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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이 전쟁 별전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2026.09.25. 15:06 (2026.09.25. 15:06)

사르페돈 – 제우스가 구하지 못한 아들

■  
제우스의 아들이자 뤼키아의 왕 사르페돈은 글라우코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를 돕기 위해 전쟁에 나선다. 그는 왕이라면 백성보다 앞에서 싸워야 한다며 언제나 전장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출전한 파트로클로스와 맞서면서 운명의 순간을 맞는다. 제우스는 사랑하는 아들을 구하고 싶어 하지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의 죽음을 지켜본다. 사르페돈이 쓰러진 뒤 아폴론은 시신을 거두고, 힙노스와 타나토스는 그를 고향 뤼키아로 데려간다.
목   차
[숨기기]
사르페돈 – 제우스가 구하지 못한 아들
 
 
 

개요

 
제우스의 아들이자 뤼키아의 왕 사르페돈은 글라우코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를 돕기 위해 전쟁에 나선다. 그는 왕이라면 백성보다 앞에서 싸워야 한다며 언제나 전장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출전한 파트로클로스와 맞서면서 운명의 순간을 맞는다. 제우스는 사랑하는 아들을 구하고 싶어 하지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의 죽음을 지켜본다. 사르페돈이 쓰러진 뒤 아폴론은 시신을 거두고, 힙노스와 타나토스는 그를 고향 뤼키아로 데려간다.
 
 
 

제1장. 제우스의 아들, 뤼키아의 왕

1.1 제우스의 아들로 태어나다
 
사르페돈의 어머니 라오다메이아는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친 영웅 벨레로폰의 딸이었다. 벨레로폰에게는 이산드로스와 히폴로코스, 라오다메이아라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제우스가 라오다메이아와 사랑을 나누어 사르페돈이 태어났다. 따라서 사르페돈은 인간 영웅 벨레로폰의 혈통과 올림포스 최고신 제우스의 혈통을 함께 이어받았다. 히폴로코스의 아들 글라우코스는 그의 가까운 친족으로, 훗날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믿음직한 동료가 되었다.
 
사르페돈은 훗날 소아시아 남서부의 뤼키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혈통을 지녔지만 신은 아니었으며, 다른 인간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불멸을 보장하지 않았고,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창과 화살 역시 그의 혈통을 가려 주지 않았다.
 
사르페돈은 뤼키아의 왕이자 뛰어난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훗날 트로이의 평원에서 수많은 영웅과 맞설 때에도 사람들은 그를 단순한 외국 원군의 장수가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이름이 그에게 약속한 것은 죽지 않는 삶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아버지 제우스가 하늘에서 바라보며 구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특별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사르페돈을 품에 안은 라오다메이아
 
 
1.2 크산토스 강가의 뤼키아를 다스리다
 
뤼키아는 크산토스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다.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았고, 잔치에서는 좋은 고기와 가득 찬 술잔을 받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신들처럼 우러러보았으며, 크산토스강 주변의 과수원과 곡식이 자라는 넓은 땅도 그들에게 주어졌다. 사르페돈은 이렇게 뤼키아에서 높은 명예를 누리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에게 왕의 자리는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한 특권만을 뜻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내어 준다면 전쟁이 벌어졌을 때 자신 역시 다른 사람보다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이 위험한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데 왕이 뒤에 숨어 있다면 지금까지 받아 온 존경과 대접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사르페돈 곁에는 글라우코스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뤼키아의 군대를 이끌었고 전장에서도 서로를 의지하였다. 사르페돈이 위험에 빠졌을 때 글라우코스가 달려왔고, 글라우코스가 다쳤을 때에는 사르페돈이 그의 빈자리를 메우며 싸웠다. 훗날 사르페돈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시신을 맡길 사람으로 글라우코스를 찾은 것도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이러한 신뢰 때문이었다.
 
크산토스강을 바라보는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
 
 
1.3 글라우코스와 함께 뤼키아군을 이끌다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자 뤼키아도 군대를 보냈다.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는 크산토스강가에서 온 뤼키아 전사들을 이끌고 먼 트로이까지 향하였다. 트로이와 뤼키아 사이에는 넓은 소아시아의 땅이 놓여 있었지만, 두 사람은 프리아모스와 트로이군의 동맹자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들이 이끄는 뤼키아군은 트로이 편에 선 여러 동맹군 가운데에서도 강한 전력으로 여겨졌다.
 
사르페돈은 전투가 시작될 때마다 부하들을 뒤에서 몰아세우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둥근 방패를 들고 두 자루의 창을 손에 잡은 채 언제나 선두로 나섰다. 뤼키아 병사들은 자신들의 왕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 뒤를 따랐다. 글라우코스도 그의 곁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그리스군과 맞섰다.
 
트로이인들에게 사르페돈은 먼 나라에서 찾아온 지원군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전쟁이 어려워질수록 그와 뤼키아군이 맡는 역할도 커졌다. 때로는 헥토르에게 트로이군의 태도를 꾸짖을 만큼 당당했으며, 자신이 동맹군이라는 이유로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사르페돈에게 트로이의 싸움은 이미 다른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과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이 되어 있었다.
 
뤼키아군의 선두에 선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
 
 
1.4 트로이를 위해 전쟁의 선두에 서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르페돈은 트로이군과 함께 여러 차례 그리스군을 공격하였다. 트로이 성벽 밖의 평원에는 전차와 병사들이 뒤엉켰고 어느 한쪽도 쉽게 우세를 잡지 못했다. 사르페돈은 뤼키아군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마다 모습을 드러냈으며, 동맹군 장수라는 이유로 뒤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창에 쓰러지는 그리스 병사들도 늘어 갔다.
 
전투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헥토르에게도 거리낌 없이 충고하였다. 자신은 크산토스강가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 많은 재산을 두고 먼 트로이까지 왔으며, 이곳에는 그리스군에게 빼앗길 자신의 땅이나 가축조차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뤼키아인들은 트로이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정작 도시를 지켜야 할 헥토르와 트로이인들이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질책하였다.
 
사르페돈은 자신의 말처럼 언제나 먼저 행동하였다. 공격이 시작되면 뤼키아군의 선두에서 창을 들었고, 병사들이 흔들릴 때에는 다시 불러 세워 싸움을 이어 갔다. 트로이가 위기에 빠질수록 먼 뤼키아에서 온 제우스의 아들은 더욱 깊이 전장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싸움 속에서 그는 마침내 로도스에서 온 그리스 장수이자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와 마주하게 되었다.
 
헥토르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사르페돈
 
 
 

제2장. 트로이 전쟁의 선두에 서다

2.1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와 맞서다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던 어느 날 사르페돈 앞에 로도스에서 온 그리스 장수 틀레폴레모스가 나타났다. 그는 헤라클레스의 아들로, 사르페돈과 마찬가지로 제우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영웅이었다. 두 사람이 전장에서 마주 서자 틀레폴레모스가 먼저 사르페돈을 조롱하였다.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불리면서도 전장에서 별다른 힘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혈통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틀레폴레모스는 자신의 아버지 헤라클레스가 과거 불과 여섯 척의 배와 적은 병력을 이끌고 트로이에 와서 도시를 함락한 일을 꺼냈다. 당시 트로이 왕 라오메돈이 약속한 말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헤라클레스가 복수하러 왔던 사건이었다. 그는 그런 아버지와 비교하면 사르페돈은 제우스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 직접 그를 죽여 하데스의 세계로 보내겠다고 장담하였다.
 
사르페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헤라클레스가 옛 트로이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인은 약속을 어긴 라오메돈에게 있었다고 맞받았다. 그리고 이제 이 전쟁에서 죽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틀레폴레모스라고 선언하였다. 제우스의 아들과 제우스의 손자가 서로 창을 겨누면서 두 영웅의 말다툼은 곧 목숨을 건 결투로 바뀌었다.
 
창을 겨누고 대치하는 사르페돈과 틀레폴레모스
 
 
2.2 틀레폴레모스를 쓰러뜨리고 부상을 입다
 
사르페돈과 틀레폴레모스는 거의 동시에 긴 창을 던졌다. 사르페돈의 창은 틀레폴레모스의 목을 꿰뚫었고, 헤라클레스의 아들은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그러나 틀레폴레모스가 던진 창도 빗나가지 않았다. 창끝은 사르페돈의 왼쪽 넓적다리를 깊숙이 파고들어 뼈 가까이까지 이르렀다. 사르페돈은 상대를 죽였지만 자신 역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오디세우스는 부상당한 사르페돈을 발견하고 그를 뒤쫓을지 주변의 뤼키아 병사들을 공격할지를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날 사르페돈이 오디세우스의 손에 죽을 운명은 아니었다. 오디세우스가 뤼키아군을 공격하는 사이 동료들은 사르페돈을 전장에서 급히 빼냈다. 그들은 그를 제우스의 떡갈나무 아래에 앉혔고, 가까운 동료 펠라곤이 넓적다리에 깊이 박혀 있던 창을 뽑아냈다.
 
창이 빠져나오자 사르페돈은 심한 고통과 출혈로 정신을 잃었다. 한동안 그의 눈앞을 어둠이 덮었지만 북풍이 얼굴에 불어오자 다시 숨을 돌리며 의식을 되찾았다. 제우스의 아들은 이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남았고, 훗날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 피한 죽음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정해진 마지막 순간은 파트로클로스와의 결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쓰러진 틀레폴레모스와 부상당한 사르페돈
 
 
2.3 글라우코스에게 왕의 의무를 말하다
 
상처에서 회복한 사르페돈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리스군이 배를 지키기 위해 높은 방벽과 도랑을 만들어 놓자 트로이군과 동맹군은 그 방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르페돈은 그리스군의 방벽을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커다란 방패를 앞세운 채 두 자루의 창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글라우코스가 있었다.
 
공격을 앞두고 사르페돈은 글라우코스에게 뤼키아에서 자신들이 누리는 명예를 이야기하였다. 두 사람은 잔치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고 좋은 고기와 술을 받으며, 크산토스강가의 넓은 땅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앞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뤼키아 병사들이 자신들의 왕은 좋은 대접만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곳에서도 앞장서 싸운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르페돈은 만일 전투를 피함으로써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자신도 앞장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글라우코스에게도 전장에 나가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의 앞에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수많은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영광을 내주든 자신들이 영광을 얻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글라우코스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뤼키아 병사들을 이끌고 방벽으로 돌진하였다.
 
방벽 앞에서 글라우코스에게 말하는 사르페돈
 
 
2.4 그리스군의 방벽에 길을 열다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가 이끄는 뤼키아군이 밀려오자 그리스군의 방벽 위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방어를 맡은 메네스테우스는 아이아스와 궁수 테우크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이아스가 던진 거대한 돌에 사르페돈의 동료 에피클레스가 쓰러지고, 테우크로스의 화살은 방벽을 오르던 글라우코스의 팔을 맞혔다. 부상당한 글라우코스는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사르페돈은 가장 가까운 동료가 전장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테스토르의 아들 알크마온을 창으로 쓰러뜨린 뒤 방벽 위의 흉벽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돌과 목재로 이어진 일부가 무너져 내렸고, 그리스군의 방어선에 병사들이 지나갈 수 있는 틈이 만들어졌다. 뤼키아군은 그곳을 향해 더욱 거세게 밀려들었다.
 
아이아스와 테우크로스가 사르페돈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지만 제우스는 아직 아들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르페돈은 잠시 밀려났다가 다시 뤼키아인들을 불러 세웠다. 혼자서는 아무리 강해도 방벽을 뚫을 수 없으니 함께 나아가자고 외쳤다. 결국 트로이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뒤이어 헥토르가 거대한 돌로 성문을 부수면서 그리스군의 방어선은 마침내 무너졌다.
 
그리스군의 흉벽을 두 손으로 무너뜨리는 사르페돈
 
 
 

제3장. 파트로클로스와 운명의 결투를 벌이다

3.1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은 파트로클로스가 나타나다
 
트로이군은 그리스군의 방벽을 넘어 배가 있는 곳까지 밀고 들어갔다. 헥토르가 이끄는 군대가 배에 불을 붙이려 하자 오랫동안 전투에서 물러나 있던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더 이상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미르미도네스군을 이끌고 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갑옷까지 빌려 주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은 파트로클로스가 미르미도네스군과 함께 전장으로 돌진하자 트로이군은 아킬레우스가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흔들렸다. 불타던 배 주변에서 밀려난 병사들은 도랑과 방벽을 지나 트로이 쪽으로 달아났다. 파트로클로스는 그들을 끈질기게 추격하며 수많은 병사를 쓰러뜨렸고, 전장은 순식간에 트로이군의 후퇴로 뒤바뀌었다.
 
사르페돈이 이끄는 뤼키아군도 이 거센 공격에 휘말렸다. 그의 부하들이 파트로클로스의 창에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하자 사르페돈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도망치는 뤼키아인들에게 부끄러움을 알라고 외치며 자신이 직접 저 전사가 누구인지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차에서 뛰어내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은 파트로클로스를 향해 걸어갔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돌진하는 파트로클로스
 
 
3.2 사르페돈이 직접 파트로클로스와 맞서다
 
사르페돈이 무장을 갖춘 채 전차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본 파트로클로스도 땅으로 내려섰다. 두 사람은 높은 바위 위에서 굽은 발톱과 부리를 세우고 싸우는 두 마리 독수리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쪽은 제우스의 아들이자 뤼키아군의 지도자였고, 다른 한쪽은 아킬레우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그리스군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온 전사였다.
 
먼저 파트로클로스의 창이 사르페돈의 충실한 시종 트라시멜로스를 쓰러뜨렸다. 사르페돈은 곧바로 창을 던졌지만 파트로클로스를 맞히지 못하고 그의 전차를 끌던 말 페다소스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페다소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말들이 뒤엉켰고, 전차를 몰던 아우토메돈은 재빨리 칼을 뽑아 쓰러진 말을 연결한 끈을 잘라 내어 전차를 다시 바로잡았다.
 
사르페돈은 다시 파트로클로스를 향해 창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창끝은 그의 왼쪽 어깨 위를 스쳐 지나갔다. 두 차례 던진 창이 모두 파트로클로스를 맞히지 못하면서 싸움의 흐름은 파트로클로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의 창을 움켜잡고 반격할 순간을 노렸다. 바로 그때 올림포스에서 결투를 바라보던 제우스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다가온 죽음을 알아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창을 들고 맞서는 사르페돈과 파트로클로스
 
 
3.3 제우스가 아들을 구할지를 고민하다
 
올림포스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제우스는 사르페돈과 파트로클로스가 서로 맞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제 파트로클로스의 손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우스는 헤라에게 사르페돈을 전쟁터에서 몰래 빼내어 살아 있는 채 고향 뤼키아로 돌려보낼 것인지, 아니면 정해진 운명에 따라 죽게 둘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라는 이미 죽을 운명이 정해진 인간을 제우스가 마음대로 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트로이 전쟁에는 사르페돈뿐 아니라 여러 신의 자식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제우스가 자신의 아들만 살려 보낸다면 다른 신들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자식들을 전쟁터에서 빼내려고 할 것이었다. 대신 사르페돈이 죽은 뒤에는 그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 가족과 친족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제우스는 결국 헤라의 말을 받아들였다. 신들의 왕이었지만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운명에서 빼내지 않았다. 대신 사르페돈이 죽을 트로이의 들판 위로 피와 같은 붉은 빗방울을 내렸다. 그것은 먼 고향을 떠나 자신이 바라보는 앞에서 죽어야 하는 아들에게 제우스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표시였다. 그 사이 땅 위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두 전사의 결투가 마지막 순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장을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제우스와 헤라
 
 
3.4 파트로클로스의 창에 쓰러지다
 
사르페돈의 두 번째 창마저 빗나가자 파트로클로스가 반격하였다. 그가 힘껏 던진 창은 사르페돈의 가슴, 뛰는 심장이 자리한 곳에 깊숙이 박혔다. 사르페돈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산에서 배를 만들 목재를 얻기 위해 베어 낸 참나무나 포플러, 소나무가 쓰러지듯 뤼키아의 영웅도 자신의 전차와 말 앞에 길게 쓰러졌다. 제우스가 알고 있던 운명의 순간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사르페돈은 마지막 힘을 모아 글라우코스를 불렀다. 그는 뤼키아의 장수들을 모으고 트로이의 전사들에게도 도움을 청해 자신의 시신과 갑옷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스군이 그의 몸을 차지하여 갑옷을 벗겨 간다면 자신뿐 아니라 함께 싸운 뤼키아인들에게도 큰 치욕이 될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그의 마음은 자신을 따라 먼 트로이까지 온 동료들과 전사의 명예를 향해 있었다.
 
마지막 부탁을 남긴 뒤 사르페돈의 힘은 완전히 끊어졌다. 파트로클로스가 그의 가슴에 박힌 창을 뽑아내자 창끝과 함께 마지막 숨도 빠져나갔다. 한때 틀레폴레모스를 쓰러뜨리고 그리스군의 방벽에 길을 열었던 제우스의 아들은 트로이의 평원에서 생을 마쳤다. 하늘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제우스도 이미 받아들인 아들의 운명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파트로클로스의 창에 쓰러지는 사르페돈
 
 
 

제4장. 신들의 손으로 고향에 돌아가다

4.1 글라우코스가 마지막 부탁을 이어받다
 
사르페돈의 마지막 말을 들은 글라우코스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뤼키아의 왕이 눈앞에서 죽었지만, 그는 곧 친구가 남긴 부탁을 실행해야 했다. 사르페돈의 시신을 그리스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흩어진 뤼키아 병사들을 불러 모으고, 트로이의 장수들에게도 함께 싸워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글라우코스 역시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그는 앞서 그리스군의 방벽을 공격하다 테우크로스의 화살에 팔을 맞아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창을 제대로 들 수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사르페돈의 시신을 지킬 수 있을지 괴로워하던 글라우코스는 아폴론에게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팔에서 고통을 없애 주고 다시 싸울 힘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사르페돈의 마지막 부탁을 지킬 수 있도록 신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아폴론은 그의 기도를 듣고 상처의 통증을 가라앉혀 다시 힘을 되찾게 하였다. 글라우코스는 곧 뤼키아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왕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라고 외쳤다. 이어 헥토르와 다른 트로이 장수들에게도 사르페돈이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다가 죽었음을 일깨우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의 외침에 뤼키아군과 트로이군이 다시 모여들면서 사르페돈의 시신을 둘러싼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폴론에게 기도하는 부상당한 글라우코스
 
 
4.2 시신을 두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다
 
글라우코스의 외침을 들은 뤼키아군과 트로이군은 사르페돈의 시신 주위로 몰려들었다. 헥토르도 그의 죽음을 알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반대편에서는 파트로클로스가 아이아스와 다른 그리스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양쪽 모두 사르페돈의 시신과 갑옷을 차지하기 위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죽은 왕의 몸을 사이에 두고 창과 돌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제우스는 아들의 죽은 몸을 내려다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헥토르가 바로 이 싸움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그의 갑옷을 벗기게 할 것인지, 아니면 파트로클로스가 계속 싸우며 더 많은 트로이인을 쓰러뜨리도록 둘 것인지를 헤아렸다. 결국 제우스는 아직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고, 전투는 더욱 거세졌다. 사르페돈의 시신 주변에는 양쪽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갔다.
 
마침내 그리스군이 우세를 잡았다. 트로이군과 뤼키아군은 시신에서 밀려났고, 그리스 병사들은 사르페돈의 빛나는 갑옷을 벗겼다. 파트로클로스는 그것을 부하들에게 맡겨 그리스군의 배로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갑옷을 빼앗긴 사르페돈의 몸까지 적의 손에 남겨질 운명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아들을 운명에 맡긴 제우스는 이제 죽은 아들을 위해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사르페돈의 시신을 둘러싼 양군의 격전
 
 
4.3 아폴론이 사르페돈의 시신을 거두다
 
사르페돈의 갑옷이 벗겨지고 싸움이 지나간 뒤 제우스는 아폴론을 불렀다. 그는 아폴론에게 전장 한가운데 놓인 아들의 시신을 무기와 병사들 사이에서 꺼내 오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몸에 묻은 검은 피를 씻어 내고 흐르는 물로 깨끗하게 한 뒤, 암브로시아를 바르고 불멸의 옷을 입혀 주라고 하였다.
 
아폴론은 곧 이다산 높은 곳에서 내려와 전장으로 향했다. 그는 사르페돈의 몸을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들어 올려 멀리 옮겼다.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이 서로 차지하려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시신이 이제 신의 손에 들렸다. 아폴론은 제우스가 명한 대로 몸에 묻은 피와 먼지를 씻어 내고 상처 입은 육신을 정갈하게 정돈하였다.
 
이어 아폴론은 사르페돈의 몸에 암브로시아를 바르고 불멸의 옷을 입혔다. 전장에서 갑옷을 빼앗겨 쓰러져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왕의 모습만 남았다. 제우스는 살아 있는 아들을 파트로클로스의 창에서 구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몸만큼은 적의 손에 버려두지 않았다. 그리고 아폴론에게 사르페돈의 몸을 힙노스와 타나토스에게 맡겨 머나먼 뤼키아로 데려가게 하였다.
 
사르페돈의 시신을 거두는 아폴론
 
 
4.4 힙노스와 타나토스가 뤼키아로 데려가다
 
아폴론은 깨끗하게 단장한 사르페돈의 시신을 힙노스와 타나토스에게 맡겼다. 힙노스는 잠의 신이고 타나토스는 죽음의 신으로, 두 신은 형제였다. 제우스의 뜻에 따라 두 신은 사르페돈의 몸을 넓고 비옥한 고향 뤼키아로 데려가게 되었다. 트로이를 돕기 위해 스스로 떠났던 길을 이제 사르페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잠과 죽음의 두 신에게 안겨 돌아가게 되었다.
 
힙노스와 타나토스는 그의 몸을 트로이에서 멀리 떨어진 뤼키아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형제들과 친족이 죽은 사르페돈을 위해 장례를 치르고 봉분과 비석을 세우게 되어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갑옷을 빼앗겼지만 자신의 시신만큼은 적국의 들판에 버려지지 않았다. 트로이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뤼키아의 영웅은 마침내 자신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 죽은 자에게 합당한 장례를 맞게 되었다.
 
제우스는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에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지 않았다. 사르페돈 역시 자신이 글라우코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인간 앞에 놓인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왕이 누리는 명예만큼 전쟁에서도 앞장서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켰고, 파트로클로스와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살아 있는 사르페돈을 운명에 맡긴 제우스는 마지막으로 힙노스와 타나토스에게 아들을 맡겨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사르페돈을 고향으로 옮기는 힙노스와 타나토스
 

 
※ 출전: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2권 —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가 이끄는 뤼키아군.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5권 627~698행 — 틀레폴레모스와 사르페돈의 결투, 사르페돈의 부상.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6권 — 벨레로폰의 가계와 라오다메이아에게서 태어난 사르페돈의 계보.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12권 290행 이하, 특히 310~328행 — 그리스군 방벽 공격, 사르페돈이 글라우코스에게 말하는 왕의 의무와 죽음, 방벽 돌파.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16권 419~683행 — 파트로클로스와 사르페돈의 결투, 제우스와 헤라의 대화, 사르페돈의 죽음, 시신을 둘러싼 싸움, 아폴론·힙노스·타나토스에 의한 뤼키아 귀환.
•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3.1.1~2 —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 사르페돈 전승 및 호메로스의 라오다메이아 계보 언급.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사 총서》 5.79.3 — 에우로페의 아들 사르페돈과 트로이 전쟁의 사르페돈을 서로 다른 세대로 연결하는 전승.
 
※ 사르페돈의 계보에는 고대 전승에 따라 차이가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제우스와 벨레로폰의 딸 라오다메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전한다. 한편 다른 전승에서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로 미노스·라다만티스와 형제인 사르페돈이 등장하며, 후대에는 두 전승을 서로 다른 세대의 인물로 연결하기도 하였다. 이 글은 《일리아스》의 트로이 전쟁 영웅, 즉 제우스와 라오다메이아의 아들 사르페돈을 기준으로 구성하였다.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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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