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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7〉
고려왕조의 문신 이승휴는 삼척에 은거한 채 세상을 관조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국왕에 대한 충정을 담아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그는 서문(帝王韻紀進呈引表)에서 충렬왕이 좋은 정치를 하기를 간절하게 희망했다. 그는 단군을 우리 민족 역사의 근원으로 제시하고 몽골제국이 주도하는 천하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천하인 요동(遼東)을 언급하며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당시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내다보며 고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재흥(再興)의 시기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표문을 통해 원나라의 부마가 된 충렬왕의 가문과 권위를 높이 찬양하는 정치적 수사를 구사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왕이 실정을 바로잡고 마음을 바르게 닦아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극복하고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동안거사 이승휴 저술 《제왕운기》(사진:위키백과)
필자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을 읽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를 바치는 표문[帝王韻紀進呈引表]
신 이승휴(李承休)가 말씀드립니다. 신이 제왕운기를 삼가 편수하여 두 권으로 나누고, 바로잡아 고쳐 필사하여 바치는 것은, 부족한 선비(牛襟下士)가 《오전(五典)》과 《삼분(三墳)》에서 거칠게나마 깨달음을 얻어 반딧불이의 빛과 같은 희미한 밝음으로 해와 달의 밝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약하여서입니다. 신 이승휴는 실로 황송하고 두려워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주(周)나라보다 성대하시고 탕왕보다 밝으며, 천자의 누이를 비(妃)로 삼았으니, 어찌 삼한(三韓)이 일찍이 이처럼 용루(龍樓)가 모임(成集)을 보았겠습니까? 실로 생각하건대, 100대(代)에 듣기 어려우며 만(萬) 세대에도 만나기 힘든데 한 때에 모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선대가 남기신 가르침을 따르고 하늘 가운데 해가 떠오르는 상서로움에 보답하고자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동서로 다녔던 인연으로 단계를 뛰어넘어 화려하고 중요한 직책에 제수되었습니다.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온몸이 군주의 깊은 은혜에 흠뻑 젖었으니, 머리카락을 뽑아 은혜를 헤아리고 맑은 실로 곤룡포를 기워야겠으나, 이에 인연과 명이 박하여 도리어 몸이 한가롭게 되었으니, 하늘을 볼 계책이 없음이 한탄스럽지만, 만수무강을 축원할 수 있는 처지임은 기쁩니다. 마음은 불교(佛隴)에 귀의하고 눈은 불경(虯函)에 가 있는데, 만권의 책과 밝은 창은 해를 좇아 뜻이 피로해지는 변화가 있지만, 구중궁궐은 항상 봄이라 늙지 않는 시간입니다.
또한 생각하건대, 이 변변치 않은 글은 저의 평생의 업이니, 마땅히 벌레 소리와 같은 변변치 않은 글로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鶴戀)을 더하여 편 것입니다. 이에 마침내 예로부터 지금까지 황제가 전하고 황제가 받아온바, 중국(中朝)은 반고(盤古)로부터 금국(金國)에 이르기까지, 동국(東國)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우리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처음 일어나게 된 근원을 책(簡牘)에서 다 찾아보아 같고 다른 것을 비교하여 요점을 취하고 읊조림에 따라 장(章)을 이루었습니다. 저들이 서로 계승하여 주고받아 흥하여 선 것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고, 선대를 이어받은 것과 말하고 행한 것을 취사 선택한 것은 마음에 명백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스러운 지혜를 넉넉히 미루시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가지고서 그를 폐하지 마시고, 잠시 이명(离明: 군주의 명석하고 지혜로운 통찰력)의 밝음을 빌어 왕께서 읽어주심(乙夜之觀)을 허락하시고 바깥의 해당 관서에 맡기어 행해지게 하시어서 후세에 권장과 경계로 삼으십시오. 신은 실로 황송하고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며 삼가 말씀드립니다.
지원(至元) 24년(1287) 3월 일.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 신 이승휴.
이승휴 유적지 물통방아(사진:궁인창)
1995년, 동국대 정병조 교수는 삼척시 미로면 두타산(頭陀山) 천은사 사적기를 조사해 발표했다. 천은사는 758년(경덕왕 17)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의 승려 두타 삼선(頭陀三仙)이 창건한 고찰로 처음에는 백련대(白蓮臺)라고 하였다. 839년(문성왕 1) 범일국사(梵日國師)가 극락보전(極樂寶殿) 등을 건립하고 규모 있는 사찰로 만들었다. 이후 고려 이승휴(李承休)가 중수하고 이곳에서 대장경을 열람한 뒤 간장암(看藏庵)이라고 하였다. 용계(龍溪)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고, 71세 되던 해에 그가 머물며 책을 읽던 용안당(容安堂)의 현판을 내리고 간장암(看藏庵)으로 바꾼 뒤, 절에 전답 등을 시주했다.
조선왕조 선조 때 서산대사(西山大師)는 간장암(看藏庵)을 중건하고, 절의 서남쪽에 있는 봉우리가 검푸른 것을 보고 흑악사(黑岳寺)라고 하였다. 1899년(고종 광무 3)에 왕명으로 이성계(李成桂)의 5대 조인 이양무(李陽武) 장군의 준경묘와 부인 김씨의 영경묘를 새롭게 수축하며, 흑악사(黑岳寺)를 천은사(天恩寺)로 고쳐 부르게 하고, 제사에 지내는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造泡寺) 및 원당으로 삼았다.
삼척 준경묘(사진;삼척시)
동해안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758년 천축국(天竺國, 印度)에서 온 세 명의 승려 두타삼선(頭陀三仙)이 돌로 만든 배(龍)를 타고 멀리 있는 신라에 왔다고 한다. 이들은 강원도 불래진(佛來津)으로 들어온 뒤, 두타산에 올라 제각기 다른 색깔의 연꽃을 한 송이씩 공중에 날려 떨어뜨려 사찰의 자리를 잡았다. 동쪽에는 푸른 연꽃(靑蓮)을 떨어뜨려 지상사(池上寺)를 창건하고, 남쪽에는 금색 연꽃을 떨어뜨려 영은사(靈隱寺)를 창건했다. 북쪽에는 검은 연꽃을 떨어뜨려 삼화사(三和寺)를 창건했다. 서쪽에는 흰 연꽃을 떨어뜨려 백련대(白蓮臺)를 창건했는데, 오늘날 천은사(天恩寺)이다.
두타(頭陀)는 참된 수행자가 번뇌를 털어내고 의식주에 집착하지 않는 불교의 청정한 수행을 뜻하며, 삼선(三仙)은 도교적 색채가 융합된 신령스러운 존재를 의미한다. 일본 승려 엔닌이 838년에 견당선을 타고 당나라로 불법을 구하러 간 것처럼, 천축국 승려들도 바닷길을 통해 통일 신라에 도착하고, 배를 타고 동해안까지 포교하러 다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견당사(사진;KBS)
1948년 12월, 강원도 삼척 두타산 천은사에 큰 불이 나 대웅전도 타고 경내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사찰은 곧 복구가 되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탄 뒤 명맥만 겨우 유지했다. 인적이 끊긴 절터에는 세월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부처님 도량은 찾아오는 이 없이 온통 잡초만 무성하고 많은 세월이 구름처럼 덧없이 흘러갔다.
불교에서는 아주 작은 인연(因緣)도 중요하게 여긴다. 당시 오대산 월정사의 교무 문일봉(文一峰, 당시 31세)은 관공서 출입으로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번잡한 행정 업무에서 벗어나 조용한 사찰에서 기도하며 수행 정진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봉은 월정사 종무실에서 월정사 말사 현황을 보다가 우연히 천은사 토지대장에 밭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밭농사를 직접 지으면, 신도에게 의지하지 않고, 굶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을 잘 모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무회의를 마치고 주지에게 천은사 소임을 간청해, 일봉 승려는 1972년 6월 10일 천은사 주지로 부임했다.
천은사 월영루(사진:궁인창)
당시 천은사를 찾아갈 때 교통편이 많지 않아 온종일 걸어서 갔다. 쉰움산(688m) 깊은 심산계곡에 있는 절에 막상 와보니 방 두 칸에 목조아미타삼존불과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 있고, 그 옆에 부엌 한 칸만 달랑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예불을 마치고 도량을 청소하고 멀리까지 산책을 하다 절 입구 석탄교 삼거리에서 천은사기실비(天恩寺 紀實碑)를 처음 보았다.
천은사 기실비(사진;국가유산청)
‘천은사 기실비’는 1921년 조선불교 당대 문장가인 석전 박한영(1870~1948) 선사가 글을 짓고, 영동지역에서 활동하던 명필 계남(桂南) 심지황(沈之潢, 1888~1964) 서화가가 글씨를 썼다. 비문 속에는 천은사 창건 배경과 고려왕조 이승휴의 흔적, 준경묘(濬慶墓), 영경묘 수축 등 천은사의 모든 역사와 깊은 인연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석전 박한영(1870~1948) 선사(사진;동국대학교)
1970년대에 쌍용양회가 두타산 일대의 광산 개발 구역에서 석회석을 캐려고 하였다. 쌍용양회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 삼화사와 천은사를 매입하려고 하였다. 당시 천은사 주지는 삼화사 매각과 이전 소식을 전해 듣고 혼자 강력하게 반발하며 맞섰다. 주지는 “나라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천년이 넘은 고찰을 한꺼번에 두 개씩이나 없애면 안 됩니다.”라며 끝까지 버텼다.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는 삼화사 매각을 승인하고, 이승휴의 정신이 살아있는 천년고찰 천은사는 보존하기로 의결했다. 삼화사는 1977년 쌍용양회가 석회석 채광을 시작하면서 사찰이 철거되어 두타산 무릉계곡 인근 중대사 옛터로 이전하여 사찰을 중건했다. 쌍용양회가 쉰움산에 폭약을 연일 터뜨려 천은사 대웅전 건물이 자주 흔들거리고 균열이 자주 발생해 사찰 건물들을 열다섯 번이나 보수하며 사찰을 지켜냈다.
동해시 삼화동 석회석 광산(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해시 삼화동 무릉 3지구 석회석 광산은 쌍용양회가 1968년부터 2017년까지 시멘트 원료를 캐던 황량한 노천광산으로 50년간의 채굴을 마치고 폐쇄가 되었다. 동해시는 석회석을 채굴하며 깊게 파인 자리를 자연스럽게 복원하려고 애썼다. 깊은 웅덩이에 물이 차오르면서 석회질 성분으로 인해 일반 호수와 다른 짙은 청록색 및 에메랄드빛의 청옥호와 금곡호 두 개의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고, 깎아지른 듯한 지상 약 125m 높이의 채석장의 회색빛 계단식 절개면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아름다운 곳으로 변모했다. 동해시는 2021년 11월 복합관광단지 ‘무릉별유천지’를 개장했다.
이후 동해시가 2단계 추진 사업을 모색하던 2023년에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 〈폐산업시설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이 발표되었다. 동해시는 이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23년~2026년 사업비 50억 원(국·도비 32억 5000만 원 포함)을 받아 기존 산업시설의 역사적 흔적을 보존하면서 다목적 전시 공간, 쇄석 체험장 등을 마련해 지역 관광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무릉별유천지 라벤더 축제(사진:동해시)
동해시는 2024년에 공공건축 심의를 거치고, 설계 제안 공모를 거쳐 당선작을 선정해 거대한 에메랄드빛 호수와 이색 레저 시설을 갖춘 ‘무릉별유천지’에 과거 광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 공간, 문화 예술 재생 공간, 호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카페를 건설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석회암 원석을 잘게 부수던 대형 쇄석장 건물은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광산 장비인 대형 덤프트럭과 굴착기도 현장에 그대로 전시하였다. 그리고 계절별 정원 조성을 거쳐 라벤더 정원과 미로 정원 등이 조성했다. 며칠 전 서울 지하철에서 ‘무릉별유천지’ 광고를 보고 너무나 신기했다.
2026 무릉별유천지 라벤더 축제(사진:동해시)
동해시 두타산 무릉계곡 입구 금란정(金蘭亭) 편액은 계남(桂南) 심지황(沈之潢)의 필적이다. 이 글귀는 《주역(周易)》 계사상전(繫辭上傳)에 나오는 고사성어 금란지교(金蘭之交)에서 따온 것이다.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을 해석하면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을 수 있고, 한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라는 말이다. 이는 황금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깊고 변치 않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뜻하며 동의어로 기리단금(其利斷金), 기취여란(其臭如蘭),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교(斷金之交)가 있다.
무릉계곡 금란정(金蘭亭) 편액(사진:궁인창)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주지는 역사학자 해산(海山) 김일기(金馹起, 1929~1998) 교수를 비롯해 관공서와 대학교 및 역사연구소 등을 방문해 이승휴 선양사업을 간곡히 호소하고, 시민들에게 이승휴 정신을 설명했다. 1986년 3월, 강원일보사 부설 태백문화연구소가 개설되어 ‘제1회 태백문화학술연찬회’가 1986년 9월 11일 삼척군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학술대회 대주제는 〈삼척군 두타신과 이승휴의 제왕운기〉였다. 이날 김일기 교수는 〈이승휴의 생애와 유적〉 논문을 발표했다. 이날 김 교수는 200매 분량의 원고 중 4분의 1만 축약했다.
2025 가을 삼척학포럼(사진:강원대학교, 2025.11.6)
해산(海山) 김일기 교수는 ‘삼척학’의 미래를 연 선구자로 1951년 8월 6년제 삼척공업중학교를 나와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진학해 졸업했다. 그는 1955년 10월 1일 강릉사범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이후 북평고등학교, 원주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1963년 9월 12일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1995년 정교수로 정년퇴임을 맞이할 때까지 학문 연구에 최선을 다했다. 김 교수는 1997년 제3대 삼척문화원장으로 취임하고, 강원도 문화재위원(1985~1998)으로 활동하며 향토 문화재 보존과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겨 1989년 삼척 시민상을 수상했다.
《삼척학의 미래를 열다, 김일기》(사진:삼척시립박물관)
삼척시립박물관(조사연구총서 57집)은 1985년 《三陟郡誌》를 공동 저술한 김일기 교수와 박재문 교장 그리고 김진문(金振文) 선생 중에 〈삼척편년사〉를 집필하여 지역 사학의 디틀을 다진 김일기 교수를 추모하여 2023년 6월 차장섭 교수가 밑아 《삼척학의 미래를 열다, 김일기》를 발간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