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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피이의 저주를 받은 아이네이아스
크레타를 떠난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폭풍에 밀려 이오니아해의 스트로파데스 제도에 닿는다. 섬에서 주인 없는 가축을 발견한 트로이인들은 잔치를 벌이지만, 하르피이들이 날아와 음식을 빼앗고 더럽힌다. 두 번째 습격에 맞서 싸운 뒤, 아이네이아스는 하르피이 켈라이노에게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도시를 세우기 전에 끔찍한 굶주림을 겪어 식탁까지 먹게 되리라는 저주를 듣는다. 불길한 예언을 품은 트로이인들은 서둘러 섬을 떠난다.
1.1 폭풍 끝에 스트로파데스에 이르다
크레타에서 새로운 정착의 꿈을 접은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다시 배에 올라 이탈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바다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어두워지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파도는 배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깊은 골짜기로 떨어뜨렸고, 비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밤낮을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폭풍이 이어지자 노련한 조타수 팔리누루스조차 방향을 잡지 못했다.
트로이인들은 사흘 동안 별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떠돌았다. 배들은 서로 떨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했고, 사람들은 돛을 줄이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버텼다. 넷째 날이 되어서야 멀리 산의 윤곽과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아이네이아스는 즉시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육지로 향하게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오니아해의 스트로파데스 제도였다. 긴 폭풍에서 벗어나 땅을 밟은 트로이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 섬은 평범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한때 피네우스의 식탁을 괴롭히다 쫓겨난 하르피이들이 머무는 곳이었고, 그 가운데 켈라이노도 있었다. 트로이인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 채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폭풍을 헤치고 스트로파데스에 다가가는 트로이 함대
1.2 주인 없는 소와 염소를 발견하다
섬의 들판에는 살찐 소 떼와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목동도 울타리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 항해와 폭풍에 지친 트로이인들에게 그것은 뜻밖의 행운처럼 보였다. 아이네이아스와 동료들은 가축 가운데 일부를 잡아 식량으로 삼기로 하고, 무기를 들고 들판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소와 염소를 잡은 뒤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에게 먼저 몫을 바쳤다. 신들에게 제물을 올린 다음에야 자신들의 식사를 준비했고, 해안에는 오랜만에 고기 굽는 냄새가 퍼졌다. 크레타에서 역병을 겪고 다시 길을 떠난 뒤 처음 맞는 넉넉한 식사였기에 사람들의 표정에도 조금씩 여유가 돌아왔다. 폭풍과 긴 항해에 지친 선원들에게는 잠시나마 편안히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 섬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배를 살피고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한 뒤 다시 항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주인 없는 가축이 누구의 것인지, 왜 이 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트로이인들은 해안의 풀밭에 자리를 펴고 음식을 나누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산과 숲 쪽에서 거칠고 낮은 날갯짓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들판의 소와 염소를 발견한 아이네이아스 일행
1.3 첫 번째 잔치가 하르피이에게 짓밟히다
트로이인들은 해안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막 잔치를 시작하려 했다. 긴 항해와 폭풍 끝에 마련한 음식이 눈앞에 놓이자 사람들은 모처럼 편안히 숨을 돌렸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지친 몸을 쉬는 일이었다. 아이네이아스 역시 일행이 잠시라도 평온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러나 갑자기 하늘에서 거친 비명과 날갯짓 소리가 쏟아졌다. 새의 몸에 여인의 얼굴을 한 하르피이들이 산에서 무리를 지어 내려와 식탁을 덮쳤다. 그들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고기를 낚아채고 그릇을 뒤엎었으며, 남은 음식에는 지독한 냄새가 밴 오물을 남겼다. 트로이인들이 제대로 대응할 틈도 없이 하르피이들은 먹을 것을 휩쓸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풍성했던 잔치는 먹을 수 없는 음식과 뒤엎어진 그릇만 남은 자리가 되었다. 트로이인들은 바다의 폭풍을 벗어난 뒤 처음 마련한 식사를 정체 모를 괴물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이네이아스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자리를 옮겨 다시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이번에는 나무와 바위가 둘러싼 곳을 찾아 식탁을 차리고, 하르피이들이 다시 나타날 경우에 대비하기로 했다.
트로이인들의 식탁을 덮치는 하르피이 무리
2.1 두 번째 잔치를 준비하고 경계를 세우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첫 번째 잔치가 무너진 곳을 떠나 나무와 바위가 둘러싸인 한적한 장소로 옮겼다. 그곳에서 다시 식탁을 마련하고 제단에 불을 피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마음 편히 앉아 있지 않았다. 하르피이들이 다시 음식을 노리고 내려올 것이라 생각한 아이네이아스는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전사들은 칼을 풀밭 사이에 숨기고 방패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놓아두었다. 하르피이들에게 아무런 대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 뒤, 가까이 내려오면 일제히 공격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하늘과 주변 숲을 살폈다. 미세누스는 높은 곳에서 하르피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나타나면 나팔을 불어 신호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날갯짓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르피이들은 첫 번째 습격 때와 마찬가지로 무리를 지어 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은 트로이인들이 다시 차려 놓은 음식을 보자 거침없이 식탁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하르피이들이 충분히 가까워지는 순간, 높은 곳에서 공격을 알리는 신호가 울려 퍼졌다.
무기를 숨긴 채 하르피이를 기다리는 트로이 전사들
2.2 다시 나타난 하르피이와 싸우다
하르피이들이 굽은 해안을 따라 식탁으로 날아들자 높은 곳에서 지켜보던 미세누스가 청동 나팔을 불었다. 신호가 울리자 숨어 기다리던 트로이 전사들은 풀밭에 감춰 두었던 칼과 방패를 들고 일제히 뛰쳐나왔다. 그들은 음식을 낚아채려 낮게 날아드는 하르피이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처음으로 정면에서 맞섰다.
그러나 싸움은 예상과 달랐다. 칼날이 하르피이들의 몸을 스치는 듯했지만 상처를 입힐 수 없었고, 깃털 하나 제대로 떨어뜨리지 못했다. 하르피이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공격을 피해 다시 하늘로 솟구쳤고, 틈을 보아 남은 음식까지 더럽혔다. 트로이의 전장을 견뎌 낸 전사들이었지만, 칼로도 상처 입힐 수 없는 존재를 상대로는 힘을 쓰기 어려웠다.
마침내 하르피이들은 먹을 것을 버려 둔 채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땅에는 뒤엎어진 그릇과 더럽혀진 음식만 남았다. 트로이인들은 칼과 방패를 든 채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뒤쫓을 수도 없었다. 다른 하르피이들이 빠르게 날아올라 하늘 높이 사라질 때, 무리 가운데 하나만 높은 바위 위에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언자 켈라이노였다.
나팔 신호와 함께 하르피이에게 맞서는 트로이 전사들
2.3 높은 바위의 켈라이노와 마주하다
높은 바위에 내려앉은 것은 하르피이 켈라이노였다. 다른 하르피이들이 하늘 높이 사라진 뒤에도 그녀만은 트로이인들을 내려다보며 자리를 지켰다. 얼굴에는 굶주림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고, 날개를 접은 채 전사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무기를 든 트로이인들도 그녀가 단순히 다시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켈라이노는 먼저 트로이인들의 행동을 꾸짖었다. 그녀는 라오메돈의 자손들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가축을 죽이고, 이제는 하르피이들까지 무력으로 몰아내려 한다고 외쳤다. 트로이인들은 자신들이 주인 없는 가축을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켈라이노에게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동료들을 공격한 일이었다. 전사들은 무기를 든 채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켈라이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협박과는 다른 불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잠시 뒤 켈라이노는 자신이 신들의 뜻을 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은 제우스가 아폴론에게 알리고, 아폴론이 다시 자신에게 전한 운명이라고 했다. 폭풍과 괴물의 습격보다 신탁을 두려워하던 트로이인들은 무기를 든 채 말을 멈추었다. 아이네이아스 역시 바위 위의 켈라이노를 바라보았다. 이제 싸움보다 더 무거운 말이 그들 앞에 놓이려 하고 있었다.
높은 바위에서 트로이인들을 내려다보는 켈라이노
3.1 식탁까지 먹게 되리라는 저주를 듣다
켈라이노는 트로이인들이 결국 이탈리아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 찾아가고 있는 땅 자체는 잘못된 목적지가 아니었다. 바람도 그들을 그곳으로 데려갈 것이며, 마침내 이탈리아의 항구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말이었다. 잠시 동안 그것은 아이네이아스가 기다려 온 희망처럼 들렸다. 그러나 켈라이노의 예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트로이인들이 이탈리아에 도착하더라도 곧바로 약속된 도시를 성벽으로 두를 수는 없다고 했다. 스트로파데스에서 하르피이들에게 가한 폭력의 대가가 먼저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에게 닥칠 것은 적군의 칼이나 바다의 폭풍이 아니라 굶주림이었다. 식량이 모두 떨어지고 배고픔이 극에 달해, 마침내 자신들이 차려 놓은 식탁까지 이로 씹어 먹게 되리라고 켈라이노는 외쳤다.
트로이인들은 그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하리라는 약속보다 ‘식탁을 먹는다’는 기괴한 경고가 더 강하게 마음에 남았다. 어디에서 그런 굶주림을 겪게 될지,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켈라이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예언을 마친 그녀는 날개를 펼쳐 숲 쪽으로 날아가 버렸고, 바위 위에는 불길한 말만 남았다.
바위 위에서 저주를 선포하는 켈라이노와 아이네이아스
3.2 안키세스가 신들에게 재앙을 막아 달라 빌다
켈라이노가 사라진 뒤 트로이인들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조금 전까지 하르피이들과 무기로 맞서던 전사들도 더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상대가 단순한 괴물인지 신적인 존재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신들의 뜻을 담았다고 하는 예언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다시 식탁을 펴거나 섬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안키세스는 두 손을 하늘로 들고 신들에게 기도했다. 그는 켈라이노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재앙을 돌려 달라고 간청하고, 트로이인들의 앞길을 지켜 달라고 빌었다. 사람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서원과 기도로 신들의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빌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의 기도를 지켜보며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련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목적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페나테스가 알려 준 땅도, 지금 켈라이노가 언급한 땅도 이탈리아였다. 저주 속에서도 그들이 결국 이탈리아에 이른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식탁까지 먹게 될 굶주림’이라는 말의 뜻은 알 수 없었지만, 트로이인들은 불길한 예언을 마음에 품은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갈 마음을 다잡았다.
두 손을 들어 신들에게 기도하는 안키세스
3.3 불길한 예언을 품고 섬을 떠나다
기도를 마친 안키세스는 곧 스트로파데스를 떠나도록 명했다. 트로이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갔다. 선원들은 해안에 매어 둔 밧줄을 풀고 돛을 올렸고, 전사들은 마지막으로 해안을 바라보며 배에 올랐다. 폭풍에서 벗어난 뒤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안전한 피난처처럼 보였던 섬은 이제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불길한 땅이 되어 있었다.
배가 해안에서 멀어져도 켈라이노의 예언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결국 이탈리아에 도착한다는 말에는 희망이 있었지만, 도시를 세우기 전에 굶주림에 시달려 식탁까지 먹게 된다는 경고는 앞날에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렸다. 그 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이네이아스 역시 답을 찾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스트로파데스에서의 사건은 짧았지만 그곳에서 들은 예언은 이후의 여정에 오래 따라붙었다. 트로이인들은 하르피이들이 머무는 섬을 뒤로하고 다시 이오니아해로 나아갔다. 바람을 받은 배들은 새로운 항로를 따라 서서히 멀어졌고, 아이네이아스와 동료들은 아직 끝을 알 수 없는 운명을 품은 채 다음 기착지를 향해 돛을 펼쳤다.
스트로파데스를 떠나는 아이네이아스의 함대
※ 출전: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Aeneis)》 제3권 192~269행 — 폭풍 속 항해와 스트로파데스 제도 도착, 스트로파데스의 가축, 하르피이의 습격과 트로이인들의 반격, 켈라이노의 예언과 ‘식탁을 먹게 되리라’는 저주, 안키세스의 기도와 출항.
※ 각주: 〔1〕 켈라이노(Celaeno): 그리스어 이름은 켈라이노(Kelainō), 라틴어 이름은 켈라이노(Celaeno)이다. 동일한 하르피이를 가리키며 이름의 표기만 다르다. 〔2〕 제우스(Zeus): 로마 신화에서는 유피테르(Jupiter)라고 부른다. 《아이네이스》의 원문에서는 유피테르의 이름인 Iovem이 사용되었다. 〔3〕 페나테스(Penates): 로마에서 가정의 식량과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들이다. 《아이네이스》에서는 트로이의 수호신으로 등장하여 아이네이아스가 새로운 조국을 찾아가는 길을 인도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정확히 일치하는 단일 신명은 없다.
※ 표기상 참고: 팔리누루스와 미세누스는 《아이네이스》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리스 신화에 별도의 대응 인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