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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3〉
명나라는 건국 후 10개월이 지나 1368년 11월(공민왕 17)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부보랑(符寶郎) 직위의 설사(偰斯)를 외교 특사로 임명했다. 황제의 친서를 들고 해로를 통해 이동하다 사신단은 풍랑으로 고초(苦楚)를 겪은 끝에, 1369년 4월 고려 개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사신단은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 태조로 나라를 건국했음을 고려왕에게 공식 통보했다. 설사는 1370년 5월에 상보상승(尙寶司氶)의 직함으로 고려를 다시 방문했다.
설 씨는 조상 대대로 바이칼호 남쪽의 항가이산맥에서 발원하여 바이칼호로 흘러 들어가는 설련하(偰輦河: 현재의 셀렝가강) 강가에서 살았다. 설사는 위구르(回鶻) 고창(高昌. 하미 지역) 출신으로 원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 주원장에게 귀부(歸附)한 인물이다.
설손(偰遜)은 원나라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스승으로 경전을 가르쳤다, 그는 승상 합마(哈麻)의 비위에 거슬려 단주(單州) 태수로 좌천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한 후 대녕(大寧)에 살았다. 그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인연이 있는 공민왕을 찾아 1358년(공민왕 7)에 다섯 명의 아들 설장수(偰長壽), 설연수(偰延壽), 설복수(偰福壽), 설경수(偰慶壽), 설미수(偰眉壽)를 이끌고 고려에 망명했다가 1360년에 세상을 떠났다.
18세에 고려에 귀화한 설장수(偰長壽, 1341~1399)는 공민왕의 후원 속에 공부하여 1362년 홍언박(洪彦博)과 유숙(柳淑)이 주관한 과거에 정도전, 박의중과 함께 급제했다. 그는 4개 언어가 능통해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대명 외교의 중책을 맡아 1373년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기 시작해 여덟 번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며 복잡한 외교 현안을 해결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는 그를 “고가(高家)의 자손이다.”라고 하면서 극진하게 대접하며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조선의 통역 및 외국어 교육기관인 사역원을 관장하며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사역원은 대외무역을 관장하는 인재도 양성했다. 동생 설미수(偰眉壽)는 태종 때 다섯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다녀왔다.
홍건군(紅巾軍) 공격 진로(사진:다음 카페)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전순동(全淳東, 1945~ ) 명예교수는 명(明)·청(淸) 시대사를 전공하여, 2012년 중국사학회 발간 《중국사 연구》에 〈명초 환관의 외교 활동 실태와 그 특성〉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인용된 사료에 따르면 명나라 황제는 1369년(홍무 2) 4월에 “요사이 북방 유연(幽燕) 지방의 백성을 남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는데, 그중에 고려 백성 156명이 있으니 그들이 어찌 향리와 골육(骨肉)에 대한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 짐이 매우 불쌍히 여겨 유사에게 명하여 배를 준비하고 사신을 보내어 이들을 호송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라고 명했다. 옆에 있던 고려 출신 환관 내사감승(內使監丞) 김여연(金麗淵)도 배려하여 고려에 파견하였다. 환관 김여연은 사라(紗羅) 6필을 고려 국왕에게 예물로 올리고 옥새(玉璽)가 찍힌 국서를 고려에 전했다. 김여연은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 만나 《고려사절요》에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送朝天客歸國詩章圖)(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외국 사신이 명나라 수도인 남경을 방문했다가 귀국할 때 전별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배는 명나라 관용 선박 참선(站船)이다.
순천향대 박현규 교수가 쓴 〈송조천객귀국시장도(送朝天客歸國詩章圖)의 제작 시기와 朝天客 분석〉 논문을 읽었는데, 논문에 의하면 “그림의 형태는 권축본으로, 전체 크기는 103.6 × 163.0cm이다. 하단은 진한 채색으로 그린 그림이고, 재질은 명주(絹)이다. 상단에는 그림의 내용을 알려주는 글씨가 쓰여 있고, 재질은 종이이다. 상단 글씨는 영파의 유명한 화가 운관옹(雲冠翁) 방사(方仕, 호 梅厓)의 화제와 당시 감찰어사(監察御使)이던 일호(日湖) 김유심(金唯深)의 시가 있다.”
세계유산 베이징 자금성(사진:궁인창)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明成祖, 永樂帝, 1360~1424)는 1406년에 자금성(紫禁城)을 착공해 1420년 12월에 완공했다. 1421년(영락 19) 정월에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고 황실 가족은 새로 지은 집에 입주했다. 그런데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421년 음력 4월 8일 밤 자금성 상공에 돌연 비구름이 몰려와 종일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계속 내리쳤다. 이날 거대한 벼락이 핵심 전각인 봉천전(奉天殿), 화개전(華蓋殿), 근신전(謹身殿)에 떨어져 세 전각이 불이 나 전소되었다. 황권의 상징인 전각이 잿더미로 변하자, 민심은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러 천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대신들은 난징 천도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불이 난 건물들은 20여 년간 방치되다 복원되었다.
영락제는 조선에 개인적인 요구로 공녀를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고려의 한영정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그의 딸이 제3차 공녀로 선발되어 영락제의 후궁 여비(麗妃)에 봉해졌다가 황제가 1424년 7월 18일 유목천 막영에서 붕어(崩御)하여 순장 대상 16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명 황실에서 생활한 지 8년 만에 짧은 생애를 마쳤다. 영락제는 베이징 북쪽 천수산(天壽山) 자락 장릉(長陵)에 묻혔다.
장남 주고치(朱高熾, 1378~1425)는 1404년에 황태자로 책봉된 지 20년 만인 1424년에 보위를 이어 제4대 황제 홍희제(洪熙帝)가 되었다. 홍희제는 매우 부지런해 매일 신하들을 불러 조언을 구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몸이 너무 병약했던 데다, 남경 환도를 급히 서둘러 4월 4일 남경의 황성을 수축하라고 명령했다. 황제는 과로가 쌓여 재위한 지 10개월 만에 5월 12일에 급서(急逝)하여 황태자가 선덕제(明宣宗, 宣德帝, 1399~1435)로 즉위했다.
태감 창성(昌盛)과 환관 윤봉(尹鳳)이 선덕제에게 여비(麗妃)의 여동생이 무척 아름답다고 말해 선종은 호기심이 무척 강해 두 사람을 조선으로 보내 동생 한계란(韓桂蘭, 1410~1483)을 맞이하도록 명했다. 조선 세종 10년의 제5차 공녀로 청주 한씨 한영정의 딸 한계란이 19살에 명나라에 진헌되었다.
당조 히로시 著《영락제》(사진:궁인창)
명나라 환관 윤봉(尹鳳, 1386~1469)은 본래 조선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그는 어려서 거세되어 환관 이빈(李彬)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 1403년(태종 3) 이전 명나라에 화자(火者, 고자, 內侍)로 진헌(進獻)되어 명나라의 사례감(司禮監)에 재직하면서 1406년(태종 6) 이전에 종 6품 봉어(奉御)가 되고, 이후 전부(典簿, 정 6)·승(丞, 정 5)·소감(少監, 종 4)을 거쳐 1428년(세종 10) 이전에 장관직인 정4품 태감(太監)에 승진하였다. 태종실록 12권에 의하면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배려로 1406년 8월 6일 “내사 이원의(李原儀) 등 19인이 와서 대궐에 나아가 숙배하고 태평관에 머물렀다. 황제는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게(省親) 하였다.
【원문】 ○ 壬辰/內史李原義、尹鳳等十九人來, 詣闕肅拜, 館于太平館。 原義等, 皆本國所進宦者也。 帝使還鄕省親。
윤봉(尹鳳)은 1년 후(1407, 明 永樂 5년)에 황제의 칙서를 든 사신에 뽑혀 조선의 어린 화자 300~400명을 뽑아가는 임무를 띠고 조선에 건너왔다.
【태종실록 국역 원문】 흠차 내사(欽差內史) 한첩목아(韓帖木兒), 윤봉(尹鳳), 이달(李達), 김득남(金得南) 등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니, 길거리에 결채(結綵)하고 백관이 반송정(盤松亭)에 나가 맞이하고, 임금은 창덕궁(昌德宮)의 인정문(仁政門)에 나가 맞이하여 정전(正殿)으로 맞아들였다. 자문은 이러하였다. “본부 상서(本部尙書) 조공(趙羾)이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너희 예부(禮部)에서 곧 공문서(公文書)를 보내 조선 국왕(朝鮮國王)에게 알리어, 화자(火者, 환관)를 데려오게 하고, 여기서 한첩목아를 사신으로 보내어 성지(聖旨)를 구두(口頭)로 선포(宣布)하게 하라. 짐(朕)이 안남(安南)에서 화자(火者) 3천을 데려왔으나, 모두 우매하여 쓸 데가 없다. 오직 조선의 화자(火者)가 명민(明敏)하여 일을 맡겨 부릴 만하다. 이리하여 구(求)하는 것이다. 다만 자문(咨文) 내(內)에 그 숫자를 제한하지 말 것인즉, 만일 짐(朕)이 숫자를 정하게 되면, 국왕이 그 액수(額數)를 채우지 못하면 국왕이 지성으로 짐을 섬기는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사적(私的)으로 한첩목아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뜻은 어떠합니까?”하니, 한첩목아가, “3, 4백 명 선에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임금이, “이것들은 종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맞이하여 광연루(廣延樓)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고, 각각 안마(鞍馬)를 주었다.
서인범 교수(사진:동국대)
서인범 교수는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후쿠(東北) 대학에 유학하여 문학부 동양사학과에서 〈明代兵制史硏究〉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해 은사 조영록 교수가 건넨 최부의 《표해록》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2009년 연구년을 맞아 ‘최부의 길’을 걸었다, 서 교수는 최부의 고난의 여정을 통해 알게 된 그늘에 가려져 있던 조선 출신 환관과 공녀를 연구하고 고문헌을 조사했다. 그의 논문에 “조선은 태조에서 성종 대까지 15회에 걸쳐 207명의 화자를 명나라에 진헌 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사례감 태감은 물론 12감(監)의 하나인 상보감, 사설감, 어마감(말과 코끼리 관리)의 태감을 지냈다. 조선 중기까지 명나라 사신의 대부분은 조선 출신 환관이었고,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환관 수는 10만 명, 여관은 9,000명에 달했다.”라고 글로 발표했다. 명의 사신 윤봉 일행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한확(韓確, 1400~1456)은 여동생 한계란이 병이 나서 명나라에 도저히 갈 수 없다고 말해 한계란(韓桂蘭, 1410~1483)은 4차 공녀로 선발되었지만, 5차 때 명나라로 향했다. 명나라 문헌에는 한계란은 영락 8년(永樂 8, 조선 태종 10년) 4월 9일에 태어났고, 그녀의 가문은 고려 말에 명성을 떨친 상장군 한악(韓渥)의 5남인 한방신(韓方信)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사진:위키백과)
고려 제31대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은 충숙왕과 명덕태후(明德太后) 홍 씨의 차남이자 충혜왕의 친동생이다. 초명은 왕기(王祺)였으나 왕전(王顓)이라 개명했다.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이고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이다. 그는 어릴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져 1341년(충혜왕 2) 12살에 원나라 대도에 가서 10년간 독로화(禿魯花)로 있으면서 원나라 중앙정치를 직접 목격하고 배웠다. 이후 1349년 원나라 종실(宗室)인 위왕(魏王) 보로테무르(孛羅帖木兒, ?~1353)의 딸 부다시리(寶塔失里)와 혼인하여, 부인은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왕기는 타향 객지에 머물면서 원의 간섭에서 빨리 벗어나 고려 왕권을 강화하고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원나라 대도에 머물던 중 고려의 왕들이 잇따라 승하하여 왕기는 1351년에 왕으로 즉위했다. 공민왕의 왕비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로 봉해졌다. 고려 왕은 1351년 12월에 고려에 귀국하여 몽골식 변발과 호복을 벗어버리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 정책으로 과거를 통해 신진사대부를 등용했다. 그러나 왕의 개혁 정책에 반발한 부원세력(附元勢力) 기철(奇轍, ?~1356) 등이 역모를 꾸미자, 1356년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전격 처형해 혼란을 잠재웠다. 왕은 1359년, 1361년 두 차례의 홍건적 침략과 왜구들이 침략하자, 최영, 이방실(李芳實, 1298~1362), 안우(安祐)를 파견해 격퇴했다.
1365년 2월, 대도에서 오랜 기간 고락을 함께하며 지냈던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다 난산으로 사망했다. 이후 공민왕은 극심한 우울증과 정신적 공황에 빠져 왕비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앞에 두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대하며 매일 통곡하며 비탄에 빠졌다. 공민왕은 9년간 국정을 신돈(辛旽)에게 맡긴 채 수능(壽陵)을 조성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개성 오산리 공민왕릉(玄陵, 敬孝大王陵)과 왕비능(正陵)(사진:위키백과)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 신하들은 후사(後嗣)가 없는 공민왕에게 조속히 왕자를 생산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이에 공민왕은 문하시중을 지낸 이제현(李齊賢)의 딸 혜비(惠妃) 이 씨, 종실 왕의(王義)의 딸 익비(益妃) 한 씨(韓氏), 안극인(安克人)의 딸 정비(定妃) 안 씨, 곡성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의 딸 신비(愼妃) 염 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이하였다.
【《고려사》 원문】 惠妃李氏, 雞林人, 府院君齊賢之女. 魯國大長公主無子, 宰相請納名家女宜子者, 於是選入封惠妃. 洪倫·韓安之强辱諸妃也, 妃拒不從. 恭愍旣見弑, 剃髮爲尼.
【번역】 혜비 이씨는 계림 출신으로 부원군 이제현의 딸이다. 노국대장공주에게 자식이 없자, 중신들이 왕에게 다산(多産)으로 이름난 명문가 출신의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할 것을 청하였고, 이에 그녀가 간택되어 혜비로 책봉되었다. 홍윤과 한안이 왕의 후궁들을 범하려 했을 때, 그녀는 완강히 저항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 혜비 이 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 시해(사진:궁인창, AI 이미지 생성)
1373년(공민왕 22) 10월, 공민왕은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국왕의 신변을 보호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용모가 뛰어난 명문가 자제들을 모아 궁중에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다. 그리고 믿음직한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에게 이들의 통제를 맡겼다. 그러나 자제위에 소속한 미소년들은 점차 왕의 총애를 받아 거칠고 통제가 어렵고 동성애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그러던 중 홍륜(洪倫, ?~1374)이 익비 한씨(益妃 韓氏)를 임신시키고, 다른 동료가 궁중의 여인을 강제로 범한 사건이 벌어졌다. 환관 최만생(崔萬生)이 익비의 일을 비밀로 일관하다 두려워 공민왕에게 “익비(益妃)께서 아기를 밴 지가 벌써 5개월이 되었습니다.”라고 밀고했다. 공민왕은 후사가 생겨 좋았지만, 왕을 둘러싼 추악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해 최만생을 비롯해 자제위를 모두 없애는 방안을 고심했다. 하루는 왕이 환관 최만생에게 “내가 내일 홍륜을 죽여 입을 막을 것이며, 너는 이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라고 농담조로 말하며 단속했다. 이 말을 들은 최만생은 불안하여 자제위(子弟衛)의 홍륜,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한안(韓安)에게 왕의 의중을 폭로했다. 뛰어난 가문의 자제들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처해 모의 끝에 왕을 죽이기로 하였다.
1374년 9월 22일(甲申日) 깊은 밤, 폭우가 세차게 쏟아지는 틈을 타 환관 최만생과 자제위 일당은 공민왕의 침전으로 은밀히 침입했다. 왕은 이날 낮에 이들과 어울려 거나하게 마신 술에 취해 아무런 의심도 없이 태평하게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들은 망설임도 없이 왕에게 다가가 왕을 칼로 사정없이 찔러 시해(弑害)했다. 공민왕은 과감한 개혁을 이끌고 고려의 중흥을 꿈꾸었지만, 평소 가장 믿고 총애하던 시종(侍從)들의 칼날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공민왕의 나이는 향년 44세였다.
부산 무민사(武愍祀) 최영(崔瑩) 장군 영정(사진:국립민속박물관)
고려 조정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비상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때 1359년, 1361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1350년 이래 계속된 왜구의 침략을 무찔려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무신세력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인임(李仁任, 1312~1388)과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지원했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다.
이들은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권력 기구인 정방(政房)을 신속하게 장악한 뒤, 공민왕 시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시해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처형하여 국가의 혼란을 수습하고, 우왕(禹王)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혼란한 고려 정치 상황을 역사학자 고혜령 선생이 1981년 《역사학보》 제91집에 발표한 논문 〈李仁任 政權에 대한 一考察〉을 통해 심도 있게 분석했다. 그녀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사부장으로 근무하며 한국사 연구를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부친은 1952년 부산에서 역사학회 창설을 주도하고, 1979년 서울대 총장에 임명된 역사학자 녹촌(鹿村) 고병익(高柄翊, 1924~2004, 문경 출생) 박사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