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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이 전쟁 별전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2026.09.24. 00:14 (2026.09.24. 00:14)

10. 아이네이아스의 명계 여행

■  
시칠리아를 떠난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의 쿠마이에 도착해 시빌라에게 앞으로 닥칠 전쟁을 듣고,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기 위해 명계로 내려가기로 한다. 황금 가지를 얻어 저승에 들어간 그는 팔리누루스와 디도, 데이포보스의 혼령을 만나고 타르타로스를 바라본 뒤 엘리시온에 이른다. 마침내 안키세스와 재회한 그는 로마로 이어질 후손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확인한 뒤 지상으로 돌아온다.
목   차
[숨기기]
아이네이아스의 명계 여행
 
 
 

개요

 
시칠리아를 떠난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의 쿠마이에 도착해 시빌라에게 앞으로 닥칠 전쟁을 듣고,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기 위해 명계로 내려가기로 한다. 황금 가지를 얻어 저승에 들어간 그는 팔리누루스와 디도, 데이포보스의 혼령을 만나고 타르타로스를 바라본 뒤 엘리시온에 이른다. 마침내 안키세스와 재회한 그는 로마로 이어질 후손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확인한 뒤 지상으로 돌아온다.
 
 
 

제1장. 쿠마이에서 명계로 가는 길을 묻다

1.1 쿠마이에 도착해 아폴론의 신전을 찾다
 
시칠리아를 떠난 아이네이아스의 함대는 마침내 이탈리아 서쪽 해안의 쿠마이에 닿았다. 배가 해안에 닿자 트로이의 젊은이들은 뭍으로 뛰어내려 불씨를 구하고 숲에서 땔감을 마련했으며, 새로운 물줄기를 찾아 나섰다. 아이네이아스는 충실한 아카테스와 함께 높은 언덕에 자리한 아폴론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곳 가까이에는 아폴론의 신탁을 전하는 쿠마이의 시빌라가 머무는 거대한 동굴이 있었다.
 
신전의 문에는 크레타를 탈출한 다이달로스가 새겼다고 전해지는 여러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미노스의 왕국과 파시파에, 미노타우로스와 미궁, 아리아드네의 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이달로스는 죽은 아들 이카로스의 모습도 새기려 했으나 슬픔 때문에 두 번이나 손을 멈추었다고 했다. 아이네이아스가 그 이야기들을 더 살펴보려 할 때 아카테스와 함께 시빌라 데이포베가 나타났다.
 
시빌라는 지금은 조각을 바라볼 때가 아니라 신에게 뜻을 물을 때라며 아이네이아스를 신전으로 이끌었다. 바위를 뚫어 만든 거대한 동굴에는 수많은 입구와 통로가 나 있었고, 그곳을 통해 시빌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네이아스는 아폴론에게 트로이인들이 마침내 이탈리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새 조국에 신전을 세워 신의 예언을 오래도록 받들겠다고 약속했다.
 
쿠마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선 아이네이아스와 시빌라
 
 
1.2 시빌라에게 이탈리아의 전쟁을 예언받다
 
신에게 사로잡힌 시빌라는 아이네이아스에게 트로이인들이 마침내 라비니움의 땅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소원을 이룬 뒤에는 도리어 그곳에 도착한 것을 후회할 만큼 큰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베리스강은 피로 물들고, 새로운 아킬레우스가 나타나 트로이인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며, 유노의 분노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트로이에서 겪었던 전쟁이 이탈리아에서 다시 모습을 바꾸어 시작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시빌라는 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또다시 외국에서 온 신부와 혼인 문제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도움의 길이 열릴 것이며, 그리스계 도시 가운데 하나가 오히려 그의 편이 될 것이라는 암시도 주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의 전모는 감춰져 있었지만, 이탈리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새로운 운명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두려운 예언을 듣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바다와 전쟁, 도시의 멸망과 수많은 죽음을 견뎌 왔다며 어떤 고난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다만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안키세스는 생전에 아들이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시빌라를 찾아 명계로 내려오라고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었다.
 
신탁에 사로잡혀 전쟁을 예언하는 쿠마이의 시빌라
 
 
1.3 명계로 가기 위한 조건을 듣다
 
아이네이아스의 부탁을 들은 시빌라는 명계로 내려가는 길 자체는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디스의 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어 누구든 죽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곳에서 다시 지상의 빛으로 돌아오는 일은 극히 어렵다고 경고했다. 신들의 사랑을 받은 영웅이나 특별한 운명을 지닌 사람만이 살아서 그 길을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네이아스가 뜻을 굽히지 않자 시빌라는 필요한 조건을 알려 주었다.
 
먼저 깊은 숲 속에 숨어 있는 황금 가지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명계의 여왕 프로세르피나에게 바치는 신성한 예물이었으며, 살아 있는 사람이 저승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가져가야 하는 증표였다. 운명이 명계행을 허락한다면 가지는 손쉽게 꺾일 것이지만,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힘을 써도 떼어 낼 수 없다고 했다. 하나를 꺾으면 곧 그 자리에 새로운 황금 가지가 돋아난다고도 했다.
 
시빌라는 또 하나의 조건을 말했다. 아이네이아스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지만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해 함대 전체가 부정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그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르고 무덤을 세운 뒤 정해진 제물을 바쳐야 명계의 문이 열릴 것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길이 먼저 죽은 동료에게 마지막 예를 다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금 가지를 찾아야 한다고 알려 주는 시빌라
 
 
 

제2장. 황금 가지를 얻어 명계로 들어가다

2.1 미세누스의 죽음을 발견하다
 
시빌라의 동굴을 나온 아이네이아스는 아카테스와 함께 해안으로 돌아가면서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한 동료가 누구인지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바닷가에서 한 시신을 둘러싸고 슬퍼하는 트로이인들을 발견했다. 죽은 사람은 미세누스였다. 그는 한때 헥토르와 함께 싸웠고, 헥토르가 죽은 뒤에는 아이네이아스를 따라온 뛰어난 전사이자 나팔수였다.
 
미세누스는 나팔을 불어 전사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데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자신의 나팔 소리로 바다의 신들에게 도전했다가 트리톤의 질투와 노여움을 사 파도 속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졌다. 아이네이아스는 시빌라가 말한 매장되지 않은 동료가 바로 미세누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로이인들은 그의 주위에 모여 큰 소리로 울며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곧 시빌라의 명령에 따라 장례를 준비하게 했다. 동료들은 깊은 숲으로 들어가 소나무와 참나무, 물푸레나무를 베어 거대한 장작더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네이아스도 직접 나무를 나르며 그들을 도왔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아직 찾아야 할 황금 가지를 생각했다. 미세누스의 장례 준비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끝없이 펼쳐진 숲을 바라보며 신들이 길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해안에서 미세누스의 시신을 발견한 아이네이아스
 
 
2.2 비둘기의 인도로 황금 가지를 찾다
 
장례에 쓸 나무를 마련하던 아이네이아스는 숲을 바라보며 황금 가지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바로 그때 두 마리의 비둘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앞 풀밭에 앉았다. 비둘기는 어머니 베누스에게 속한 새였다. 아이네이아스는 어머니가 자신을 돕기 위해 보낸 징표임을 알아보고, 황금 가지가 숨겨진 곳까지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비둘기들은 아이네이아스가 놓치지 않을 만큼 앞서 날며 숲 깊은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마침내 아베르누스의 어두운 입구 가까이에 이르자 두 새는 한 나무 위에 나란히 내려앉았다. 짙은 잎 사이에서 황금빛 가지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겨울 숲의 나무에 돋은 겨우살이처럼 황금 잎과 줄기가 주위의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이네이아스가 손을 뻗자 가지는 운명이 허락한 듯 그의 손에 꺾여 나왔다.
 
황금 가지를 얻은 아이네이아스는 그것을 들고 시빌라에게 돌아갔다. 그 사이 해안에서는 미세누스의 장례가 계속되었다. 동료들은 시신을 씻어 향유를 바르고 자주빛 옷으로 덮은 뒤 장작더미에 올렸으며, 불길이 꺼지자 뼈를 거두어 항아리에 담았다. 아이네이아스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무덤을 세우고 미세누스의 무기와 노, 나팔을 함께 놓았다. 그 언덕은 뒤에 그의 이름을 따라 미세눔이라 불리게 되었다.
 
비둘기의 인도로 황금 가지를 꺾는 아이네이아스
 
 
2.3 제사를 올리고 명계의 입구로 내려가다
 
미세누스의 장례를 마친 아이네이아스와 시빌라는 아베르누스 호수 가까이에 있는 깊은 동굴로 향했다. 검은 물과 짙은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는 땅속에서 독한 기운이 솟아올라 새조차 그 위를 날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시빌라는 먼저 검은 암소 네 마리를 제단 앞에 세우고 이마에 포도주를 부은 뒤, 뿔 사이의 털을 잘라 불에 던지며 하늘과 명계의 권능을 지닌 헤카테를 불렀다.
 
제사가 이어지자 아이네이아스도 직접 희생을 바쳤다. 그는 검은 양을 밤의 여신 녹스와 대지의 여신 텔루스에게 바치고, 프로세르피나에게는 새끼를 낳지 않은 암소를 제물로 올렸다. 명계의 왕 디스를 위해서는 밤중에 별도의 제단을 세우고 황소들을 통째로 불길 위에 바쳤다. 제사는 밤새 계속되었고, 시빌라는 명계의 신들을 부르며 의식을 이끌었다.
 
새벽빛이 밝아오기 직전 갑자기 발밑의 땅이 울리고 숲으로 덮인 산등성이가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는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시빌라는 헤카테가 가까이 왔다며 동료들에게 물러가라고 외쳤다. 아이네이아스는 칼을 뽑아 들고 시빌라의 뒤를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슬픔과 질병, 굶주림과 죽음의 형상들이 어둠 속을 채우고 있었고, 그 너머로 살아 있는 사람이 쉽게 돌아올 수 없는 명계의 길이 펼쳐졌다.
 
시빌라와 함께 어두운 명계로 내려가는 아이네이아스
 
 
 

제3장. 저승의 강을 건너 죽은 이들을 만나다

3.1 팔리누루스의 혼령을 만나다
 
아케론강에 이른 아이네이아스는 강가를 가득 메운 수많은 혼령을 보았다. 죽은 남녀와 노인, 젊은이와 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내밀며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 뱃사공 카론은 어떤 혼령은 배에 태우면서도 다른 이들은 거칠게 밀어냈다. 아이네이아스가 까닭을 묻자 시빌라는 장례를 치른 자들만이 강을 건널 수 있으며, 매장되지 못한 영혼은 백 년 동안 강가를 떠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무리 속에서 아이네이아스는 뜻밖에도 자신의 조타수 팔리누루스를 발견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떠난 뒤 바다에서 사라진 사람이었다. 팔리누루스는 바다에 빠진 뒤 사흘 동안 파도와 싸워 이탈리아 해안까지 헤엄쳤지만, 가까스로 땅에 닿으려는 순간 그곳 사람들에게 살해되었다고 말했다. 시신은 바닷가에 버려져 아직 묻히지 못했고, 그 때문에 카론의 배에 오르지 못한 채 강가를 헤매고 있었다.
 
팔리누루스는 아이네이아스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시빌라는 신들의 법을 거스를 수 없다며 막았다. 대신 그의 시신이 놓인 해안의 사람들이 신들의 징조를 받고 무덤을 세우며, 그 땅이 영원히 팔리누루스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말을 들은 팔리누루스의 슬픔은 조금 누그러졌다. 아이네이아스는 죽은 동료의 혼령과 다시 작별하고 강가를 떠났다.
 
아케론강가에서 팔리누루스의 혼령과 만난 아이네이아스
 
 
3.2 카론의 배를 타고 케르베로스를 지나다
 
아이네이아스와 시빌라가 강가에 가까이 가자 카론은 살아 있는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보고 길을 막았다. 그는 전에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같은 영웅들이 산 채로 명계에 들어와 소란을 일으킨 일을 떠올리며, 살아 있는 인간을 자신의 배에 태울 수 없다고 했다. 아이네이아스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은 그의 경계심을 더욱 키웠다. 그러자 시빌라는 이들이 명계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빌라가 옷 속에서 황금 가지를 꺼내 보이자 카론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그것이 프로세르피나에게 바칠 정당한 증표임을 알아보고 배를 돌려 두 사람을 태웠다. 아이네이아스의 무게가 실리자 낡은 배는 삐걱거리며 물을 받아들였지만, 마침내 두 사람은 어두운 강을 건너 반대편 강가에 내렸다. 살아 있는 아이네이아스는 죽은 자들만 건너는 물길을 지나 명계의 더 깊은 곳에 발을 들였다.
 
곧 세 개의 목으로 짖어 대는 거대한 케르베로스가 길을 막았다. 뱀들이 목 주위에서 꿈틀거리는 괴물이었다. 시빌라는 꿀과 약을 섞은 먹이를 던졌고, 케르베로스는 그것을 삼킨 뒤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잠에 빠졌다. 두 사람은 괴물을 깨우지 않고 재빨리 지나갔다. 뒤에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앞에서는 죽은 자들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론의 배를 타고 아케론강을 건너는 아이네이아스
 
 
3.3 슬픔의 들판에서 디도를 다시 만나다
 
케르베로스를 지나자 아이네이아스는 일찍 죽은 아이들과 억울한 죽음을 맞은 자들의 울음을 들었다. 더 깊은 곳에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린 영혼들이 머무는 슬픔의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어두운 숲 사이를 지나던 그는 그곳에서 희미한 그림자 하나를 알아보았다. 카르타고에서 헤어진 디도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녀가 자신의 칼로 죽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그제야 눈앞에서 확인했다.
 
아이네이아스는 눈물을 흘리며 디도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그녀를 떠난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들의 명령과 운명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마지막으로 멈추어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말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죽음과 원망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디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돌린 채 차가운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다가 마침내 아이네이아스를 떠나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곳에는 먼저 죽은 남편 시카이우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디도는 그의 곁으로 돌아갔다. 아이네이아스는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살아 있을 때 풀지 못한 두 사람의 이별은 명계에서도 화해로 이어지지 못한 채 다시 끝났다.
 
슬픔의 들판에서 디도의 혼령과 마주한 아이네이아스
 
 
 

제4장. 타르타로스를 바라보고 안키세스를 만나다

4.1 데이포보스에게 트로이의 마지막 밤을 듣다
 
슬픔의 들판을 떠난 아이네이아스는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영혼들이 머무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전사들이 있었다. 트로이인들은 아이네이아스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몰려왔지만, 그리스 장수들의 혼령은 살아 있는 그가 무장을 한 채 나타나자 옛 전쟁을 떠올리고 두려워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들 사이에서 온몸이 심하게 훼손된 프리아모스의 아들 데이포보스를 발견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친구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물었다. 그는 데이포보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이테움 해안에 빈 무덤을 만들어 이름과 무기를 바쳤지만 시신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데이포보스는 아이네이아스가 자신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며, 자신의 죽음은 마지막 밤 헬레네의 배신으로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잠든 사이 무기를 빼앗긴 채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불타던 트로이의 마지막 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나 시빌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며 아이네이아스를 재촉했다. 그들이 선 곳에서 길은 둘로 갈라졌다. 오른쪽은 디스의 성벽 아래를 지나 엘리시온으로 향했고, 왼쪽은 죄인들이 벌을 받는 타르타로스로 이어졌다. 데이포보스는 다시 어둠 속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아이네이아스는 시빌라를 따라 길을 나섰다.
 
상처 입은 데이포보스의 혼령과 만난 아이네이아스
 
 
4.2 죄인들이 벌을 받는 타르타로스를 바라보다
 
갈림길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왼쪽 멀리 거대한 성채를 보았다. 세 겹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고, 불길이 흐르는 플레게톤강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주위를 감돌았다. 단단한 문과 철탑 앞에는 복수의 여신 티시포네가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다. 안쪽에서는 채찍 소리와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 고통에 찬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이 어떤 곳이며 누가 벌을 받고 있는지 시빌라에게 물었다.
 
시빌라는 그곳이 타르타로스이며 죄인이 죽은 뒤 라다만튀스의 심판을 받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신들에게 반역하거나 인간의 도리를 짓밟은 자, 가족을 미워하고 손님을 속인 자, 재물을 독차지한 자와 나라를 팔아 이익을 얻은 자들이 각자의 죄에 따라 벌을 받고 있었다. 티탄족과 알로아다이, 살모네우스 같은 신화 속 죄인들도 그곳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아이네이아스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타르타로스를 뒤로하고 오른쪽 길을 택했다. 곧 디스의 궁전과 프로세르피나의 거처가 있는 곳에 이르자 아이네이아스는 몸을 정결하게 하고 황금 가지를 문 앞에 바쳤다. 명계로 들어오기 위해 숲에서 찾아낸 신성한 예물이 마침내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두 사람 앞에는 지금까지 지나온 음산한 풍경과 전혀 다른 밝은 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아버지 안키세스가 머무는 엘리시온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불길에 둘러싸인 타르타로스를 바라보는 아이네이아스
 
 
4.3 엘리시온에서 아버지 안키세스와 재회하다
 
엘리시온에는 넓고 푸른 들판과 맑은 빛이 펼쳐져 있었다. 어떤 영혼들은 풀밭에서 운동을 하고, 어떤 이들은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과 경건한 사제, 훌륭한 시인과 인간에게 유익한 기술을 남긴 사람들이 평화롭게 머물고 있었다. 아이네이아스와 시빌라는 그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무사이오스에게 안키세스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그의 안내를 받아 빛나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마침내 아이네이아스는 골짜기에서 수많은 영혼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안키세스는 앞으로 세상에 태어날 자신의 후손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멀리서 아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험한 길을 넘어 자신을 찾아온 아들의 효심을 기뻐하며, 정말 다시 얼굴과 목소리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이네이아스 역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이네이아스는 세 번이나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안키세스의 모습은 손끝을 빠져나가는 바람이나 꿈처럼 잡히지 않았다. 트로이를 탈출하던 밤 등에 업고 나왔던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도 다시 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죽음이 갈라놓은 뒤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네이아스가 그곳에 모인 영혼이 누구인지 묻자 안키세스는 아들이 보아야 할 더 큰 미래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엘리시온에서 아버지 안키세스와 재회한 아이네이아스
 
 
 

제5장. 로마의 미래를 보고 지상으로 돌아오다

5.1 안키세스에게 영혼의 윤회와 운명을 듣다
 
아이네이아스의 눈앞에는 한 강 주변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영혼이 모여 있었다. 안키세스는 그 강이 레테이며, 저곳에 모인 영혼들은 운명에 따라 다시 육체를 얻어 세상에 태어날 존재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레테의 물을 마심으로써 지난 삶의 기억을 잊게 된다고 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미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들이 어째서 다시 육체를 얻고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려 하는지 놀라 아버지에게 물었다.
 
안키세스는 하늘과 땅, 바다와 별을 하나의 신성한 정신과 생명의 힘이 움직이며 인간의 영혼 역시 그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면 욕망과 두려움, 슬픔과 기쁨에 사로잡히고, 죽은 뒤에도 생전에 쌓인 흔적을 곧바로 떨쳐 내지 못한다. 그 때문에 어떤 영혼은 바람 속에서, 어떤 영혼은 물속에서 씻기며, 또 어떤 영혼은 불을 거쳐 자신의 허물을 정화해야 했다.
 
이러한 정화가 끝나고 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 신은 다시 태어날 영혼들을 레테의 강가로 불러 모았다. 그들은 망각의 물을 마신 뒤 지난 기억을 잊고 새로운 삶을 바라며 지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안키세스가 바라보고 있던 영혼들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트로이인의 후손들이었다. 아버지는 그들 가운데 아이네이아스의 혈통을 이어 로마의 역사를 만들어 갈 인물들을 하나씩 보여 주기 시작했다.
 
레테강가의 수많은 영혼을 설명하는 안키세스
 
 
5.2 로물루스와 아우구스투스로 이어질 후손들을 보다
 
안키세스가 먼저 가리킨 젊은이는 아이네이아스와 라비니아 사이에서 태어날 실비우스였다. 그는 알바 롱가의 왕이 되어 트로이인의 혈통을 이탈리아에서 이어 갈 사람이었다. 그 뒤에는 프로카스와 카피스, 누미토르를 비롯한 알바의 왕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로물루스가 나타나 로마를 세우고 그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라고 했다. 트로이에서 쫓겨난 이들의 혈통이 새로운 도시와 나라를 이루는 미래였다.
 
안키세스는 더 먼 시대에 나타날 로마의 인물들도 보여 주었다. 그는 율루스의 후손들을 차례로 가리키다가 특별히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로 불리며 한때 사투르누스가 다스렸던 라티움에 다시 황금시대를 가져오고, 로마의 지배 영역을 먼 땅까지 넓힐 인물이라고 했다. 아이네이아스가 찾아온 작은 이탈리아의 땅에서 장차 거대한 로마가 일어날 것이었다.
 
안키세스가 보여 주는 행렬에는 로마의 왕들과 공화정의 영웅들도 이어졌다. 누마와 브루투스, 파비우스와 스키피오를 비롯해 나라를 세우고 지켜 갈 인물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의 모습으로 아이네이아스 앞을 지나갔다. 아이네이아스는 자신이 겪어 온 방랑과 희생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비로소 눈앞에서 확인했다. 이제 이탈리아에서 기다리는 전쟁은 자신만의 삶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먼 후손들의 미래로 이어지는 길이 되었다.
 
미래 로마의 영웅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는 안키세스
 
 
5.3 로마의 사명을 듣고 명계를 떠나다
 
안키세스는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에게 주어질 사명을 아들에게 일러 주었다. 다른 민족들이 청동과 대리석으로 더 뛰어난 조각을 만들고 하늘의 움직임을 연구하며 말솜씨를 자랑할 수 있지만, 로마인에게는 나라들을 다스리고 질서를 세우는 일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굴복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고 교만하게 맞서는 자를 제압하는 것이 그들의 길이라고 말했다. 아이네이아스가 앞으로 벌일 싸움도 그 긴 역사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네이아스는 빛나는 장수 곁에서 슬픈 얼굴을 한 젊은 영혼을 발견했다. 안키세스는 그가 훗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큰 기대를 받지만 젊어서 죽게 될 마르켈루스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로마가 이런 젊은이를 오래 가질 수 있다면 너무 강대해질 것이라며 탄식하고, 그의 혼령에 백합을 뿌려 마지막 예를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찬란한 로마의 미래 속에도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슬픔이 함께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을 보여 준 안키세스는 앞으로 아이네이아스가 라티움에서 겪을 전쟁과 맞서야 할 민족들에 대해서도 일러 주었다. 마침내 작별할 시간이 되자 그는 아들과 시빌라를 잠의 두 문 가운데 상아로 만든 문으로 내보냈다. 아이네이아스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 동료들과 합류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내려갔던 명계에서 로마의 미래를 본 그는 이제 라티움을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 했다.
 
상아문을 지나 명계에서 지상으로 돌아가는 아이네이아스
 
 

 
※ 출전: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아이네이스(Aeneis)》 제6권
 
※ 각주:
〔1〕 유노(Juno): 그리스 신화의 헤라(Hera). 제우스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으로, 로마 신화에서는 유피테르의 아내이다.
〔2〕 디스(Dis):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Hades)에 대응하는 로마의 명계 신. 디스 파테르(Dis Pater)라고도 하며, 플루토(Pluto)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3〕 프로세르피나(Proserpina):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Persephone). 데메테르의 딸이자 하데스의 아내로, 로마 신화에서는 디스의 아내이자 명계의 여왕이다.
〔4〕 베누스(Venus):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Aphrodite).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며,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이다.
〔5〕 녹스(Nox): 그리스 신화의 닉스(Nyx). 밤을 의인화한 태초의 여신이다.
〔6〕 텔루스(Tellus):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Gaia). 대지를 의인화한 로마의 여신으로, 테라(Terra)라고도 한다.
〔7〕 율루스(Iulus):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Ascanius)의 다른 이름. 그리스어 이름은 아스카니오스(Askanios)이며, 로마의 율리우스 가문은 율루스를 자신들의 선조로 여겼다.
〔8〕 사투르누스(Saturnus):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Cronus)에 대응하는 로마의 신. 로마 신화에서 라티움의 황금시대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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