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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클롭스의 섬을 탈출한 아이네이아스
헬레노스의 예언을 따라 이탈리아에 닿은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위험을 피해 시칠리아로 향한다. 에트나산 아래 키클롭스의 해안에 닿은 그들은 오디세우스 일행의 탈출 과정에서 홀로 남겨진 그리스인 아카이메니데스를 구한다. 그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눈먼 폴리페모스가 나타나고, 트로이인들은 몰려드는 키클롭스들을 피해 바다로 탈출한다. 아카이메니데스의 안내를 받은 함대는 시칠리아 해안을 따라 다시 항해를 이어 간다.
1.1 이탈리아 땅을 처음 바라보다
에페이로스의 부트로툼을 떠난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헬레노스가 일러 준 길을 따라 바다를 건널 준비를 했다. 한밤중에 조타수 팔리누루스가 일어나 바람과 별을 살핀 뒤 출항 신호를 보냈고, 함대는 돛을 펼쳐 이탈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새벽빛이 수평선을 밝힐 무렵 멀리 낮은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테스가 가장 먼저 그 땅을 발견하고 “이탈리아다!”라고 외쳤다. 긴 항해에 지친 트로이인들은 갑판으로 몰려나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운명의 땅을 바라보았다.
안키세스는 큰 잔에 포도주를 채워 들고 신들에게 기도했다. 바다와 땅과 폭풍을 다스리는 신들이 순풍을 내려 주어 자신들의 항해를 무사히 이끌어 주기를 빌었다. 선원들은 눈앞에 나타난 이탈리아를 바라보며 기뻐했지만, 아이네이아스는 아직 여정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헬레노스는 가까운 해안에 서둘러 정착하지 말고, 신들이 정한 더 먼 땅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얼마 뒤 함대는 바위 절벽 사이로 열린 작은 항구에 들어갔다. 높은 언덕에는 미네르바의 신전이 서 있었고, 트로이인들은 오랜 표류 끝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땅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그들이 밟은 곳은 아직 새로운 조국이 아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신탁과 예언이 가리키는 땅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겼다.
새벽 바다에서 이탈리아를 가리키는 아카테스
1.2 미네르바 신전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다
아이네이아스와 동료들은 언덕 위에 자리한 미네르바의 신전으로 올라갔다. 그때 들판에서 네 마리의 흰 말이 풀을 뜯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키세스는 말이 흔히 전쟁을 뜻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람이 길들여 수레를 끌게 하는 짐승이기도 하니 전쟁 뒤에는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풀이했다. 새로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트로이인들에게 흰 말들은 앞으로 맞게 될 싸움과 그 너머의 평화를 함께 예고하는 듯했다.
트로이인들은 먼저 미네르바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어 헬레노스가 일러 준 가르침을 기억하여 프리기아식으로 머리를 가리고 유노에게 정해진 제사를 드렸다. 트로이를 오랫동안 미워해 온 여신의 노여움을 달래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항해도 안전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사를 마친 아이네이아스는 오래 머물지 않고 사람들을 다시 배로 불러 모았다.
함대는 타렌툼을 지나 라키니움의 곶과 카울론, 스킬라키움 부근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의 해안은 길게 이어졌지만 어느 곳에도 닻을 내리고 정착하지 않았다. 목적지는 아직 더 멀리 있었고, 무엇보다 앞에는 헬레노스가 거듭 경고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해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원들은 기쁨을 뒤로한 채 다시 노를 잡고 위험한 남쪽 바다로 향했다.
미네르바 신전 앞에서 제사를 올리는 트로이인들
1.3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를 피해 시칠리아로 향하다
이탈리아 남쪽 해안을 따라가던 트로이인들은 바다 건너 시칠리아의 산들을 바라보았다. 해협이 가까워질수록 물살은 거세졌고, 바위 사이에서는 무서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바닷물이 솟구쳤다가 다시 깊이 꺼지기를 되풀이하자 안키세스는 헬레노스가 경고했던 카리브디스의 물길임을 알아차렸다. 그 너머에는 스킬라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예언자가 목숨을 걸고 지나려 하지 말라고 했던 위험한 해협이었다.
안키세스는 즉시 그곳에서 벗어나라고 외쳤다. 조타수 팔리누루스가 먼저 뱃머리를 왼쪽 넓은 바다 쪽으로 돌렸고, 나머지 배들도 노와 돛을 움직여 그의 뒤를 따랐다. 물살은 함대를 다시 해협 쪽으로 끌어당겼고 파도는 배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내던졌다. 선원들은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위험한 물길에서 벗어나려 했고, 마침내 함대는 해협 깊숙이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기울고 바람마저 잦아들었다. 지친 배들은 길을 알지 못한 채 흐르는 물살에 밀려 낯선 해안으로 흘러갔다. 밤이 내려앉을 무렵 그들이 들어선 곳은 에트나산이 내려다보이는 시칠리아의 만이었다. 트로이인들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위험은 피했지만, 자신들이 이제 사람을 잡아먹는 키클롭스들이 사는 해안 가까이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아직 알지 못했다.
거센 소용돌이를 피해 뱃머리를 돌리는 트로이 함대
제2장. 홀로 남겨진 그리스인 아카이메니데스를 만나다
2.1 에트나산 아래 키클롭스의 해안에 닿다
트로이 함대가 들어간 만은 바람을 피하기에는 안전했지만, 바로 뒤에는 거대한 에트나산이 솟아 있었다. 산은 밤새 무서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다가 붉은 불꽃과 재가 섞여 떨어졌고, 때때로 뜨겁게 달아오른 돌덩이가 산 위에서 튀어 올랐다. 땅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몸부림치는 듯한 굉음이 이어지자 트로이인들은 배를 떠나 숲속에 몸을 숨긴 채 밤을 지새웠다.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 그런 소리를 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땅이 울릴 때마다 사람들은 불안하게 서로를 바라보았고, 산꼭대기에서 솟구친 불빛이 잠시 숲과 해안을 붉게 밝혔다. 오랜 항해 동안 수많은 위험을 겪었지만, 이곳의 밤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숨결 속에 들어온 듯했다. 누구도 깊이 잠들지 못한 채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새벽빛이 숲의 그림자를 걷어 내기 시작했다. 트로이인들이 배와 해안을 살피던 그때, 숲속에서 사람 하나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옷은 찢어지고 몸은 굶주림으로 야위었으며, 수염과 머리는 오랫동안 손질하지 못해 거칠게 자라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트로이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불길과 연기를 뿜는 에트나산 아래의 트로이 함대
2.2 숲에서 굶주린 그리스인을 발견하다
숲에서 나타난 낯선 남자는 해안에 선 트로이인들의 무기와 옷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때 자신과 전쟁을 벌였던 적들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두려움에 떨다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듯 해변으로 달려와 두 손을 내밀었다. 자신이 그리스인임을 숨기지 않겠다며, 이 끔찍한 땅에서만 데려가 준다면 어디로 가도 좋다고 애원했다. 차라리 트로이인들의 손에 죽는 것이 키클롭스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 낫다고까지 말했다.
아이네이아스의 동료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무기를 움켜쥐었지만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안키세스가 먼저 손을 내밀어 겁에 질린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예상하지 못한 친절을 받은 그는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이네이아스는 그의 이름과 고향, 그리고 어쩌다 이 황량한 해안에서 홀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남자는 자신을 이타카 출신의 아카이메니데스라고 밝혔다. 그는 오디세우스를 따라 트로이 전쟁에 참가했고, 귀향길에 키클롭스의 땅에 들어왔다가 동료들이 황급히 탈출하는 과정에서 홀로 남겨졌다고 말했다. 그 뒤로 사람을 잡아먹는 폴리페모스와 다른 키클롭스들을 피해 숲속에 숨어 살아왔다며, 트로이인들에게 지금 당장 이 해안을 떠나야 한다고 다급하게 경고했다.
트로이인들 앞에 무릎 꿇은 아카이메니데스
2.3 아카이메니데스에게 폴리페모스의 이야기를 듣다
아카이메니데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그곳은 피비린내와 공포가 가득한 끔찍한 장소였다. 거대한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의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을 붙잡아 바위에 내리쳐 죽인 뒤 그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아카이메니데스는 동료들이 차례로 희생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자신도 곧 같은 운명을 맞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와 살아남은 동료들은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다. 폴리페모스가 음식과 포도주에 취해 잠든 틈을 타, 그들은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나무를 그의 하나뿐인 눈에 찔러 넣었다. 눈을 잃은 폴리페모스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날뛰었고, 오디세우스 일행은 마침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황급히 해안을 떠나는 과정에서 아카이메니데스만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 뒤 그는 거의 석 달 동안 숲과 바위굴을 옮겨 다니며 목숨을 이어 왔다. 나무 열매와 풀뿌리로 허기를 달래고, 키클롭스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을 숨겼다. 폴리페모스 하나만이 아니라 에트나산 주변의 골짜기와 해안에는 수많은 키클롭스들이 살고 있었다. 아카이메니데스는 트로이 함대를 발견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숲에서 뛰어나왔다며,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거듭 경고했다.
폴리페모스의 공포를 들려주는 아카이메니데스
제3장. 폴리페모스와 키클롭스의 해안을 탈출하다
3.1 눈먼 폴리페모스가 해안으로 다가오다
아카이메니데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비탈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양 떼를 몰고 해안으로 내려오는 폴리페모스였다. 그는 산처럼 거대한 몸을 일으킨 채 잘라 낸 소나무를 지팡이 삼아 더듬더듬 걸었다. 오디세우스에게 찔린 하나뿐인 눈은 이미 빛을 잃었고, 양들은 눈먼 주인의 발치에서 천천히 바다 쪽으로 따라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로이인들은 아카이메니데스가 들려준 이야기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폴리페모스는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 입은 눈을 씻었다. 눈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그는 이를 갈며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폴리페모스는 깊은 바다로 걸어 들어갔지만, 물결도 그의 거대한 몸을 제대로 잠기게 하지 못했다. 트로이인들은 더 지체하지 않고 아카이메니데스를 서둘러 배에 태웠다.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닻줄을 끊고 노를 저어 해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숨을 죽인 채 노를 저었지만 수면을 가르는 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폴리페모스는 갑자기 몸을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거대한 걸음을 옮겼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의 소리를 따라 트로이의 배들을 뒤쫓았다. 거인이 물살을 헤치며 점점 가까워지자 선원들은 더 이상 소리를 아끼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깊은 바다를 향해 달아났다.
양 떼와 함께 바다로 다가오는 눈먼 폴리페모스
3.2 키클롭스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배를 띄우다
폴리페모스는 소리를 따라 바닷속으로 트로이의 배들을 뒤쫓았지만, 함대는 이미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거대한 걸음을 내디뎌도 몰아치는 이오니아해의 물결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분노와 절망을 한꺼번에 터뜨리듯 엄청난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바다와 파도가 흔들리는 듯했고, 맞은편 이탈리아의 땅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에트나산의 동굴에서도 메아리가 되받아쳤다.
그 외침은 다른 키클롭스들을 불러 모았다. 숲과 산에서 거대한 형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 해안가를 가득 메웠다. 하늘에 닿을 듯한 키클롭스들이 바닷가에 늘어선 모습은 산등성이에 빽빽하게 선 높은 참나무와 측백나무 같았다. 그들은 멀어지는 배들을 바라볼 뿐 바다 한가운데까지 따라오지는 못했다.
공포에 휩싸인 트로이인들은 어느 방향이든 이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돛줄을 당기고 노를 저었다. 그러나 앞에는 다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위험한 해협이 놓여 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헬레노스의 경고를 떠올려 그 길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배를 되돌렸다. 마침 북풍이 불어오자 함대는 바람을 받아 키클롭스의 해안을 빠르게 벗어났다.
해안을 가득 메운 키클롭스들과 달아나는 함대
3.3 아카이메니데스의 안내로 시칠리아 해안을 따라가다
키클롭스들의 해안에서 멀어진 뒤 아카이메니데스는 자신이 오디세우스 일행과 함께 지나왔던 시칠리아의 지형을 가리키며 길을 알려 주었다. 펠로루스 쪽에서 불어온 북풍을 받은 트로이 함대는 판타기아스강 어귀를 지나고, 메가라의 만과 바다 가까이 낮게 펼쳐진 탑소스 부근을 차례로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죽음을 기다리던 그리스인이 이제는 트로이인들의 길잡이가 되어 앞바다와 해안의 지형을 알려 주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카이메니데스를 다시 해안에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한때 트로이를 공격한 그리스군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무기도 동료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안키세스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받아들였고, 트로이인들도 더 이상 그를 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아카이메니데스 역시 자신을 구해 준 사람들과 함께 항해하며 뒤에 남은 키클롭스의 해안에서 점점 멀어졌다.
함대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시칠리아 동쪽 해안을 따라 계속 나아갔다. 멀리 에트나산의 불빛이 희미해지고, 바닷가에 늘어서 있던 키클롭스들의 거대한 모습도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트로이인들은 무서운 해안을 벗어나 다시 운명의 길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가장 큰 슬픔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 안키세스와 마지막 이별을 맞게 된다.
시칠리아 해안을 가리키며 길을 안내하는 아카이메니데스
※ 출전: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아이네이스(Aeneis)》 제3권, 약 506~691행. 주요 대목: 이탈리아 첫 도착, 시칠리아 접근, 에트나산과 키클롭스의 해안, 아카이메니데스의 구조, 폴리페모스의 등장과 탈출.
※ 각주: 〔1〕 미네르바(Minerva) :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Athena). 지혜와 전쟁, 기술과 공예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2〕 유노(Juno) : 그리스 신화의 헤라(Hera). 주피테르(제우스)의 아내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