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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키세스를 기리는 시칠리아의 장례 경기
카르타고를 떠난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폭풍을 피해 다시 시칠리아에 닿고, 그곳에서 아버지 안키세스의 기일을 맞는다. 아이네이아스는 무덤에 제사를 올리고 장례 경기를 열어 아버지를 기린다. 함선 경주와 달리기, 권투, 활쏘기, 기마 행사가 이어지지만, 유노의 계략으로 트로이 여인들이 함선에 불을 지른다. 아이네이아스는 일부 사람들을 시칠리아에 남긴 뒤 남은 동료들과 다시 이탈리아를 향해 출항한다.
1.1 카르타고를 떠나 다시 시칠리아에 닿다
카르타고를 떠난 아이네이아스의 함대는 다시 이탈리아를 향해 바다로 나아갔다. 뒤편으로 멀어지는 카르타고에서는 디도의 장례 불길이 치솟았지만, 바다 위의 트로이인들은 그 불길의 뜻을 알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거세지고 검은 구름이 몰려오자 조타수 팔리누루스는 정면으로 항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계속 이탈리아로 나아가기보다 가까운 시칠리아로 뱃머리를 돌리자고 권했다.
아이네이아스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칠리아 서쪽에는 트로이 혈통을 지닌 아케스테스가 살고 있었고, 그곳은 이미 한 차례 머문 적이 있는 익숙한 땅이었다. 함대가 해안에 가까워지자 아케스테스는 짐승 가죽을 걸친 모습으로 산에서 내려와 옛 친구들을 반갑게 맞았다. 그는 오랜 항해에 지친 트로이인들에게 음식과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아이네이아스에게 이 귀환은 더욱 특별했다. 바로 이곳에서 아버지 안키세스를 잃은 지 어느덧 한 해가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이면 안키세스가 세상을 떠난 기일이었다. 바람에 밀려 뜻밖에 다시 찾아온 시칠리아는 아이네이아스에게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아버지를 다시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장소가 되었다.
시칠리아 해안으로 뱃머리를 돌리는 아이네이아스의 함대
1.2 안키세스의 기일을 맞아 장례 경기를 선포하다
다음 날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는 오늘로 아버지 안키세스가 세상을 떠난 지 한 해가 되었다며, 자신이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이 날만큼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연처럼 보였던 시칠리아 귀환도 신들이 자신들을 아버지의 무덤으로 이끈 것인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는 먼저 안키세스에게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치른 뒤, 아홉째 날이 밝으면 성대한 장례 경기를 열겠다고 선포했다.
아케스테스는 제사와 경기를 위해 가축과 곡식, 포도주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트로이인들은 안키세스의 무덤 주변을 정돈하고 제단을 마련했다. 아이네이아스는 함선 경주와 달리기, 권투와 활쏘기 경기가 열릴 것이라고 알리고, 힘과 기량을 겨루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참가하라고 했다. 승자들에게는 말과 무기, 화려한 옷과 값진 물건이 상으로 주어질 예정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트로이 멸망 이후 그들에게 이어진 것은 전쟁과 죽음, 끝없는 항해와 이별이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슬픔에만 머물지 않고 모두가 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다. 안키세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살아남은 트로이인들을 다시 하나로 묶었고, 시칠리아에는 추모와 축제가 함께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안키세스의 무덤 앞에서 장례 경기를 선포하는 아이네이아스
1.3 안키세스의 무덤에서 신비한 뱀을 보다
안키세스의 기일이 되자 아이네이아스는 머리에 푸른 가지를 두르고 무덤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땅에 맑은 포도주 두 잔과 갓 짠 우유 두 잔, 희생 제물의 피 두 잔을 차례로 붓고 보랏빛 꽃을 흩뿌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혼을 부르며 다시 한 번 제사를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트로이인들도 차례로 제단 앞에 서서 안키세스를 기렸다.
그때 무덤 아래에서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는 푸른빛과 황금빛 무늬가 번쩍였고, 뱀은 일곱 번이나 무덤 둘레를 천천히 돌았다. 사람들은 놀라 물러섰지만 뱀은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그것은 제물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며 음식과 술을 맛본 뒤 다시 무덤 아래로 사라졌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것이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인지, 아니면 아버지 안키세스를 따르는 영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광경을 길한 징조로 받아들여 제사를 계속했다. 양 두 마리와 돼지 두 마리, 검은 등을 가진 암소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안키세스의 혼을 다시 불렀다. 슬픔 속에서 시작된 제사는 두려움보다는 경건함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곧 시작될 장례 경기로 향했고, 시칠리아 해변에는 오랜만에 축제의 기운이 번져 갔다.
안키세스의 무덤을 일곱 번 휘감아 도는 신비한 뱀
제2장. 안키세스를 위한 장례 경기가 시작되다
2.1 네 척의 함선이 바다에서 경주를 벌이다
아홉째 날 아침이 밝자 시칠리아 해변에는 수많은 트로이인과 현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가장 먼저 열린 것은 함선 경주였다. 전쟁과 항해를 함께 견뎌 온 네 척의 배가 참가했고, 므네스테우스, 기아스, 세르게스투스, 클로안투스가 각각 배를 이끌었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위를 돌아 먼저 돌아오는 배가 승자가 되는 경기였다.
신호가 떨어지자 노를 젓는 병사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바다는 노 끝에서 하얗게 갈라졌고, 함선들은 서로 앞서려 좁은 거리를 다투었다. 기아스의 배가 먼저 선두에 나섰지만, 바위를 너무 멀리 돌아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조타수 메노이테스에게 더 가까이 붙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조타수가 암초를 두려워해 명령을 따르지 않자 기아스는 분노하여 그를 바다로 밀어 버렸다.
그 사이 클로안투스와 므네스테우스의 배가 바짝 뒤쫓았다. 함성은 해안까지 울려 퍼졌고, 구경꾼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배의 이름을 외쳤다. 전투가 아닌 경기였지만 선원들의 얼굴에는 전쟁 못지않은 긴장감이 서렸다. 안키세스를 기리는 첫 경기는 트로이인들의 오랜 항해 경험과 자존심을 겨루는 무대가 되었다.
바다 위에서 치열하게 노를 젓는 네 척의 트로이 함선
2.2 클로안투스가 함선 경주의 승자가 되다
경주는 반환점을 지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세르게스투스는 앞선 배를 추월하려다 지나치게 해안 가까이 붙었고, 그의 배는 숨겨진 바위에 부딪혀 노가 부러진 채 꼼짝하지 못했다. 선원들은 장대를 들고 암초에서 배를 밀어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 사이 므네스테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도를 높여 앞선 배들을 추격했다.
기아스의 배와 므네스테우스의 배가 치열하게 다투는 동안 클로안투스는 선두를 노렸다. 그는 바다의 신들에게 두 손을 들어 기도하며 승리를 얻게 해 준다면 제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기도가 받아들여진 듯 바다의 신들이 배를 떠밀어 주었고, 클로안투스의 함선은 마지막 순간 다른 배들을 앞질러 가장 먼저 해안으로 들어왔다. 해변에서는 승자를 맞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네이아스는 승리한 클로안투스에게 황금실로 수놓은 망토를 내렸다. 뒤이어 들어온 므네스테우스와 기아스에게도 값진 무기와 그릇을 상으로 주었다. 뒤늦게 부서진 배를 끌고 돌아온 세르게스투스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승패는 갈렸지만, 아이네이아스는 모두가 안키세스를 기리는 경기에 함께했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가장 먼저 해안으로 들어오는 클로안투스의 함선
2.3 니수스와 에우리알루스가 달리기 경주에 나서다
함선 경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넓은 들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 경기는 달리기였다. 니수스와 그의 가까운 친구 에우리알루스를 비롯해 살리우스, 헬리무스, 디오레스 등 여러 젊은이가 출발선에 섰다. 아이네이아스는 승자에게 화려한 말을 주고, 그 뒤를 잇는 선수들에게도 무기와 값진 물건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참가자 모두에게도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자 니수스가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는 다른 선수들을 크게 앞서며 결승점을 향했지만, 희생 제물의 피가 스며든 땅을 밟는 순간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승리를 놓친 니수스는 뒤따라오던 살리우스 앞을 일부러 가로막아 그를 넘어뜨렸다. 그 틈에 에우리알루스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고, 헬리무스가 두 번째, 디오레스가 세 번째로 들어왔다.
살리우스는 곧바로 부당한 경기라며 항의했지만 아이네이아스는 에우리알루스의 승리를 그대로 인정했다. 대신 살리우스에게 훌륭한 사자 가죽을 주어 달랬으며, 넘어져 피와 진흙을 뒤집어쓴 니수스에게도 값진 방패를 내렸다. 친구를 돕기 위해 니수스가 저지른 뜻밖의 반칙에 경기장은 웃음과 소란으로 가득 찼고, 무거웠던 장례의 분위기도 잠시 밝아졌다.
넘어진 니수스 곁을 지나 결승선으로 달리는 에우리알루스
제3장. 트로이의 영웅들이 힘과 기량을 겨루다
3.1 다레스와 엔텔루스가 권투 경기를 벌이다
달리기가 끝난 뒤 아이네이아스는 힘을 겨룰 자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트로이의 다레스가 먼저 나섰다. 그는 오랫동안 이름난 권투 선수로, 누구도 쉽게 상대하려 하지 않을 만큼 강한 전사였다. 한동안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자 다레스는 승리를 확신하며 상으로 걸린 황소를 요구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케스테스는 시칠리아의 노장 엔텔루스에게 옛 기량을 보여 달라고 권했다.
엔텔루스는 처음에는 나이를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다레스의 자랑을 듣고 마음을 바꾸어 앞으로 나왔다. 그는 한때 영웅 에릭스에게 권투를 배웠다며, 스승이 사용하던 거대한 가죽 장갑을 꺼내 보였다. 그 장갑은 너무 크고 무거워 다레스조차 놀랐다. 아이네이아스는 지나치게 위험한 옛 장갑 대신 두 선수에게 크기가 비슷한 장갑을 주어 경기를 시작하게 했다.
젊고 빠른 다레스는 몸을 움직이며 연달아 주먹을 날렸고, 엔텔루스는 묵직한 자세로 공격을 견뎠다. 어느 순간 엔텔루스가 강한 일격을 내질렀지만 다레스가 재빨리 피하면서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트로이인과 시칠리아인들 사이에서 큰 함성이 터졌고, 아케스테스가 달려가 오랜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수치와 분노에 자극받은 엔텔루스가 다시 달려들어 거센 주먹을 퍼붓자 다레스는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아이네이아스는 그가 크게 다치기 전에 경기를 중단시켰다.
권투 경기에서 거센 주먹을 주고받는 다레스와 엔텔루스
3.2 엔텔루스가 마지막 승부를 스승에게 바치다
아이네이아스는 엔텔루스의 승리를 선언하고 상으로 황소를 내주었다. 패한 다레스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을 떠났다. 그의 머리는 흔들리고 입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엔텔루스는 승리를 자랑하기보다 자신이 아직 힘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 주려 했다. 그는 받은 황소를 제단 앞으로 천천히 끌고 갔다.
노장은 장갑을 낀 오른손을 높이 들더니 황소의 이마를 단 한 번 내리쳤다. 황소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람들은 다레스가 계속 싸웠다면 어떤 일을 당했을지 깨닫고 놀라 숨을 삼켰다. 엔텔루스는 쓰러진 황소를 에릭스에게 바치며 이제 권투 장갑과 경기를 모두 내려놓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자신의 마지막 승부를 스승에게 돌리는 작별 의식과도 같았다.
이어 아이네이아스는 활쏘기 경기를 준비하게 했다. 세르게스투스의 함선에서 가져온 돛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비둘기 한 마리를 묶어 과녁으로 삼았다. 히포코온, 므네스테우스, 에우리티온, 아케스테스가 차례로 활을 들었다. 사람들은 다시 환호하며 자리를 잡았고, 힘의 대결로 뜨거워진 경기장은 이번에는 누가 가장 정확한 활솜씨를 보일지 기다렸다.
한 주먹으로 황소를 쓰러뜨리는 노장 엔텔루스
3.3 아케스테스의 화살이 하늘에서 불타는 징조가 되다
활쏘기 경기가 시작되자 높이 세운 돛대에 묶인 비둘기를 향해 네 명의 참가자가 차례로 활을 들었다. 첫 번째로 나선 히포코온의 화살은 날아가 돛대에 깊숙이 박혔다. 이어 므네스테우스가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비둘기를 묶어 둔 줄을 정확히 끊었다. 자유로워진 새가 날갯짓하며 하늘로 솟구치자 세 번째로 나선 에우리티온이 재빨리 화살을 쏘아 날아가는 비둘기를 맞혀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솜씨에 큰 함성을 보냈다.
마지막 차례가 된 아케스테스에게는 더 이상 맞힐 과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기량을 보이듯 활을 들어 화살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그런데 공중을 가르던 화살이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불붙은 화살은 별똥별처럼 긴 빛의 흔적을 남기며 하늘에서 사라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사람들은 놀라 하늘을 바라보았고, 아이네이아스도 그것을 평범한 우연이 아니라 신들이 보낸 특별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아이네이아스는 날아가는 비둘기를 맞힌 에우리티온의 뛰어난 솜씨를 인정하면서도, 신성한 징조를 받은 아케스테스를 최고의 승자로 선언했다. 그리고 안키세스가 간직했던 값진 술잔을 특별한 상으로 건넸다. 아케스테스의 불타는 화살은 활쏘기 경기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으로 남았다. 이어 주요 경기가 끝나자 아이네이아스는 아스카니우스와 트로이 소년들이 펼칠 기마 행사를 준비하게 했다.
하늘로 쏘아 올린 아케스테스의 불타는 화살
제4장. 장례 경기를 마치고 다시 항해에 나서다
4.1 아스카니우스와 트로이 소년들이 기마 행진을 펼치다
경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아이네이아스는 아스카니우스와 트로이의 소년들을 들판으로 불러냈다. 소년들은 말을 타고 세 무리로 나뉘어 섰다. 한 무리는 아스카니우스가 이끌었고, 다른 무리들은 트로이 명문 가문의 어린 후계자들이 맡았다. 그들은 작은 창을 들고 빛나는 투구와 장식물을 갖춘 채 어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호가 울리자 세 무리의 소년들은 서로 갈라졌다가 다시 돌아서고, 서로를 향해 달리는 듯하다가 재빨리 방향을 바꾸었다. 때로는 추격하고 때로는 도망치며 복잡한 원을 그렸고, 세 무리가 흩어졌다가 한순간 다시 질서 있게 모였다. 전투를 흉내 낸 기마 행진이었지만 실제 싸움의 살기는 없었다. 관중들은 트로이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을 보며 크게 환호했다.
특히 아이네이아스는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잠겼다. 안키세스를 추모하기 위해 열린 이날의 행사는 죽은 아버지만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할아버지 안키세스에서 아들 아이네이아스, 다시 손자 아스카니우스로 이어지는 세대가 한 들판 위에 겹쳐졌다. 그러나 모두가 환호하는 동안, 해변에 남아 있던 트로이 여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을 타고 기마 행진을 펼치는 아스카니우스와 소년들
4.2 트로이 여인들이 함선에 불을 지르다
남자들이 장례 경기를 지켜보는 동안 트로이 여인들은 함선이 정박한 해변에 모여 있었다. 오랜 방랑과 계속되는 폭풍에 지친 그들은 다시 바다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이때 유노는 아이네이아스의 여정을 막기 위해 이리스를 내려보냈다. 이리스는 트로이 여인 베로에의 모습으로 변해 그들 사이에 섞여, 이제는 떠돌 만큼 떠돌았으니 배를 불태우고 시칠리아에 정착하자고 부추겼다.
이리스는 먼저 손에 든 횃불을 함선에 던졌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여인들도 마음속에 쌓인 피로와 절망에 휩쓸려 불붙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때 프리아모스의 아들들을 돌보았던 노파 피르고가 앞에 선 여인은 진짜 베로에가 아니라고 외쳤다. 진짜 베로에는 병이 들어 장례 행사에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체가 드러난 이리스는 무지개를 남기며 하늘로 사라졌지만, 이미 여러 함선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연기를 발견한 아스카니우스와 트로이인들은 급히 해변으로 달려왔다. 아이네이아스는 번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유피테르에게 남은 함선이라도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와 거센 비를 퍼부었고 불길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대부분의 배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네 척의 함선은 이미 불에 타 잃은 뒤였다. 사람들은 꺼진 불길과 손상된 함선을 바라보며 다시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불타는 트로이 함선들을 바라보는 아이네이아스와 여인들
4.3 일부를 시칠리아에 남기고 이탈리아로 떠나다
네 척의 함선을 잃은 아이네이아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계속 이탈리아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모두 함께 시칠리아에 남을 것인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때 노장 나우테스가 젊고 강한 사람들은 운명을 따라 항해를 계속하고, 지친 노인과 여성, 바다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이곳에 남겨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자고 조언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오랜 방랑에 지친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 말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날 밤 안키세스의 혼이 꿈속에 나타났다. 아버지는 유피테르의 명을 받고 왔다며 나우테스의 조언을 따르라고 했다. 그리고 젊고 용감한 사람들을 골라 이탈리아로 데려가되, 그곳에 도착한 뒤에는 먼저 쿠마이의 시빌라를 찾아 명계로 내려오라고 일러 주었다. 자신은 타르타로스가 아니라 엘리시움에 머물고 있으며, 그곳에서 아이네이아스에게 앞으로 이어질 후손들과 새로운 나라의 운명을 보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남을 사람들을 정하고 불에 그을린 함선들을 수리하게 했다. 이어 쟁기로 도시의 경계를 긋고 집터를 나누었으며, 아케스테스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법을 마련했다. 에릭스산에는 베누스의 신전을 세우고 안키세스의 무덤에는 사제와 성스러운 숲을 두었다. 아홉 날의 제사를 마친 뒤 아이네이아스는 에릭스와 폭풍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마침내 돛이 오르자 트로이인들은 시칠리아에 남은 사람들과 작별하고 이탈리아를 향했다. 그들 앞에는 이제 쿠마이와 명계로 이어지는 새로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칠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출항하는 아이네이아스의 함대
※ 출전: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아이네이스(Aeneis)》 제5권.
※ 각주: 〔1〕 유노(Juno): 그리스 신화의 헤라(Hera)에 해당하는 로마의 여신. 유피테르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이다. 〔2〕 유피테르(Jupiter):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에 해당하는 로마의 최고신. 하늘과 천둥을 다스리는 신이다. 〔3〕 베누스(Venus):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Aphrodite)에 해당하는 로마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이다. 〔4〕 아케스테스(Acestes): 그리스 전승에서는 아이게스테스 또는 아이게스토스라고도 불리는 시칠리아의 영웅. 트로이계 혈통을 지닌 인물로, 아이네이아스 일행을 환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