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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폴리토스 – 아르테미스를 섬긴 왕자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는 트로이젠에서 자라며 사랑과 결혼을 멀리하고 아르테미스를 섬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프로디테는 계모 파이드라에게 금지된 사랑을 불어넣는다. 유모를 통해 그 마음을 알게 된 히폴리토스가 거절하자 파이드라는 죽기 전 그에게 누명을 씌운다. 이를 믿은 테세우스는 포세이돈에게 아들을 벌해 달라고 빌고, 히폴리토스는 전차 사고로 치명상을 입는다. 마지막에 아르테미스가 진실을 밝히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뒤늦게 화해한다.
1.1 아마존의 피를 이은 왕자
히폴리토스는 아테나이의 영웅 테세우스와 아마존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전승에 따라 안티오페나 히폴리테 등으로 다르게 전해지지만, 그는 아마존의 피를 이은 왕자로 기억되었다. 테세우스가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 파이드라와 혼인하게 되면서 히폴리토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테세우스는 앞으로 파이드라에게서 태어날 자식들과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생기는 것을 피하려는 뜻에서 히폴리토스를 트로이젠으로 보냈다. 그곳에는 테세우스의 외조부이자 지혜로운 왕으로 이름난 피테우스가 있었다. 피테우스는 히폴리토스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고 왕자로 길렀으며, 훗날 트로이젠을 이어받을 후계자로 생각했다. 히폴리토스에게 트로이젠은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 온 고향이 되었다.
아테나이의 궁정과 떨어져 성장한 히폴리토스는 정치와 권력보다 숲과 들판을 가까이했다. 그는 말타기와 사냥을 즐기고 몸을 단련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왕자의 지위보다 자유로운 야외 생활을 좋아했던 그는 궁정의 다툼과도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그의 마음은 점차 한 여신에게 깊이 기울었다. 활을 들고 산과 숲을 누비는 처녀신 아르테미스였다.
피테우스에게 맡겨지는 어린 히폴리토스
1.2 트로이젠의 숲에서 자라다
트로이젠에서 자란 히폴리토스는 젊은 동료들과 함께 산과 숲을 누비며 사냥하는 일을 즐겼다. 새벽이면 말에 오르고 사냥개를 데리고 들판으로 나갔으며, 사냥을 마친 뒤에는 다시 아르테미스의 성소를 찾았다. 왕궁의 연회나 화려한 생활보다 바람 부는 숲과 말발굽 소리가 그에게 더 익숙했다.
히폴리토스에게 아르테미스는 단순한 사냥의 여신이 아니었다. 그는 결혼을 멀리한 처녀신의 삶을 본받아 자신도 사랑과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살고자 했다. 다른 젊은이들이 연애와 혼인을 이야기할 때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냥과 경기, 말타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일을 더 좋아했다. 그는 정치적 권력이나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아르테미스를 향해 품은 숭배는 특별했다. 사람이 함부로 밟지 않은 초원에서 꺾은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여신에게 바치며 자신이 그녀와 가까이 있다고 믿었다. 숲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는 먼저 여신을 찾아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만을 높이는 마음은 차츰 다른 신을 낮춰 보는 태도로 이어졌다. 특히 사랑과 욕망을 다스리는 아프로디테를 멀리한 그의 태도는 훗날 큰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사냥개와 함께 숲을 달리는 젊은 히폴리토스
1.3 아르테미스에게 화관을 바치다
어느 날 히폴리토스는 사냥을 마치고 젊은 동료들과 함께 트로이젠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르테미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여신의 제단으로 향했다. 히폴리토스는 손에 들고 있던 화관을 아르테미스의 상에 걸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신에게 사냥의 기쁨과 깨끗한 삶을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곁에 있던 늙은 시종은 히폴리토스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다른 신들도 공경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가까운 곳에는 사랑과 욕망을 다스리는 아프로디테의 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종은 신들 가운데 누구도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아프로디테에게도 예를 갖추라고 권했다. 젊은 왕자가 한 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신을 업신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히폴리토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아프로디테가 다스리는 사랑을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며 그 제단을 지나쳤다. 그의 말에는 젊은 날의 자신감과 결벽에 가까운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아르테미스에게만 마음을 바치는 것이 가장 깨끗한 삶이라고 믿었던 그는, 자신이 모욕한 여신이 그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르테미스의 상에 화관을 바치는 히폴리토스
1.4 아프로디테의 분노를 사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멀리하고 아르테미스만을 높이는 히폴리토스의 태도를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사랑과 욕망은 인간과 신에게 모두 미치는 자신의 권능이었지만, 히폴리토스는 그것을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며 아프로디테를 공경하지 않았다. 여신은 그런 오만을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했다.
어느 날 히폴리토스가 신성한 밀의에 참여하기 위해 아티카를 찾았을 때 파이드라는 그를 처음 보았다. 바로 그때 아프로디테는 그녀의 마음에 거스를 수 없는 사랑을 불어넣었다. 파이드라에게 히폴리토스는 남편 테세우스의 아들이었으므로 그 감정은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두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아무 일도 없는 듯 견뎌 보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깊어졌다.
뒤에 테세우스가 팔라스의 아들들을 죽인 일로 생긴 피의 죄를 씻기 위해 파이드라와 함께 트로이젠으로 오면서 두 사람은 다시 가까운 곳에 머물게 되었다. 파이드라는 히폴리토스를 바라볼 때마다 괴로움이 커졌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동안, 아프로디테의 복수는 이미 그의 집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히폴리토스를 바라보다 사랑에 빠진 파이드라
2.1 파이드라가 사랑으로 병들다
파이드라는 처음에는 자신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히폴리토스를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것이 남편 테세우스의 아들에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을 이루기보다 차라리 숨긴 채 견디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파이드라의 몸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음식을 거부하고 침상에 누운 채 바깥의 햇빛조차 피했으며, 시녀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때로는 산으로 나가 사냥하고 싶다거나 맑은 샘물가에 눕고 싶다는 말을 중얼거렸고, 곁에서 듣던 유모는 그 말 속에 감춰진 마음을 알아내려 했다.
파이드라는 끝까지 입을 다물려 했지만 유모의 끈질긴 간청에 결국 자신이 히폴리토스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는 수치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사랑이 알려지면 자신의 명예뿐 아니라 자식들의 앞날까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녀는 욕망을 따르기보다 죽어서라도 비밀과 명예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가 침묵할수록 아프로디테가 심어 놓은 사랑은 더욱 깊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침상에 누워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파이드라
2.2 유모가 비밀을 알아내다
파이드라의 고백을 들은 유모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곧 주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랑도 인간에게 찾아오는 하나의 병과 같으니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달랬다. 파이드라는 그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유모는 겉으로는 약속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히폴리토스를 설득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이드라가 죽어 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주인의 뜻을 어기고 히폴리토스를 찾아가 비밀을 털어놓았으며, 그에게 파이드라의 마음을 받아들여 달라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히폴리토스는 뜻밖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아버지의 아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비밀을 유모가 자신에게 전했다는 일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이 관계가 집안과 왕가를 더럽힐 일이라고 보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만 유모가 먼저 받아 낸 맹세 때문에, 자신이 들은 일을 당장 테세우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약속과 분노 사이에서 흔들렸다.
파이드라에게 사랑의 비밀을 듣는 유모
2.3 히폴리토스가 사랑을 거부하다
유모에게서 모든 말을 들은 히폴리토스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과 결혼을 멀리해 온 이유를 말하며 파이드라의 감정에 응할 뜻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무엇보다 아버지 테세우스를 배신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유모는 목소리를 낮추라며 그를 말렸지만 그의 격한 말은 집 안까지 울려 퍼졌다.
파이드라는 안쪽에서 히폴리토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비밀이 이미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에게 전해졌고, 이제 언제든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고 여겼다. 히폴리토스가 맹세 때문에 침묵하겠다고 해도 그녀는 그 약속만으로 자신의 명예와 아이들의 미래를 맡길 수 없었다.
히폴리토스는 유모의 행동을 꾸짖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자신이 들은 비밀을 지키겠지만 파이드라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혼자 남은 파이드라는 유모를 원망하면서도 이미 되돌릴 길이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두려움은 사랑의 고통보다 더 커졌고, 마침내 자신의 죽음으로 이 일을 끝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과 자식들의 명예를 지킬 방법도 함께 생각해야 했다.
유모의 말을 듣고 격분하는 히폴리토스
2.4 파이드라가 거짓 고발을 남기다
파이드라는 자신의 죽음이 곧 모든 문제를 끝내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죽는다면 히폴리토스가 비밀을 밝힐 수도 있고, 사람들은 왕비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의심할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죽은 뒤에도 자신의 이름이 수치 속에 남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파이드라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그녀는 글판에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는 내용을 남겨 테세우스가 보도록 했다. 실제로는 히폴리토스가 그녀의 사랑을 거절했지만, 남겨진 글은 그를 가해자로 바꾸어 놓았다. 파이드라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동시에 자신을 거부한 히폴리토스에게 치명적인 의심을 남겼다.
글을 남긴 뒤 파이드라는 방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녀들의 울음소리가 궁 안에 퍼졌고, 집으로 돌아온 테세우스는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무너졌다. 아직 그는 파이드라가 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에 매달린 글판을 발견하는 순간, 슬픔은 곧 아들을 향한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글판에 적힌 고발은 테세우스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히폴리토스에게 누명을 씌우는 글판을 남긴 파이드라
3.1 테세우스가 파이드라의 글을 발견하다
테세우스는 파이드라의 시신 앞에서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울부짖다가 그녀가 남긴 글판을 발견했다. 봉인을 풀고 글을 읽은 순간 그의 얼굴은 굳어졌다. 글에는 히폴리토스가 파이드라의 정절을 더럽히려 했고, 왕비가 그 수치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했다는 뜻이 적혀 있었다.
테세우스에게는 죽은 아내의 글을 의심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파이드라는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도, 말을 바꿀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히폴리토스는 평소 사랑과 여성을 멀리한다고 말해 왔으므로, 테세우스는 오히려 그 태도 뒤에 거짓이 숨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슬픔은 순식간에 배신감과 분노로 변했다.
그때 히폴리토스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는 파이드라의 죽음에 놀랐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이미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테세우스는 글판을 들어 보이며 아들을 거칠게 몰아세웠고, 히폴리토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지키겠다고 맹세한 비밀이 이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증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도 곧바로 파이드라의 비밀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파이드라의 글판을 읽고 분노하는 테세우스
3.2 아버지와 아들이 맞서다
히폴리토스는 자신이 파이드라를 욕보이려 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랑과 욕망을 멀리하며 살아왔고, 아버지의 집과 왕위를 탐낸 적도 없다고 호소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트로이젠의 숲과 사냥,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조용한 삶뿐이라며 결백을 믿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테세우스에게 그런 말은 변명으로 들렸다. 그는 죽은 파이드라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거짓말을 남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 히폴리토스는 진실의 핵심을 알고 있었지만 유모에게 맹세한 일을 깨뜨릴 수 없었다. 파이드라가 자신을 사랑했고 유모가 그 비밀을 전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결백만 주장해야 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말은 점점 거칠어졌다. 히폴리토스는 신들을 증인으로 세워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맹세했지만 테세우스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마침내 히폴리토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말을 입 안에 두고도 약속 때문에 삼켰고, 그 침묵은 테세우스의 의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서로의 말을 받아들일 틈이 거의 남지 않았다.
결백을 호소하며 테세우스와 맞서는 히폴리토스
3.3 포세이돈에게 아들의 죽음을 빌다
테세우스의 분노는 아들을 꾸짖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일찍이 테세우스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테세우스는 그 약속 가운데 하나를 히폴리토스에게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바다의 신을 부르며 자신의 아들이 이날을 넘기지 못하도록 벌해 달라고 빌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그 소원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헤아리지 못했다.
히폴리토스는 아버지가 신의 힘까지 불러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유모 앞에서 한 맹세를 깨뜨리지 않았다. 파이드라가 자신을 사랑했고 유모가 그 비밀을 전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신들을 증인으로 세워 자신은 죄가 없다고 거듭 호소했다. 그러나 테세우스의 분노를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테세우스는 히폴리토스에게 당장 트로이젠을 떠나 다시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친구들과 시종들은 그의 결백을 믿었지만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히폴리토스는 아버지를 저주하지 않은 채 자신이 사랑하던 숲과 아르테미스의 성소를 뒤로했다. 아무도 진실을 믿어 주지 않는 가운데 그는 전차를 준비해 추방의 길에 올랐다.
바다를 향해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비는 테세우스
3.4 히폴리토스가 트로이젠을 떠나다
히폴리토스는 익숙한 말들을 전차에 매고 트로이젠을 떠났다. 오랫동안 함께 사냥하고 달리던 말들이었고, 그는 누구보다 능숙하게 고삐를 다룰 줄 알았다. 몇몇 동료들이 그의 뒤를 따랐지만 길 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고향에서 쫓겨나는 왕자에게 누구도 쉽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전차는 트로이젠을 벗어나 해안을 따라 아르고스와 에피다우로스로 이어지는 길을 향했다. 한쪽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쪽에는 바위와 숲이 이어졌다. 히폴리토스는 자신의 운명이 갑자기 무너진 까닭을 생각하면서도 끝내 맹세를 깨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가 진실을 알게 되기를 바랄 뿐 파이드라의 비밀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추방당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포세이돈에게 빌었던 저주는 이미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잔잔하던 바다에서 갑자기 거대한 소리가 들리더니 먼 수면 위로 높은 물결이 일어났다. 말들은 귀를 세우고 불안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히폴리토스가 고삐를 잡아 진정시키려는 순간, 파도 속에서 평범한 폭풍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차를 타고 트로이젠을 떠나는 히폴리토스
4.1 바다에서 황소가 나타나다
바다의 물결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마침내 거대한 황소의 모습이 파도 사이에서 솟아올랐다. 괴물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안으로 달려왔고, 그 모습을 본 말들은 공포에 질려 날뛰기 시작했다. 히폴리토스는 재빨리 고삐를 당기며 익숙한 목소리로 말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말들은 더 이상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전차는 바닷길을 벗어나 거칠게 흔들리며 바위가 많은 길로 치달았다. 히폴리토스는 몸을 세우고 고삐를 놓지 않은 채 방향을 돌리려 했지만 말들의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동료들은 뒤에서 그를 따라가며 멈추라고 외쳤으나 전차와 말은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해안의 좁은 길에서는 전차가 방향을 바꿀 여유도 거의 없었다.
마침내 전차가 바위와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히폴리토스는 넘어지는 순간 고삐에 몸이 얽혀 땅 위로 끌려갔고, 바위와 거친 땅에 온몸을 크게 다쳤다. 말들이 멈춘 뒤 동료들이 달려왔을 때 그는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테세우스가 포세이돈에게 빌었던 저주는 그렇게 아들에게 닿았다. 바다의 신은 아버지가 내린 저주를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파도 속 황소에 놀라 날뛰는 말과 히폴리토스
4.2 부서진 전차와 죽어 가는 왕자
히폴리토스와 함께 길을 나섰던 동료들은 부서진 전차 곁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고삐에 얽힌 그의 몸을 풀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바위와 땅에 끌려간 히폴리토스는 온몸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고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은 남아 있었으며, 그는 자신이 죄 없이 이런 일을 당했다며 신들이 결백을 밝혀 주기를 바랐다.
한 전령이 먼저 트로이젠으로 돌아가 테세우스에게 사고를 알렸다. 그는 바다에서 거대한 황소가 나타나자 말들이 놀라 날뛰었고, 전차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고 전했다. 히폴리토스가 심한 상처를 입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테세우스는 아직 파이드라의 글을 진실이라 믿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여겼지만, 죽어 가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 앞에서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에 빠졌다.
바로 그때 궁전에는 인간의 말로는 풀 수 없었던 비밀을 밝힐 존재가 나타났다. 히폴리토스가 평생 섬겨 온 아르테미스였다. 여신은 자신의 숭배자가 누명을 쓴 채 죽어 가는 일을 더는 그대로 둘 수 없었다. 테세우스가 여전히 아들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순간, 아르테미스는 모든 비극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밝히기 위해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서진 전차 곁에 쓰러진 히폴리토스
4.3 아르테미스가 진실을 밝히다
아르테미스는 테세우스 앞에 나타나 히폴리토스가 파이드라를 욕보이려 했다는 고발이 거짓이라고 밝혔다. 파이드라가 히폴리토스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프로디테의 뜻에서 시작되었고, 히폴리토스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모가 비밀을 전한 뒤 일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파이드라가 죽으면서 거짓 글을 남겼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테세우스는 자신이 너무 늦게 진실을 알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죽은 아내의 글만 믿고 아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포세이돈에게 받은 귀한 소원까지 사용해 히폴리토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르테미스는 히폴리토스가 맹세를 지키느라 파이드라의 비밀을 밝힐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들의 침묵은 죄의 증거가 아니라 약속을 지킨 결과였다.
아르테미스의 말을 들은 테세우스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제 아무리 후회해도 포세이돈의 저주를 되돌릴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동료들이 치명상을 입은 히폴리토스를 궁전 앞으로 데려왔다. 히폴리토스는 아버지를 보자 자신에게 닥친 일을 이해했고, 테세우스는 죽어 가는 아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테세우스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아르테미스
4.4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름을 남기다
테세우스는 죽어 가는 히폴리토스 곁으로 다가가 자신이 성급하게 판단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파이드라의 글만 믿고 아들의 호소를 듣지 않은 채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빌었던 일을 깊이 후회했다. 히폴리토스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르테미스의 말을 따라 테세우스를 용서하고, 자신의 결백이 밝혀진 것으로 마지막 위안을 삼았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을 충실히 섬긴 히폴리토스의 이름이 트로이젠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혼인을 앞둔 처녀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그의 성소에 바치고, 노래를 통해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의 비극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에게는 죽어 가는 인간의 마지막 숨결을 바라보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여신은 히폴리토스에게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자리를 떠났다.
히폴리토스는 테세우스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죄에서 풀어 주고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테세우스는 아들의 몸을 받아 안으며 뒤늦은 슬픔에 잠겼다. 훗날 트로이젠에는 히폴리토스의 성역과 무덤이 전해졌고 그를 기리는 제의가 이어졌다. 아르테미스만을 섬겼던 왕자는 신들의 갈등과 인간의 오해 속에서 죽었지만, 그의 결백과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죽기 전 테세우스의 손을 잡는 히폴리토스
※ 출전: • 에우리피데스, 《히폴리토스(Hippolytos)》 — 본문의 중심 출전. 아프로디테의 복수, 파이드라와 유모, 히폴리토스의 맹세, 파이드라의 고발, 테세우스의 저주, 포세이돈이 보낸 재앙, 아르테미스의 진실 공개와 부자의 화해를 따른다. •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에피토메 1.16~19 — 히폴리토스의 아마존계 출생,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 테세우스의 저주와 바다에서 나타난 황소에 관한 전승. • 파우사니아스, 《그리스 여행기》 1.22.1~2, 2.31.4, 2.32.1~4·10 — 히폴리토스가 피테우스에게 맡겨진 전승, 트로이젠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히폴리토스 성역, 무덤, 혼인 전 처녀들이 머리카락을 바치는 풍습과 전차 사고에 관한 지역 전승.
※ 히폴리토스의 어머니는 전승에 따라 안티오페, 히폴리테 또는 멜라니페 등으로 전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특정 이름을 단정하지 않고 ‘아마존 여인’으로 표현했다. ※ 아폴로도로스의 전승에서는 파이드라가 직접 히폴리토스에게 접근하고 거짓 고발을 한 뒤 죽는 것으로 전하지만, 이 본문은 유모가 비밀을 전하고 파이드라가 글을 남기는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 전승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 파우사니아스는 파이드라가 트로이젠에서 히폴리토스를 처음 보았다고 전하지만, 본문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 따라 신성한 밀의에 참여하러 아티카에 온 히폴리토스를 파이드라가 처음 본 것으로 구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