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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9.13. 16:27 (2026.09.11. 15:57)

명나라에 진헌된 조선의 공녀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1〉
대둔산(878m) 남쪽 깊은 산속 안심사에 보물 〈묘법연화경〉 목판이 제작되어 보관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안심사는 조선왕조 초부터 불경 간행이 매우 활발했던 곳으로, 이때 발간한 한문본 〈묘법연화경〉 판본이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일찍이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수제자인 정몽주의 문화에서 수학하였던 조선왕조 개국공신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발문에 〈묘법연화경〉 발간 경위가 적혀있다.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1〉
 
 
대둔산(878m) 남쪽 깊은 산속 안심사에 보물 〈묘법연화경〉 목판이 제작되어 보관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안심사는 조선왕조 초부터 불경 간행이 매우 활발했던 곳으로, 이때 발간한 한문본 〈묘법연화경〉 판본이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일찍이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수제자인 정몽주의 문화에서 수학하였던 조선왕조 개국공신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발문에 〈묘법연화경〉 발간 경위가 적혀있다.
 
권근(權近)이 쓴 발문(發文)에 따르면 “조계종의 대선(大選: 僧科에 入格한 사람에게 주는 法階) 신희(信希) 등이 눈이 어두운 노인들이 보기 편하도록 글자 크기가 중간인 글자로 불경을 간행하기를 발원했다. 이에 성달생(成達生), 성개(成槪) 형제가 상중(喪中)에 이 소식을 듣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정성껏 불경 글씨를 썼다. 이를 승려 신문(信文)이 받아 대둔산 안심사로 가지고 가서 목판에 새겨 1405년(태종 5)에 〈묘법연화경〉 경전을 간행했다.”
 
이후 성달생은 불교 경전을 직접 정서(淨書)하며, 완주 화암사 등 여러 사찰의 중창 불사를 크게 도왔다. 그의 집안은 대단한 명망 높은 가문이었으나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성달생의 딸이 1427년(세종 9) 17세 나이로 명나라 처녀 간택에 징발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한쪽 가슴이 터지게 아파하며 명나라로 간 딸을 위해 원찰(願刹)을 건립하고자 마땅한 절을 물색했다. 그는 화암사를 합당하게 여기고 시주하여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사진:규장각)
 
조선왕조 태종에서 세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명나라에 진헌(進獻)된 조선의 공녀는 총 7차례에 달한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이 저술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따르면 진천 사람인 우군사정(右軍司正) 오척(吳倜)의 딸 오공녀가 1427년(세종 9) 제4차 공녀로 간택되어 12세 나이로 명나라 황궁에 입궁했다. 야사(野史)에서는 그녀가 명나라 선덕제(宣德帝, 선종)의 후비(宣廟賢妃 吳氏)가 되었으며, 제7대 황제 경태제(景泰帝, 명 대종, 주기옥, 1428~1457)의 생모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내관 윤봉(尹鳳)이 조선에 와서 그녀의 생부인 오척(吳倜)을 황친(皇親)으로 지칭하며 그에 걸맞은 예우를 요구했다. 오척은 종5품 우군사정을 거쳐 영춘현감을 지내고, 오척의 형제들도 모두 입신출세했다.
 
조혁연 교수는 2017년 《백산학회》에 발표한 논문 〈조선 전기의 공녀와 그 친족에 대한 시혜- 명 경태제 모후 오척(吳倜)의 딸을 중심으로-〉 에서 “그녀는 명나라 제7대 황제의 생모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사(明史)》와 명나라 학자 왕기(王圻)가 편찬한 역사서 《속통고(續通考)》에는 다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경태제의 생모인 효익황태후 오씨(孝翼皇太后 吳氏, 1397~1462, 死後 효연경황후)가 명나라 남직례(南直隶) 진강부 단도현(현재 江蘇省 鎭江市 丹徒區) 출신이며, 아버지는 도독 오안(吳安, 吳彦名)으로 명시되어 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오안의 딸은 16살 때 영락 10년(1412년)에 당시 황태손이었던 선덕제를 모시기 위해 입궁했다. 1428년(선덕3)에 황제의 차남인 주기옥을 낳아 현비(賢妃)로 책봉되고 주기옥이 황제로 즉위한 후 황태후로 존승되었다.
 
베이징 명 13릉, 경릉(景陵)(사진:北京旅遊指南)
 
1435년, 명나라 선종(朱瞻基)이 10년간의 선정을 뒤로하고 37세에 갑자기 병을 얻어 3일 만에 병사하여 베이징 명 13릉 중 하나인 경릉(景陵)에 안장되었다. 선종의 뒤를 이어 불과 8세의 황태자 주기진(朱祁镇)이 명나라 제6대 황제 영종(英宗, 正統帝)으로 등극했다. 어린 황제 영종이 즉위하자, 선종의 어머니인 장태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국정 혼란을 막고 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장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종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필하며 총애하던 환관 왕진(王振)에게 통치를 전적으로 의지했다.
 
한편, 중원의 넓은 대륙을 차지하며 호령하다가 명나라 건국 이후 힘에 빌려 북방으로 밀려난 몽골제국(北元)은 이후 타타르(달단)와 오이라트(Oirāt)로 분열되었다. 이중 몽골 북부 홉스콜 일대에 거주하며 몽골어로 ‘숲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오이라트 부족은 점차 강성해져 갔다. 과거 오이라트는 초로스, 도르베트, 토구르트, 호쇼트 4개 부족 연맹체로 동쪽의 달단(韃靼) 부족까지 아우르며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명나라와 교역하며 압박하였다.
 
에센 타이시 카안(也先太師, 大元田盛大可汗)(사진:나무위키)
 
1449년 7월, 몽골 오이라트의 지도자 에센 타이시(Esen taiš Qa'an, Эсэн тайш хаан, 也先太師, 1407 ~ 1454)가 조공 무역 갈등을 이유로 명나라 국경을 전격 침범했다. 오이라트 수장이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와서 말(馬)을 바치고 보상을 요구하며 국경 무역 확대를 요구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을 이끌던 환관 왕진(王振)이 오이라트 사절단 인원을 황제에게 축소 보고하고 말의 보상을 줄이면서 갈등이 커졌다. 이에 격분한 오이라트 부족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자, 환관 왕진이 영종을 부추겨 친정(親征)을 권유했다. 전쟁 경험이 하나도 없는 영종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오이라트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오랜 기간 평화를 누려 군사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명나라 군대는 식량 보급이 끊기고 행군 진로가 잘못되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해 9월 명나라 군대는 토목보(土木堡,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화이라이현)에서 오이라트 군대에 기습을 받아 부대 전체가 처참하게 궤멸당하고, 지휘관이던 환관 왕진이 살해당하고, 황제가 적군의 포로가 되는 전대미문의 토목의 변(土木堡之變)이 발생했다. 이는 서진(西晉) 말기 307년경 북방 민족 오호(五胡: 흉노, 선비, 저, 갈, 강)의 대침공으로 서진이 멸망하고 한족이 강남으로 밀려난 ‘영가의 난(永嘉之亂)’과 1126년 여진족이 북송의 수도인 카이펑(開封)을 함락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가 중원과 화북을 상실하고 수도를 강남으로 천도한 ‘정강의 변(靖康之變)’과 더불어 중국 한족 왕조 역사상 3대 치욕에 하나로 꼽히는 대사건이다.
 
토목의 변(사진:위키백과)
 
명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수도 연경(베이징)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많은 대신이 장강(長江)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병부시랑 우겸(于謙, 1398~1457)이 나서 강력히 반대하며 “수도는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길 바라는가? 북송이 어찌 망했는지 잊었는가?”라고 말하고는 야전군을 지휘하여 오이라트 군대의 거센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우겸과 대신들은 국가의 중심을 바로 잡고 오이라트의 인질 외교를 무력화하기 위해 영종의 이복동생인 성왕 주기옥(朱祁鈺)을 제7대 황제 경제(景泰帝, 景宗)로 추대하였다. 영종은 태상황으로 높였으나 이미 실권은 상실한 명목상 황제였다. 이때 경제가 즉위하여 그의 생모인 현비 오씨는 황태후로 격상되었다.
 
에센 타이시는 오이라트 연맹의 초로스(Choros) 부족 지도자인 토곤(脫懽)의 아들이다. 아버지 토곤은 외몽골을 통일했다. 에센 타이시 카안은 북원의 카안으로 휘는 오이라트 에센(衛拉特 也先), 연호는 첨원(添元), 중국식 존호는 천성황제(天聖皇帝)이다. 청나라 때의 이름은 액삼(額森)이었다. 에센 카안은 오이라트부와 주변 지역을 통합하고, 1452년부터 1454년까지 몽골지역을 일시적으로 통일하여 몽골제국 제29대 대칸(재위 1453~1454)이 되었다. 그는 몽골제국 제27대 타이순 칸에 의해 몽골 태사에 봉해지고, 1453년 직접 대칸에 올랐다.
 
오이라트와 명나라 지도(사진:위키백과)
 
에센 카안이 명나라에서 받은 작위는 경순왕(敬順王)이고, 즉위 직전의 공식 직책은 태사회왕(太師淮王), 오이라트 도총병(瓦剌都总兵), 다르칸(答剌罕) 대두목(大頭目), 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이었다. 보르지긴 씨족(黃金氏族)이 아닌 씨족 출신 최초의 몽골 대칸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북원(北元)의 ‘대칸’이라고 선언했다. 명나라 《영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했으며, 다이온 텡게를크 복드 카안(大元田盛大可汗, 大元天聖大可汗)이라 칭했다고 기록했다.
 
1457년, 명나라 조정은 오이라트(瓦剌)와의 화약을 맺어 태상황 영종을 고국에 돌아오게 했다. 경제는 영종을 반갑게 맞이하고 태상황으로 받들었지만, 남궁(南宮)에 가두며 금의위를 통해 궁문을 굳게 잠그고 엄격히 통제했다. 이후 푸젠성과 절강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병부시랑 우겸이 모두 진압했다. 황제 경제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되자, 중신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중에 1456년 오이라트를 상대로 큰 공을 세웠던 무장 석형(石亨, ?~1460)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궁에 갇힌 영종(주기진, 朱祁镇)을 복위시킬 마음을 품고 주변 인물들을 한 명씩 포섭하여 상의한 뒤, 환관 조길상(曹吉祥), 도독 장월(张軏), 도찰원 좌도어사 양선(杨善), 태상경 허빈(许彬) 및 좌부도어사 서유정(徐有贞) 등과 함께 일을 공모했다.
 
명나라 제6대 황제 영종(英宗, 正統帝)(사진:위키백과)
 
그사이 영종은 비밀리에 환관 조길상과 내통하여 정세를 살폈고, 석형, 서유정 등 영종을 따르던 세력들과 함께 밤중에 남궁의 문을 부수고 진입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을 ‘탈문의 변(奪門之變)’, ‘남궁의 변’이라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 복위에 성공한 영종은 동생 경제를 폐위해 성왕(郕王)으로 강등시켰다. 경제는 한 달 뒤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명나라 제8대 황제로 즉위한 영종은 연호를 천순(天順)으로 바꾸었다. 정변을 통해 정통제가 다시 황제로 복위하자, 석형은 복위 1등 공신이 되어 충국공(忠國公)에 봉해지고 군권을 장악했다. 석형은 평소 감정이 좋지 않은 병부상서 우겸(于謙)을 시기하여, 충신인 우겸이 외번을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누명을 씌어 체포하고 바로 처형했다. 석형은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권세가 오르자 더욱 오만해져 자신의 친인척과 문하생들을 요직에 등용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1459년, 막강한 군사 권력을 쥐며 조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석형의 조카 석표(石彪)가 사사로이 용포를 감춘 것이 감찰에 발각되었다. 이것은 구족을 멸할 수 있는 대죄였다. 게다가 석표는 몽골 부족(北元)이 황제에게 보낸 공녀를 중간에서 차지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황제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모독이었다.
 
사극 대명풍화(大明風華)(사진:채널차이나)
 
황제로 복위한 천순제는 재상 이현(李賢)에게 현재의 정치 상황과 황제의 처신을 물었다. 탈문의 변 이후 정치를 주도하며 조정의 안정을 이끌던 이현은 “탈문(奪門)이란 두 글자는 이제 쓰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천하는 원래 황제의 것이었으니, 황제의 수레를 맞이한다는 뜻의 영가(迎駕)라고 표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조언했다. 이에 7년간 남궁에 연금되어 고생했던 황제는 재상 이현의 말에 크게 깨닫고 “다시는 탈문(奪門)을 언급하지 마라.”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후 석표(石彪)가 역모를 꾀한 혐의로 체포되고, 숙부이자 무신 세력의 우두머리인 석형 역시 연루되어 1460년 감옥에 투옥된 후 옥사했다.
 
천순제는 경제의 생모인 오태후를 황태후에서 폐위하는 대신, 서모(庶母)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아버지 선덕제의 후궁 시절 봉호인 현비(賢妃)로 돌려놓았다. 오현비는 1461년에 사망하여 사후에 영사현비(榮思賢妃)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는 남편인 선덕제의 능묘(경릉)에 합장되지 못하고 별도로 묻혔으나, 훗날 남명(南明) 시기에 이르러 황태후로 복권되었다.
 
중국문화채널 채널차이나는 개국 5주년을 기념하여 명나라 배경의 드라마 대명풍화(大明風華)를 62부작(중국 64부작)으로 특별 기획하여 2020년 국내에 방영하였다. 필자는 이 드라마를 통해 명나라 국운의 변곡점인 ‘토목의 변’을 처음 접했다. 당시 명나라의 조정은 환관 정치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이후 명나라의 국운(國運)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1592년 일본이 일으킨 동아시아 국제전쟁인 임진전쟁(壬辰戰爭,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파병하여 막대한 전비(戰費)를 소모하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壬辰倭亂)’이란 용어는 문신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1614년에 완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최초로 기록했다. 이수광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 1541~1609)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추풍령, 청주, 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다 삼도근왕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동년 음력 6월, 일본 무장 와키지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1554~1626)가 이끄는 1,600명의 왜군에게 야간 기습을 당해 용인전투에서 패했다. 이후 그는 의주로 향해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로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격문을 짓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은 1592년 4월 14일 조선을 침략해 빠르게 북상을 시도했다. 선조는 4월 29일 한밤중에 피난길(蒙塵)에 오르면서, 과거 관직을 삭탈 당하고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 갔다가 풀려나 경기도 광주(廣州)에 머물던 윤두수(尹斗壽, 1533~1601)와 윤근수(尹根壽, 1537~1616) 형제를 불러 우의정과 예조판서에 임명한 뒤 간곡하게 도움을 청했다.
 
윤두수는 동생 윤근수가 중국어에 능통한 점을 고려해 그를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윤근수는 6개월 동안 조선과 명나라를 왕래하며 경략 송응창(宋應昌, 1536~1606), 이여송 제독 등과 임진왜란(壬辰倭亂) 전황을 상의했다. 그는 요동도사(遼東都事)를 6번, 광녕부(廣寧府)를 3번 방문해 구원병 5만 명을 요청하고, 긴급한 전쟁 물자를 확보했다. 1592년 12월, 제독 이여송이 지휘하는 약 5만 명의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윤근수는 자신의 문집인 《월정선생문집(月汀先生文集)》의 글 속에서 ‘임진왜란’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梁曉天 著 《萬曆朝鮮戰爭全史》(사진:大都會文化事業有限公司) 2026년 3월 30일 발간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을 萬曆之役, 壬辰倭亂, 壬辰倭禍, 朝鮮之役, 萬曆東征之役, 東事, 倭事, 東援一役, 倭政援朝, 抗倭援朝, 倭犯朝鮮 등 다양하게 부른다. 반면 일본 학계는 이 전쟁을 朝鮮陣, 高麗陣, 朝鮮征伐, 征韓, 朝鮮役, 朝鮮出兵, 文祿·慶長の役, 朝鮮侵略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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