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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온 – 늑대가 된 왕
아르카디아의 왕 리카온은 도시를 세우고 제우스를 위한 제전을 마련한 오래된 왕으로 전해지지만, 다른 전승에서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우스까지 시험하려 한 오만한 왕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 제우스를 시험하려 한 그는 손님을 죽이려 하고 인간의 살까지 음식으로 내놓는다. 분노한 제우스는 그의 궁전을 무너뜨리고, 달아난 리카온을 늑대로 바꾸어 버린다. 리카온의 집안에 내려진 심판은 뒤이어 인간 세계를 덮친 대홍수 이야기와도 이어진다.
1.1 펠라스고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다
아르카디아에는 펠라스고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리카온이 왕이 되었다. 펠라스고스는 사람들이 아직 거친 풀과 뿌리를 먹으며 살던 시대에 먹을 수 있는 도토리를 알려 주고, 추위를 피할 집과 옷을 마련하게 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왕이었다. 리카온은 아버지가 다스리던 산과 계곡의 땅을 물려받아 아르카디아의 왕이 되었다. 아폴로도로스는 그의 어머니를 오케아노스의 딸 멜리보이아라고도 하고, 님프 킬레네라고도 전한다.
리카온은 왕이 된 뒤 리카이온산에 리코수라라는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파우사니아스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전하며, 리카온이 제우스에게 ‘리카이오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위한 제전인 리카이아도 마련했다고 기록했다. 산 정상에는 제우스 리카이오스의 제단이 있었고, 아르카디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곳을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이처럼 리카온은 처음부터 잔혹한 왕으로만 전해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도시를 세우고 신을 위한 제의와 축제를 마련한 아르카디아의 오래된 왕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우스를 위한 제전을 마련했던 바로 그 왕이 다른 전승에서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시험하려 들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리카이온산의 제우스 제단 주변에는 마침내 그의 이름을 두렵게 만든 또 하나의 전승이 생겨나게 된다.
리카이온산을 바라보는 젊은 왕 리카온
1.2 리카온의 아들들이 아르카디아에 퍼지다
리카온의 집안은 크게 번성했다. 아폴로도로스는 그가 여러 아내에게서 쉰 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한다. 파우사니아스의 전승에서도 리카온의 아들들은 아르카디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새로운 도시와 정착지를 세웠다. 팔라스는 팔란티온을, 만티네우스는 만티네이아를 세웠으며, 마이나로스와 테게아테스, 피갈로스 같은 아들들의 이름 역시 훗날 산이나 도시의 이름으로 남았다고 전해진다.
리카온의 아들들이 여러 지역에 도시를 세우면서 그들의 이름은 아르카디아 곳곳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도시를 세운 이야기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폴로도로스는 리카온의 아들들이 오만과 불경에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다고 전한다. 자신들의 힘과 지위를 믿은 그들은 신들의 뜻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간이 지켜야 할 금기조차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한편 오비디우스의 전승에서 리카온은 신을 경외하기보다 직접 시험하려 드는 오만한 왕으로 나타난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존재가 정말 신인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고, 직접 시험해 그 정체를 밝히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카디아에 낯선 방문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등장은 리카온과 그 집안에 감추어져 있던 불경과 잔혹함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여러 도시로 떠나는 리카온의 아들들의 행렬
1.3 제우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찾아오다
그 무렵 인간 세상에는 폭력과 탐욕이 널리 퍼졌다고 전해진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 제우스는 땅 위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소문을 듣고 그것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로 한다. 그는 높은 올림포스에서 내려와 신의 모습을 감추고 인간의 형상을 취했다. 신들의 왕은 홀로 땅 위를 다니며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폈다.
제우스는 산길을 따라 아르카디아로 들어왔다. 그는 마이나론의 산과 킬레네, 리카이온산 주변을 지나며 인간 세상의 모습을 살폈다. 날이 저물 무렵 마침내 리카온이 다스리는 곳에 이르러 왕의 집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곧 자신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리는 신성한 징표를 나타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외심 속에서 제우스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리카온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는 눈앞의 방문자가 정말 신인지 자신이 직접 시험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신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왕은 오히려 함정을 준비했다. 그 순간부터 리카온의 집은 신을 맞이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신의 정체를 시험하려 드는 위험한 무대로 바뀌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리카온의 집에 들어서는 제우스
1.4 신을 시험하기로 마음먹다
리카온은 겉으로는 손님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낯선 방문자가 제우스라면 평범한 인간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것이라 여겼다. 반대로 아무 힘도 보이지 못한다면 신을 사칭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신을 경외하기보다 함정을 놓아 정체를 밝히겠다는 오만한 판단이었다.
밤이 깊자 리카온은 가장 먼저 손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오비디우스의 전승에서는 그가 잠든 제우스를 기습해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인간이라면 그대로 죽을 것이고, 신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이 리카온의 생각이었다. 손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오래된 환대의 규범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리카온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끔찍한 시험을 준비했다. 자신의 집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몰로시아 사람 하나를 죽이고 그 살을 일부는 끓이고 일부는 불에 구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을 식탁에 올려 손님에게 내놓으려 했다. 리카온은 자신이 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으로서 넘어서는 안 될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잠든 제우스를 바라보며 계략을 꾸미는 리카온
2.1 인간의 살을 음식으로 내놓다
리카온은 자신이 마련한 시험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낯선 손님을 궁전의 식탁으로 불러들이고 겉으로는 평범한 음식처럼 보이는 접시들을 차려 내놓았다. 왕은 태연한 얼굴로 손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눈앞의 인물이 정말 제우스라면 음식의 정체를 알아볼 것이고, 단순한 인간이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그것을 먹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비디우스의 전승에 따르면 리카온은 자신의 집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몰로시아 사람 하나를 죽였다. 그는 희생자의 살 일부는 물에 삶고, 일부는 불에 구운 뒤 다른 음식과 함께 식탁에 올렸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 살을 손님에게 먹이려 한 것이다. 리카온에게 그것은 신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었지만, 이미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무거운 금기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제우스는 식탁에 놓인 음식의 정체를 즉시 알아차렸다. 리카온이 저지른 살인도, 밤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계획도 그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신을 시험하기 위해 마련한 식탁 앞에서 리카온의 계략은 모두 드러났다. 이제 그가 마주해야 할 것은 자신이 모욕한 신들의 왕의 분노였다.
제우스 앞에 금지된 음식을 내놓는 리카온
2.2 제우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다
제우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리카온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아 그 살을 음식으로 만들고, 자신을 찾아온 손님마저 죽이려 했다. 신의 정체를 시험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인간과 신 사이에 지켜야 할 가장 무거운 금기를 차례로 짓밟은 것이었다. 리카온은 이제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깨닫기 시작했다.
리카온이 바라던 것은 눈앞의 방문자가 신인지 인간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한 것은 오히려 리카온 자신이었다. 신에게 인간의 살을 내놓고 손님을 죽이려 한 그의 행동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제우스 앞에서 왕의 계략은 모두 드러났고, 이제 궁전에는 곧 닥칠 심판을 앞둔 긴장만이 남았다.
리카온은 그제야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제우스의 분노는 왕과 그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번개의 빛이 번쩍였고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이 자랑하던 권력과 궁전은 신의 심판 앞에서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신을 시험하려던 리카온의 계획은 실패했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대가를 받는 일이었다.
리카온의 계략을 알아차리고 분노하는 제우스
2.3 번개가 궁전을 무너뜨리다
제우스는 번개를 내려 리카온의 궁전을 쳤다. 불길이 기둥과 지붕을 휩쓸고, 왕이 자랑하던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궁전에서 신을 시험하던 왕은 이제 불길과 천둥 사이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달아나야 했다.
리카온은 무너지는 궁전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아무 무기도 챙기지 못한 채 들판과 숲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는 불길이 하늘로 솟았고, 천둥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렸다. 왕을 따르던 사람들도 흩어졌으며, 누구도 그를 보호하려 나서지 못했다. 손님을 죽이려 했던 궁전은 이제 자신이 도망쳐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궁전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제우스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리카온은 황야를 달리며 살려 달라고 외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에서는 말 대신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손과 발,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제우스의 벌은 궁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왕의 몸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
번개에 무너지는 궁전에서 달아나는 리카온
2.4 들판에서 늑대로 변하다
들판으로 달아난 리카온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에서 나온 것은 끊어진 외침과 짐승의 울음에 가까운 소리뿐이었다. 그는 당황하여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 했으나 손가락은 점차 굳어지고 몸은 앞으로 기울었다. 피부 위로 거친 털이 돋기 시작했고, 팔과 다리의 모습도 빠르게 달라졌다.
얼굴에는 왕이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점점 늑대의 주둥이와 이빨이 드러났다. 오비디우스는 변신한 뒤에도 그의 회색 머리와 사나운 얼굴, 번뜩이는 눈빛이 그대로 남았다고 묘사한다. 모습은 짐승이 되었지만 피를 좋아하고 폭력을 즐기던 성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일 때 품었던 잔혹함이 이제 늑대의 몸으로 드러난 셈이었다.
리카온은 더 이상 궁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람의 말을 잃은 그는 들판을 헤매며 양 떼를 향해 달려들었고, 입에서는 울부짖음만 흘러나왔다. 신을 시험하려 했던 아르카디아의 왕은 자신이 멸시하던 질서 밖으로 밀려나 인간 사회에서 쫓겨난 짐승이 되었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왕의 위업보다 늑대로 변한 이야기와 함께 오래 기억되었다.
황야에서 늑대로 변해 가는 리카온
3.1 리카온의 아들들이 심판을 받다
리카온과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오비디우스와 다른 전승도 전해진다. 아폴로도로스는 리카온에게 여러 아내에게서 태어난 쉰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오만과 불경한 행동으로 악명을 떨쳤다고 기록한다. 제우스는 그들에 관한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평범한 일꾼의 모습으로 아르카디아를 찾아왔다. 그러나 리카온의 아들들은 낯선 방문자를 환대하기보다 그가 정말 신인지 시험하려 했다.
그들은 한 소년을 죽여 그 내장을 희생 제물의 고기와 섞은 뒤 제우스에게 내놓았다. 형 마이나로스가 이 일을 부추겼다고 전해진다. 제우스는 음식의 정체를 즉시 알아차리고 분노하여 식탁을 뒤엎었다. 이어 번개를 내려 리카온과 그의 아들들을 벌했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와 세부는 다르지만, 인간의 살을 신에게 내놓아 그의 정체를 시험하려 했다는 중심 사건은 서로 닮아 있다.
아폴로도로스의 전승에서는 막내 닉티모스만이 살아남았다. 제우스가 마지막으로 그를 치려는 순간 가이아가 신의 오른손을 붙잡아 분노를 가라앉혔기 때문이다. 다른 형제들이 모두 쓰러진 뒤 닉티모스는 아르카디아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리카온의 집안에 내려진 재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로 닉티모스가 왕이 된 시대에 인간 세상을 뒤덮는 거대한 홍수가 닥치게 된다.
번개 앞에서 심판받는 리카온과 그의 아들들
3.2 리카이온산에 늑대 전설이 남다
리카온의 변신에 대해서도 또 다른 오래된 전승이 전해진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리카온은 리카이온산의 제우스 리카이오스 제단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제단 위에 흘렸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인간의 모습을 잃고 늑대로 변했다. 이 이야기에서는 궁전을 찾아온 제우스나 금지된 식탁 대신, 신성한 제단에서 이루어진 인간 희생이 리카온에게 내려진 변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리카이온산에는 이후에도 인간이 늑대로 변한다는 기묘한 전설이 이어졌다. 제우스에게 바친 희생 제물 가운데 인간의 살을 맛본 사람은 늑대로 변한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변한 사람이 아홉 해 동안 인간의 살을 먹지 않으면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기간에 다시 인간의 살을 먹으면 영원히 늑대의 모습으로 남는다고 전해졌다.
이러한 이야기는 리카온의 이름을 리카이온산과 늑대의 전설에 깊이 연결시켰다. 전승마다 사건의 모습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리카온 또는 그의 집안이 인간 희생과 인간의 살을 둘러싼 가장 무거운 금기를 어겼고, 그 결과 제우스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뒤 리카온은 아르카디아의 오래된 왕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모습을 잃고 늑대가 된 왕으로 기억되었다.
제우스 제단 앞에서 늑대로 변하는 리카온
3.3 닉티모스의 시대에 대홍수가 닥치다
리카온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닉티모스는 큰 재앙을 겪은 왕가를 이어 아르카디아를 다스렸다. 그의 형제들은 제우스의 번개에 쓰러졌고, 아버지 리카온 역시 신의 심판을 받았다. 아폴로도로스의 전승에서는 바로 닉티모스의 시대에 데우칼리온의 대홍수가 일어났다고 전한다. 어떤 이들은 그 홍수의 원인을 리카온의 아들들이 저지른 불경한 행위에서 찾았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도 리카온 사건 뒤에 곧바로 대홍수가 이어진다. 제우스는 신들의 회의에서 리카온이 저지른 일을 들려주며 인간 세상의 타락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말한다. 한 왕의 궁전에서 확인한 잔혹함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죄로만 보이지 않았다. 제우스는 인간 세계 전체가 폭력과 불경으로 병들었다고 판단하고 더 큰 심판을 준비한다.
처음에는 번개로 세상을 태워 버릴 생각도 했지만, 하늘까지 불길이 번질 것을 염려해 물로 인간 세계를 쓸어 버리기로 한다.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쏟아졌으며 강과 바다가 땅을 삼키기 시작했다. 이렇게 리카온의 식탁에서 드러난 인간의 죄는 신화 속에서 데우칼리온의 대홍수로 이어지는 서막이 되었다.
거대한 홍수에 잠겨 가는 인간 세계
3.4 늑대가 된 왕으로 남다
대홍수 속에서도 모든 인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신들을 공경하고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으로 여겨져 살아남았고, 물이 물러간 뒤 다시 인간 세상을 이어 가게 된다. 대홍수 이전의 폭력과 불경한 인간 세계는 물속에 사라졌으며, 데우칼리온과 피라를 통해 새로운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때 리카온은 도시를 세우고 제전을 마련한 아르카디아의 오래된 왕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가장 오래 남긴 것은 왕국의 크기나 도시 건설이 아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 신을 시험하고, 인간의 생명을 빼앗아 그 살을 음식으로 내놓은 뒤 늑대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그의 이름과 결합했다. 왕의 모습 아래 감추어져 있던 잔혹함이 짐승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리하여 리카온은 신을 시험한 왕이자 인간의 모습을 잃고 늑대로 변한 존재로 그리스 신화에 남았다. 그의 이야기는 리카이온산의 제우스 제의와 인간 희생의 전승, 그리고 데우칼리온의 대홍수 이야기와 서로 얽히며 여러 형태로 전해졌다. 전승마다 세부는 달랐지만 마지막 모습만은 강렬하게 남았다. 아르카디아의 왕좌에 앉아 있던 인간이 황야에서 울부짖는 늑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황야에서 홀로 울부짖는 늑대가 된 리카온
※ 출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 제1권 163행 이하 ― 리카온과 대홍수 이야기 • 아폴로도로스, 《도서관(Bibliotheca)》 제3권 8.1~8.2 • 파우사니아스, 《그리스 여행기(Description of Greece)》 제8권 1.4~1.6, 2.1~2.6, 3.1~3.4, 38.1, 38.5~3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