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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 인간을 사랑한 티탄
이아페토스의 아들 프로메테우스는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를 지닌 티탄이었다. 그는 흙으로 연약한 인간을 빚고 살아갈 기술을 가르쳤으며, 메코네에서 인간의 몫을 지키고 제우스가 감춘 불까지 훔쳐 건넸다. 분노한 제우스는 판도라를 보내고 프로메테우스를 카우카소스 바위에 묶었지만, 그는 오랜 형벌 속에서도 예언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이오의 먼 후손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쓰러뜨리면서 인간을 위해 고통받던 티탄은 사슬에서 풀려났다.
1.1 이아페토스의 아들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이아페토스는 오케아노스의 딸 클리메네와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아틀라스와 메노이티오스,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였다. 네 형제는 모두 오래된 티탄의 혈통과 강인한 힘을 물려받았지만, 각자가 지닌 성품과 앞으로 맞게 될 운명은 크게 달랐다.
아틀라스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힘을 자랑했고, 메노이티오스는 자신의 용맹을 믿으며 거칠고 무모하게 행동했다. 에피메테우스는 눈앞에 놓인 일에 쉽게 마음을 빼앗겨, 행동한 뒤에야 그 결과를 깨닫곤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형제들과 달리 힘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뒤에 닥칠 결과를 헤아리며 신들과 세상의 변화를 조용히 살폈다.
훗날 아틀라스는 제우스에게 맞서 싸우다가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았고, 교만한 메노이티오스는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에피메테우스도 제우스가 보낸 판도라를 받아들인 뒤에야 형의 경고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의 시대가 무너지고 올림포스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미리 내다보며, 형제들과 다른 길을 걸을 준비를 했다.
네 아들과 함께 선 이아페토스와 클리메네
1.2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에는 ‘먼저 생각하는 자’, 에피메테우스라는 이름에는 ‘뒤늦게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행동에 나서기 전에 그 결과를 헤아렸지만, 에피메테우스는 눈앞에 놓인 일부터 처리하고 문제가 생긴 뒤에야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았다. 두 형제의 서로 다른 성품은 인간을 세상에 내보내는 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두 형제의 차이를 보여 주는 한 전승에 따르면, 신들은 세상에 태어날 생명들에게 저마다 살아갈 능력을 나누어 주도록 명령했다. 에피메테우스는 그 일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청했다. 그는 사자에게 힘과 발톱을, 새에게 날개를, 들짐승에게 빠른 다리와 두꺼운 털을 주었다. 몸집이 작은 짐승에게는 몸을 숨기는 재주나 수많은 새끼를 낳는 능력을 주며 위험을 피하게 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가진 능력을 모두 나누어 준 뒤에야 인간에게 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털도, 날개도, 날카로운 발톱도 없이 맨몸으로 세상에 놓이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뒤늦게 드러난 동생의 실수를 바라보며 인간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짐승의 몸보다 강한 지혜와 기술을 인간에게 마련해 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맨몸의 인간을 바라보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1.3 제우스의 시대를 선택하다
크로노스에게 삼켜졌던 형제자매들을 구해 낸 제우스가 아버지의 지배에 맞서자, 신들의 세계는 거대한 전쟁에 휩싸였다. 아틀라스와 메노이티오스를 비롯한 많은 티탄은 크로노스의 편에 서서 올림포스의 젊은 신들과 맞섰다. 그들은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해 온 자신들이 힘과 수에서 제우스의 무리보다 앞선다고 믿었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티탄들에게 힘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다. 테미스가 전해 준 예언도 이번 승리가 완력이나 폭력이 아니라 지혜와 계략에 달려 있다고 가리켰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믿은 티탄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충고를 비웃었다. 설득을 포기한 그는 티탄의 진영을 떠나 제우스에게로 가서 새로운 신들이 승리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십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은 마침내 제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아틀라스는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았고, 패배한 티탄들은 타르타로스에 갇혔다. 제우스는 자신을 도운 신들에게 권능과 자리를 나누어 주었지만, 연약한 인간들은 없애고 새로운 종족을 만들려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왕좌에 오르도록 도운 제우스에게 다시 맞서면서, 멸망할 위기에 놓인 인간들을 지키기로 했다.
티탄 진영을 떠나 제우스에게 향하는 프로메테우스
1.4 진흙으로 인간을 빚다
인간의 탄생을 다르게 전하는 후대 이야기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직접 인간의 형상을 빚었다고 한다. 그는 강가의 축축한 흙을 가져다가 물과 섞은 뒤 자신의 손으로 머리와 몸, 팔과 다리를 빚었다. 짐승들은 대부분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만은 몸을 곧게 세우고 얼굴을 들어 하늘과 별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가 빚은 형상에 생명이 깃들자 인간들은 눈을 뜨고 세상으로 나왔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다가와 흙으로 만든 몸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갓 태어난 인간들은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도, 새처럼 날 수 있는 날개도 없었다. 추위를 막을 털과 적에게서 몸을 지킬 단단한 가죽조차 지니지 못했다.
인간은 들짐승보다 약했고, 어둠이 내리면 몸을 숨긴 채 떨 수밖에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빚은 존재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인간에게 집을 짓고 먹을 것을 마련하는 방법을 조금씩 알려 주며 곁을 지켰다. 인간을 위한 그의 선택은 마침내 신과 인간의 몫을 정하는 메코네의 모임에서 제우스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강가의 진흙으로 인간을 빚는 프로메테우스
2.1 신과 인간이 메코네에 모이다
올림포스의 질서가 자리를 잡아 갈 무렵, 신들과 인간은 메코네의 들판에 함께 모였다. 그때까지 신과 인간의 경계는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고, 인간은 때때로 신들과 같은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그러나 제우스는 앞으로 인간이 신들에게 무엇을 바치고, 제물 가운데 어느 몫을 신들이 차지할 것인지 확실히 정하려 했다.
커다란 황소 한 마리가 희생 제물로 마련되었다. 황소를 잡아 신과 인간의 몫으로 나누는 일은 단순히 고기를 배분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신들이 좋은 살코기를 차지한다면 인간에게는 먹을 것이 거의 남지 않을 수 있었다. 연약한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자신들이 기른 가축의 고기를 먹고 힘을 얻어야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대신하여 황소를 나누겠다고 나섰다. 제우스는 그가 인간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신과 인간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로메테우스는 황소의 가죽을 벗기고 살과 뼈를 천천히 갈라놓았다. 그러고는 어느 쪽이 더 좋은 몫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두 무더기를 꾸미기 시작했다.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메코네의 희생 제물
2.2 황소를 두 몫으로 나누다
프로메테우스는 먹음직스러운 살코기와 내장을 황소의 가죽으로 감싼 뒤 볼품없는 위장 아래에 숨겼다. 다른 쪽에는 먹을 수 없는 흰 뼈를 가지런히 쌓고 그 위를 윤기 나는 지방으로 두껍게 덮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방이 번들거리는 뼈 무더기가 훨씬 크고 훌륭해 보였으며, 살코기를 감춘 무더기는 초라하기만 했다.
그는 제우스에게 두 몫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먼저 고르라고 말했다. 제우스는 윤기 나는 지방으로 덮인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헤시오도스의 이야기에서는 제우스가 속임수를 이미 알아차리고도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을 벌할 구실을 얻기 위해 그 몫을 골랐다고 전한다. 지방 아래에서 흰 뼈가 드러나자 제우스의 얼굴에는 무서운 분노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 인간들은 제사를 지낼 때 짐승의 뼈와 지방을 불에 태워 신들에게 바치고, 살코기와 내장은 자신들의 몫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살아갈 양식을 지켜 주었지만, 제우스를 공개적으로 속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보다 먼저 그가 사랑하는 인간들을 벌하기로 하고, 세상에서 불을 감추어 버렸다.
살코기와 지방으로 덮인 뼈를 나누는 프로메테우스
2.3 인간에게서 불을 거둔 제우스
제우스가 불을 거두자 인간들의 화로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하나둘 사라졌다. 차가운 밤이 찾아와도 몸을 녹일 수 없었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익히거나 단단한 곡식을 부드럽게 만들 수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는 들짐승이 가까이 다가와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추운 밤이 길어질수록 어린아이와 노인부터 힘을 잃어 갔다.
인간들은 불씨를 되살리려고 마른 나뭇가지를 비비고 돌을 부딪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추위와 굶주림이 이어지면서 곳곳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올림포스에 앉은 제우스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인간들이 프로메테우스의 도움만으로 신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 했다. 다른 신들 역시 제우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인간에게 불을 돌려주지 못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빚고 보살펴 온 인간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외면하지 않았다. 제우스에게 용서를 빌면 자신은 편안할 수 있었지만, 인간들은 앞으로도 신들의 뜻에만 매달려 살아야 했다. 그는 불이 인간의 몸만 따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문명을 일으킬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직접 훔치기로 결심했다.
불 꺼진 화로 곁에서 추위에 떠는 인간들
2.4 회향 줄기에 불을 숨기다
프로메테우스는 속이 비어 있는 커다란 회향 줄기를 하나 꺾어 들고 신들의 거처로 향했다. 겉으로는 평범한 풀줄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불씨를 넣으면 겉을 태우지 않은 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었다. 그는 신들의 눈을 피해 신들이 간직한 불꽃 가까이 다가가 작은 불씨 하나를 회향 줄기 속에 조심스럽게 숨겼다.
프로메테우스가 돌아와 불씨를 내놓자 인간들은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다시 화로를 밝혔다. 사람들은 불 주위에 모여 추위를 피하고 음식을 익혀 먹었으며,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들짐승을 물리쳤다.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재 아래에 묻어 보관하는 법도 배웠다. 한 화로에서 시작된 불꽃이 집과 집으로 옮겨지면서 인간의 마을은 다시 밝아졌다.
높은 올림포스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던 제우스는 밤마다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을 발견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다시 자신의 뜻을 거역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주어진 불을 다시 거두는 대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인간들은 그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지만, 그 안에는 불보다 오래 남을 고통이 감추어져 있었다.
회향 줄기에 신들의 불씨를 숨기는 프로메테우스
3.1 인간에게 삶의 기술을 가르치다
불을 되찾았다고 해서 인간들이 곧바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계절이 바뀌는 때를 알지 못해 씨앗을 뿌릴 시기를 놓쳤고, 겨울이 닥쳐와도 튼튼한 집을 짓지 못했다. 꿈이 전하는 뜻과 앞날을 알리는 징조도 분별하지 못했으며, 앞날을 생각하지 않은 채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해와 별의 움직임을 살펴 계절을 헤아리는 법을 알려 주었다. 수를 세고 글자를 남기게 했으며, 소에게 멍에를 씌워 밭을 갈고 말에게 수레를 끌게 했다. 바다를 건너갈 배와 돛을 만들고, 광산에 묻힌 구리와 철을 찾아 불로 다루게 했다. 약초를 골라 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도 하나씩 가르쳤다.
사람들은 배운 것을 자식에게 전했고, 작은 동굴을 떠나 집과 마을을 세웠다. 곡식을 저장하고 먼 곳의 사람들과 물건을 바꾸었으며, 밤하늘과 바다를 따라 낯선 땅으로 나아갔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불은 인간의 손에서 수많은 기술로 바뀌었다. 그러나 인간이 신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을수록 제우스의 분노도 더욱 깊어졌다.
별과 글자와 도구를 인간에게 가르치는 프로메테우스
3.2 신들이 판도라를 만들다
제우스는 불을 얻은 인간에게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재앙을 품은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흙과 물을 섞어 젊은 여인의 모습을 빚고, 인간의 목소리와 힘을 지니게 하라고 명령했다. 헤파이스토스가 신들을 닮은 여인을 만들어 내자 올림포스의 신들이 차례로 다가와 각자의 선물을 더했다.
아테나는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베를 짜는 솜씨를 가르쳤으며, 아프로디테는 누구나 마음을 빼앗길 만한 아름다움과 강렬한 욕망을 주었다. 카리테스와 페이토는 황금 목걸이로 몸을 꾸몄고, 호라이들은 머리에 봄꽃으로 엮은 관을 씌웠다. 헤르메스는 능숙한 말과 거짓을 꾸미는 교활한 마음을 넣었다. 여러 신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뜻에서 여인은 판도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인간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마치고 헤르메스에게 그녀를 에피메테우스에게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미 동생에게 제우스가 보내는 선물은 무엇이든 받지 말고 돌려보내라고 경고해 두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신들의 선물로 꾸며진 판도라를 이끌고 올림포스를 내려왔다. 제우스가 마련한 아름다운 함정은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에피메테우스의 집 앞에 다가서고 있었다.
헤파이스토스가 빚고 신들이 꾸미는 판도라
3.3 열려 버린 판도라의 항아리
헤르메스가 판도라를 데리고 오자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경고를 떠올렸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보내는 선물을 받지 말고 곧바로 돌려보내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판도라는 재앙이 아니라 신들을 닮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에피메테우스는 눈앞의 선물에 마음을 빼앗겨 판도라를 받아들이고 아내로 맞이했다.
그들의 집에는 굳게 닫힌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다. 어느 날 판도라가 자신의 손으로 무거운 뚜껑을 들어 올리자, 그 안에 갇혀 있던 온갖 고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힘겨운 노동과 질병, 굶주림과 다툼, 슬픔과 늙음이 사방으로 날아가 인간 세상에 흩어졌다. 목소리조차 없는 질병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 다가와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놀란 판도라는 황급히 항아리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고통이 빠져나간 뒤였고, 항아리 안에는 희망만이 남아 문턱을 넘지 못했다. 희망이 미처 날아오르기 전에 뚜껑이 닫힌 것 역시 제우스가 정한 일이었다. 땅과 바다는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해졌으며, 에피메테우스는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야 자신이 받아들인 선물의 뜻을 깨달았다.
열린 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고통
3.4 카우카소스 바위에 묶이다
인간에게 판도라를 보낸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도 직접 형벌을 내렸다. 힘을 나타내는 크라토스와 폭력을 나타내는 비아가 그를 붙잡아 세상의 동쪽 끝 카우카소스산으로 끌고 갔다. 제우스의 명령을 받은 헤파이스토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를 가엾게 여겼지만, 왕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헤파이스토스는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프로메테우스의 두 팔과 다리를 바위에 단단히 묶었다. 햇볕과 비바람을 가릴 곳도 없는 절벽에서 그는 홀로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낮이 되면 제우스가 보낸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배를 찢고 간을 뜯어 먹었다. 불멸자인 그의 간은 밤마다 다시 자라났고, 다음 날이면 같은 고통이 되풀이되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잘못을 인정하고 복종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인간에게 불을 준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더욱이 프로메테우스는 언젠가 제우스의 왕권을 뒤흔들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비밀을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무기로 간직했다. 독수리의 형벌이 되풀이되고 긴 세월이 흘러도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카우카소스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
4.1 대홍수를 아들에게 알리다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데우칼리온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데우칼리온은 프티아 지방을 다스리며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딸 피라와 혼인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들은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속이며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 분노한 제우스는 거대한 비를 내려 타락한 인간들을 물속에 쓸어버리기로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다가올 재앙을 미리 알아차리고 아들에게 커다란 궤짝을 만들라고 일러 주었다. 데우칼리온은 궤짝 안에 먹을 것과 필요한 물건을 실은 뒤 피라와 함께 올라탔다. 마침내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지자 강과 바다가 넘쳐 도시와 들판을 삼켰다. 두 사람은 아흐레 밤낮을 물 위에서 떠다닌 끝에 파르나소스산에 닿았다.
비가 멎은 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제우스에게 제사를 올리고 인간을 다시 일으킬 방법을 구했다. 신탁에 따라 두 사람은 대지의 뼈, 곧 돌을 어깨 너머로 던졌다.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에서는 남자들이, 피라가 던진 돌에서는 여자들이 태어났다.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를 따른 아들과 며느리 덕분에 멸망의 물결을 견딘 인간들은 다시 세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데우칼리온에게 대홍수를 경고하는 프로메테우스
4.2 이오에게 먼 후손을 예언하다
프로메테우스가 카우카소스의 바위에 묶여 있을 때, 머리에 소의 뿔이 돋은 젊은 여인이 그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다가 헤라의 미움을 사서 암소의 모습으로 떠돌게 된 이오였다. 헤라가 보낸 등에가 끊임없이 몸을 찌르는 바람에 이오는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세상의 끝까지 달아나고 있었다.
이오는 쇠사슬에 묶인 존재가 인간에게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방랑이 언제 끝날지 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녀가 동쪽과 남쪽의 먼 땅을 지나 마침내 나일강이 흐르는 이집트에 닿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곳에서 제우스가 손을 내밀면 이오는 본래 모습을 되찾고, 에파포스라는 아들을 낳게 될 운명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오의 고통이 헛되이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파포스의 후손 가운데 다나오스의 딸 휘페르므네스트라가 남편을 살려 주고, 그 혈통에서 위대한 영웅이 태어날 것이었다. 이오의 혈통이 열세 세대를 이어 간 뒤 태어날 그 영웅이 바로 헤라클레스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 영웅이 언젠가 독수리를 쓰러뜨리고 자신의 사슬을 풀어 줄 것이라고 예언했다.
카우카소스에서 이오의 앞날을 예언하는 프로메테우스
4.3 제우스의 운명을 쥔 비밀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제우스가 운명으로 정해진 어떤 여신과 결합하면 아버지보다 강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었다. 그 아들은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왕좌에서 몰아냈듯 자신의 아버지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지배자가 될 운명이었다. 이 위험을 피할 방법을 아는 존재는 프로메테우스뿐이었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카우카소스로 보내 그 여신의 이름을 밝히라고 명령했다. 헤르메스는 입을 열지 않으면 번개로 산을 무너뜨리고 프로메테우스를 타르타로스에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을 약속받기 전에는 비밀을 내놓지 않겠다고 버텼다. 천둥과 폭풍이 절벽을 뒤흔들어도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왕권 역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며 굴복하지 않았다.
후대의 전승에서 그 여신은 바다의 여신 테티스였다. 제우스가 사슬에서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자 프로메테우스는 테티스가 낳을 아들이 아버지보다 강해질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제우스는 그녀와의 결합을 포기하고 인간 영웅 펠레우스와 혼인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킬레우스가 태어났지만 인간의 아들이었기에 제우스의 왕좌를 위협하지 못했고, 프로메테우스가 해방될 길도 마침내 열렸다.
헤르메스 앞에서 테티스의 비밀을 지키는 프로메테우스
4.4 헤라클레스가 끊은 사슬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헤라클레스는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를 구하기 위해 세상의 끝으로 향했다. 카우카소스산을 지나던 그는 절벽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와 날마다 그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를 발견했다. 독수리가 다시 날아들자 헤라클레스는 활을 들어 겨누었다. 그가 쏜 화살은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 거대한 독수리를 꿰뚫었다.
헤라클레스는 바위로 올라가 프로메테우스를 붙잡고 있던 사슬을 끊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한편, 자신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영광이 더욱 커지는 것을 기뻐하여 그 해방을 막지 않았다. 어떤 전승에서는 불멸의 존재가 대신 죽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고, 독화살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던 케이론이 자신의 불멸을 내놓아 프로메테우스가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제우스가 내린 형벌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프로메테우스가 쇠고리에 카우카소스의 돌조각을 끼워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손가락에는 사슬과 바위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는 더 이상 절벽에 묶여 독수리에게 고통받지 않았다. 인간을 만든 티탄은 인간을 위해 신에게 맞서 싸웠고, 마침내 인간 영웅의 손으로 구원받았다. 그가 훔쳐 준 불도 인간의 화로에서 계속 타올랐다.
독수리를 쏘고 프로메테우스의 사슬을 끊는 헤라클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