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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2〉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에 위치한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 말사로 절집 규모는 작지만,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대단한 사찰이다. 과거 화암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심사와 함께 많은 불경과 서적을 출간하였다.
운주면에 있는 안심사는 638년(신라 선덕여왕 7)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도량이다. 자장율사가 처음 이곳에 도착하여 주변 산세를 살펴보니, 산세가 부처님이 열반에 든 모습과 닮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절’이라는 뜻으로 안심사(安心寺)로 이름을 지었다.
안심사 사적비(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송정숙 교수는 〈서산대사의 《심법요초(心法要抄)》에 관한 서지적 연구 논문에서 1664년에 간행된 안심사판 《심법요초(心法要抄)》를 분석하며 안심사에서 활동했던 백곡 처능의 활약을 기록했다. 《심법요초》은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이 禪의 요지를 간략히 서술한 책이다.
1759년(영조 35)에 건립된 안심사 사적비는 높이 215㎝, 너비 104㎝, 두께 38㎝로 사찰의 역사와 부도전의 건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비문은 1행 58자로 비의 전후좌우 4면에 새겼는데, 앞면의 비문은 1658년 안심사의 승려 백곡 처능(處能)이 주지 명능(明能)의 뜻을 전하며 안흥사를 중흥하려고 부탁하여 우의정 김석주(金錫胄, 1634~1684)가 안심사의 사적을 찬(撰)하였다. 이것을 100여 년 후에 이조판서를 지냈던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본문 글씨를 썼다. ‘대둔산안심사비(大芚山安心寺碑)’라는 전액(篆額)은 당대 최고 명필이며 금석학의 대가인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썼다. 유척기는 경주 신라시조왕비, 청주 만동묘비 등의 글씨를 남겼다. 그는 사도세자를 보호하려고 애쓴 온건파로 기국(器局: 사람이 지닌 재능과 포부, 마음의 크기)이 중후하고 고금(古今)의 일에 박통해 영조가 중용하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사적비 비문 내용을 종합하면 안심사는 다섯 차례 중창(重創)하였다. 638년에 자장법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뒤 875년(헌강왕 원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고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조구(祖求) 화상에 의해 중창되었다. 그 후 고려를 거쳐 1601년(선조 34) 수천화상(守天和尙)에 의해 중창되고, 1701년(숙종39)에 5번째로 중창되었다.
안심사 부도전(사진:안심사)
안심사 주지 명응(明應)이 절에 전해 내려오던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수십 명의 시주를 받아 5개월에 걸쳐 금강계단과 석종형 부도전을 건립하였다. 금강계단이 건립되고 나서 소식을 들은 영조 임금이 1759년(영조 35)에 글씨를 써서 안심사에 보내 주었다. 이에 명응(明應)이 이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어서각(御書閣)를 세웠다. 부도전에는 고려시대에 유행된 석종형 부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 칼을 든 무인상(武人像)을 배치하였다. 무인상은 눈썹이 많고 눈은 부릅뜨고 있으며 코는 작은 편이나 우락부락한 모습이다.
안심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이후 1969년 비구니 현응이 적광전과 요사를 건립했다. 2003년 서안 일연(棲岸一衍, 1947~ )이 주지로 부임해 사찰을 둘러보고 조급하게 불사를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일연은 1965년 출가하여 1980년에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하고 선방에서 정진했다. 이후 봉녕사 승가대학에서 처음 강의를 하고, 1992년 세주당(世主堂) 묘엄(妙嚴, 1931~2011) 스님에게 전강을 받았다. 그리고 1994년에 동학사 주지 겸 동학사승가대학 학장이란 소임을 맡고, 2011년 스승 묘엄이 전계를 내려주었다.
완주 안심사 삼존불 점안법회(사진:불교신문)
일연 주지는 보석사에 있던 250년 된 안심사 동종을 되찾아오고, 조선 세조 때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하던 기관인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사 판 경전들을 찾아 전국 박물관을 찾아 살펴보고, 문화재 지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주지 일연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한 사찰 멸실 자료와 공문서(육군 제9부대 민사 제15호)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10여 년 동안 꾸준히 국가에 책임론을 제기했다.
완주 안심사(사진:삼천리 잡지)
1950년 10월 1일 오후 7시경, 전라북도 완창리 안심사는 북한군의 월북 경로에 있다는 이유로 국군이 철수하면서 작전상 불가항력으로 육군 8사단 제88연대 제3대대(징발 집행관 중위 김□▢)가 사찰을 징발해 대웅전, 명부전, 적설루(積雪樓), 향적전(香積殿), 약사암, 칠성각 6동을 소각해버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재가되어 사라졌다. 경판도 모두 사라지고 사찰 어귀 부도군과 금강계단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후 1966년 8월 25일 안심사 주지였던 김창수가 운주면장과 완창리 이장, 마을 주민의 서명을 받아 국방부에 제출한 ‘미확인 징발재산신고서’를 통해 아군에 의한 소각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안심사 주지의 노력으로 2006년 설계비 2억 원을 확보하고 불사를 시작하였다. 완주군이 2009년에 복원을 추진하여 대웅보전은 2009년에 착공해 2014년 완공하고 단청을 마치고 65년 만에 총공사비 52억 원을 들여 2015년 11월 1일 대웅보전을 낙성하고 삼존불 점안법회를 봉행했다.
완주 안심사 금강계단(사진:국가유산청)
완주 안심사 금강계단은 1759년 이전에 조성된 부처의 치아사리(齒牙舍利)와 의습(衣襲)을 봉안한 불사리탑(높이 176㎝), 네 구의 신장상(높이 110㎝∼133㎝), 넓은 기단을 형성한 방단의 석조 조형물은 그 조형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단층 계단 면석의 연화문과 격자 문양 등의 조각 수법은 장식성과 섬세함이 부각되어 매우 우수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으며, 신장상의 조각 또한 갑옷과 신체의 세부 표현에 있어 매우 세련되고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고 있어 정부는 2005년 6월 보물 제1434호로 지정하였다.
만해 선사(사진:나무위키)
1931년 7월,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가 산골 절 안심사에 상당수의 언해본 경판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차를 타고 연산역에 내려 자동차를 타고 안심사를 방문했다. 절에는 선조의 명으로 1575년(선조 8)에 판각되어 보관된 언해본 목판이 있었다. 원래 절에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판전(版殿)이 따로 있었으나 무너져 대웅전에 보관했다.
만해는 대웅전에 있는 한글 경판 원본(금강경, 원각경, 부모은중경, 유합, 천자문)을 친견하고 벅찬 감동에 2,000여 장의 경판을 분류하기 시작해, 다음날 해가 질 무렵에 판본의 정리를 마쳤다. 당시 낙질이 거의 없는 판본이 5종이나 남아 있었다. 〈원각경〉 〈금강경〉 〈은중경〉 등 경전이 3종, 여기에 〈천자문〉과 〈유합〉의 판본까지 있었다. 남아 있는 언해본 판본의 수는 무려 655판에 이르렀다. 이를 모두 인출(印出)하게 되면 1,36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만해 선사가 경판을 발굴하자, 조선총독부에서 인출 비용을 전액 대주겠다고 회유해 왔지만, 만해는 민족의 보물을 일제의 손에 넘길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민족의 힘으로 간행하려고 뜻있는 지역 유지(有志) 고재현 등이 출연한 후원금과 회원을 모아 재원을 마련해 1932년 12월 영인본 불경을 독자적으로 인쇄(印刷)하고 배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만해는 ‘국보 잠긴 안심사’란 제호로 〈삼천리〉 1935년 7월호에 글을 실었다. 만해는 이후 판본을 경성으로 이전하거나 큰 절로 이전하는 방안을 구상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외금강 신계사(사진:남북경협뉴스)
1932년 월간 불교잡지인 《불교》지에서 독자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조선불교 대표 인물 인기투표’를 실시해 독립투쟁과 불교 혁신 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55세) 선사가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투표 결과를 보면 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으로 《불교》지 93호에 발표되었다. 만해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불교계 독립운동의 상징이다. 현재 불교계의 항일 독립투쟁 국가유공자가 100여 명이 넘는데도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65년(고종 2), 지담 대사는 경기도 포천 금주산에 작은 암자를 짓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1890년경 지담 대사는 금강산 신계사에 기도하러 갔다가 청년 홍범도(洪範圖, 1868~1943)를 상좌로 받아들였다.
1913년 홍범도 장군(사진:독립기념관)
홍범도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후손으로 알려진 지담(止潭) 대사의 상좌승이 되어 2년간 수도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이순신 장군의 위업과 민족의 역사를 배우며 항일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후 환속하여 사냥꾼으로 평범하게 살았다. 1907년 일본의 조선 군대 해산과 총포령에 맞서 1907년 11월 15일 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300명의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해 의병들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부인 이옥구를 납치하여 남편의 귀순을 회유했지만, 부인은 강하게 거부해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홍범도 의병장이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치며 항일전을 펼치자, 일본군은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섬멸전에 나섰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홍범도는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1908년 11월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914년 중국 흑룡강성 밀산에 자리를 잡고 소학교와 무관학교를 설립에 참여했다. 그는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에 매진하며 장기전에 대비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청산리전투 전적지 어랑촌(사진:독립기념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운동을 계기로, 같은해 3월 17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모든 독립투쟁 단체가 모여 통합하여 대한국민의회를 결성했다. 이곳에서 홍범도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8월 하순 간도 지방으로 이동한 대한독립군은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한 후, 10월 21일부터 6일간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은 탁월한 전략과 리더십으로 독립군 연합부대 3,000명을 이끌고 최강의 일본군 30,000명이 넘는 병력을 상대로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 완구루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유기적인 게릴라전과 매복 기습작전으로 교전하며 적을 대파했다.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독립군 연합체는 우세한 화력의 일본군을 제압하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며,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를 쟁취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