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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손 – 아르고호의 영웅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은 숙부 펠리아스에게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한쪽 신발의 사내를 두려워한 펠리아스는 그에게 콜키스의 황금 양털을 가져오라고 명한다. 이아손은 아르고호에 그리스의 영웅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며, 메데이아의 사랑과 마법으로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나 메데이아와의 맹세를 저버리고 새로운 왕가와의 혼인을 택하면서 가족과 명예를 모두 잃고, 한때 영광을 안겨 준 아르고호 곁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1.1 아이손의 아들
테살리아의 이올코스를 세운 크레테우스에게는 아이손과 페레스, 아미타온이라는 아들들이 있었다. 그러나 크레테우스가 죽자 왕권을 차지한 사람은 왕비 티로가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낳은 펠리아스였다. 그는 자신의 쌍둥이 형제 넬레우스를 몰아내고, 크레테우스의 맏아들 아이손마저 왕좌에서 밀어냈다. 아이손은 목숨은 건졌지만 펠리아스의 감시 아래 살아야 했다.
아이손은 알키메데와 혼인하여 아들을 얻었다. 아이가 자라면 빼앗긴 왕위를 요구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부부는 펠리아스가 출생을 알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나자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집 안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처럼 곡성을 울렸다. 사람들의 눈을 속인 뒤 아이손은 갓난아들을 믿을 만한 이들에게 맡겨 펠리온산으로 몰래 보냈다.
산속에는 현명한 켄타우로스 케이론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받아 자신의 동굴에서 기르며 이아손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펠리아스는 아이손의 아들이 죽었다고 믿고 왕좌를 지켰지만, 왕가의 후계자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남았다. 이아손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왕국을 돌려받아야 하는지 모른 채 펠리온산의 숲과 골짜기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펠리온산에서 케이론에게 아기 이아손을 맡기는 아이손
1.2 케이론에게 맡겨진 왕자
케이론은 수많은 영웅을 길러 낸 스승이었다. 그는 이아손에게 활과 창을 다루는 법뿐 아니라 산길을 읽고 상처를 치료하는 법,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약한 사람을 대하는 법도 가르쳤다. 이아손은 새벽이면 숲을 달리고 낮에는 사냥과 씨름을 익혔으며, 밤이면 불가에 앉아 옛 영웅과 왕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친 산에서 자랐지만 그의 행동에는 왕가의 품위가 배어들었다.
세월이 흐르자 케이론은 이아손에게 그의 아버지가 이올코스의 정당한 왕 아이손이며, 펠리아스가 왕위를 차지한 뒤 가족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아손은 자신이 버림받은 아이가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숨겨진 왕자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당장 군사를 모아 싸우기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 펠리아스 앞에서 자신의 이름과 권리를 밝히기로 했다.
장성한 이아손은 케이론과 작별하고 펠리온산을 내려왔다. 스승은 앞날에 바다와 수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붙잡지 않았다. 이아손은 창 두 자루를 들고 어깨에 짐승 가죽을 두른 채 이올코스를 향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숨겨 주었던 산을 벗어나는 순간, 왕위를 되찾으려는 그의 여정도 시작되었다.
펠리온산에서 창술을 익히는 청년 이아손과 케이론
1.3 한쪽 신발을 신고 돌아오다
이아손이 고향으로 향하던 날, 비로 불어난 아나우로스강이 길을 가로막았다. 강가에는 혼자 건너지 못해 머뭇거리는 늙은 여인이 서 있었다. 이아손은 자신의 길도 위태로웠지만 여인을 등에 업고 거센 물살 속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펠리아스에게 원한을 품은 헤라가 모습을 바꾼 존재였다. 여신은 자신을 도운 젊은이를 눈여겨보고 앞으로 닥칠 모험에서 힘이 되어 주기로 했다.
강 한가운데서 이아손의 신발 한 짝이 진흙에 빠져 떠내려갔다. 그는 그것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신발 한 짝만 신은 채 이올코스에 도착했다. 마침 펠리아스는 바닷가에서 포세이돈에게 큰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낯선 젊은이가 창을 들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의 당당한 모습과 한쪽뿐인 신발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펠리아스는 젊은이를 보는 순간 오래전 들은 신탁을 떠올렸다. 신탁은 아이올로스의 후손 가운데 한쪽 신발만 신고 오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는 두려움을 감추고 이아손의 이름과 고향을 물었다. 이아손은 자신이 아이손의 아들이며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러 왔다고 거리낌 없이 밝혔다. 펠리아스는 예언 속의 사내가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음을 알았다.
거센 강물에서 노파를 등에 업은 이아손
1.4 황금 양털을 가져오라는 명령
이아손은 친족들을 찾아가 자신이 살아 돌아왔음을 알렸다. 아이손의 형제와 그 자손들이 모여 그를 맞았고, 이아손은 닷새 동안 잔치를 베푼 뒤 펠리아스에게 왕좌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가축과 재산은 펠리아스가 가져도 좋지만, 제우스가 아이올로스의 후손에게 내리고 아버지가 이어받았던 왕권만은 자신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펠리아스는 두려움을 감춘 채 그의 요구를 들었다.
펠리아스는 곧바로 왕좌를 내놓는 대신 자신이 받은 신탁과 꿈을 이야기했다. 죽은 프릭소스가 꿈에 나타나 콜키스에 머무는 자신의 혼을 고향으로 모셔 오고, 그곳에 남겨진 황금 양털도 되찾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황금 양털은 프릭소스를 태우고 바다를 건넌 신성한 숫양의 가죽으로,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가 아레스의 숲에 걸어 두고 잠들지 않는 거대한 용에게 지키게 한 보물이었다.
펠리아스는 자신은 이미 늙어 먼 원정을 떠날 수 없으니 젊고 용감한 이아손이 그 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황금 양털을 가져오면 왕위를 돌려주겠다고 신들 앞에서 약속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아손이 콜키스에서 죽기를 바랐다. 이아손은 위험한 계략임을 알아차리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고 왕좌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받아들였다. 이제 그에게는 먼 바다를 건널 배와 함께 싸울 영웅들이 필요했다.
이올코스 왕좌에서 황금 양털 원정을 명하는 펠리아스
2.1 그리스의 영웅들을 모으다
이아손은 뛰어난 조선공 아르고스에게 먼 바다를 건널 큰 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테나는 배의 건조를 도왔고,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의 신성한 참나무 조각을 가져와 뱃머리에 넣어 주었다. 그 나무는 위험이 다가오면 사람의 목소리로 경고할 수 있었다. 오십 명의 영웅이 노를 저을 수 있는 배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건조자의 이름을 따서 아르고호라 불렀다.
황금 양털 원정 소식이 퍼지자 그리스 각지에서 이름난 영웅들이 모여들었다. 헤라클레스와 오르페우스,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펠레우스와 텔라몬, 멜레아그로스, 칼라이스와 제테스가 이올코스로 찾아왔다. 예언자 이드몬과 뛰어난 키잡이 티피스도 배에 올랐다. 이들은 아르고호를 탄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아르고나우타이라 불리게 되었다.
영웅들은 가장 강한 헤라클레스를 지휘자로 세우려 했지만, 헤라클레스는 원정을 시작한 이아손이 모두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아손은 중책을 받아들이고 파가사이의 바닷가에서 아폴론에게 제사를 올렸다. 희생 제물의 불꽃이 밝게 타오르자 영웅들은 노를 잡고 한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는 가운데 아르고호는 이올코스의 해안을 떠났다.
완성된 아르고호 앞에 모인 이아손과 그리스 영웅들
2.2 렘노스의 여왕 휩시퓔레
아르고호가 처음 오래 머문 곳은 렘노스섬이었다. 그곳의 여인들은 아프로디테를 제대로 섬기지 않은 벌을 받아 남편들에게 버림받았고, 분노 끝에 섬의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 왕녀 휩시퓔레만은 아버지 토아스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궤짝에 태워 바다로 피신시켰다. 남자 없이 살아가던 여인들은 낯선 배가 다가오자 갑옷을 입고 해안으로 몰려나왔다.
처음에는 전투가 벌어질 듯했지만, 렘노스 여인들은 의논 끝에 아르고나우타이를 섬 안으로 맞아들였다. 이아손은 여왕이 된 휩시퓔레의 궁전에 머물렀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다른 영웅들도 섬의 여인들과 어울리며 출항을 잊어 갔다. 편안한 날들이 계속되자 일부는 황금 양털을 포기하고 이곳에 정착하자는 생각까지 품었다.
배에 남아 있던 헤라클레스는 동료들이 원정의 목적을 잊었다고 꾸짖었다. 정신을 차린 이아손은 다시 출항하기로 하고 휩시퓔레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 장성한 뒤 자신의 부모가 있는 이올코스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하지 못했다. 휩시퓔레는 멀어지는 아르고호를 바라보았고, 이아손은 사랑과 안식을 뒤에 남긴 채 다시 동쪽 바다로 나아갔다.
렘노스 궁전에서 작별을 나누는 휩시퓔레와 이아손
2.3 퀴지코스를 죽이고 헤라클레스를 잃다
아르고나우타이는 프로폰티스의 돌리오네스 땅에 닿아 젊은 왕 퀴지코스의 환대를 받았다. 이아손과 일부 영웅들이 산에 올라 항로를 살피는 사이, 여섯 팔을 가진 거인들이 바위로 항구를 막으려 했다. 배를 지키던 헤라클레스와 동료들은 활과 창으로 거인들을 쓰러뜨렸다. 퀴지코스는 떠나는 영웅들에게 식량을 내주었고, 양쪽은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러나 밤에 거센 역풍이 불어 아르고호를 같은 해안으로 되돌려 놓았다. 어둠 속에서 돌리오네스인들은 돌아온 배를 해적선으로 오해했고, 아르고나우타이도 자신들을 공격하는 이들이 어제의 친구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격렬한 싸움 끝에 이아손은 창으로 퀴지코스를 쓰러뜨렸다. 날이 밝은 뒤에야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왕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다시 길을 떠난 배가 미시아에 닿았을 때에는 헤라클레스의 시종 휠라스가 샘의 님프들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헤라클레스와 폴리페모스는 숲을 헤매며 그를 찾았지만, 출항 신호를 듣지 못했다. 바람을 얻은 아르고호는 두 사람을 남겨 둔 채 해안을 떠났다. 이아손은 가장 강한 동료를 버렸다는 비난에 괴로워했으나,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가 헤라클레스에게는 다른 운명이 정해졌다고 알리자 항해를 계속했다.
새벽빛 속 쓰러진 퀴지코스를 알아본 이아손
2.4 충돌하는 바위를 넘다
베브리케스인의 나라에서는 왕 아미코스가 낯선 이들에게 권투 시합을 강요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왕 앞에 폴리데우케스가 나서 치열한 싸움 끝에 그를 쓰러뜨렸다. 이어 아르고나우타이는 트라키아에서 눈먼 예언자 피네우스를 만났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지나치게 밝혔다는 벌로 음식에 달려드는 하르퓌이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칼라이스와 제테스가 날아올라 괴물들을 멀리 쫓아냈다.
구원받은 피네우스는 이아손에게 콜키스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가장 큰 난관은 배가 지나갈 때마다 서로 부딪치는 두 바위 심플레가데스였다. 그는 먼저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새가 무사히 통과하면 곧바로 노를 저으라고 충고했다. 바위 사이로 날아간 비둘기는 꼬리깃 몇 개만 잃고 빠져나갔다. 이아손은 즉시 영웅들에게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으라고 외쳤다.
아르고호가 좁은 틈으로 들어서자 두 바위가 굉음을 내며 다가왔다. 파도가 배를 뒤로 밀어냈지만 영웅들은 박자를 맞춰 노를 저었고, 아테나는 배의 뒤를 힘껏 밀어 주었다. 바위는 선미 장식 일부만 부순 채 서로 충돌했다. 아르고호가 빠져나가자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운명에 따라 두 바위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이아손과 영웅들은 마침내 흑해로 들어가 콜키스를 향했다.
충돌하는 두 바위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아손과 아르고호
3.1 아이에테스에게 양털을 요구하다
긴 항해 끝에 아르고호는 콜키스의 파시스강 어귀에 닻을 내렸다. 도중에 난파당한 프릭소스의 아들들을 구해 주었던 이아손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아이에테스의 왕궁으로 향했다. 일부 영웅들은 무기를 들고 황금 양털을 빼앗자고 했지만, 이아손은 먼저 말로 청해야 한다며 만류했다. 그는 프릭소스의 혼과 황금 양털을 고향으로 모셔 가기 위해 왔다고 밝히고, 대가로 아이에테스가 치르는 전쟁을 돕겠다고 제안했다.
외손자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반기던 아이에테스는 황금 양털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빛을 바꾸었다. 그는 이아손과 프릭소스의 아들들이 자신의 왕국을 빼앗으려고 꾸민 일이라 의심하며 당장 떠나라고 호통쳤다. 황금 양털이 사라지면 자신의 생명과 왕국에 재앙이 닥치리라는 신탁 때문에 그것을 내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이아손이 물러서지 않자 왕은 겉으로만 공정한 기회를 주는 척했다.
아이에테스는 이아손에게 자신과 같은 용기를 지녔음을 증명하라고 명했다. 먼저 아레스의 들판에서 불을 뿜는 청동 발굽의 황소 두 마리에 멍에를 씌워 밭을 갈아야 했다. 이어 용의 이빨을 고랑에 뿌리고 땅에서 솟아나는 무장 전사들을 하루 안에 모두 쓰러뜨려야 했다. 이아손은 물러서지 않고 시험을 받아들였지만, 왕궁을 나온 뒤에는 살아남을 방법을 찾지 못해 침묵했다. 그때 아이에테스의 딸 메데이아가 남몰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에테스 왕 앞에서 황금 양털을 요구하는 이아손
3.2 메데이아에게 사랑을 맹세하다
헤라와 아테나는 이아손이 메데이아의 도움 없이는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음을 알고 아프로디테를 찾아갔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왕궁에 숨어들어 메데이아의 가슴에 화살을 쏘았다. 이아손을 본 순간부터 메데이아는 그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아버지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그를 죽게 둘 수 없다는 마음이 밤새 맞서 싸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메데이아는 헤카테 신전에서 이아손을 만났다. 그녀는 프로메테우스의 피에서 돋아났다는 약초로 만든 연고를 건네며, 몸과 무기에 바르면 하루 동안 불과 쇠붙이에 상처 입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또한 용의 이빨에서 전사들이 솟아나면 그들 사이에 돌을 던지라고 가르쳐 주었다. 누가 던졌는지 모르는 전사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남은 자들을 쓰러뜨리라는 계책이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손을 잡고 자신을 살려 준다면 그리스로 데려가 아내로 삼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자신과 메데이아 사이를 갈라놓을 것은 죽음뿐이라며 올림포스의 신들을 증인으로 불렀다. 조국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메데이아에게 그 약속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녀는 연고와 계책을 모두 내주었고, 이아손은 반드시 함께 콜키스를 떠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헤카테 신전에서 마법의 연고를 건네는 메데이아
3.3 불 뿜는 황소와 용의 이빨
시험의 날이 밝자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연고를 몸과 창, 방패에 발랐다. 온몸에는 전에 없던 힘이 솟았고 무기는 쉽게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아레스의 들판 문이 열리자 청동 발굽을 가진 황소들이 불길을 내뿜으며 달려왔다. 이아손은 방패로 불을 막고 두 뿔을 움켜쥔 뒤 거센 몸부림을 견뎌 냈다. 마침내 황소들의 목에 멍에를 걸고 쟁기를 연결했다.
이아손은 불타는 숨결을 등 뒤에 맞으면서도 들판을 끝까지 갈았다. 흙이 뒤집히자 투구에 용의 이빨을 담아 고랑마다 뿌렸다. 잠시 뒤 땅속에서 창과 방패를 든 전사들이 작물처럼 솟아나 사방에서 그를 에워쌌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말대로 커다란 돌 하나를 그들 한가운데 던졌다. 돌을 맞은 전사들은 서로가 공격했다고 생각해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땅에서 태어난 전사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안 이아손은 살아남은 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해가 지기 전에 마지막 전사까지 땅에 눕자 아르고나우타이는 환호했지만, 아이에테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아손이 혼자 힘으로 시험을 이겼을 리 없다고 여기고 메데이아의 도움을 의심했다. 왕은 밤이 되면 아르고호를 불태우고 영웅들을 모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불 뿜는 청동 황소에 멍에를 씌우는 이아손
3.4 잠들지 않는 용을 지나가다
아버지의 계획을 알아챈 메데이아는 밤중에 왕궁을 빠져나와 아르고호로 달려갔다. 그녀는 이아손에게 날이 밝기 전에 황금 양털을 빼앗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아손은 영웅들에게 출항을 준비하게 한 뒤 메데이아와 함께 아레스의 숲으로 향했다. 숲 한가운데 솟은 거대한 참나무에는 달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양털이 걸려 있었다.
나무 아래에는 잠들지 않는 거대한 용이 몸을 여러 겹으로 감고 있었다. 용은 두 사람이 다가오자 머리를 치켜들고 쉼 없이 혀를 날름거렸다. 메데이아는 헤카테를 부르며 약물을 뿌리고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사납게 꿈틀거리던 용은 차츰 머리를 떨어뜨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이아손은 용의 몸을 넘어 참나무로 다가가 황금 양털을 두 손으로 벗겨 냈다.
황금 양털은 횃불처럼 밤의 숲을 환하게 밝혔다. 이아손은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메데이아의 손을 잡아 아르고호로 달렸다. 영웅들은 두 사람을 배에 태우자마자 밧줄을 풀고 노를 저었다. 뒤늦게 배신을 알아챈 아이에테스가 군사를 모으는 동안 아르고호는 이미 파시스강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아손은 임무를 이루었지만, 메데이아는 그를 위해 아버지와 조국을 모두 등지고 말았다.
잠든 용 곁에서 황금 양털을 들어 올린 이아손과 메데이아
4.1 압시르토스의 죽음과 험난한 귀환
아이에테스는 아들 압시르토스에게 함대를 맡겨 달아난 아르고호를 추격하게 했다. 콜키스의 배들이 앞길을 막자 메데이아는 억지로 끌려온 것처럼 오빠를 속여 아르테미스의 섬으로 불러냈다. 압시르토스가 홀로 나타나자 숨어 있던 이아손이 달려들어 그를 베었다. 다른 전승에서는 메데이아가 어린 동생을 죽여 몸을 바다에 흩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폴로니오스는 이아손이 압시르토스를 직접 죽였다고 전하므로, 그 역시 피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압시르토스가 죽자 추격대는 흩어졌지만 제우스는 두 사람의 친족 살해에 분노했다. 폭풍 속에서 도도나의 참나무로 만든 아르고호의 뱃머리가 키르케에게 정화를 받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경고했다. 아이아이에섬에 도착한 두 사람은 피 묻은 칼을 내려놓고 키르케의 화로 앞에 앉았다. 키르케는 정화 의식을 치러 주었지만 그들이 저지른 일을 알고는 곧 떠나라고 명했다.
아르고호는 오르페우스의 노래로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 냈다. 파이아케스인의 섬에서는 왕 알키노오스가 메데이아가 이아손의 아내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왕비 아레테가 이를 몰래 알려 주자 두 사람은 그날 밤 혼인식을 올렸다. 다시 출항한 영웅들은 크레타에서 청동 거인 탈로스와 마주쳤고, 메데이아가 주문으로 그를 쓰러뜨린 뒤 마지막 바다를 건넜다. 마침내 이아손은 황금 양털과 메데이아를 데리고 이올코스로 돌아왔다.
키르케의 화로 앞에서 정화받는 이아손과 메데이아
4.2 펠리아스에게 복수하고 왕국을 떠나다
귀환한 이아손을 기다린 것은 가족의 죽음이었다. 아르고호가 침몰했다는 소문을 들은 펠리아스는 아이손을 죽이려 했고, 아이손은 황소의 피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아손의 어머니도 펠리아스를 저주하며 죽었으며 어린 동생 프로마코스까지 살해되었다. 이아손은 황금 양털을 내보이며 약속한 왕위를 요구했지만, 펠리아스는 원정의 약속을 외면한 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힘으로 왕궁을 공격하려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펠리아스를 벌할 방법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메데이아는 늙은 숫양을 잘라 솥에 넣고 약초를 뿌린 뒤 어린 양이 뛰어나오게 하여 펠리아스의 딸들을 속였다. 아버지도 젊어질 수 있다고 믿은 딸들은 잠든 펠리아스를 죽여 솥에 넣었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되살리는 약초를 넣지 않았고, 펠리아스는 자신의 딸들 손에 최후를 맞았다.
펠리아스의 죽음으로 왕좌는 비었지만 이아손은 끝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펠리아스의 아들 아카스토스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왕권을 이어받은 뒤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이올코스에서 추방했다. 다른 전승에서는 복수를 마친 이아손이 스스로 아카스토스에게 왕국을 넘겼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황금 양털을 가져오면 왕이 되리라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아손은 메데이아와 함께 코린토스로 떠났다.
끓는 솥에서 어린 양을 꺼내는 메데이아와 펠리아스의 딸들
4.3 코린토스의 왕녀를 택하다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떠돌이가 된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십 년 동안 살며 메르메로스와 페레스라는 두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이아손은 왕국도 지위도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혼인하면 다시 왕가의 일원이 되고 아들들에게도 안전한 미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아손은 콜키스에서 목숨을 구해 주고 모든 것을 버린 메데이아와의 맹세를 저버렸다. 그는 새로운 혼인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선택이라고 변명했지만, 메데이아에게는 배신일 뿐이었다. 크레온은 복수를 두려워하여 메데이아와 아이들에게 코린토스를 떠나라고 명했다. 메데이아는 단 하루만 머물게 해 달라고 애원한 뒤 그 시간 동안 이아손의 새로운 가정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메데이아는 두 아들을 시켜 독이 밴 옷과 황금 관을 글라우케에게 보냈다. 선물을 몸에 걸친 글라우케는 불길에 휩싸였고, 딸을 구하려던 크레온도 함께 죽었다. 이어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혈통을 끊으려고 두 아들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뒤늦게 달려온 이아손은 시신조차 품에 안지 못한 채, 용이 끄는 태양신의 전차를 타고 떠나는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왕가에 들려던 그의 선택은 신부와 자식, 명예를 모두 앗아 갔다.
글라우케와의 혼인을 밝히는 이아손과 분노한 메데이아
4.4 아르고호 아래에서 맞은 최후
메데이아가 태양신의 전차를 타고 떠나려 하자 이아손은 두 아들의 시신이라도 넘겨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아이들을 자신이 직접 묻겠다며 거절하고, 이아손에게도 정해진 최후가 기다린다고 예언했다. 그는 한때 자신이 이끌었던 아르고호의 낡은 나무에 머리를 맞아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었다. 다른 전승에서는 아내와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한 이아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원정을 마친 아르고호는 코린토스 지협에서 포세이돈에게 봉헌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황금 양털 원정을 기념하는 찬란한 배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널빤지가 갈라지고 선미가 기울어 갔다. 모든 것을 잃은 이아손은 오래된 배를 찾아가 그 아래에 몸을 누였다. 렘노스와 충돌하는 바위, 콜키스의 숲과 황금 양털을 함께 지나온 배만이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이아손이 배 아래에서 잠들자 낡은 선미의 들보가 부러져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수많은 괴물과 폭풍을 이겨 낸 영웅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이끌었던 배에 깔려 생을 마쳤다. 펠리아스가 그를 죽이려고 시작하게 한 원정은 최고의 영광을 안겨 주었지만, 그 영광의 상징이 마지막에는 무덤이 되었다. 황금 양털을 얻고도 왕좌와 가족을 지키지 못한 이아손의 긴 여정은 그렇게 끝났다.
낡은 아르고호 아래에서 잠든 늙은 이아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