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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트로이를 탈출한 아이네이아스
트로이 전쟁 십 년째, 그리스군이 남긴 거대한 목마가 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트로이의 마지막 밤이 시작된다. 아이네이아스는 불길 속에서 끝까지 싸우지만 프리아모스 왕의 죽음과 신들의 뜻을 본 뒤 가족을 구하기 위해 탈출한다. 그는 늙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등에 업고 아들 아스카니우스와 아내 크레우사를 이끌고 성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도중에 크레우사를 잃고, 그녀의 혼령에게 새로운 땅과 왕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예언을 듣는다.
1.1 그리스군이 사라지고 목마가 남다
십 년 동안 트로이 성벽을 둘러싸고 있던 그리스군이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변에는 버려진 그리스군의 진영과 전에 본 적 없는 거대한 목마 하나만 남아 있었다. 트로이인들은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닫혀 있던 성문을 열고 해변으로 몰려나와 그리스군이 머물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어떤 이는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자고 했고, 어떤 이는 적이 남긴 물건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그때 넵투누스의 사제 라오콘이 달려와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정말 아무 까닭 없이 이런 거대한 선물을 남겼겠느냐며 목마 속에 군사들이 숨어 있거나 다른 계략이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나는 그리스인들이 선물을 들고 올 때조차 두렵다.” 라오콘은 창을 힘껏 던져 목마의 옆구리를 찔렀다. 창이 박히자 속이 빈 몸체에서 둔탁한 울림이 퍼졌다.
그러나 오랜 전쟁에 지친 트로이인들은 그 소리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승리를 믿고 싶었던 마음이 의심보다 컸다. 그리스군의 배들은 멀리 떠난 것처럼 보였고, 해변에는 적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인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리스 함대는 가까운 테네도스섬 뒤에 숨어 있었고, 목마 안에는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정예 전사들이 트로이의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목마에 창을 던지는 라오콘
1.2 시논의 거짓말에 속다
트로이인들이 목마를 둘러싸고 논쟁하던 때, 목동들이 한 그리스 청년을 붙잡아 끌고 왔다. 그의 이름은 시논이었다. 사람들은 적군이 모두 떠났는데 왜 혼자 남아 있는지 캐물었다. 시논은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도 그리스인들에게 버림받은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프리아모스 왕은 그에게 목숨을 보장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하라고 명했다.
시논은 자신이 오디세우스의 미움을 샀으며, 그리스군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간 제물을 바쳐야 하게 되자 오디세우스의 압박을 받은 예언자 칼카스가 자신을 희생자로 지목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결박을 풀고 달아나 숨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시논은 그리스군이 트로이의 수호물인 팔라디온을 훔쳐 미네르바의 분노를 샀으며, 거대한 목마는 그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만든 봉헌물이라고 설명했다.
목마를 크게 만든 까닭도 트로이인들이 성 안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일 목마를 파괴하면 트로이에 재앙이 닥치지만, 성 안으로 들이면 오히려 신의 보호를 받아 그리스에 맞설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눈물과 두려움을 섞은 시논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트로이인들은 점차 그의 말을 믿었고, 라오콘의 경고만이 목마를 향한 마지막 의심으로 남았다.
프리아모스 앞에서 거짓 이야기를 하는 시논
1.3 라오콘의 죽음 뒤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다
그때 바다 쪽에서 거대한 뱀 두 마리가 물결을 가르며 나타났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뱀들은 제단에서 제물을 바치던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먼저 두 아이의 몸을 휘감은 뱀들은 아들을 구하려 달려든 라오콘까지 굵은 몸통으로 죄었다. 라오콘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두 뱀은 그들을 죽인 뒤 미네르바의 신전으로 기어가 여신상 발아래, 방패 밑에 몸을 숨겼다.
트로이인들은 이 광경을 라오콘이 신성한 목마에 창을 던진 데 대한 신벌이라고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시논의 말을 더욱 굳게 믿고 성벽 일부를 허문 뒤 목마에 밧줄을 걸었다. 소년과 처녀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을 잡았고 거대한 목마는 천천히 성 안으로 들어왔다. 카산드라는 앞으로 닥칠 재앙을 경고했지만, 트로이인들은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트로이인들은 오랜만에 전쟁이 끝났다며 축제를 벌이고 깊은 잠에 빠졌다. 밤이 깊자 테네도스섬에 숨어 있던 그리스 함대는 횃불 신호를 보고 다시 트로이 해안으로 돌아왔다. 시논은 목마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풀었고,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 메넬라오스를 비롯한 그리스 전사들이 차례로 내려왔다. 그들은 성문을 열어 상륙한 군대를 불러들였다. 승리를 축하하던 트로이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학살과 불길의 밤으로 바뀌었다.
밧줄로 거대한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트로이인들
2.1 헥토르의 혼령에게 트로이의 최후를 듣다
깊은 밤, 아이네이아스는 잠결에 헥토르의 모습을 보았다. 한때 트로이의 가장 강한 전사였던 그는 전차에 끌려 다녔던 상처투성이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이네이아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자 헥토르는 트로이는 이미 끝났으며 더는 성을 지키려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트로이의 신성한 것들을 맡기며,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성벽을 세울 땅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꿈속에서도 멀리서 불길과 함성이 밀려왔다.
아이네이아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도시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목마에서 내려온 그리스 전사들은 성문을 열었고, 해안에 상륙한 그리스군이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병사들은 잠든 트로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집들이 불타기 시작하고 거리마다 비명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높은 지붕에 올라간 아이네이아스는 데이포보스의 집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았다. 그제야 목마의 계략과 트로이의 운명을 깨달았다.
헥토르는 도망치라고 했지만 아이네이아스의 마음은 전투로 향했다. 그는 갑옷을 입고 칼을 들었다. 이미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료들을 모아 성채로 달려가려 했다. 곧 판토오스와 다른 트로이 전사들이 합류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싸우자고 외쳤다. 불길이 번지는 밤거리에서 작은 무리는 압도적인 그리스군을 향해 나아갔다. 살아남기 위한 탈출보다 무기를 들고 죽는 것이 그 순간의 아이네이아스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잠든 아이네이아스 앞에 나타난 상처투성이 헥토르
2.2 동료들과 마지막 항전을 벌이다
아이네이아스와 동료들은 불타는 거리를 지나던 중 그리스 장수 안드로게오스의 부대와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안드로게오스는 그들을 같은 편으로 착각해 말을 걸었다. 뒤늦게 트로이인임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기습하여 그리스 병사들을 쓰러뜨렸고, 코로이보스는 적의 갑옷과 방패를 걸치고 그리스군으로 위장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적의 무장을 하고 혼란스러운 도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한동안 이 계책은 통했다. 트로이 전사들은 자신들을 아군으로 착각한 그리스 병사들을 공격하며 길을 열었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신전에서 카산드라가 붙잡혀 끌려나오는 모습을 보자 코로이보스와 동료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들이 카산드라를 구하려 달려들자 전투가 뒤엉켰고, 성 위의 트로이인들마저 그리스 갑옷을 입은 그들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했다.
곧 진짜 그리스군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위장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코로이보스와 판토오스, 리페우스를 비롯한 동료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아이네이아스는 몇 사람과 함께 가까스로 포위를 벗어났지만, 도시의 중심부에서는 더 큰 함성과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곳은 프리아모스 왕의 궁전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마지막으로 왕궁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전투가 이제 왕의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스군의 갑옷을 입고 싸우는 아이네이아스와 동료들
2.3 프리아모스의 죽음과 신들의 뜻을 보다
프리아모스의 궁전은 이미 그리스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문은 부서지고 지붕과 회랑에서는 마지막 수비대가 돌과 창을 던지며 저항했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곧 피로스가 앞장서 문을 깨뜨리고 병사들과 궁전 안으로 밀려들었다. 늙은 프리아모스는 갑옷을 걸치고 싸우려 했지만 왕비 헤카베는 그를 제단으로 데려갔다. 바로 그때 아들 폴리테스가 피로스에게 쫓겨 부모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다.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죽인 피로스를 꾸짖으며 힘겹게 창을 던졌지만 창은 방패를 뚫지 못했다. 피로스는 늙은 왕을 제단 곁으로 끌고 가 칼로 죽였다. 트로이의 왕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네이아스는 문득 자신의 늙은 아버지 안키세스와 아내 크레우사, 어린 아스카니우스를 떠올렸다. 자신이 전장에 머무는 동안 가족도 프리아모스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때 어머니 베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이네이아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개를 걷어 내고, 인간들의 싸움 뒤에서 트로이를 무너뜨리고 있는 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넵투누스는 성벽과 그 기초를 흔들고 있었고, 유노는 스카이아이 문에서 그리스군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트로이의 높은 성채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유피테르마저 그리스군에게 힘을 더하고 있었다. 베누스는 이제 트로이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며 더는 싸우지 말고 가족을 구하라고 명했다. 아이네이아스는 마침내 죽음을 향한 싸움을 멈추고 불길 속을 헤쳐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제단 앞에서 피로스에게 쓰러지는 프리아모스
3.1 안키세스가 탈출을 거부하다
아이네이아스는 불길과 무너지는 건물 사이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 안키세스에게 서둘러 트로이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늙은 안키세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젊은 사람들은 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지만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무너지는 조국과 함께 죽겠다고 했다. 과거 유피테르의 벼락을 맞은 뒤 자신이 신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여겼던 그는 낯선 땅으로 달아나 남은 삶을 이어 갈 뜻이 없었다.
아이네이아스와 크레우사, 어린 아스카니우스가 눈물로 설득했지만 안키세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다며 다시 무기를 들었다. 가족이 있는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 그리스군과 싸우다 죽겠다고 했다. 조금 전 베누스가 가족을 구하라고 명했지만, 아버지가 떠나지 않겠다고 하자 절망한 그의 마음은 다시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크레우사가 어린 아스카니우스를 안고 아이네이아스의 발을 붙잡았다. 그녀는 남편이 죽으러 간다면 자신과 아들도 함께 죽게 될 것이라며 가지 말라고 호소했다. 안키세스는 여전히 떠나기를 거부했고, 밖에서는 그리스군의 함성과 불길이 점점 가까워졌다. 가족 모두가 죽음을 눈앞에 둔 듯한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신비로운 징조가 어린 아스카니우스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떠나기를 거부하는 안키세스를 설득하는 아이네이아스 가족
3.2 아스카니우스에게 신의 징조가 나타나다
가족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어린 아스카니우스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가느다란 불꽃이 일어났다. 불길은 아이의 머리카락과 이마를 부드럽게 감싸며 타올랐지만 아스카니우스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놀란 아이네이아스와 크레우사가 불을 끄려 하자 안키세스가 그들을 막았다. 그는 이 이상한 불꽃을 신들이 보내는 징조로 여기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었다.
안키세스는 전능한 유피테르에게 아직 자신들의 기도를 들을 뜻이 있다면 또 하나의 확실한 표지를 보여 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왼쪽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다. 곧 밝은 별 하나가 긴 빛을 끌며 지붕 위를 가로질렀다. 별은 이다산의 숲 쪽으로 날아가 빛을 감추었고, 그 뒤로 긴 광채의 흔적이 밤하늘에 남았다. 안키세스는 그것을 신들이 자신들에게 보내는 분명한 길잡이로 받아들였다.
죽음을 기다리겠다던 안키세스는 마침내 마음을 돌렸다. 그는 신들의 뜻에 따르겠다며 아이네이아스에게 자신을 데리고 떠나라고 말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곧 탈출 계획을 세웠다. 가족이 함께 움직이되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성 밖 케레스의 오래된 신전 근처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이제 아이네이아스에게 남은 일은 트로이와 함께 죽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아내와 집안의 신들을 지켜 불타는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머리 위에 신비로운 불꽃이 타오르는 아스카니우스
3.3 아버지를 등에 업고 불길 속을 빠져나가다
아이네이아스는 먼저 늙은 안키세스를 등에 업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성물과 조상 대대로 모셔 온 수호신 페나테스를 품에 안았다. 아이네이아스는 막 전투와 살육을 치르고 돌아온 몸이었기 때문에 몸을 씻기 전에는 신성한 물건을 직접 만질 수 없었다. 그는 어린 아스카니우스의 손을 잡고 앞장섰고, 크레우사는 조금 뒤에서 따라오도록 했다. 집을 나선 가족은 불빛이 번지는 골목을 피해 어둠 속 좁은 길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수많은 그리스 병사와 맞서 싸우던 아이네이아스였지만, 이제는 작은 소리에도 몇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등에 업힌 아버지와 손을 잡은 아들, 뒤따라오는 아내까지 모두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갑옷 부딪치는 소리와 발걸음이 들릴 때마다 가족은 담장과 폐허 뒤로 몸을 숨겼다. 불타는 집들의 빛이 거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트로이 곳곳에서는 아직도 싸움과 비명이 이어졌다.
성문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그리스 병사들의 방패와 무기가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안키세스가 적이 다가온다고 외치자 아이네이아스는 익숙한 길을 벗어나 어둠 속 골목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아스카니우스의 손을 잡은 채 정신없이 달렸다. 크레우사도 뒤에서 따라오고 있으리라 생각한 채, 마침내 성 밖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안키세스를 등에 업고 아스카니우스와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
4.1 탈출 도중 크레우사를 잃다
케레스의 신전 근처에 도착한 사람들은 숨을 고르며 뒤따라오는 가족과 동료들을 기다렸다. 안키세스와 아스카니우스는 무사했고 함께 탈출한 사람들도 하나둘 약속한 장소에 모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크레우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네이아스는 그제야 불길 속을 빠져나오는 동안 아내가 어느 순간 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언제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지나온 길을 떠올리며 자신을 책망했다. 크레우사가 운명에 빼앗긴 것인지, 길을 잘못 든 것인지, 아니면 지쳐 어디엔가 주저앉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적을 피해 급히 방향을 바꾸던 순간에 뒤처졌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무사히 성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잃을 듯한 슬픔 속에서 신과 인간을 원망하며 크레우사를 찾아 다시 트로이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와 아들, 집안의 신들을 동료들에게 맡기고 다시 갑옷을 입었다. 그는 크레우사를 찾지 않고는 트로이를 떠날 수 없었다. 조금 전 가까스로 빠져나온 성으로 되돌아가 칼을 들고 불타는 거리를 향했다. 성 안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치솟고 그리스군의 함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네이아스는 위험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죽음이 가득한 트로이로 다시 들어갔다.
집결지에서 사라진 크레우사를 찾는 아이네이아스
4.2 불타는 트로이로 돌아가 아내를 찾다
아이네이아스는 먼저 자신들이 빠져나온 성문과 골목을 살폈다. 불길에 무너진 집과 시체, 버려진 무기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크레우사의 이름을 여러 번 크게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집으로 되돌아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의 집까지 찾아갔으나 이미 그리스군이 들이닥쳐 있었고 지붕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다시 프리아모스의 궁전과 성채 쪽으로 올라갔다. 유노의 신전에는 트로이에서 약탈한 보물들이 쌓여 있었고, 그리스 병사들은 금과 신성한 기물들을 지키고 있었다. 붙잡힌 트로이의 여인들과 아이들도 그 곁에 모여 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혹시 그들 사이에 크레우사가 있는지 살폈다.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와 신전 주변을 헤매며 계속 아내의 이름을 불렀지만 어디에서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도시는 이미 그가 알던 트로이가 아니었다. 왕궁은 무너지고 신전은 약탈당했으며, 익숙했던 거리마다 적군이 서 있었다. 그래도 아이네이아스는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는 불타는 폐허 사이를 미친 듯이 헤매며 크레우사를 찾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모습 하나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살아 있는 크레우사가 아니었다. 죽은 아내의 혼령이 아이네이아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불타는 폐허를 헤매며 크레우사를 부르는 아이네이아스
4.3 크레우사의 혼령에게 새로운 운명을 듣다
크레우사의 혼령은 슬픔에 빠진 아이네이아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지 말라고 말했다. 지금 일어난 일은 신들의 뜻이며, 자신에게는 남편과 함께 바다를 건너는 운명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아이네이아스 앞에는 긴 유랑과 넓은 바다를 건너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으며, 마침내 먼 서쪽의 헤스페리아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곳에는 비옥한 들판 사이로 티베리스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크레우사는 그곳에서 아이네이아스에게 평안한 삶과 새로운 왕국이 기다리고 있으며, 왕가의 여인과 혼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리스인의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어머니가 이 땅에 붙들어 두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사랑하고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네이아스는 눈물을 흘리며 크레우사를 품에 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두 팔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그는 세 번이나 아내의 모습을 향해 팔을 뻗었지만 크레우사의 혼령은 가벼운 바람이나 날아가는 꿈처럼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아이네이아스는 깊은 슬픔을 안은 채 성 밖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트로이 생존자들이 모여 그를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벽별이 이다산 위로 떠오르자 아이네이아스는 다시 늙은 안키세스를 등에 업었다. 그는 살아남은 트로이인들과 함께 불타는 조국을 뒤로하고 산길을 향해 떠났다. 이제 그들 앞에는 크레우사가 예언한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레우사의 혼령 앞에서 팔을 뻗는 아이네이아스
※ 출전: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아이네이스(Aeneis)》 제2권.
※ 각주: 〔1〕 넵투누스(Neptunus):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Poseidon)에 해당하는 로마의 바다의 신. 〔2〕 미네르바(Minerva):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Athena)에 해당하는 로마의 지혜와 전쟁, 기술의 여신. 〔3〕 베누스(Venus):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Aphrodite)에 해당하는 로마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4〕 유노(Iuno): 그리스 신화의 헤라(Hera)에 해당하는 로마의 여신으로, 유피테르의 아내이자 혼인과 가정의 수호신. 〔5〕 유피테르(Iuppiter):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에 해당하는 로마의 최고신. 〔6〕 케레스(Ceres): 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Demeter)에 해당하는 로마의 농경과 곡물의 여신. 〔7〕 페나테스(Penates): 로마에서 집안과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들. 그리스 신화에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하는 신격은 없다. 〔8〕 신들의 어머니(Magna Mater):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 유래한 대지와 풍요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가리킨다. 그리스에서도 키벨레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으며, 레아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