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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메테우스 – 판도라를 받아들인 티탄
이아페토스의 아들 에피메테우스는 일을 저지른 뒤에야 깨닫는 티탄이었다. 그는 생명들에게 살아갈 능력을 나누어 주면서 인간만 빈손으로 남겨 두었고, 그 잘못은 형 프로메테우스의 불 도둑질로 이어졌다. 훗날 그는 제우스의 선물을 받지 말라는 형의 경고마저 잊고 아름다운 판도라를 받아들인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질병과 고통이 세상에 퍼졌지만, 두 사람의 딸 퓌라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인류의 어머니가 된다.
1.1 이아페토스의 아들
티탄 이아페토스는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와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하늘을 떠받치게 될 아틀라스와 거친 힘을 자랑한 메노이티오스, 앞일을 먼저 헤아리는 프로메테우스, 일이 지나간 뒤에야 깨닫는 에피메테우스였다. 네 형제는 모두 티탄의 피를 이었지만 성품과 운명은 서로 달랐다.
프로메테우스는 무슨 일이든 결과부터 살폈다. 그는 강한 자와 맞설 때에도 힘보다 계략을 앞세웠고, 인간이 살아갈 길을 오래 궁리했다. 반면 에피메테우스는 눈앞에 놓인 일에 쉽게 마음을 빼앗겼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라도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일이 벌어진 뒤에야 알아차리곤 했다.
그래서 두 형제의 이름에도 서로 반대되는 성품이 담겼다. 프로메테우스가 ‘먼저 생각하는 자’라면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였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가 처음부터 어리석거나 악한 티탄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맡은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생명들을 보살피려 했다. 다만 선택하기 전에 그 결과를 헤아리지 않는 성급함은 곧 커다란 실수로 드러나고, 그가 뒤늦게 얻은 깨달음은 훗날 인간의 운명까지 바꾸게 된다.
이아페토스 앞에 나란히 선 네 아들
1.2 생명들에게 능력을 나누다
플라톤이 전한 이야기에서는 신들이 땅속에서 인간과 여러 동물의 모습을 빚었을 때, 아직 어느 생명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신들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각각의 생명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알맞게 나누어 주라고 맡겼다. 에피메테우스는 자신이 먼저 분배한 뒤 형에게 살펴보게 하겠다며 그 일을 자청했다.
그는 어떤 동물에게는 힘을 주되 빠른 발을 주지 않았고, 힘이 약한 동물에게는 달아날 속도를 주었다. 몸집이 작은 것은 날개로 하늘에 오르거나 땅속 굴에 숨어 위험을 피하게 했다. 다른 동물에게는 날카로운 뿔과 발톱, 단단한 등껍질을 주었으며, 몸집이 큰 동물은 그 크기와 힘만으로도 스스로를 지키게 했다.
추위와 더위를 견디도록 털과 두꺼운 가죽도 입히고, 발에는 발굽과 단단한 살갗을 주었다. 어떤 동물은 풀과 열매를 먹게 하고 다른 동물은 짐승의 살을 먹게 했으며, 잡아먹히는 종에게는 많은 새끼를 낳는 능력을 주어 사라지지 않게 했다. 에피메테우스는 하나를 약하게 만들면 다른 능력으로 보충하면서 생명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가 가진 선물은 그렇게 하나씩 동물들에게 돌아갔다.
동물들에게 발톱과 날개를 나누어 주는 에피메테우스
1.3 인간을 빈손으로 남겨 두다
에피메테우스는 짐승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맡은 일을 훌륭하게 마쳤다고 여겼다. 사자는 힘과 발톱을 지녔고, 사슴은 위험에서 벗어날 빠른 다리를 얻었다. 새는 날개로 하늘에 올랐으며, 거북은 단단한 등껍질 안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어느 생명도 자신을 지킬 방편 없이 남겨지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인간이 남아 있었다. 에피메테우스가 남은 능력을 살펴보았을 때는 이미 나누어 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인간에게는 맹수의 이빨도, 추위를 막을 털도, 위험에서 달아날 날개도 없었다. 단단한 발굽조차 없이 맨발로 서 있었고, 밤을 지낼 보금자리와 적에게 맞설 무기도 갖추지 못했다.
모든 생명이 땅속에서 나와 햇빛을 보아야 할 날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에피메테우스는 그제야 동물들에게 준비된 능력을 모두 써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 준 것을 거두어 올 수도, 인간의 몫을 새로 마련해 달라고 신들에게 청할 수도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인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생명들을 살리려 했던 그의 넉넉한 분배는 오히려 가장 연약한 인간을 빈손으로 남긴 커다란 실수가 되었다.
아무 능력도 받지 못한 인간 앞의 에피메테우스
1.4 형이 훔쳐 온 불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이 나누어 준 능력을 살피러 돌아왔다. 짐승들은 저마다 몸을 지키고 먹이를 구할 수단을 갖추었지만, 인간만은 벌거벗고 맨발인 채 아무런 무기도 없이 남아 있었다. 그대로 땅 위에 내보낸다면 추위와 굶주림, 맹수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에피메테우스는 형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감출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나가 함께 기술을 익히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불과 함께 두 신이 지닌 여러 기술의 지혜를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불로 추위를 물리치고 음식을 익혔으며, 도구를 만들어 집을 세웠다. 몸을 지켜 줄 타고난 능력은 없었지만, 배운 것을 활용하여 살아갈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시를 이루는 데 필요한 공동체의 지혜는 제우스가 지키고 있어 프로메테우스도 가져오지 못했다. 인간들은 한곳에 모여 살려 할 때마다 서로 다투었고, 흩어지면 짐승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이 모두 사라질 것을 염려한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과 정의를 모든 인간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그렇게 에피메테우스의 실수는 프로메테우스의 도둑질을 거쳐 인간이 기술과 공동체를 갖추는 결과로 이어졌다.
불과 기술의 지혜를 훔치는 프로메테우스
2.1 인간에게 내린 제우스의 벌
한편 헤시오도스가 전한 이야기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편에 서서 제우스와 맞섰다. 그는 메코네에서 소를 잡아 두 몫으로 나누었다. 고기와 내장은 볼품없는 가죽과 위장 속에 감추고, 앙상한 뼈에는 먹음직스러운 흰 지방을 덮었다. 제우스는 그 속임수를 알아차렸고, 흰 지방을 걷어 뼈를 확인하자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을 향해 분노했다.
제우스는 인간에게서 불을 감추어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속이 빈 회향 줄기에 불씨를 숨겨 다시 인간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인간들은 되찾은 불로 어둠과 추위를 몰아내며 기뻐했다. 지상에서 밝게 타오르는 불빛을 본 제우스는 불의 대가로 인간들이 스스로 반기면서도 끝내 고통받게 될 아름다운 재앙을 보내기로 했다.
앞날을 헤아리는 프로메테우스라면 제우스가 보내는 수상한 선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그는 동생에게 올림포스의 왕이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지 말고 돌려보내라고 미리 경고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준비한 선물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일이 벌어진 뒤에야 깨닫는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졌다. 그 선물이 바로 신들의 손으로 빚어진 여인 판도라였다.
지상의 불빛을 보며 판도라를 계획하는 제우스
2.2 흙으로 빚어진 여인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흙과 물을 섞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빚으라고 명했다. 그 얼굴과 몸은 불멸의 여신들을 닮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을 만큼 빛났다. 헤파이스토스가 흙으로 인간의 형상과 힘을 갖춘 몸을 완성하자, 세상에 없던 첫 여인이 올림포스의 신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테나는 그녀에게 베를 짜는 솜씨를 가르치고 눈부신 옷과 수놓은 베일을 입혔다. 아프로디테는 머리 위에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욕망을 부어 주었다. 카리테스와 설득의 여신 페이토는 황금 목걸이로 목을 꾸몄고, 계절의 여신 호라이들은 봄꽃으로 엮은 화관을 머리 위에 씌웠다. 완성되어 갈수록 그녀는 신들이 내린 축복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헤르메스가 제우스의 뜻에 따라 거짓말과 교묘한 말, 남을 속이는 성품을 가슴에 넣고 말하는 능력을 주었다. 제우스는 불멸의 신들을 닮은 아름다움과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올 위험이 한 몸에 담긴 모습을 바라보았다. 겉모습만으로는 누구도 그 안에 감추어진 뜻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제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에게 보낼 아름다운 선물이 완성되었다.
흙으로 판도라의 몸을 빚는 헤파이스토스
2.3 모든 신의 선물을 받다
헤르메스는 신들이 저마다 한 가지씩 선물을 더한 여인에게 판도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신들이 준 아름다움과 솜씨는 그녀를 행복하게 하려는 축복만은 아니었다. 제우스에게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가 사랑한 인간들에게 보낼 아름다운 덫이자, 불을 얻은 대가를 인간 스스로 받아들이게 할 계책이었다.
판도라의 단장이 끝나자 헤르메스가 그녀를 이끌고 올림포스에서 내려왔다. 에피메테우스 앞에 선 판도라는 화려한 옷과 수놓은 베일을 걸치고, 머리에는 봄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있었다. 에피메테우스는 처음 보는 여인의 눈부신 모습에 놀랐다. 헤르메스는 그녀가 제우스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밝히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래된 전승은 판도라가 제우스의 계략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신들이 준 모습과 성품을 지닌 채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졌고, 에피메테우스 역시 아름다운 겉모습 너머에 감추어진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제우스가 보낸 선물을 받아들일 것인지 형의 경고에 따라 돌려보낼 것인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인간의 미래는 이제 에피메테우스의 선택에 놓였다.
신들의 선물로 판도라를 단장시키는 올림포스 신들
2.4 형의 경고를 잊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자신의 도전을 그대로 넘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올림포스의 왕이 보내는 것은 무엇이든 받지 말고 곧바로 돌려보내라고 거듭 경고했다. 선물이 아무리 아름답고 값져 보여도 그 안에는 인간을 해칠 뜻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판도라를 마주한 순간 에피메테우스의 머릿속에서 형의 경고는 희미해졌다. 그는 판도라에게서 위험을 찾지 못했고, 신들이 정성껏 꾸며 보낸 여인을 매정하게 돌려보낼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제우스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판도라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 집 안으로 데려갔다.
선택을 내린 뒤에야 에피메테우스는 불현듯 프로메테우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미 헤르메스는 올림포스로 돌아갔고 판도라는 그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자신이 받은 것은 재앙이 아니라 아내라고 믿으려 했다. 아직 눈앞에 불행은 보이지 않았지만, 제우스가 놓은 덫은 되돌릴 수 없게 닫혔다. 일을 겪고 나서야 생각한다는 그의 이름은 이제 한 사람의 성품을 넘어 인간 모두의 운명을 가리키게 되었다.
판도라를 제우스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에피메테우스
3.1 재앙을 품은 항아리
판도라가 오기 전까지 인간들은 온갖 재앙과 고된 노동,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질병에서 벗어나 살았다고 헤시오도스는 전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속이자 제우스는 인간에게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과 불을 감추었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되찾아 주었지만, 사람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수고해야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에피메테우스가 판도라를 받아들인 순간, 제우스가 인간에게 보내려 한 벌도 그녀와 함께 인간 세계로 들어왔다. 판도라는 신들이 빚어 준 모습과 성품을 지닌 채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제우스가 계획한 재앙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이 곧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판도라의 곁에는 굳게 닫힌 피토스가 있었다. 피토스는 본래 곡식이나 포도주를 저장하는 커다란 항아리였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수많은 괴로움이 들어 있었다. 오래된 전승은 이 항아리가 어디에서 왔고 누구의 것이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굳게 닫힌 뚜껑 아래에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재앙들이 머물고 있었다고 전한다.
굳게 닫힌 피토스 곁의 판도라와 에피메테우스
3.2 열려 버린 항아리
어느 날 판도라는 커다란 항아리 앞에 섰다. 오래된 이야기는 무엇이 그녀의 손을 움직였는지 밝히지 않는다. 누군가 항아리를 열라고 명했는지, 판도라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녀가 두 손으로 커다란 뚜껑을 들어 올리는 순간, 제우스가 인간에게 보내려 했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항아리 안에 갇혀 있던 수많은 재앙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질병과 고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땅과 바다로 흩어졌고, 수고와 근심은 사람들이 사는 곳마다 찾아갔다. 인간들은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늙음과 병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과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판도라는 빠져나가는 재앙들을 다시 붙잡을 수 없었다. 땅은 이미 온갖 괴로움으로 가득 찼고 바다에도 재앙이 떠돌았다. 질병들은 제우스에게 목소리를 빼앗겼으므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 다가왔다. 누구도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미리 피할 수 없었다. 항아리의 뚜껑이 다시 닫혔을 때,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홀로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피토스의 뚜껑을 열어 재앙을 퍼뜨리는 판도라
3.3 항아리에 남은 엘피스
커다란 항아리의 가장자리 아래에는 엘피스만 남아 있었다. 항아리의 뚜껑이 닫히기 전에 밖으로 나오지 못했으며, 엘피스가 항아리 안에 머무른 것 또한 제우스의 뜻이었다. 나머지 재앙들은 이미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지만, 엘피스는 깨뜨릴 수 없는 항아리를 자신의 집으로 삼아 그 안에 머물렀다.
엘피스는 흔히 ‘희망’이라고 옮기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다리는 ‘기대’라는 뜻도 지녔다. 그것이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 보존된 위안인지, 인간에게서 빼앗겨 항아리 안에 갇힌 것인지는 오래된 이야기만으로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인간들은 앞날을 알지 못한 채 온갖 괴로움을 견디고, 아직 찾아오지 않은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었다.
항아리가 열리고 재앙이 세상에 퍼진 뒤에야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경고가 옳았음을 온전히 깨달았다. 그러나 판도라를 돌려보내거나 세상으로 퍼진 재앙을 다시 항아리에 가둘 수는 없었다. 앞날을 먼저 헤아리지 못한 그의 선택은 질병과 노동, 근심이 인간 곁을 떠돌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았고, 두 사람의 딸을 통해 멸망한 인간 세상이 다시 일어날 길이 열리게 된다.
재앙이 떠난 피토스 안에 홀로 남은 엘피스
3.4 퓌라에게 이어진 미래
후대의 전승은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 사이에서 퓌라라는 딸이 태어났다고 전한다. 퓌라는 프티아 일대를 다스리던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혼인했다. 앞일을 먼저 헤아리는 자의 아들과 일이 지나간 뒤에야 깨닫는 자의 딸이 부부가 된 것이다. 두 형제의 집안은 그들의 자녀를 통해 다시 하나로 이어졌다.
제우스가 청동 종족을 멸하기 위해 거대한 홍수를 일으키려 하자 프로메테우스는 아들에게 튼튼한 궤를 만들고 양식을 실으라고 일러 주었다. 데우칼리온과 퓌라는 궤에 올라 아홉 낮과 아홉 밤 동안 거센 물결을 떠돌았다. 높은 산으로 피한 몇 사람을 제외한 인간들은 홍수에 휩쓸렸고, 두 사람의 궤는 마침내 파르나소스산에 닿았다.
비가 그치자 데우칼리온은 제우스에게 제사를 올렸다. 제우스가 헤르메스를 보내 소원을 묻자 그는 다시 인간들이 생겨나기를 바랐다.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이 돌을 머리 너머로 던지자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에서는 남자들이, 퓌라가 던진 돌에서는 여자들이 태어났다. 에피메테우스가 받아들인 판도라를 통해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두 사람의 딸 퓌라를 통해서는 홍수 뒤의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돌을 던져 인간을 되살리는 데우칼리온과 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