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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9.09. 13:07 (2026.09.09. 13:07)

동해 삼척의 고소하고 담백한 두부 요리 1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0〉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동해시에 도착해 뉴동해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새벽 사진가 이효웅 선생을 만나 천은사로 향했다. 천은사에서 합류한 친구들과 쉬지 않고 산을 타 쉰움산 오십정(683m)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서 140km 떨어진 울릉도를 보려고 했지만, 안개가 심해 볼 수가 없었다.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0〉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동해시에 도착해 뉴동해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새벽 사진가 이효웅 선생을 만나 천은사로 향했다. 천은사에서 합류한 친구들과 쉬지 않고 산을 타 쉰움산 오십정(683m)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서 140km 떨어진 울릉도를 보려고 했지만, 안개가 심해 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암반 위에 풍화작용으로 움푹 파인 50여 개의 웅덩이 나마(Gnamma)를 관찰하고 주변에 요전산성 흔적을 조사했다. 정상부 너럭바위 암반 위에 많은 구멍을 지형학적 용어로 ‘나마’라고 하는데, 크기가 세숫대야부터 작은 밥그릇 크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쉰움산 오십정 정상의 오랜 세월 빗물과 풍화를 거쳐 형성된 지형은 무척 신비해 지질·지형학적 명소로 유명해졌다.
 
쉰음산 나마(Gnamme)(사진;궁인창)
 
삼척에서는 예로부터 높은 지역에서 날씨가 쾌청할 때 무릉도(茂陵島, 鬱陵島)를 조망할 수 있었다. 삼척 남쪽의 소공대에서 문인들이 무릉도를 보고 남긴 시가 많이 전해온다. 고려의 문인 이승휴는 몽골 난 때 피난하여 삼척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망무릉도행’ 이란 시를 남겼다. 사진가 이효웅 선생은 동해안 여러 곳에서 울릉도를 촬영하며 요전산성 연구를 했다.
 
그는 2010년부터 삼척 소공대(224m), 광진산(137m), 개산길, 봉황산(149m), 동해시 초록봉(531m)에서 울릉도를 촬영했다. 쉰움산에서 머물며 안개가 빨리 걷히기를 기다렸지만, 날씨가 변하지 않아 요전산성을 한 번 더 조사한 후 하산하여 천은사와 이승휴 유적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바닷가로 이동해 맛있는 두부 전골을 먹었는데, 두부 맛이 일품이었다.
 
삼척시 봉황산에서 촬영한 울릉도(사진;이효웅, 2022년 9월 21일 촬영)
 
우리가 즐겨 먹는 두부(豆腐)의 기원은 정말 오래되었다. 학자들은 두부의 기원을 중국 북방 유목민족이 키우던 동물의 젖을 짜서 만들어 먹던 유부(乳腐)로 보기도 한다. 우유나 양유(羊乳)의 단백질에 효소나 산(Acid)을 넣어 뇌수(腦髓)처럼 연하게 응고시킨 뒤, 물기를 빼서 치즈 형태의 유부로 만들어 먹었다. 우유 단백질을 응고시킨 것 중 수분이 많으면 유부가 되고, 수분이 없으면 치즈가 되는 것이다.
 
명나라의 의학자 이시진(李時珍)은 옛 문헌에만 의존하지 않고 산과 들을 누비며 27년 동안 약초를 채집했다. 그는 동물, 광물, 식물의 성질을 관찰하고 농업과 지리학적 자료까지 집대성하여 1596년에 《본초강목》을 완성한다, 이 책에 의하면 두부는 기원전 2세기 전한(前漢)의 황족인 회남왕 유안(劉安, 기원전 179~122)이 발명했다고 한다. 이후 당나라 고종~현종 시기와 송나라 때 두부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때는 실크로드를 통해 북방민족과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해양탐험가 이효웅 쉰음산 설명(사진;궁인창)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음식 명장 제2호이며 진관사 회주 계호(戒昊) 스님은 옛 문헌을 바탕으로 콩을 맷돌로 갈아 만든 두부에 석이버섯, 잣, 미나리 등으로 고명을 올려 담백하게 쪄내 두부찜을 재현해 전시회에 출품했다.
 
농경 중심으로 생활하던 중원 사람들은 가축의 젖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단백질이 풍부한 콩즙(두유)에 주목했다. 그들은 유목민이 젖을 굳히던 방식을 응용해, 콩즙에 간수를 넣어 굳게 하는 기술을 발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부 한자의 부(腐)자는 ‘찌꺼기’나 부정적인 나쁜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말랑말랑하게 응고된 치즈 형태의 단백질을 뜻했다. 즉, 유부(젖을 굳힌 것)의 기술이 콩으로 옮겨 가면서 두부(콩을 굳힌 것)가 되었다는 해석이 매우 자연스럽다. 콩을 갈아 만든 두부는 사찰의 채식 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 두부 제조 기술은 이후 불교 승려들을 통해 동아시아 전역으로 널리 퍼져 각 지역의 독특한 식문화와 결합하며 다채로운 조리법으로 발전했다.
 
진관사 회주(계호) 두부찜(사진;불교신문)
 
학자들은 고려 후기의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이 자신의 문집 《목은시고(牧隱詩藁)》에 술, 차, 두부 등 음식에 관한 시를 여럿 남겨 것을 토대로, 대략 13~14세기경에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색은 소박한 미식가로 음식 중에서도 특히 두부를 좋아해 두부 시를 남겼는데, 이는 우리나라 두부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목은시고(牧隱詩藁)》(33권)
 
<대사가 두부를 구해와서 먹여주기에(大舍求豆腐來餉〉
 
菜羹無味久(채갱무미구)
豆腐截肪新(두부재방신)
便見宜疏齒(편견의소치)
眞堪養老身(진감양노신)
 
오랫동안 맛없는 나물국만 먹다 보니
두부가 마치 금방 썰어낸 비계 같군
성긴 이로 먹기에 참으로 좋으니
늙은 몸을 보양하기에 으뜸이로다.
 
魚蓴思越客(어전사월객)
羊酪想胡人(양락상호인)
我土斯爲美(아토사위미)
皇天善育民(황천선육민)
 
오월(吳越)의 나그네는 농어와 순채를 그리워하고
북방의 유목민은은 양젖 치즈를 떠올리겠지만
우리 땅에선 이 두부를 가장 귀하게 여기나니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이 착한 백성을 참으로 잘 기르시네!
 
시인은 이 시에서 두부의 부드러운 식감을 찬탄하며, 노인이 먹기에 정말 부드럽고 그 맛이 금방 썰어낸 비계처럼 고소하고 훌륭하다고 표현했다. 원래 두부는 사찰에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주던 승가(僧伽)의 음식이었으나, 점차 사대부들이 좋아해 유가(儒家)의 음식 문화로도 자리를 잡았다. 사대부들은 두부를 가리켜 다섯 가지 미덕, 오덕(五德)를 갖춘 음식이라며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첫째, 맛이 부드럽고 좋음이 일덕(一德)이요,
 
둘째, 은은한 향이 이덕(二德)이요,
 
셋째, 색과 광택이 아름다움이 삼덕(三德)이요,
 
넷째, 모양이 반듯함이 사덕(四德)이요,
 
다섯째, 먹기에 아주 간편함이 오덕(五德)이라고 칭송했다.
 
승려들은 콩이 단백질이 풍부해 두부를 ‘뼈 없는 고기(無骨肉)’라고 부르며 아주 귀하게 여겼다. 목은 선생은 두부와 채소를 즐기고 술을 곁들이며 인생을 관조하는 삶을 살았는데, 자기 자신을 ‘미나리 먹고 햇볕 쬐던 늙은 시골 농부’라고 칭하며 한없이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목은시고》 제9권에는 〈두부와 토란을 섞은 반찬〉이란 시가 있다.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과 곡성시중(曲城侍中)이 병석에서 일어난 나를 찾아와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 기쁜 정회(情懷)를 기록했다.
 
二老過從數(이로과종수)
孤生病起初(고생병기초)
幸容陪杖屨(행용배장구)
更喜接門閭(갱희접문려)
 
두 노인은 수시로 나에게 들러주는데
외로운 이 몸은 병석에서 겨우 일어났네
어른들 모시고 산책할 수 있으니 다행이거니와
서로 이웃하여 가깝게 지내니 이 또한 기쁘네
 
豆腐蹲鴟雜(두부준치잡)
香粳吠蛤餘(향갱폐합여)
乾羊斟美酒(건양짐미주)
秋色滿庭除(추색만정제)
 
두부 반찬에 토란을 곁들였고
향긋한 햅쌀밥은 개구리가 울던 논에서 거둔 것이라네
말린 양고기 육포에 훌륭한 술을 잔에 가득 따르니
깊어진 가을 경치가 뜨락에 가득하구나!
 
정혜경 저《채소의 인문학》(사진;궁인창)
조선왕조에서 두부는 궁중 음식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아, 왕실의 제향(祭享)과 공상(供上)에 널리 사용되었다. 조정은 왕릉 제사에 쓸 두부를 공급받기 위해 화성 용주사, 양주 봉선사, 북한산 진관사를 조포사(造泡寺)로 지정하고 왕실 제사용 두부를 전문적으로 만들게 했다.
 
1930년 5월 10일 이왕직 예식과(禮式科)에서 전국의 능침 관리자들을 통해 조포사를 조사한 결과 총 35개의 조포사가 조사되었다.
 
조선이 두부를 아주 잘 만든다는 사신의 말에 명나라 황제는 “우리 명나라 두부는 맛이 없다. 조선에 부탁해 두부 제조 기술자를 보내 달라.”라고 조선에 특별 요청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 여성들의 뛰어난 두부 제조 및 요리 솜씨를 극찬하며 기술자를 다시 보내 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명나라 사신으로 간 공조판서 성달생(成達生)이 1428년(세종 10) 2월 11일, 사신 백언(白彦)이 궁중 요리를 잘하는 집찬비(執饌婢)를 시켜 술, 과일, 두부를 만들어 황제에게 올리니, 명나라 황제가 이를 맛보고 크게 기뻐하여 매우 가상히 여겨 환관 백언에게 어용감 소감(御用監 少監) 관직을 제수(除授)하고 관대(冠帶)를 내려주셨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원문】
 
○工曹判書成達生, 在中朝報: "使臣白彦, 使執饌女, 造酒果豆腐以進, 帝甚嘉之, 卽除彦御用監小監, 賜冠帶。
 
1463년 진관사 주지(性明)의 두부찜 재현(사진;진관사)
 
1463년(세조 9년) 음력 5월 15일, 승려 일암당 학전(日庵堂 學傳)은 진관사 계곡으로 유람을 떠나 시회(詩會)를 열자고 친분이 두터운 지인들에게 제안하여 당시 좌의정이었던 신숙주(申叔舟, 1417~1475), 관료 이백옥, 호조참판을 지낸 문신 홍일휴(洪日休), 김호생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관사 주지 성명(性明)은 승려 수십 명을 이끌고 일주문에서 이들을 맞이하며 떡, 국수, 밥과 함께 두부찜(泡蒸)을 정성껏 대접했다. 신숙주의 시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 기록에 따르면 미식가(美食家) 홍일휴는 진관사 두부찜을 무려 일곱 그릇을 비워 승려들을 놀라게 하였다.
 
홍일휴(洪日休, 洪逸童, 1412?~1464)는 호가 마천(麻川)으로 파주 적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461년(세조 7) 호조참판으로 천추사(賀聖節兼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2년에는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1463년 행상호군(行上護軍)에 임명되었다. 1464년(세조 10) 3월, 세조가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을 명승지로 안내하라는 명과 함께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했다. 그는 종재(宗宰)들을 모시고 임금이 내린 술 선온(宣醞)을 가지고 홍주(洪州)에 가서 여러 종재(宗宰)가 돌아오는 것을 만나 선위례(宣慰禮)를 행하였는데, 안타깝게 3월 13일 갑자기 졸(卒)하였다. 향년 53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8회나 등장하며, 그의 딸은 성종 후궁 숙의 홍씨이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사부(詞賦)를 잘 짓고, 술을 곧잘 마시었는데, 취하면 풀피리(草笛)를 만들어 즐겨 불었다. 저서로는 《마천집(麻川集)》이 있다. 남양 홍씨 족보를 최초로 정리하였다.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은 조선 초기의 무신이다. 그는 1402년(태종 2) 조선에서 처음 치러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후 흥덕진 병마사를 거쳐 경성절제사, 평안도도관찰사, 평안도도절제사 등의 외직을 지냈으며 내직으로 공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했다. 1407년(태종 7)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근경(近境)에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왜구를 추격해 격퇴했다. 이에 태종은 왕실의 말(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그의 공을 위로하였다. 세종은 “경이 오랫동안 외직에서 수고하고 또 이제 늙었으니 다시는 경에게 외직을 시키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事)를 제수했다. 이후 임금의 눈병 치료를 위한 초수(椒水: 천연 탄산수) 행차를 호종(扈從)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가 69세였다. 세종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攸司, 관청)에 명하여 예절을 갖추어서 염(斂)을 하고 빈소(殯所)를 차리도록 지시했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경천면(庚川面) 가천리(佳川里)에는 화암사(花巖寺)란 절이 있다. 이 절은 신라(新羅)의 원효(元曉), 의상(義相) 두 조사(祖師)가 중국과 서역을 유람한 후, 이곳에 머물며 주석하였다. 화암(花巖)의 유래는 “의상대사가 서역을 유람할 때 단향목(檀香木)의 씨를 가져와 절에 심었는데, 그 꽃이 너무나 예뻐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중국 황제가 사신을 파견해 왕궁 안 정원에 옮겨 심게 했다.”라고 한다.
 
완주 화암사 중창비(사진:국가유산청)
 
완주 화암사 중창비(도유형문화재 94호)는 장방형 사각 받침틀 위에 비신만 세운 소박한 형태로, 높이 130cm, 너비 52cm, 두께 11cm로 앞뒷면에 해서체로 글씨가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비에는 화암사의 창건 역사와 조선 초기 사찰을 다시 고쳐 지은 중창 경위를 담고 있다. 비문은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지어졌으며, 비석 자체는 선조 5년(1572년)에 세워졌다. 성달생은 불심이 깊어 명나라에 공녀 4차 때 간택되어 명나라에 간 딸을 위해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불심을 더 깊게 한 화암사는 그의 애절함을 담은 사찰이기도 하다. 성달생의 손자가 단종의 복위를 음모하다 처형당한 매죽헌 성상문(1418~1456)으로 이로 인해 가문이 화를 입어 묘비가 파헤쳐지는 온갖 수난을 겪었다.
 
완주 화암사(사진:완주군)
 
화암사를 중창하게 된 경위를 적어 놓은 중창비 비석에는 절의 당주(堂主)인 수월관음(水月觀音)의 용모와 자태는 바로 의상대사의 영혼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노닐 때 수월관음의 참모습을 직접보고 만들어진 등신원불(等身願佛)이며, 절 동쪽 원효대(元曉臺)와 남쪽 의상암(義相庵)은 모두 두 조사(祖師)가 정신수양을 수양하던 곳이라 하였다.
 
그 후 고려(高麗) 대덕(大德) 년간(1297~1307)에 화주(化主: 시주를 모으는 승려) 달생(達生)이 절을 한 차레 중창(重創)하였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와 중추원판사(中樞院判事)를 지낸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 조선 태종 17년(1417) 절을 하나 짓고자 터를 찾아다니던 중, 화암사의 자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주하였다. 성달생은 아우 성개와 함께 1423년(세종 5)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불교 경전을 필사해 안심사에서 《묘법연화경》을 판각하고 절을 후원하여 세종 7년(1425)에 주지 해총(海聰), 신해(信海) 등이 주도적으로 절을 중창하였다. 1489년(성종 20) 을유(乙酉)에 용마루 기와와 마룻대 등과 부속 건물을 한 번 더 중창하였다.
 
보물 제1306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사진:국립박물관문화재단)
 
성달생은 당대 최고의 명필로 유명했다. 그가 정성을 들여 필사한 《묘법연화경》을 판각한 법화경 판본은 보물 제961호, 보물 제971호, 보물 제1306호로 지정되었다. 성달생은 세 차례 《묘법연화경》의 정서본을 써서, 1405년, 1422년, 1433년 각각 안심사, 대자암, 화암사에서 간행되었다. 이후 화암사판은 지속해 간행되어 24종이나 나왔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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