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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6〉
고려왕조 제26대 국왕 충선왕 왕장(王璋, 1275~1325)은 관례를 치른 15세부터 51세로 죽을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계속 원나라 대도에 머물며 고려의 자주성을 찾고자 무척이나 고심했다. 1307년 원나라는 황제 직할령인 심양에 통치자로 충선왕을 심왕(瀋王)에 책봉했다, 1308년 부친 충렬왕이 서거하자, 고려 국왕에 복위하여 각종 개혁정치를 시행하고, 두 달 만에 다시 대도로 건너갔다.
충선왕이 고려에 머문 기간은 총 2년 남짓으로 주로 교지를 통해 통치했다. 국정을 운영할 때 일명 전지(傳旨) 정치를 행한 것이다. 충선왕은 1313년 개경 팔관회에서 뛰어난 문장 실력을 선보인 26세의 청년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을 발탁해 대도로 데려간다. 이듬해인 1314년에는 사재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이제현이 원나라의 젊은 학자들과 마음껏 널리 교유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 할 수 있게 하였다.
익재 이제현 초상화(사진:우리역사넷)
1320년 12월에 원나라 황제 영종(英宗, 게겐 칸, 1302~1323)이 즉위하여 재상 바이주(拜住)를 중용하고 유교적 한화(漢化)정책을 기반한 개혁정치를 펼쳤다. 이 시기 환관들의 무고를 받아 정쟁에 휘말린 충선왕(46歲)은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티베트)에 다녀오라고 권유을 받게 된다. 충선왕은 신하들과 함께 살사결로 떠난다. 살사결은 라싸 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시가체(Shigatse) 지역에 위치한 샤카 사원(萨迦寺)을 가리킨다. 이 권유는 사실상의 유배 조치였다. 대도를 떠날 때 많은 수행 인원이 함께 출발하였으나, 힘든 노정에 재상 최성지 등 여러 신하가 중간에 탈락하고 직보문각 박원각(朴元恪), 전대호군 잠원지 등 18명의 신하가 끝까지 동행했다. 샤카 사원(萨迦寺)은 1073년에 건립된 티베트 샤카파의 본산으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다.
시가체(Shigatse) 샤카 사원(萨迦寺)(사진;티벳여행사)
원나라 제5대 황제 쿠빌라이 카안의 외손자인 충선왕은 티베트 샤카 사원(萨迦寺)에서 3년 2개월간 참선하고 불경을 공부했다. 이 기간 고려의 충숙왕과 고려의 신료들은 원나라 조정에상왕의 석방을 거듭 청원했다. 당시 샤카 사원의 주지는 남송의 제7대 황제였던 공제(恭帝, 趙顯, 1271~1323)였다. 조현은 도종 황제의 여섯번 째 아들로 황제가 승하하자, 승상 가사도(賈似道)의 추대로 세 살 때 황제로 즉위했다. 1275년 가사도가 이끄는 13만 대군이 원나라 군대에 패해 항복했다.
1279년 3월 19일, 남송의 정승 루슈푸(陸秀夫)는 8세 황제 조병(趙昺)과 함께 애산(崖山)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로 인해 남송 왕조가 완전히 멸망했다.
>>+ 남송 제7대 황제 공제(恭帝)(사진:위키백과)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카안은 처음에는 어린 남송 황제를 후하게 대우하여 영국공(瀛國公)에 봉하고, 몽골 왕족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원나라 조정은 영국공(瀛國公)을 大都에서 上都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우사장(乌斯藏)과 감주(甘州, 一说 谦州) 등지로 가서 머물게 했다. 1288년 10월, 원 조정은 조서를 보내 영국공을 토번(티베트) 샤카 사원(萨迦寺)으로 보내 범서와 티베트 문자를 익히게 했다. 그는 그곳에서 스스로 불교에 귀의하여 법명 초에키 린첸(却季仁钦)를 받았다. 티베트인들은 그를 만자라존(合尊法宝)이라고 존칭했다. 티베트 승려가 된 영국공은 산스크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하고, 문헌을 교정하며 일에 매진하여 학문적 깊이가 높아져 대가람의 주지가 되었다. 1323년에 그는 〈재영국공사(在瀛國公事)〉라는 시를 지었다.
【원문】
寄語林和靖 (기어임화정) 梅開幾度花 (매개기도화) 黃金臺上客 (황금대상객) 無復得還家 (무부득환가)
【번역】
임화정에게 말을 전하노니, 그곳의 매화는 몇 번이나 피었는가. 황금대 위의 나그네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
〈재영국공사(在瀛國公事)〉(사진:궁인창, AI생성이미지)
이 시를 읽은 원 조정의 관리들과 그를 오랜 기간 감시해 온 첩자들은 시의 내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며 그의 태도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제(영국공)가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남송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원나라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품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특히 이 시가 한족인 남인들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며 황제에게 “영국공이 읊조린 시구는 남인(옛 南宋 百姓)들의 마음을 대변해 원나라 정치를 비판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황제는 깊은 고민끝에 1323년 4월 ,하서(河西:今甘肃河西走廊张掖)에서 자결하라고 명했다. 이 명령으로 토번 샤카사원(萨迦寺) 주지(瀛國公)는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元英宗至治三年(1323年)四月,赐瀛国公赵㬎死于河西。」
필자가 고승이 남긴 원문 시를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며 시의 내용을 파악하며 시에 나오는 임화정(林和靖)을 조사했다. 시인 임화정은 북송시대의 유명한 임포(林逋, 967~1028)로 자는 군복(君復)이며 매처학자(梅妻鶴子)였다. 그는 젊은 시절 강회(江淮) 지역을 유람한 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말년에는 남송의 수도인 임안(臨安, 항저우)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숨어 살며 매화를 사랑해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자식처럼 삼았다. 그는 “내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가정생활이나 지위, 명성, 부를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오직 푸른 산과 맑은 물만이 내 영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룰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은일 시인 임포(林逋, 967~1028)(사진:바이두백과)
‘황금대(黃金臺)’는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昭王)이 훌륭한 인재를 모시기 위해 황금을 쌓아 두고 극진히 대접했던 자리이다. 이 시에서는 ‘조정의 높은 벼슬자리’나 ‘부귀영화와 명예를 좇는 세속의 삶’을 비유하는 시어로 쓰였다. ‘객(客)’은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세속의 명리를 좇아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라,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인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속세를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임화정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며 담담하게 순수한 시를 적었지만, 그러나 속세에서 살며 안목이 어두운 사람들이 시(詩)의 본래 뜻을 왜곡해 황제에게 참소하는 빌미로 삼았다.
북송의 은거 시인 임포(林逋, 967~1028)가 남긴 시 중에는 〈산원소매(山園小梅)〉가 유명하다. 당시 송나라 진종(眞宗)은 임포의 높은 명성을 전해 듣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며, 지방 관리들에게 그의 안부를 각별히 잘 살피게 했다. 훗날 소식(蘇軾, 1037~1101)은 임포의 고결한 인품과 예술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시는 당나라의 시인 동야(東野, 孟郊, 751~814)와 같아서 추함을 말하지 않고, 그의 글씨는 유공권(柳公權, 778~865)와 같아서 군더더기 살집이 없이 굳세다.”라고 극찬했다.
서예가 柳公權(사진:바이두백과)
북송 시인 임포(林逋)는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인종(仁宗, 1010~1063) 천성(天聖) 6년(1028년)에 6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고고하게 살다가 세상을 등진 그에게 화정선생(和靖先生, 조화롭고 고요한 스승)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모아 《임화정시집(林和靖詩集)》을 엮었으며, 남송의 유명한 학자 상세창(桑世昌, 1135~1210)은 《임포전(林逋傳)》을 저술했다. 명말청초의 문인 장대(張岱)는 《서호몽심(西湖夢尋)》에서 임포의 청빈함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남송 멸망 후 도굴꾼들이 임포의 무덤을 몰래 파헤쳤으나, 무덤에서 단주에서 나는 벼루 단연(端硯)과 옥비녀 하나만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시인 임포(林逋)의 묘(사진:바이두백과)
그의 묘는 중국 항저우 서호 섬(孤山島)에 자리하고 있다. 원대에 세워진 방학정(放鶴亭)이 있는데, 이 장소는 매림귀학(梅林歸鶴)으로 불리며 청나라 때는 ‘서호 18경’ 중에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고 큰 사랑을 받았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묘소가 훼손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후 완전히 복원되었다. 오늘날 그의 묘소는 서호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이 반드시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서호의 풍경이 좋아 호수 주변 길을 걷는 방문객이 무척 많다.
몽골제국 영종 황제가 상도에서 대도로 이동하다 남파점에서 머물렀을 때, 황제의 반대파 세력의 기습을 받아 황제와 승상 바이주를 살해했다. 이른바 ‘남파(南坡)의 변’으로 인해 1323년 10월 28일 원나라의 제6대 황제로 태정제 에순테무르(1276~1328)가 즉위했다. 새로 등극한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대사면령을 선포해, 이 덕분에 충선왕은 5년 만에 1324년 원나라 수도인 대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익재 이제현이 유배지까지 찾아와 충선왕을 곁에서 지극히 배행하였다. 척박하고 추운 곳에서 오래 머물러 몸이 예전보다 더 쇄약해진 충선왕은 1325년 음력 5월 13일(양 7.1) 대도 사저에서 승하하여, 그의 재궁(梓宮: 왕의 관)이 고려에 환국하였다.
《서정록을 찾아서》 지영재 지음(사진;궁인창)
글을 쓰던 중, 고려의 문신 이제현을 연구한 지영재(1936~ ) 전 단국대 중문학과 교수가 2003년 출판사 ‘푸른역사’에서 출간한 《서정록을 찾아서》 책이 생각나 서가에서 책을 찾아내어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문신 이제현은 개성과 대도를 여덟 번 왕복하고, 중국의 아미산, 보타산, 도스마를 오가 지금 거리로 환산하여 무려 4만 350km를 걸어 다녔다, 그는 여행 중에 많은 시를 남겼는대, 그의 첫 번째 시집이 바로 《서정록(西征錄)》이다.
도서출판 푸른역사(대표 박혜숙)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500여 권의 주옥같은 책들은 펴냈다. 책들은 편집이 정말 꼼꼼하고 완성도가 높아 필자는 정성이 듬뿍 담긴 명저(名著)들을 한 권씩 모아 서가에 잘 간직해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 읽으며 독서의 참맛을 느끼곤 한다.
티베트 샤카(Sa skya) 사원에는 고려 왕의 모습이 그려진 불화가 남아 있다. 지영재 교수가 티베트 현지 사원을 방문했을 때, 사원의 주지가 안내하여 설명을 듣고 탱화를 확인했다.
티베트 샤카 사원 탱화 속 충선왕(사진;나무위키)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HK 연수교수 최소영은 2026년 《동방학》 54권에 〈원대 유형(流刑)과 고려 충선왕의 티베트 유배〉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 논문을 통해 토번 유배의 구체적인 실상과 이동 경로, 그리고 현지 생활 조건을 더욱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계미향 저 《고려 충선왕의 생애와 불교》(사진;불교신문)
30년 넘게 고려사를 전공한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박종기 명예교수는 필자에게 당시 역사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려왕조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나라로 우리나라 문화재의 약 70%가 고려왕조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