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라디온 – 트로이를 지킨 성상
팔라디온은 아테나가 죽은 벗 팔라스의 모습을 새겨 만든 나무 성상이며, 다른 전승에서는 일로스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형상으로 전해진다. 일로스는 성상을 일리오스의 신전에 모셨고, 팔라디온이 성벽 안에 있는 동안 트로이는 함락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나 전쟁의 마지막에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성상을 훔치면서 트로이의 운명은 기울기 시작했다. 후대의 로마 전승에서는 팔라디온이 아이네이아스와 함께 로마로 이어지는 성물이 되었다.
1.1 팔라스의 이름을 지닌 성상
한 전승에서는 아테나가 트리톤의 곁에서 자랐고, 그의 딸 팔라스와 함께 무기를 익혔다고 한다. 두 소녀는 나뭇가지를 창처럼 휘두르는 놀이에서 시작해 실제 창과 방패를 맞대는 훈련으로 나아갔다. 팔라스는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어느 날 팔라스가 창을 내지르자 제우스는 아테나를 지키려 아이기스를 들어 올렸다. 방패에 놀란 팔라스는 피할 틈을 놓쳤고, 아테나의 창끝이 그녀를 찔렀다. 아테나는 친구를 끌어안았지만, 팔라스는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아테나는 팔라스의 모습을 나무에 새기고 아이기스를 가슴에 둘러 제우스 곁에 세웠다. 뒤에 엘렉트라가 신의 폭력을 피해 그 곁으로 숨자, 제우스는 팔라디온과 아테를 일리오스 땅으로 던졌다고 한다. 친구를 기리던 형상은 트로이의 성물이 되었다.
제우스의 아이기스에 놀라 창에 찔리는 팔라스
1.2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형상
세월이 흐른 뒤 팔라디온의 운명은 트로이 왕가의 시조들과 얽혔다. 다르다노스의 후손인 일로스는 프리기아에서 열린 경기에서 우승했다. 그러자 그곳의 왕은 신탁에 따라 그에게 얼룩소 한 마리를 주며, 소가 누운 곳에 새 도시를 세우라고 했다. 그는 소가 이끄는 길을 따라갔고, 소가 프리기아의 아테 언덕에서 멈춰 서자 그 자리에 성채를 세우기 시작했다. 새 도시는 훗날 일리오스, 곧 트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로스는 자신의 힘만으로 도시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우스에게 도시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징표를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새벽이 지나고 하늘이 맑게 열린 어느 날, 일로스의 천막 앞에 낯선 형상이 떨어져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옮겨 놓은 흔적은 없었고, 창을 높이 든 여신의 모습은 땅 위에 세워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팔라디온이었다.
일로스는 성상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성상의 높이는 세 큐빗쯤 되었고, 두 발은 붙어 있었으며, 한 손에는 창이, 다른 손에는 실잣대와 방추가 들려 있었다. 전쟁을 준비하는 여신의 힘과 도시의 삶을 돌보는 질서가 한 형상 안에 함께 들어 있었다. 일로스는 그것을 단순한 조각상으로 여기지 않고, 제우스가 자신에게 맡긴 표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 도시의 가장 신성한 자리에 모실 것을 명령했다.
일로스의 천막 앞에 하늘에서 내려온 팔라디온
1.3 다르다노스에서 일리오스로
팔라디온이 트로이에 온 경로는 모든 전승에서 같지 않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제우스가 성상을 다르다노스에게 맡겼다고 한다. 다르다노스는 사모트라케를 떠나 트로아스 땅에 이르러 테우케르 왕의 환대를 받았고, 그곳에 자신의 도시를 세웠다. 그는 테우케르의 딸 바티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왕가를 열었고, 그의 이름은 훗날 트로이의 가장 오래된 뿌리로 남았다.
다르다노스의 뒤를 이은 왕들은 땅과 성벽을 넓혀 갔다. 에리크토니오스와 트로스의 시대를 지나 왕국은 트로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트로스의 후손 일로스는 새로운 성채를 세우며 나라의 중심을 옮겼다. 그래서 어떤 전승에서는 팔라디온이 다르다노스의 손에서 후손에게 전해졌다고 말하고, 다른 전승에서는 일로스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늘에서 직접 내려왔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두 전승이 가리키는 뜻은 같았다. 팔라디온은 어느 날 우연히 들어온 물건이 아니라 트로이 왕가의 시작과 함께 내려온 성물이었다. 다르다노스에게서 이어진 혈통과 일로스가 세운 성채는 하나의 왕국으로 합쳐졌고, 그 중심에는 신성한 형상이 놓였다. 왕이 바뀌고 도시의 이름이 달라져도 성상은 처음부터 트로이의 운명과 함께 움직였다.
다르다노스에게 전해지는 신성한 팔라디온
1.4 트로이 왕가의 성물이 되다
일로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팔라디온을 위해 성벽 안에 신전을 세웠다. 성상은 왕의 사적인 보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의지하는 성소의 중심에 놓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 도시의 건설을 허락한 징표이자, 그 땅을 지킬 책임을 맡긴 신호로 여겼다.
왕이 바뀌고 성벽의 모습이 달라져도 팔라디온의 자리는 옮겨지지 않았다. 왕가와 사제들은 성상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도시가 위태로울수록 성소의 안위를 먼저 살폈다. 팔라디온은 왕과 백성이 함께 지켜야 할 성물이었다.
다르다노스의 혈통과 일로스가 세운 일리오스의 이름은 성상 앞에서 이어졌다. 라오메돈과 프리아모스의 시대에도 팔라디온은 신전 안에 남았다. 사람들에게 그것은 나무 형상이면서, 트로이가 아직 버려지지 않았다는 약속이었다.
트로이 신전 중심에 모셔지는 팔라디온
2.1 신성한 형상을 바라본 일로스
한 전승에서는 팔라디온을 인간이 정면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신상으로 여겼다. 어느 날 아테나의 신전에 불이 번졌다는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다. 불길이 성소를 삼키기 전에 성상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로스는 누구의 만류도 듣지 않고 신전 안으로 달려갔다.
일로스는 연기와 불꽃 사이에서 팔라디온을 붙잡았다. 그러나 손으로 성상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는 그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그의 두 눈이 어두워졌고, 신전의 불빛과 사람들의 외침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왕은 성물을 구해 냈지만, 신성한 경계를 넘은 대가로 빛을 잃은 것이다.
트로이 사람들은 왕의 실명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다. 일로스는 자신의 행동이 도시를 지키려는 뜻에서 비롯되었음을 호소했지만, 성스러운 것은 선한 의도만으로 다룰 수 없었다. 그는 아테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제사를 올렸으며, 마침내 시력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후 팔라디온은 더욱 깊은 곳에 모셔졌고, 사람들은 성상을 지키는 일이 곧 성상의 모습을 함부로 보지 않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다.
불타는 신전에서 팔라디온을 붙잡는 일로스
2.2 왕가가 지켜 온 성상
일로스 뒤에는 라오메돈이 왕위에 올랐고, 오랜 뒤에는 프리아모스가 트로이를 다스렸다. 후대 전승 속에서 왕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운명을 지녔지만, 팔라디온 앞에서는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왕은 성벽을 고치고 군대를 정비할 수는 있었지만, 성상을 함부로 옮기거나 사적인 보물처럼 다룰 수는 없었다. 팔라디온은 왕보다 오래된 권위로 왕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팔라디온을 왕궁의 보물처럼 여기지 않았다. 성상은 왕 개인보다 오래된 권위를 지녔고, 왕이 바뀌어도 신전 안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성상을 지킨다는 말은 나무 형상을 보관하는 일을 넘어 왕가와 도시의 약속을 이어 가는 일이 되었다.
팔라디온이 신전 안에 머무는 동안 왕가도 자신들이 지켜야 할 약속을 잊지 않았다. 왕이 전쟁에서 패하거나 성벽이 흔들릴 때에도 성상은 말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 침묵을 신의 거절이 아니라 아직 트로이를 버리지 않았다는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팔라디온은 왕의 권위를 장식하는 보물이 아니라, 왕이 끝까지 책임져야 할 무거운 수호물이 되었다.
팔라디온 앞에서 맹세하는 트로이의 왕과 사제들
2.3 성벽보다 깊은 수호
팔라디온을 둘러싼 후대 전승에서는 트로이의 성벽이 높고 두꺼워도 돌만으로 도시를 지킬 수 없다고 여겨졌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성벽에는 상처가 늘었고, 들판에는 불탄 마을이 생겼다. 그러나 트로이의 중심에 팔라디온이 남아 있는 동안 왕과 백성은 아직 마지막 시간이 오지 않았다고 믿었다. 성상은 칼을 들고 싸우지 않았지만, 도시가 무너지지 않을 마지막 선처럼 여겨졌다.
그리스군이 아무리 오랫동안 포위해도 트로이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전사들이 쓰러지고 왕자들이 전장으로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에도, 신전 깊은 곳에서는 팔라디온이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이 부족해도 도시를 버티게 하는 힘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보이지 않는 수호가 성벽의 돌과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수호물은 전쟁을 대신해 주지 않았다. 팔라디온이 있다고 해서 병사들이 다치지 않는 것도, 왕가가 실수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성상은 인간의 선택을 없애는 힘이 아니라 도시의 운명을 붙잡아 두는 표지였다. 그리스군이 성상을 노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믿음 때문이었다.
성벽 안 신전에서 도시를 지키는 팔라디온
2.4 함락되지 않는 도시의 조건
트로이의 성벽이 오랜 포위에도 버티자, 그리스군은 도시를 지키는 힘이 돌과 병사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후대 전승에서는 팔라디온이 성 안에 있는 한 트로이가 함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성상은 전쟁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 소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성벽은 서 있었고 팔라디온도 신전 안에서 창을 든 채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성상을 둘러싼 이야기는 적의 귀에 들어갔다. 성상을 지키는 일은 신전의 위치와 길을 감추는 일이 되었다.
그리스군은 성문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가까워졌다. 수호물이 사라지면 성벽도 같은 힘을 갖지 못한다는 믿음이 퍼졌다. 아무도 성상에 손대지 않았지만, 전쟁의 마지막은 이미 팔라디온을 향하고 있었다.
성벽 너머 팔라디온을 노리는 그리스군
3.1 트로이를 함락할 마지막 조건
전쟁이 끝나지 않자 그리스군은 칼과 창만으로는 트로이를 꺾을 수 없다고 인정했다. 아킬레우스와 파리스가 죽고 많은 전사가 쓰러졌지만 성벽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리스의 지도자들은 예언을 다시 물으며 도시를 지키는 힘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전승에 따라 트로이 함락의 조건을 밝힌 인물은 다르게 전해진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칼카스가 헬레노스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고 밝혔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포로가 된 헬레노스가 직접 조건을 말했다고 한다. 요구는 하나가 아니었으며, 전승에 따라 필록테테스의 귀환과 펠롭스의 뼈를 가져오는 일, 네오프톨레모스의 참전 등이 요구되었다. 그 가운데 팔라디온을 훔쳐야 한다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상이 신전 안에 있는 한 트로이는 보호받는다는 말은 새로운 명령이 되었다. 군대 대신 성소에 들어갈 사람이 필요했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선택되었고, 두 사람은 같은 밤을 향해 움직였다.
헬레노스에게 함락 조건을 묻는 그리스 지도자들
3.2 헬레노스가 밝힌 비밀
파리스가 죽은 뒤 헬레노스와 데이포보스는 헬레네를 두고 다투었다고 전해진다. 트로이 사람들은 데이포보스의 손을 들어 주었고, 헬레네는 그에게 돌아갔다. 헬레노스는 트로이를 떠나 이다산으로 물러났다. 그는 도시의 운명이 기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군은 헬레노스가 예언의 비밀을 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디세우스가 그를 붙잡아 진영으로 데려오자, 지휘관들은 함락의 조건을 말하라고 요구했다. 헬레노스가 스스로 말했는지 강요를 받았는지는 갈리지만, 여러 조건 가운데 팔라디온을 훔쳐야 한다는 내용은 같았다.
헬레노스의 말은 형제와 백성이 지키던 비밀을 적에게 넘기는 일이었다. 그는 트로이의 길과 성소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를 골랐다. 한 사람은 속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칼을 들 수 있었다.
이다산에서 붙잡혀 그리스 진영으로 끌려오는 헬레노스
3.3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의 잠입
밤이 되자 오디세우스는 무기를 감추고 초라한 거지의 모습으로 트로이 성벽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얼굴과 옷차림을 바꾸는 데 능했고, 전쟁터에서 수없이 보았던 적군의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흉내 낼 수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를 이름 없는 떠돌이로 여겼지만, 헬레네는 그 눈빛을 알아보았다.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평범한 거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헬레네는 그를 곧바로 고발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서 있던 그녀는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고, 오디세우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도 짐작했을 것이다. 어떤 후대 전승에서는 그녀가 팔라디온이 있는 신전과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까지 알려 주었다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그녀에게 자신의 목적을 털어놓았고, 헬레네의 도움으로 필요한 정보를 얻은 뒤 밤의 어둠 속에서 성 밖에서 기다리던 디오메데스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성벽의 약한 곳을 살피고, 사람들이 잠든 때를 기다렸다. 오디세우스가 문과 길을 살피는 동안 디오메데스는 몸을 숨긴 채 뒤를 따랐다. 그들은 신전으로 향하는 길에서 마주치는 경비를 피해 움직였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 오자 칼을 뽑았다. 지금까지의 전쟁이 군대와 군대의 충돌이었다면, 그 밤의 싸움은 두 사람이 도시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조용한 침입이었다.
거지로 변장해 트로이 성벽으로 들어가는 오디세우스
3.4 어둠 속에서 팔라디온을 훔치다
신전 안은 전쟁터의 소리가 닿지 않는 듯 고요했다. 팔라디온은 등불 아래 창을 든 채 서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잠시 멈추었다. 그들이 손을 대려는 것은 살아 있는 적이 아니라 트로이의 기도와 왕가의 기억이 겹쳐진 성상이었다.
성상이 손길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전승에서는 눈에서 빛이 번쩍였고, 다른 전승에서는 받침대에서 세 번 뛰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상을 들어 올려 경비를 피해 신전 밖으로 빠져나왔다. 트로이를 지키던 형상이 처음으로 성벽 밖의 밤을 맞은 순간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오디세우스가 공적을 혼자 차지하려고 디오메데스를 죽이려 했다는 전승도 있다. 달빛에 칼끝을 본 디오메데스는 무기를 빼앗았다. 이 장면이 없는 이야기에서도 팔라디온이 사라졌다는 결말은 같다.
어둠 속 신전에서 팔라디온을 훔치는 두 영웅
4.1 사라진 수호물과 흔들리는 트로이
아침이 밝자 팔라디온은 신전에서 사라져 있었다. 제단 곁에는 빈자리만 남았고, 문지기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적군보다 먼저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성상이 도시의 목숨과 이어졌다는 믿음 속에서 빈자리는 패배의 시작처럼 보였다.
그리스군은 곧장 공격하지 않았다. 배를 떠나는 듯 꾸미며 경계를 풀었고, 해안에는 에페이오스가 만든 목마를 남겼다. 돌벽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예전처럼 볼 수 없었다. 팔라디온이 사라진 자리에 적의 계략이 다가오고 있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성상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라디온은 이미 그리스군의 손에 들어갔고 목마 안에는 전사들이 숨어 있었다. 수호물을 잃은 도시는 아직 성문을 열지 않았으나, 운명은 안으로 들어갈 길을 찾고 있었다.
팔라디온이 사라진 신전의 빈 제단
4.2 목마가 들어온 마지막 밤
그리스군은 배를 감추고 떠난 것처럼 꾸민 뒤 목마를 남겼다. 안에는 오디세우스와 전사들이 숨어 있었고, 밖에는 시논이 철군의 이유를 거짓으로 설명했다. 오랜 포위에 지친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가 승리의 기념물인지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라오코온은 목마를 들여서는 안 된다고 외치며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바다의 뱀들이 그와 두 아들을 휘감자, 사람들은 그 죽음을 목마를 받아들이라는 징표로 여겼다. 다른 전승에서는 카산드라도 재앙을 예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경고는 사라지고 거짓된 선물만 남았다.
그날 밤 목마는 성문을 통과했다. 밤이 깊자 전사들이 나와 성문을 열었고, 숨어 있던 그리스군이 밀려들었다. 팔라디온을 잃은 트로이는 목마를 막을 힘도 경고를 믿게 할 힘도 잃은 채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트로이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목마
4.3 아이네이아스가 품은 트로이의 유산
트로이가 불타던 밤, 아이네이아스는 전사로서 싸우는 일과 아버지 안키세스와 아들 아스카니오스를 지켜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는 불길 속에서 아버지 안키세스를 등에 업고, 아들 아스카니오스의 손을 잡았다. 집의 신들과 조상들의 성물을 챙긴 뒤,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무너지는 도시를 빠져나왔다. 트로이의 왕국은 끝났지만, 그와 함께 떠난 유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팔라디온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전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훔친 것이 진짜 성상이었고, 그것이 그리스군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트로이 사람들이 가짜 성상을 곁에 두어 적을 속였으며, 진짜 팔라디온은 아이네이아스가 불타는 도시에서 구해 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디오메데스가 성상을 이탈리아로 가져갔다가 아이네이아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은 팔라디온의 행방을 하나로 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후대 전승은 트로이의 성상이 도시의 멸망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이네이아스가 그것을 직접 품었든, 다시 넘겨받았든, 팔라디온은 트로이 왕가가 간직한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불타는 성벽을 떠난 아이네이아스의 행렬 속에는 무너진 나라의 이름과 다시 시작될 운명이 함께 실려 있었다.
안키세스를 업고 아스카니오스와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
4.4 로마로 이어진 팔라디온
아이네이아스는 불타는 트로이를 빠져나온 뒤에도 아버지 안키세스와 아들 아스카니오스를 지키며, 도시에서 가져온 신성한 유산을 품었다. 긴 방랑 끝에 이탈리아에 닿자 후대의 로마 전승은 그가 라비니움에 트로이의 성물들을 모셨다고 전한다. 팔라디온도 그 유산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팔라디온의 행방은 전승마다 달랐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아이네이아스가 직접 가져왔다고 하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디오메데스의 손에 들어간 성상을 아이네이아스가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전승에서도 성상은 트로이의 불길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이탈리아로 이어졌다.
로마 전승 가운데 하나에서는 팔라디온이 로마의 베스타 신전 안쪽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광장에 공개된 상이 아니라 베스타의 처녀 사제들이 지키는 비밀스러운 유산이었다. 로마인들은 그것을 국가의 운명과 이어진 성물로 여겼고, 트로이를 지키던 성상은 이제 로마의 운명을 맡은 성물이 되었다.
베스타 신전에서 팔라디온을 지키는 베스타 처녀들
※ 출전: 아폴로도로스 《도서관》 3.12.1~3·《에피토메》 5.8~5.13, 위(僞)플루타르코스 《그리스·로마 평행전》 17, 콘온 《이야기》 12, 프로클로스 《소일리아스》 개요, 트리피오도로스 《일리오스 함락》,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2~3·7~8, 오비디우스 《축제일》 6.419~460, 디오니시오스 《로마 고대사》 1.68~69, 세르비우스 《아이네이스 주해》 2.166,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4.240~2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