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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인창의 독서여행 【 궁인창의 지식창고 】 2026.10.09. 12:49 (2026.10.09. 12:49)

명나라 정화 함대의 7차 남해 항해

■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4〉
조선 황해도 서흥 출신의 명나라 환관 윤봉(尹鳳)은 영락제의 신임을 얻은 이후 다섯 명의 황제를 모셨다. 그는 명 황실에서 상선감(尚膳监), 좌소감(左少监)를 거쳐 태감에 자리까지 올랐다. 윤봉은 영락 4년에 조선에 파견되어 궁중 시종과 노래 및 춤을 잘 추는 소녀들을 선발하고, 해동청 물자를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5〉
 
 
《명사(明史)》 〈환관전(宦官傳)〉에서 중요한 다섯 번째 인물은 환관 정화(郑和, 馬三寶, 福善, Cheng Ho, Zheng He, 1371~1433)이다. 본래의 성은 마(馬)씨, 본명은 마화(馬和)이다. 법명은 복선(福善). 삼보태감(三保太監, 三寶太監)이라 불린다.
 
정화 보선(사진:인천일보)
 
정화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집안 출신으로 윈난성(雲南省) 쿤양(毘陽)의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쿤밍(昆明) 남쪽의 거대한 호수인 덴츠 호수 아래 위치한 진닝(晉寧)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마(馬)는 무함마드(Mohammad)의 중국식 버전이다. 그는 1382년 명나라가 윈난성을 공격했을 때 포로가 되었다. 12살때 거세되어 베이징 황궁에 보내져 21세인 연왕(燕王, 주체)을 섬겼다. 정화는 아주 큰 키에 체격이 담대하고 성격이 활달해 20년 동안 환관으로 일하면서 연왕(주체, 훗날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최고의 고문관이 되었다. 당시 연왕은 북방 방어를 책임졌다. 그는 막북에서 호시탐탐 중원 재탈환을 노리던 북원 세력과 나하추를 여러 번 격파했다. 명군의 압박을 받은 나하추는 투항하고, 연왕의 세력권은 멀리 만주까지 확장되었다.
 
정난(靖難)의 변(1399년∼1402년)(사진:위키백과)
 
강력한 힘을 가진 연왕은 자기를 죽이려는 난징의 조카 혜제(建文帝)의 모의를 사전에 간파하고 선수를 쳐서 ‘정난(靖難)의 변(1399년∼1402년)’ 반란을 일으켰다. 건문제는 제2차 북벌의 총사령관으로 조국공 이경륭(李景隆)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에 임명하고 50만 명의 조정 관군을 주어 연왕의 본거지인 연경(燕京, 베이징)을 공격하게 했다. 이경륭은 연왕이 북벌하러 요동으로 원정을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만만하게 연경을 공략했지만, 연왕의 맏아들 주고치가 여러 날 잘 방어했다. 관군이 연경에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연왕이 군대를 돌려 달려와 야밤에 관군을 습격해 압박하자, 관군은 대패하여 연경에서 물러났다.
 
일설에 의하면 1399년 연경 근처 정촌패(鄭村貝) 전투에서 마화(馬和)가 8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연왕 주체가 정예 기병을 이끌고 기습을 감행하고 마화의 부하들이 관군을 효율적으로 공격하여 관군을 궤멸시켰다. 정촌패(鄭村貝) 전투는 정난의 변 초기 전세를 연왕에게 유리하게 돌린 결정적인 분수령 중 하나였다. 이후 건문제의 관군은 백구하(白溝河) 전투, 동창(東昌)전투, 영벽(靈璧)전투, 포자구(浦子口)전투에서 연패를 당했다. 마침내 4년간의 내전 끝에 연왕이 지휘한 반란군이 명나라의 수도 난징을 함락했다. 이때 연왕은 조카인 건문제가 궁궐의 화재로 죽었다고 보고를 받았다. 어떤 이는 “황제가 밤에 어수선한 틈을 타 승려로 변장하여 탈출했다.”라고 말했다. 연왕은 난징을 함락한 후, 영락제로 즉위했다. 정화는 전투 공로로 태감(太監)에 발탁되어 공신이 되었다. 영락제는 대승을 거둔 정촌패 전투를 회상하고 이를 기념하여 환관 마하(馬和)에게 정(鄭)씨 성을 하사했다. 정촌패(鄭村壩)는 연왕의 반란군과 건문제의 조정 관군이 격돌한 주요 전장으로 오늘날의 중국 베이징시 차오양구(朝陽) 동부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정화 선단 7차 항해(사진:나무위키)
 
전략가 정화(鄭和)는 1405년 6월 15일(양력 7월 11일) 쑤저우(蘇州)에서 범선 함대를 이끌었다. 당시 제1차 원정에 동원된 배 선단은 총 317척으로 보선 62척, 선박 250여 척, 선원은 2만 7,8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정화가 탑승한 대형 보선(寶船)은 선단의 대선으로 길이가 137m, 선폭이 56m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 있었으며 배수량은 약 2,700 톤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 범선이었다. 영락제는 출항하는 정화에게 건문제가 해상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 가는 곳마다 철저하게 수색하라고 명했다. 정화 대선단은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들을 물리치고 인도 서안의 캘커타까지 도달하여 진국(鎭國)비를 건립하였다. 정화는 1433년까지 7차례 항해를 하며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였다.
 
중국학자들은 명나라 정화 함대의 항해 목적이 “국위를 선양하고, 중화(中華) 중심의 조공 책봉 체제를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전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필자가 해양을 오랫동안 항해하며 연구한 결과 명나라가 많은 배를 먼 곳까지 보낸 것은 인도양과 동아프리카지역의 엄청난 자원을 알고 무역을 하려고 방문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11.07m 방향키 축(舵杆)(사진:바이두백과)
 
1957년 난징의 조선소 보선창(寶船廠) 유적지에서 약 11.07m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 방향키 축(舵杆)이 발굴되었다. 이 새로운 발견은 정화(鄭和)의 대원정에 사용되었다고 문헌으로만 전해오던 거대 선박 보선(寶船)을 증명하는 수중고고학적 증거가 되었다. 조선공학자들은 11m가 넘는 방향키의 크기를 바탕으로 선박의 크기를 약 130~150m로 추정했다. 정화의 보선에는 물의 저항을 줄여 거대한 배를 비교적 적은 힘으로 조종할 수 있게 돕는 수면 위아래로 조절 가능한 균형 방향키(Balanced Rudder) 기술이 적용되었다. 2000년대 들어 보선창 추가 발굴에서 비슷한 크기의 대형 방향키 축 2개가 더 발견되어 유물은 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화 함대는 1405년부터 바다의 여신인 마조(媽祖)를 모시고 서남아시아를 거쳐 동아프리카 케냐의 스와힐리(Swahili) 해안에 이르는 33개국을 방문하였다. 스와힐리(Swahili)란 해안을 뜻하는 아랍어 ‘사와힐(sawahil)’에서 유래한 말로 이 지역은 13세기에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작은 어촌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해 어느새 번화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해안 도시국가는 인도와 아라비아반도에서 향신료, 직물을 수입하고 금, 은, 구리, 상아, 코뿔소 뿔을 수출했다. 당시 스와힐리(Swahili) 도시국가 항구는 아프리카 내륙 전역에 물건을 공급하는 해안 무역 기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말리 제국 전성기 영역(사진:나무위키)
 
말리 제국(Manden Kurufa)은 1235년 순디아타 케이타가 나라를 세워 금과 소금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1670년까지 존재했다. 말리 제국의 넓은 영토는 지금의 모리타니, 말리, 세네갈에 걸쳤으며 백성이 5천만 명에 달했다. 이슬람 여행작가 이븐 칼둔, 이븐 바투타, 레오 아프리카누스 등이 이 왕국을 방문해 여행기를 남겼다.
 
대서양 범선 항로(사진:브리테니커)
 
만사 아부바카리 2세(Abubakari II, 재위: 1310~1312년경)는 말리 제국의 황제로 영토 확장보다 지리학자들이 말한 넓은 바다 끝에 무엇이 있는지 밝혀내는 데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황제는 이집트와 지중해에서 선박 기술자를 불러모아 세네감비아 해안에서 수백 척의 배를 건조하였다. 1310년경 제1차 대서양 원정에 탐험대와 배 200척, 보급선 200척에 금, 물, 말린 고기, 식량, 소금에 절인 과일 등을 충분히 싣고 원정대를 출항시켰으나, 선박들은 대양의 중간에서 뜻하지 않게 강한 소용돌이를 만나 대부분 실종되었다. 한참 후 한 척의 배만 겨우 돌아와 선장이 황제에게 당시에 본 거대한 조류에 대해 보고했다. 황제는 원정 실패에 굴하지 않고 동생을 불러 섭정을 부탁하고 직접 제2차 원정에 참여하여 감비아 항구에서 출항하였다.
 
대서양 해류(사진:위키백과)
 
황제는 1,000여 척의 대선단을 조직하여 대서양으로 출항했으나, 이후 소식이 없이 실종되었다. 최근 들어 아프리카 세네갈 연안에서 500km 떨어진 무인도 카보베르데 제도로 흘러들어온 아프리카 선박의 존재와 티피나그나가 새겨진 비명 등이 발견되어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아부바카리 2세의 함대가 브라질 레시페 인근에 도달해 원주민들과 교류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콜럼버스가 탐험 당시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산 금 합금(구아닌)을 발견했다는 기록이나 pre-Columbian 조각상 등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폴란드의 과학자 안제이 비에르친스키(Andrzej Wiercinski) 또한 멕시코의 여러 유적지에서 유사한 사실을 확인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레오 와이너(Leo Weiner) 교수는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출간한 3권짜리 대작 《아메리카 발견과 아프리카(Africa in the Discovery of America)》을 발간했다.
 
레오 와이너 교수 著 《아메리카 발견과 아프리카》(사진:아마존)
 
말리 제국의 섭정을 맡았던 동생은 황제의 권좌를 과감하게 막차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난 탐험가 황제를 목이 빠지게 무한정 기다리다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312년 말리 제국 제9대 황제 만사 무사(Mansa Musa, 1280~1337, 재위; 1312~ 1337)로 등극했다. 만사(Mansa)는 만딩카(Mandinka)어로 황제나 왕을 뜻하고, 무사는 선지자 ‘모세’의 아랍어 표기이다.
 
말리 제국 제9대 황제 만사 무사(사진:나무위키)
 
1324년, 황제는 재위한 지 10여 년이 지나자, 이슬람교 신자들의 의무인 하즈(Hajj. 聖地巡禮)를 결심했다. 황제는 비록 가는 길이 고단하고 멀지만, 하즈는 평생에 한 번은 가야 하는 의무였다. 그는 병사, 하인, 신하들을 포함한 6만 명의 성지순례단을 이끌고 낙타에는 마리당 100kg이 넘는 금을 싣고 낙타 80마리를 동원했다. 그는 페르시아산 비단옷에 황금 지팡이를 든 500명의 시종을 앞세우고 엄청난 양의 황금을 낙타에 싣고 메카로 출발했다. 아프리카의 황금왕으로 불린 그는 지나는 길목마다 빈민들에게 황금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성지순레단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여 이집트를 거쳐 성지 메카에 도착해 카바 신전을 7번 돌고, 검은 돌을 손으로 만지고, 언덕 ‘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7번 왕복하며 3개월간 체류하였다.
 
이때 이집트 국내에 너무 많은 금이 풀려 화페 가치가 대폭락했다. 황제는 메카 순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뒤늦게 자신이 의도치 않게 행한 기부 행위로 카이로 시장을 망쳐놓은 것을 첨음 알게 되었다. 황제는 카이로의 대부업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얹어주고 풀었던 금을 다시 빌려 시장을 안정시키려 시도했다.
 
성지 메카 카바 신전(사진;연합뉴스)
 
현대 학자들이 당시 카이로의 공식 통화 기록을 분석한 결과 만사 무사의 방문 직후 금 가치가 약 12%에서 최대 25%까지 급락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실로 지중해와 중동 경제권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말리는 금을 가진 지역과 사하라 횡단 교역로에 걸쳐 자리 잡고 있었고, 서아프리카 금은 더 넓은 지중해 통화 경제에 구조적으로 중요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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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