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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콘티오스와 키디페 – 사과에 새긴 맹세
케오스의 청년 아콘티오스는 델로스의 축제에서 낙소스의 처녀 키디페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는 아르테미스를 두고 자신과 혼인하겠다는 문구를 사과에 새겨 키디페가 소리 내어 읽게 한다. 뜻하지 않게 맹세에 묶인 키디페는 다른 남자와의 혼인을 앞둘 때마다 병들고, 세 번째 혼인마저 무산되자 아버지는 아폴론의 신탁을 찾는다. 마침내 사과에 새긴 맹세의 진실이 밝혀지고, 아콘티오스와 키디페는 아폴론의 신탁에 따라 혼인한다.
1.1 케오스에서 온 아콘티오스
에게해의 작은 섬 케오스의 도시 이울리스에는 아콘티오스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에욱산티오스의 후손으로, 섬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청년으로 이름나 있었다. 어느 해 델로스에서 아폴론에게 황소를 바치는 큰 제사가 열리자, 아콘티오스도 케오스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성스러운 섬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평범한 여행이었지만, 델로스에서 그의 삶을 바꿀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델로스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태어난 곳으로 여겨져 에게해 여러 섬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성지였다. 항구에는 순례자와 제물을 실은 배들이 잇따라 닿았고, 성소 주변에서는 희생 제사와 행렬이 이어졌다. 아콘티오스 역시 사람들 사이를 거닐며 낯선 섬의 축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던 그였지만, 델로스에서는 오히려 그 자신이 에로스의 화살을 맞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성소 가까이에서 그의 시선이 한 처녀에게 멈추었다. 낙소스에서 제사를 드리러 온 키디페였다. 아콘티오스는 처음 보는 그녀에게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조금 전까지 눈에 들어오던 제단과 행렬도 더 이상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케오스에서 델로스로 건너온 여행은 그 순간부터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의 기억이 아니라, 키디페를 처음 본 날의 기억으로 바뀌었다.
델로스 항구에 도착해 성소로 향하는 아콘티오스
1.2 델로스에서 키디페를 보다
키디페는 낙소스의 프로메토스 가문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처녀였다. 아콘티오스가 에욱산티오스의 후손이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이름 있는 혈통을 이었고, 많은 집안에서 아들의 아내로 맞고 싶어 할 만큼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칼리마코스는 두 사람을 각각 케오스와 낙소스에서 온, 섬 사람들 가운데 빛나는 별과 같은 젊은이들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키디페는 아직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아콘티오스는 사람들에게 물어 그녀의 이름과 고향을 알아냈다. 키디페는 낙소스에서 델로스의 제사에 왔으며, 축제가 끝나면 다시 낙소스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시녀가 곁에 있는 처녀에게 갑자기 사랑을 고백하기는 어려웠다. 몇 번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뒤따랐지만 마음을 전할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축제가 끝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아콘티오스는 초조해졌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키디페는 곧 바다를 건너 낙소스로 돌아가고, 자신도 케오스로 떠나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는 키디페가 델로스를 떠나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그녀의 마음에 남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평범한 청혼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사랑 앞에서, 마침내 그는 뜻밖의 계책을 생각해 냈다.
아르테미스 성소 근처의 키디페를 바라보는 아콘티오스
1.3 이루기 어려운 사랑
아콘티오스는 키디페에게 직접 자신의 사랑을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섬에서 왔고, 키디페의 혼인은 그녀의 아버지와 집안이 정할 일이었다. 더구나 델로스의 축제에서 잠시 마주친 낯선 청년이 곧바로 혼인을 청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질 까닭도 없었다. 아콘티오스는 키디페가 섬을 떠나기 전에 자신을 기억하게 할 방법을 궁리하며 성소 주변을 거닐었다.
그의 생각은 점점 한 가지에 모였다. 키디페에게 약속을 받아 낼 수 있다면, 두 사람이 헤어진 뒤에도 그 약속이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발적으로 낯선 사람과 혼인을 맹세할 리는 없었다. 아콘티오스는 신의 이름이 사람의 말에 힘을 준다는 사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델로스는 아르테미스가 태어난 성스러운 섬이었고, 그 성소에서 신을 두고 한 맹세는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아콘티오스는 한 가지 계책을 떠올렸다. 키디페가 자신의 뜻을 깨닫기도 전에 아르테미스를 두고 혼인을 맹세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신의 이름이 들어간 문장을 그녀 자신의 입으로 읽게 한다면, 그 말은 단순한 장난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사랑을 고백하여 마음을 얻는 대신 맹세로 그녀를 붙잡으려 한 것이다. 아콘티오스는 마침내 그 계책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소 주변을 거닐며 혼인의 계책을 떠올리는 아콘티오스
1.4 사과에 맹세를 새기다
아콘티오스는 사과 하나를 구해 그 표면에 짧은 문장을 새겼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글이 아니라, 키디페가 직접 읽게 만들기 위한 맹세의 문장이었다. 아르테미스를 두고 자신, 곧 아콘티오스와 혼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키디페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다면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여신의 이름을 걸고 혼인을 약속한 셈이 되었다. 그의 계책은 오직 그 한순간에 달려 있었다.
그는 키디페가 아르테미스의 성소에 있을 때를 노렸다. 직접 다가가 사과를 건네면 경계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오가는 틈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기다렸다. 키디페 곁에는 시녀가 있었고, 그녀는 아직 자신을 지켜보는 아콘티오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사과를 손에 쥔 채 키디페와 시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그것을 바닥에 굴려 보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키디페가 사과를 무시하거나 글을 읽지 않는다면 그의 계책은 그대로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글자를 발견해 소리 내어 읽는다면 아르테미스의 이름과 아콘티오스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함께 나오게 된다. 붉은 사과는 성소의 돌바닥을 천천히 굴러가 키디페 곁에 있던 시녀의 발치에 멈추었다. 사랑에 빠진 청년이 새긴 몇 글자가 두 사람의 운명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사과 표면에 혼인의 맹세를 새기는 아콘티오스
2.1 발아래 굴러온 사과
시녀의 발치까지 굴러온 사과를 그녀가 먼저 발견했다. 누가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는 열매였지만, 표면에는 분명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녀는 신기한 듯 사과를 집어 들고 키디페에게 건넸다. 축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물이나 장식물과는 달랐으므로, 키디페 역시 자연스럽게 그 열매에 시선을 두었다.
아콘티오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새긴 글이 키디페의 손에 들어갔지만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글을 읽지 않고 사과를 버린다면 모든 계획은 끝이었다. 그러나 키디페는 표면을 살피다가 새겨진 문장을 발견했다. 누가 왜 이런 말을 적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녀는 글을 확인하려고 사과를 돌려 보았다.
그 순간 아콘티오스가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키디페는 글자를 따라가며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장난스러운 문장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과가 놓인 곳은 델로스였고, 가까이에는 아르테미스의 성소가 있었다. 키디페가 첫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아콘티오스가 준비한 계책은 단순한 사과의 장난을 넘어 신 앞에서 이루어지는 맹세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과를 주워 키디페에게 건네는 시녀
2.2 글을 소리 내어 읽다
키디페는 사과에 새겨진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아르테미스를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아콘티오스를…” 글이 자신의 혼인에 관한 말임을 깨닫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마지막 말을 제대로 끝맺기도 전에 놀라 사과를 내던졌지만, 이미 아르테미스를 두고 한 맹세의 핵심은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온 뒤였다.
키디페는 그 문장을 자신이 선택해 만든 것도 아니고, 아콘티오스에게 약속하려는 뜻으로 읽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새긴 글을 우연히 읽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부끄럽고 불쾌한 장난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아콘티오스가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인을 약속할 이유도 없었다.
아콘티오스는 키디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의 말이 발음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키디페는 곧 사과에서 멀어졌고, 축제의 사람들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가 버린 것은 열매뿐이었다.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맹세는 델로스의 성소에 남았고, 두 사람이 각자의 섬으로 돌아간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과의 글을 읽다 놀라 열매를 내던지는 키디페
2.3 아르테미스가 들은 맹세
키디페에게는 뜻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아르테미스에게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맹세였다. 델로스는 여신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성스러운 섬이었고, 키디페가 그 말을 읽을 때 여신의 성소도 가까이에 있었다. 후일 아폴론이 밝히게 되는 것처럼 아르테미스는 바로 그 맹세를 들었다. 키디페는 속임수에 걸려들었지만, 신 앞에서 한 말은 인간의 의도만으로 지울 수 없었다.
아콘티오스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키디페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도 없었고, 두 집안 사이에 혼인 이야기가 오간 것도 아니었다. 델로스에서 이루어진 것은 오직 사과에 새긴 문장을 읽은 한순간뿐이었다. 두 사람의 삶은 여전히 케오스와 낙소스라는 서로 다른 섬에 놓여 있었다.
키디페는 그 일을 마음에서 떨쳐 버리려 했다. 자신이 진심으로 맹세한 것이 아니므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 맹세는 쉽게 사라지는 말이 아니었다. 아콘티오스는 그 맹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키디페가 약속을 지킬지 알 수 없어 마음을 놓지 못했다. 델로스의 축제는 끝나 가고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사과는 버려졌지만, 그 위에 새겨졌던 문장은 이제 보이지 않는 약속이 되어 두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성소 앞 키디페의 맹세를 지켜보는 아르테미스
2.4 두 사람은 각자의 섬으로
축제가 끝나자 키디페는 낙소스로 돌아갔다. 아콘티오스도 케오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델로스에서 그렇게 가까이 있었던 두 사람은 다시 바다를 사이에 두게 되었다. 키디페에게 그날의 사과는 잊고 싶은 우연한 사건이었지만, 아콘티오스에게는 자신의 삶을 건 약속이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키디페를 잊지 못했다.
칼리마코스의 전승에는 사랑에 시달리던 아콘티오스가 들판과 숲을 돌아다니며 나무껍질에 키디페의 이름을 새겼다는 흔적도 남아 있다. 델로스에서 한 번 본 처녀의 이름은 케오스의 나무들 위에 반복해서 새겨졌다. 그는 자신이 만든 맹세가 언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멀리 낙소스에 있는 키디페를 계속 그리워했다.
낙소스에서는 키디페의 혼인을 둘러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케익스는 딸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골라 혼인을 정하려 했다. 키디페도 델로스의 일을 집안에 말하지 않은 채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사과에 새긴 글은 이미 지나간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혼례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델로스에서 불린 아르테미스의 이름이 다시 두 사람의 운명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케오스의 나무껍질에 키디페의 이름을 새기는 아콘티오스
3.1 첫 번째 혼인을 막은 병
낙소스로 돌아온 키디페에게 아버지 케익스가 정한 혼인이 다가왔다. 집안에서는 신랑을 맞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고, 혼인 침상이 마련되었으며 희생 제물도 준비되었다. 혼례를 앞둔 밤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했다. 다음 날이면 제단 앞에서 희생될 황소가 준비되어 있었고, 집안 사람들은 곧 시작될 혼례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로 그때 키디페의 몸에 갑작스러운 이상이 나타났다.
저녁이 되자 그녀의 얼굴에는 심한 창백함이 돌기 시작했고, 당시 사람들이 ‘신성한 병’이라 부르던 격렬한 발작이 덮쳤다. 병은 단순한 열병으로 끝나지 않았다. 칼리마코스는 그 고통이 키디페를 하데스의 집 문 가까이까지 몰고 갔다고 전한다. 아침까지 혼례를 준비하던 집안은 순식간에 딸의 생명을 걱정하는 곳으로 변했고, 신랑을 맞을 행렬과 제사도 모두 중단되었다.
그런데 혼인이 무산되고 시간이 지나자 키디페는 차츰 건강을 되찾았다. 가족들은 큰 병에서 살아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그 까닭은 알지 못했다. 키디페 역시 델로스에서 읽었던 사과의 문장을 떠올렸을 수 있지만, 자신의 병이 그 일과 관계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케익스는 딸이 회복하자 다시 혼인을 추진했다. 그러나 한 번 끝난 듯했던 병은 다음 혼례를 앞두고 다시 찾아오게 된다.
혼례를 앞두고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쓰러진 키디페
3.2 세 번 무너진 혼례
키디페가 건강을 되찾자 집안에서는 두 번째로 혼례 준비가 시작되었다. 다시 혼인 침상이 마련되고 신랑을 맞을 날이 정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키디페는 다시 병들었고, 이번 병은 오랫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칼리마코스는 그녀가 나흘마다 되풀이되는 사일열에 시달리며 일곱 달 동안 앓았다고 전한다. 혼례는 다시 미뤄졌고 가족의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
긴 병이 지나간 뒤 키디페는 또다시 회복했다. 케익스는 두 번의 불행을 우연으로 여기고 딸의 혼인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신랑과 날짜를 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혼례가 가까워지자 이번에는 치명적인 오한이 키디페를 덮쳤다. 두 차례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은 혼인을 앞두고 갑자기 무너졌고, 세 번째 혼례마저 중단되었다.
같은 일이 세 번 되풀이되자 더 이상 단순한 병으로 볼 수 없었다. 혼인을 준비하면 키디페가 병들고, 혼인이 무산되면 다시 회복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케익스는 네 번째 혼례를 서둘러 준비하지 않았다. 인간의 의술이나 우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딸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어느 신이 이 혼인을 막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마침내 아폴론의 신탁을 찾기로 결심했다.
다시 병들어 혼례를 치르지 못하는 키디페
3.3 아폴론의 신탁
세 번이나 혼례가 무산되자 케익스는 더 이상 네 번째 혼인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는 딸에게 반복해서 찾아오는 병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폴론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신탁에서 아폴론은 낙소스의 누구도 알지 못했던 델로스의 일을 밝혀냈다. 키디페의 혼인을 막고 있는 것은 새로운 병도, 다른 구혼자도 아니었다.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두고 이미 이루어진 오래된 맹세였다.
아폴론은 키디페가 델로스에서 아콘티오스를 신랑으로 맞겠다고 맹세했을 때 자신의 누이 아르테미스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고 말했다. 여신은 키디페의 입에서 나온 말을 직접 들었으며, 그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할 때마다 그 맹세가 깨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케익스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혼례를 준비할 때마다 딸이 병들었던 까닭은 이제 분명해졌다.
아폴론은 아콘티오스가 키디페에게 어울리지 않는 신랑도 아니라고 알려 주었다. 케익스는 아테나이의 옛 왕 코드로스의 후손이었고, 케오스의 아콘티오스는 제우스 아리스타이오스 이크미오스를 섬기는 사제 가문의 후손이었다. 신은 두 사람의 결합을 납과 은을 섞는 것이 아니라 일렉트룸과 빛나는 금을 합치는 것에 비유하며, 딸이 한 맹세를 이루게 하라고 권했다. 케익스는 신탁을 듣고 낙소스로 돌아갔다.
아폴론의 신탁 앞에서 맹세의 진실을 듣는 케익스
3.4 맹세가 이루어지다
케익스는 낙소스로 돌아오자 키디페에게 델로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아폴론이 이미 사과와 맹세의 일을 밝혔으므로 더 이상 숨길 까닭도 없었다. 키디페는 아르테미스의 성소에서 사과를 받았고, 그 표면에 새겨진 문장을 별다른 생각 없이 소리 내어 읽었던 일을 처음부터 이야기했다. 자신이 원해서 한 약속은 아니었지만, 여신의 이름을 걸고 아콘티오스와 혼인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것은 사실이었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케익스는 아폴론의 신탁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신랑과의 혼인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러자 키디페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이제 남은 것은 아콘티오스가 낙소스로 가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키디페를 그리워하며 기다렸던 그는 바다를 건너 ‘디오니소스의 섬’ 낙소스로 향했고, 이번에는 계책이나 우연이 아니라 두 집안이 인정한 신랑으로 그녀 앞에 섰다.
마침내 아콘티오스와 키디페의 혼례가 열렸다. 이번에는 혼례를 방해하는 병도 찾아오지 않았고, 키디페의 벗들은 중단되지 않은 혼례 노래를 불렀다. 델로스에서 우연히 굴러온 사과 한 알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렇게 두 사람의 결혼으로 끝났다. 칼리마코스는 그들의 후손인 아콘티아다이 가문이 훗날 케오스의 이울리스에서 이름 있는 가문으로 이어졌다고 전한다. 사과에 새긴 짧은 맹세는 마침내 현실의 혼인으로 이루어졌다.
낙소스에서 혼례를 올리는 아콘티오스와 키디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