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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8.31. 16:23 (2026.08.31. 15:58)

쉰움산과 이승휴의 보광정(葆光亭) 현판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8〉
2021년 6월 16일, 해양탐험가 이효웅 선생이 삼척시 쉰움산의 산성이 고려 문신 이승휴 선생의 몽골군 항쟁지인 요전산성(寥田山城)이 맞는지 조사해 보자는 요청을 해왔다. 이에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동해시로 가서 동해 뉴호텔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 일찍 천은사로 향했다. 당일 새벽에 출발한 친구들과는 천은사 주차장에서 합류했다.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8〉
 
 
2021년 6월 16일, 해양탐험가 이효웅 선생이 삼척시 쉰움산의 산성이 고려 문신 이승휴 선생의 몽골군 항쟁지인 요전산성(寥田山城)이 맞는지 조사해 보자는 요청을 해왔다. 이에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동해시로 가서 동해 뉴호텔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 일찍 천은사로 향했다. 당일 새벽에 출발한 친구들과는 천은사 주차장에서 합류했다.
 
이효웅 선생은 고려왕조 문신 이승휴가 《동안거사집》에 요전산성(寥田山城)에서 ‘울릉도를 관찰하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바다에 접한 고성산의 오화리산성(吾火里山城, 吾火古城, 吾火城)에서는 지형 구조상 절대로 울릉도를 볼 수 없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해 냈다. 그는 기존 학설이 잘못되었다고 여러 해 주장하며, 바닷가의 오화리산성과 문헌의 요전산성은 완전히 별개의 산성이란 주장을 제기했다.
 
 
【원문】[望武陵島行 幷序] 越癸丑秋。因避胡寇。一方會守眞珠府蓼田山城。城之東南面。溟渤際天。而四無涯極。中有一山。浮沈出沒於雲濤煙浪之間。晨昏媚嫵。若有爲之者焉。父老云。武陵島也。江陵田使君命予賦之。聊以鄙語形容云。
 
【번역】[망무릉도행 병서] 계축년(1253년) 가을,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여러 지방 사람들이 진주부 요전산성에 함께 모여 성을 수비할 때의 일이다. 성의 동남쪽 아득한 바다 가운데 구름과 파도 사이로 한 산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아양을 부리듯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것이, 마치 누군가 신비로운 조화를 부려 일부러 만들어낸 것만 같았다. 마을 노인들에게 물으니 그 섬이 바로 무릉도(武陵島, 현재의 鬱陵島)라고 하였다. 이에 강릉의 전씨(田氏) 성을 가진 수령이 나에게 시를 지어보라 명하기에, 서툰 말로 섬의 모습을 읊어 보았다.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삼척항 남쪽에 있는 고성산(99.7m) 정상부의 산성을 요전산성으로 추정하며, 조선에서는 이 성을 오화리산성으로 불렀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평소 범선을 타고 정라항을 오갈 때 오화리산성이 군사적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고, 동해안 항해 시 핵심 요충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숙명여자대학교가 구축한 《한국 중세고고학 기초자료 DB》를 통해 자료를 검색하고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12월에 발행한 〈삼척요전산성 지표조사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했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요전산성의 실체를 확인하고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쉰움산으로 향했다.
 
고성산 요전산성 안내 비문(사진:삼척시)
 
쉰움산은 두타산 북동쪽에 솟은 봉우리로, 태백산처럼 무속의 성지로 꼽혀 많은 무속인의 기도 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숨겨진 우뚝 솟은 바위에는 흰색 천이 감겨 있었다. 산세에는 기묘한 바위가 가득했고, 정상 암반지대에는 물이 담긴 웅덩이가 50여 개 넘게 파여 있었다. ‘쉰움’이란 ‘오십 개의 움이 팼다.’라는 뜻이며, 한자로는 오십정(五十井)이라 표기한다.
 
오십정(五十井)(사진:궁인창)
 
쉰움산 정상 암반 주변에서 산성의 흔적을 찾아 조사해 보았으나, 성곽이라고 부를 만한 건축 흔적은 찾기가 어려웠다. 산 곳곳에 일부 석축이 남아 있지만, 쉰움산 자체가 천연의 요새처럼 든든하게 되어 있어 일부러 성을 축성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고려 시대 성들은 조선 시대의 성하고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사전에 염두에 두어야 했다.
 
쉰움산 정상에는 ‘나마’라는 독특한 풍화혈 지형으로 항상 물이 고여 있어, 당시 사람들은 식수를 구하기가 매우 편리했다. 두타산과 주변 봉우리를 감싼 울창한 소나무 숲은 산의 풍치를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깨끗하게 만들었다. 이 풍경은 그야말로 신선들이 노니는 선경(仙境)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비경이었다.
 
천은사 전경(사진:궁인창)
 
삼척 쉰움산 기슭에는 천년 고찰 천은사와 더불어 고려 후기 문신 동안 이승휴 선생의 은거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승휴 선생은 용안당을 짓고 《제왕운기》를 비롯해 많은 문학 작품을 저술했다. 정부는 《제왕운기》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지난 2000년 9월 16일, 이승휴 유적지를 국가사적 제421호로 지정했다.
 
쉰움산 이정표(사진:궁인창)
 
천은사로 가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노거수가 많아 오랜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역사가 깊은 천년 사찰 천은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 뒤, 극락보전과 주변 전각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법고와 운판이 걸려 있는 월영루(月影樓)를 둘러보던 중, 안쪽에 걸린 아주 큰 보광정(葆光亭)이라는 현판이 문에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현판의 보광(葆光)이란 뜻을 마음속으로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겨, 이승휴 유적지(국가사적 제421호) 동안사에 다다랐다.
 
보광정(葆光亭) 현판(사진:궁인창)
 
이승휴 유적지는 대문이 잠겨 있어 아쉽지만, 담장 높은 곳에서 사진을 찍은 뒤 안내판의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곳은 고려 시대의 뛰어난 문인이자 정치가인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1224~1300)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집을 짓고 살던 터이다. 고려 충렬왕 13년(1287) 무렵 이승휴는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서에서 가장 귀중한 자료 중 하나인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이승휴는 어렵게 벼슬을 얻었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여러 번 좌천되었다. 이에 어머니의 고향인 두타산 구동(龜洞)으로 돌아와 《제왕운기》, 《내전록》, 《동안거사집》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제왕운기」는 우리나라 역사와 중국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로,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밝히고 계승 관계를 체계화한 귀중한 자료이다. 《동안거사집》을 보면 이승휴는 언덕 위에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생활하였다. 용안당 남쪽에 우물을 만들어 표음정(瓢飲井)이라 부르고,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보광정(葆光亭)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는 연못을 만들어 지락당(知樂塘)이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은 1998년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절터와 연못의 흔적, 청자 가마터 등이 나오며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곳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유적지 발굴과 현장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01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지정되고, 2009년에는 연못지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승휴 유적지 동안사 안내판(사진:궁인창)
 
안내문을 읽고 나니, 천은사 월영루에서 보았던 ‘보광정(葆光亭)’ 현판이 바로 이승휴 선생이 머물렀던 정자의 이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문신 이승휴는 1280년 벼슬에 물러난 후 옛 은거지인 구동으로 돌아와 용안당을 짓고, 10여 년 동안 은거하며 인근 두타산 삼화사(三和寺)에서 불경을 빌려다 읽었는데, 그 양이 1,000여 개 함(函)에 이를 정도였다.
 
삼화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철조노사나불좌상의 명문은 삼화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태조의 명으로 1395년부터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넋을 기리기 위한 국행 수륙재(國行水陸齋)가 이곳에서 열렸다.
 
삼화사 수륙재(水陸齋)(사진:동해시)
 
수륙재의 본질은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중생(無主孤魂)에게 제사를 지내주어 사시사찰 제향(祭饗)이 끊이지 않게 하고, 나아가 이들에게 불법을 들려주어 고통받는 육도의 중생(六道四生)을 구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나라 수륙재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963년에 귀법사에서 무차수륙회를 열고, 971년 갈양사에서 수륙도량을 개설했다. 1090년 최사겸이 송나라에서 수륙의문(水陸儀文)을 구해와 수륙당을 짓고 수륙재를 열었다. 13세기 활동한 일연의 제자 혼구는 〈신편수륙의문〉을 지었으며, 이후 죽암 유(猷)에 의해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가 편찬되기도 했다.
 
이성운 교수는 〈한국불교 수륙재의 변용 고찰 –세부 의식을 중심으로-〉 논문을 2018년 6월, 국립민속박물관이 발간하는 《민속한 연구》 제42호에 기고했다, 이 논문을 읽으며 수륙재의 근본 목적은 변하지 않으나, 상황에 따라 신중작법(神衆作法)과 의례의식이 보완되고 새롭게 편제되면서 유연하게 변용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타산 삼화사 수륙재(水陸齋)(사진:대한불교조계종)
 
이승휴는 매일 불경을 열독(熱讀)하며, 1289년경에 《내전록(內典錄)》을 편찬했다. 이에 앞서 1287년(충렬왕 13)에 간행한 《제왕운기》는 진주에서 왕명으로 찍어냈으나, 아쉽게도 소실되어 사라졌다. 현재 전하는 것은 중간본(重刊本)으로 1360년(공민왕 9) 이승휴의 조카사위 안극인(安克仁)이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재직하던 시절에 경주에서 진사 김희(金禧)의 글씨를 바탕으로 목판본 《제왕운기》 재간본을 찍어낸 것이다. 이후 삼간본은 1413년(태종 13)에 간행되어 오늘날 널리 유포되어 있는 영인본(影印本)의 저본(底本)이 되었다.
 
보물 《제왕운기》(사진:동국대학교 도서관)
 
안극인(安克仁, ? ~ 1383년)은 고려왕조 말기의 문신이자 공민왕의 왕비인 정비(定妃)의 아버지(國舅)이다. 본관은 죽주(竹州, 안성)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고려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고국가회의 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종2품 부총리)를 지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군)에 봉해진 안한평(安漢平, 시호 襄良)이며, 아버지는 문하좌시중과 판호조사(判戶曹事)를 지내 안사경(安社卿)이다.
 
문신 안극인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후 중산대부, 병부시랑, 경상도안렴사 등을 지냈다. 특히 충목왕 때 고려 사회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만든 임시 개혁 기구인 정치도감(整治都監)에서 뛰어난 행정 역량을 발휘하며 크게 활약했다. 이후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 우상시(右常侍), 동지밀직사 등을 거쳐 중대광(重大匡) 및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올랐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이승휴의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해 둔 원고를 바탕으로 처외조부 문집 간행에도 깊이 관여했다. 문집에 실린 서한에는 출판 당시의 오자와 탈자를 철저하게 교정했던 과정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런 노력으로 1359년(공민왕 8) 무렵에 이승휴의 시와 글을 모은 《동안거사문집(動安居士文集)》이 간행되었다. 그는 이후 1377년(우왕 3)에 과거의 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를 맡기도 했으며, 1383년(우왕 9)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순흥 안 씨 후손들은 선조의 공덕을 기리고자 철화기법으로 원통형에 망자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극인(安克仁) 묘지(墓誌, 본관 10468호)는 공주 학봉리 가마에서 출토된 귀중한 유물이다.
 
안극인(安克仁) 묘지(墓誌)(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고려왕조 문신 안극인이 처가(妻家) 어른으로 처외조부인 이승휴 선생의 학문적 성취와 독자적인 민족 자주 의식이 담긴 역사관을 온전히 보존하고 널리 알린 덕분에, 오늘날 이승휴 선생의 유산이 이토록 큰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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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