 지었다. 용안당을 짓고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왕전(王倎)은 전란기인 1235년 강화도에서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1259년 몽골에 입조하여 남송 정벌전에 참전했던 뭉케 칸을 만나러 갔지만, 중간에 뭉케 칸이 사망해 제위에 오르지 않은 다행스럽게 쿠빌라이를 만났다. 태자 왕전(王倎)은 부왕 고종이 사망하자, 귀국해 1260년 3월 강안전(康安殿)에서 고려 제24대 왕 원종(元宗, 1219~1274)으로 즉위하였다.
 
《동안거사집》 권1, 행록, 〈병과시〉에 의하면 1260년(원종 원년)에 이승휴의 좌주였던 최자와 종조모 원씨가 세상을 떠났다. 1263년(원종 4)에 전염병이 심하게 창궐해 “집안에 종들 중 간혹 죽는 자도 있었고, 죽지 않은 이들도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여 심부름꾼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위독해 홀로 어머니를 정성껏 돌보았다.”라고 적었다.
 
이승휴는 시를 지으며 마음을 달랬다. 연이은 불행을 거치면서 세상을 비관하며 염세적인 태도로 지내기보다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애썼다.
 
그는 “봉황은 덕이 비록 쇠미해져도 참새와 같이하지 않으며, 기린은 비록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 속의 원숭이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을 요순시대로 만들 것이고, 임금을 요순에 이르게 할 것이다.”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전염병이 잦아든 겨울, 고려 조정은 병부시랑(정4품 관직) 이심(李深)을 관동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행정을 살피는 안집사(安集使)로 임명했다. 안집사는 관동에 와서 능력이 출중한 이승휴를 만나 국가를 위해 일할 것을 강하게 권유했다. 이승휴는 격려에 고무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고 각오를 다지고 나이 40세에 상경했다.
 
이듬해인 1264년(원종 5) 1월, 이승휴는 최자와 함께 동지공거로서 그를 선발한 황보기(皇甫琦)의 추천으로 동문원 수제가 되었다. 그는 황보기의 권유를 받아 당대 실권자인 이장용(李藏用)과 유경(柳璥)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에게 관직을 부탁하는 ‘구관시’를 지어 보냈다. 7월에 시를 통해 천재성을 알아본 이장용, 유경 등의 천거와 유천우(兪千遇)의 주선에 힘입어 1264년 경흥부(강원도 江陵) 서기에 임용되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에 의하면 그는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1268년(원종 9년), 몽골은 고려 무신정권에 개경 환도를 요청했다. 원종은 개성으로의 환도 정책을 두고 무신 김준(金俊, ?~ 1268)과 갈등이 깊었다. 김준은 천한 노비 신분에서 자기 실력으로 최고 권력에 오른 인물이다. 김준은 1258년 무오정변을 일으켜 최씨 정권 4대 집권자인 최의(崔竩, ?~1258)를 무너뜨리고 실권을 장악했다. 60여 년의 막부 정치가 무너졌다. 김준은 10년간 실권을 잡았으나 심복인 임연(林衍, 1215~1270)이 배신하여 김경(金鏡), 최은(崔) 등과 함께 합세해 1268년 12월 무진정변에 살해당했다.
 
고려 무인 정권은 몽골제국과 끝까지 항전을 불사하여 진도나 제주도로 옮겨가려고 하였다. 반면에 원종은 친화적인 정책으로 원나라와 화해를 생각했다.
 
1269년 원종은 태자 왕심을 몽골로 보내 친몽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임연이 원종을 몰아내고 동생인 안경공 왕자를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몽골의 간섭으로 4개월 만에 원종이 다시 왕으로 복귀했다.
 
진도 용장성(사적 127호)(사진;진도군)
 
1270년(원종 11) 임연이 등창이 나서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교정별감에 올라 실권을 행사하였다. 이때 원종은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다. 1270년 삼별초가 봉기하자, 이승휴는 강화도를 탈출하여 원종에게 난을 진압할 방안을 제안했다. 임유무는 제 손으로 목을 찔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를 본 몽골 사신이 목을 눌러서 죽였다. 임연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몽골로 압송되었다. 마지막 집정자 임유무가 죽어 100년 동안 유지되었던 무인 정권은 마침내 사라지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대몽항쟁을 이끈 삼별초 지휘관 배중손과 김통정은 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강화도 구포를 떠나 삼별초 본영을 진도 용장성으로 옮기고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며 끝까지 용장성에서 항전했다. 1271년 5월 진도 용장성 공격 때 원나라 아해(阿海) 원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추(史樞)가 진도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통정은 진도가 함락할 때 남은 병력을 이끌고 탐라도로 건너가 항전을 준비했다.
 
1272년(원종 13)에는 조정의 관직 임명 방식을 둘러싸고 하급 관료 사이에 불만이 퍼져 항의 상소를 올려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승휴는 이 상소에 반대하였지만,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원종은 여러 문서를 대조하라고 지시하여 이승휴의 억울한 누명을 밝혀주었다. 이후 이승휴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 싸웠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는 외세 몽골과 결탁한 새로운 권력층이 형성되어 불법과 비리가 자행되고 관리 인사는 청탁으로 얼룩지고, 권세가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거대한 농장을 만드는 일이 성행했다.
 
1273년(원종 14년), 고려군 총사령관 김방경(金方慶)과 원나라 흔도(忻都) 원수, 홍다구(洪茶丘) 부원수가 참전했다. 당시 여몽연합군은 병선 160여 척과 1만 명이 넘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삼별초의 마지막 거점인 제주의 항파두리성을 함락하고 삼별초를 진압했다.
 
2019년 7월, 제10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가 제주대학교에서 개최되어 참가자들은 셋째 날 제주도 항파두리 토성 유적지를 방문했다, 이날 항파두리 토성 유적지를 돌아보고, 전시관에서 공주대 윤용혁 명예교수의 해설을 들었다.
 
항파두리 토성 유적지, 윤용혁 교수 해설(사진:궁인창)
 
고려 원종은 원나라에 보낼 사신단을 정할 때 “다만 재주로 사신단에 추천하면 되지, 관직이 있고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라고 하며 관직이 없는 이승휴를 서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승휴가 이제 50세가 되어 늙었다고 사양하자 “경오년(1270)에 그대의 이름을 적었던 벼룻집이 아직도 내 책상 위에 있으니, 그대는 힘써 거행하라.”라고 말하며 임명을 강행하였다.
 
이승휴가 긴 사행 끝에 원나라의 대도(大都, 베이징)에 도착해 장조전(長朝殿)과 대호천사(大昊天寺) 등을 방문하였다. 당시 장조전은 폭 200척, 너비 120척, 높이 120척의 건물로 1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황제의 즉위, 원단,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를 거행하던 곳이었다. 이승휴가 대호천사(大昊天寺)의 9층 목탑에서 내려 본 대도의 풍경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광경이었다.
 
요나라 불궁사 석가탑(사진:나무위키)
 
대호천사는 1059년(요나라 淸宁 5년) 요 성종의 차녀인 진월대장공주(秦越大長公主)가 자신의 저택을 기부하면서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 공주는 요나라 제8대 황제인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062년에 완공했다.
 
웅장한 대웅전 뒤편으로 높이 200척에 달하는 화려한 9층 불탑 목탑이 세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북송의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钦宗) 부자가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끌려와 이 사찰에 감금되어 서로 상봉했다는 기록이 전해 내려온다.
 
이승휴는 귀국하여 대도의 여러 명소를 방문해 보고 들은 것을 《빈왕록(賓王錄)》에 남겼다.
 
고려 원종은 고려의 안위를 위해 세조 쿠빌라이에게 대도에 머무는 세자(충렬왕, 39세)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1274년(원종 15) 5월에 세자는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16세 제국대장공주(홀도로게리미실, 1259~1297)와 혼인하였다.
 
충렬왕은 1260년 음력 11월 28일 정신부주 왕씨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제국대장공주를 제1 왕비로 모셔 먼저 혼인해 17년간 태자비를 지낸 부인을 제2 비로 낮추고, 정화궁주(貞和宮主)에 봉해 약 40년간 별궁에 머물게 했다. 1297년(충렬왕 23) 제국대장공주가 죽고, 이듬해인 1298년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선위한 후에 겨우 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작호도 정신부주(貞信府主)로 고쳐지고, 충렬왕과 정화궁주는 거처를 상수궁으로 옮겨 함께 지냈다. 충선왕은 충렬왕과 정화궁주를 봉영(奉迎)하는 의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초상화(사진:경기도박물관)
 
1274년 고려 원종이 승하하자, 이승휴는 서장관으로 원에 가서 충실하게 사대의 예를 갖추며 외교 활동을 하는 한편, 후계자인 충렬왕을 통하여 고려의 의관(衣冠)과 전례(典禮)를 황제에게 고하며 그 존속을 보장받는 데 일조하였다. 이승휴는 고려에 귀국하여 대관인 감찰어사와 간관인 우정언에 임명되면서 오랫동안 간직해온 생각을 실현해볼 수 있게 되었다.
 
충렬왕이 이승휴에게 시정의 득실을 묻자 15가지 현실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이후 양광도(경기도)와 충청도를 관할하는 지방관이 되어서 탐관오리 7명의 죄를 따져 물었다. 이 일로 원성이 높아져 동주(강원도 鐵原)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비행하는 신료를 감찰하고 군주의 수신을 촉구하는 정치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1280년(충렬왕 6)에 이승휴는 왕에게 사냥과 유흥을 멈추고, 백성을 돌보며, 부패하고 패악을 저지르는 측근을 내치라는 상소에 이름을 올렸다. 충렬왕은 국왕의 뜻을 거역하였다 노해 파직되었다. 이승휴는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은 지 16년 만에 관료 생활을 마쳤다. 이후 그는 20년간 삼척에 은거하여 불경을 보고, 시를 지으며 문인 및 승려와 교유했다.
 
전등사(傳燈寺)(사진:궁인창)
 
1282년(충렬왕 8) 정화궁주는 강화군 길상면 삼랑성 내에 있는 사찰 진종사(眞宗寺)에 대장경과 옥등(玉燈)을 불전에 올렸다. 사찰에서는 이를 계기 삼아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널리 전한다.’라는 뜻으로 사찰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원나라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주자학을 보급한 대문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1390년경에 강화도 일대를 여행하고 삼랑성 전등사 대조루를 방문해 바다를 내다보며 〈대조루에 올라서서(登對潮樓〉 시를 지었다. 그는 6000여 수의 시와 200편의 산문을 남겼다.
 
蠟屐游山興自淸(납극유산흥자청)
傳燈老釋道吾行(전등노석도오행)
窓間遠岫際天列(창간원수제천열)
樓下長風吹浪生(누하장풍취랑생)
 
나막신 고쳐 신고 산에 오르니 맑은 흥취 절로 일고
전등사 노승이 나의 길을 인도하네
창가의 바라보이는 먼 봉우리는 하늘가에 늘어서 있고
누각 아래 거센 바람은 바다의 물결을 치고 일어나네
 
星歷蒼茫伍太史(성력창망오태사)
雲煙慘淡三郞城(운연참담삼랑성)
貞和願幢誰更植(정화원당수경식)
壁記塵昏傷客情(벽기진혼상객정)
 
천문 역법 살피던 오태사(伍允孚)의 발자취는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가 삼랑성에 아스라하게 감도네
정화궁주가 서원하며 세운 당간(幢竿)은 뉘라 다시 세울꼬
벽에 쌓인 먼지와 기록들을 바라보니 마음만 서글퍼라
 
 
천문학자 오윤부(伍允孚)(사진:궁인창, AI이미지 생성)
 
천문학자 오윤부(伍允孚, ?~ 1304)는 1275년(충렬왕 원년) 5월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 오윤부가 고려의 사일(社日)을 바꿨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사일이란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란 뜻으로 고려는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의 마지막 무일(戊日)을 사일로 삼았으나, 송과 원나라의 역서(曆書)를 보면 모두 첫 무일을 사일로 하고 있으니, 고려도 이를 따라 고치자고 건의하여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오윤부 열전〉에 의하면, 그는 고려 충렬왕 때 활약한 전설적인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日官)로 집안 대대로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던 태사국(太史局)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성실한 관측을 통해 고려 천문학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매일 밤 한잠도 자지 않고 별자리를 살폈으며, 심한 추위나 더위 속에서도 몸이 아프지 않으면 하룻밤도 관측을 쉬지 않았다.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天文圖)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는 성품이 매우 정직하였고, 매번 재이(災異)가 있을 때마다 아주 간절하고 지극하게 말했다. 시정(時政)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즉시 들어가 간언하였으며, 왕이 들어주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간쟁(諫諍)을 하여 왕이 꼭 들어주게끔 만들어 왕은 그를 꺼렸다. 항상 봉은사(奉恩寺)에서 곡삭(告朔)을 할 때면 한편으로는 절하고, 한편으로는 울면서 말하기를 “태조(太祖)시여, 태조시여! 임금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잘못되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설움에 복받쳐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다. 그의 정성스러움과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그의 용모는 추하였으며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았다.
 
제국대장(齊國大長) 공주가 일찍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그와 같은 사람을 자주 불러 보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오윤부는 나에게는 최호(崔浩) 같은 사람이니, 용모가 비록 추하더라도 버릴 수는 없소이다.”라고 말해 공주가 자못 태도를 고쳐 그를 예의로써 대우하였다. 그의 예언이 적중하며 명성이 높아지자, 원나라 세조도 그를 불러 물어보았다. 오윤부는 관직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한 뒤에 죽었다.
 
삼랑성 전등사 대조루에 걸린 이색의 시 〈登對潮樓〉를 보며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필자는 《고려사》 〈오윤부 열전〉을 읽고 당시 정세를 파악하고 강화도 전등사에 천문기구가 있게 된 연유와 충신 오윤부(伍允孚)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
 
두타산(사진:나무위키)
 
1298년, 고려 제26대 충선왕(1275~1325)은 나이가 많은 이승휴에게 관직으로 돌아오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간곡한 왕명을 거절할 수 없어 75세에 아들 이임종과 함께 조정에 나아갔다, 왕은 이승휴를 사림시독·좌간의대부(詞林侍讀·左諫議大夫)로 삼은 뒤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으로 충원하였다. 반년 동안 충선왕을 보좌하며 조정에서 헌신한 이승휴는 고령으로 인하여 퇴임을 요청해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은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선왕이 ‘조비 무고사건’으로 즉위 7개월만인 1298년 8월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가고, 충렬왕이 다시 왕의 자리로 복위하였다. 이승휴는 강원도 두타산으로 돌아와 머물다 2년 뒤인 1300년(충렬왕 26)에 7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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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