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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인창의 독서여행 【 궁인창의 지식창고 】 2026.10.20. 16:14 (2026.10.20. 16:14)

동안 이승휴 사상 선양회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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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20〉
1975년 10월, 천은사 주지 일봉(文一峰)은 이승휴 선생의 정신과 얼을 기리기 위한 ‘제1회 이승휴 다례제’를 개최하였다. 이 추모 의례는 천은사가 주관하고 삼척군 및 삼척·동해사암연합회가 후원하였다. 행사는 총 3부로 진행되어, 1부 다례제에 이어 2부에서는 해산(海山) 김일기 교수가 이승휴 선생의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으며, 3부는 다양한 민속프로그램이 선보였다. 1987년 삼척 천은사의 이승휴 유허지(李承休遺墟址)가 강원도 기념물 60호로 지정됐다.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20〉
 
 
1975년 10월, 천은사 주지 일봉(文一峰)은 이승휴 선생의 정신과 얼을 기리기 위한 ‘제1회 이승휴 다례제’를 개최하였다. 이 추모 의례는 천은사가 주관하고 삼척군 및 삼척·동해사암연합회가 후원하였다. 행사는 총 3부로 진행되어, 1부 다례제에 이어 2부에서는 해산(海山) 김일기 교수가 이승휴 선생의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으며, 3부는 다양한 민속프로그램이 선보였다. 1987년 삼척 천은사의 이승휴 유허지(李承休遺墟址)가 강원도 기념물 60호로 지정됐다.
 
천은사 주지 일봉은 1992년 9월부터 1994년 4월 15일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중앙종회 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94년에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은 《이승휴연구논총집》을 발행하였고, 1995년에는 사찰 내에 이승휴 선생을 기념하는 사당인 ‘동안사(動安祠)’을 건립했다.
 
사적 이승휴유적(李承休遺蹟) 동안사(動安祠)(사진:궁인창)
 
1996년 9월 25일, 장을병 국회의원을 회장으로 한 ‘동안 이승휴 기념사업회’가 정식 출범하면서 이승휴 선생의 유허지 정비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천은사 경내는 2000년에 사적 ‘삼척 두타산 이승휴유적’으로 지정되었다. 2003년 9월 기념사업회는 ‘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매년 10월 개천절을 전후하여 ‘이승휴·제왕운기 문화제’와고 정기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한편, 2007년에는 천은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이 강원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아미타불상을 개금(改金)할 때 부처님 복장(腹藏)에서 《법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嘉慶三年戊午四月十六日改金(가경 3년 무오 4월 16일 개금)’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이 청나라 가경제(嘉慶帝) 3년이자, 조선 정조 22년인 1798년에 개금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던 천년고찰 천은사는 주지 문일봉의 원력과 사부대중의 동참으로 2009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극락보전을 비롯해 약사전, 육화료(六和寮), 영월루(映月樓), 삼성각(三聖閣) 등 15채의 전각이 신축되고 요사채가 중수되면서 오늘날의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천은사 주지 문일봉(文一峰)(사진:대한불교조계종)
 
2009년, 삼척 출신인 이원종(1939 ~ 2021)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장을병 전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고인은 경복고와 고려대 경제학과, 고려대 정치학 석사, 한양대 정치학 박사를 취득한 인물로 1974년 신민당 김영삼 총재 공보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여, 1993년 문민정부에서 공보처 차관을 거쳐, 1996년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다. 이원종 이사장은 취임 이후 ‘이승휴 제왕운기 문화제’를 성공적으로 주관하였으며, 2014년에는 ‘제1회 이승휴 문화상’을 제정하여 삼척의 역사적 정체성을 드높이고 이승휴 선생의 정신을 선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원종 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 이사장(사진:강원도민일보)
 
지난 2015년, 필자는 범선 코리아나호에 올라 여수 소호마리나에서 출항했다. 한려수도를 항해해 부산 용호부두와 후포항을 거쳐 사흘 만에 정라항에 입항했다. 제8회 이사부 항로 탐사 대회에 참가해 울릉도, 독도로 향할 에정이었지만, 제11호 태풍 ‘낭카’로 인해 풍랑주의보가 발령되면서 범선은 삼척 정라항에서 묶이고 말았다. 항구에서 계속 머물던 기간에 범선 코리아나호 승무원들은 김억연 이승휴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안내로 천은사를 참배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후 태풍이 지나간 후 동해의 기상이 안전히 호전되자, 코리아나호는 탐사대원들을 승선시켜 마침내 울릉도와 독도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삼척민족예술제 〈뮤지컬 動安 이승휴〉(사진:삼척민예총)
 
정승 허목은 삼척 부사 임기를 마친 뒤 고향 연천으로 돌아갔다. 그는 산림(山林)에서 10여 년간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특유의 전서체 글씨를 완성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미전(眉篆)이라 불렀다. 이후 1675년, 81세의 고령이었던 허목은 예설(禮說)로 서인 정권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남인의 핵심 인물로 뜻하지 않게 다시 조정에 나아가게 된다.
 
당시 청나라 심양에서 봉림대군(효종)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제18대 국왕 현종(1641~1674)이 어머니 인선황후 장씨(1619~1974)의 국상에 몸을 크게 상해, 어머니를 여윈지 반년 만에 34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어린 숙종(1661~1720)이 등극하면서, 미수 허목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사람들은 재야의 선비로서 정승에 이른 그를 두고 세상에 드문 ‘산림 정승’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문정공 허목 82세 진영(사진;국가유산청)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사는 국제신문 〈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 이야기〉 연재 칼럼을 통해 1794년 7월, 정조(正祖)가 허목의 초상화를 가져오게 해 이명기에게 모사를 명했던 역사적 사건을 조명했다. 부산박물관이 소장한 〈허목 초상〉은 강한 음영 기법의 이명기 모사본들과 달리 채색과 음영을 극히 절제하여 꼿꼿한 기품을 보여주며, 정조가 직접 눈으로 보았던 원본 초상화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조선왕조 제22대 국왕인 정조(재위 1777~1800)는 남인(南人)의 정신적 지주였던 허목(許穆)의 직계 후손에게 그가 남긴 초상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당시 초상화는 생전에 학문을 연마했던 연천의 은거당(恩居堂)에 보관되어 있었다. 7월 26일, 초상화를 받들고 온 일행들이 한양 동대문 밖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채제공(蔡濟恭) 등 남인계(南人系) 인사 900여 명이 초상화를 맞이하러 나갔다. 정조는 82세 때의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를 어람(御覽)한 뒤, 도화사 화원 이명기(李命基)에게 모사(模寫)를 명해 4점의 초상화를 새로 제작했다.
 
반계(磻溪) 조어대(釣魚臺)의 강태공(사진:대순회보)
 
조선의 유학자 허목을 주나라 건국 공신인 삼천 년 전의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유래한 고사성어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 고사성어는 “인생의 전반기 80년은 매우 곤궁하게 살았으나, 후반기 80년은 영달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강태공의 성씨는 강(姜)이고 이름은 상(尙)이라 사람들은 강상(姜尙)으로 부르며,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의 이름이 여(呂)라 ‘여상(呂尙)’이라고도 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만 몰두해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그의 아내 마(馬) 씨가 품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나이 70이 넘도록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며 매일 시안(西安) 북쪽의 웨이수이(위수, 渭水) 강가에서 낚시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상나라 말기 주(周)나라의 기을을 잡은 서백(西伯) 문왕(文王, B.C.E. 1152~1056)이 사냥을 나왔다가 위수 강가에서 범상치 않은 노인 여상(呂尙)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문왕은 낚시꾼이 현인임을 깨닫고 스승으로 모셔 태공(太公) 벼슬을 내렸다. 이때 강태공의 나이가 72세였다. 당시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충신은 멀리하고, 옆에서 아첨하며 비위를 잘 맞추는 간신배들만 중용하며 귀비 달기에 푹 빠져 큰 호수를 파서 술을 가득 채운 뒤, 매일 호화로운 잔치를 열며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주지육림(酒池肉林)(사진:위키백과)
 
필자는 2013년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후외(後外) 김영환 교수님에게 사마천의 《사기(史記)》 강의를 2시간씩 들으며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교수님은 강의 시간에 〈은본기(殷本紀)〉에 기록된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악행과 폭정, 당시 무서운 형벌 제도를 자세하게 가르쳐주셨다. 당시 상나라 삼공(三公)은 구후(九侯), 악후(鄂候), 서백 창(西伯 昌) 이었다. 구후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주왕에게 바쳤으나, 그녀는 주왕의 음란한 행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주왕이 예쁜 여인에게 아무리 잘해주어도 전혀 웃지 않고, 오히려 주왕이 저질은 나쁜 행실을 자주 말했다. 이에 주왕이 첩을 잔인하게 죽였다. 딸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구후가 반란 세력을 조직해 난을 일으켰다.
 
주왕은 구후 세력을 모두 잡아 처벌하고 구후를 소금에 절여 천천히 죽이는 형벌로 젓갈(해, 醢)로 만들었다. 이를 본 정승 악후가 강하게 만류하고 변론하자, 주왕은 악후 역시 포(脯)로 떠서 죽이는 참형을 내렸다. 서백은 주왕이 두 삼공을 죽였다는 소식에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평소 서백을 시기하던 숭후호(崇侯虎)가 이 사실을 주왕에게 몰래 고발했다. 주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 서백 부자를 상나라 수도인 은허로 불러들여 유리(羑里) 감옥에 100일간 감금했다. 그리고는 서백의 장남인 백읍고를 죽여 그 살로 고기죽을 만들어 서백에게 주면서 먹게 했다. 서백이 죽은 아들로 만든 죽을 할 수 없이 먹자. 주왕은 “성인(聖人)은 사람 고기를 먹지 않는데, 네가 그러고도 성인이냐? 하면서 서백을 비웃고 조롱했다. 서백은 주왕에게 비굴하지만, 참고 아첨하며 뇌물과 명마를 바친 끝에 겨우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왕(紂王)의 악행(사진:궁인창, Gemini AI 이미지 생성)
 
강태공(姜太公, 太公望)은 주나라 문왕과 그의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탁월한 지략과 병법을 발휘했다. 그는 기원전 1046년경 목야대전(牧野大戰)에서 상나라 주왕(紂王)의 대군을 패배시켰다. 패배한 폭군 주왕은 오갈 데가 없어지자, 도성으로 도망쳐 미쳐서 사방에 불을 지르고 보물과 패옥을 걸치고는 누대인 녹대(鹿臺)에 올라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해 600년 동안 이어진 상나라는 완전히 사라졌다. 강태공은 주나라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나이 80세에 제(齊)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가 제나라로 부임하기 위해 휘황찬란하게 행차할 때, 과거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던 아내 마(馬)씨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같이 살던 때를 슬프게 말하고는 다시 아내로 맞아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하인을 시켜 땅에 그릇의 물을 쏟은 후, 아내에게 그 물을 다시 그릇에 담아보라고 말했다. 아내가 땅에 주저앉아 흙탕물만 계속 만지며 어찌할 바를 모르자, 강태공은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覆水不返盆), 한 번 끊어진 인연 또한 다시 맺을 수 없다.”라고 매정하게 말하며 제나라로 가버렸다.
 
覆水不返盆(사진: 궁인창, Gemini AI 이미지 생성)
 
覆水不返盆(사진: 궁인창, Gemini AI 이미지 생성)
 
이사부 독도기념관과 미수 허목의 사당인 미수사(眉叟祠)을 방문하여 돌아보고, 이효웅 사진가를 만나기 위해 허목길을 걸어 삼척항 지진해일 안전타워로 향했다. 새천년도로에서 보는 지진해일 안전타워는 아주 웅장했다. 삼척항은 1983년(사망·실종 3명, 재산 피해 약 3.7억 원)과 1993년(재산 피해 약 4억 원)에 일본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지진해일이 일어났다. 정부는 2011년 「항만구역 내 재해 취약지구 정비계획」에 포함해 수문 사업을 시행하였다.
 
삼척항 지진해일 안전타워(사진;궁인창)
 
지진해일 안전타워의 높이는 39m로 아파트 14~15층 규모이다. 이는 해수면 최고 3.7m 높이의 지진해일을 견디도록 설계된 방어구조물이다. 이 시설은 수문 높이 7.1m, 수문 길이(폭) 50m, 무게 511t, 방호벽 길이 937m, 방호문 9개소로 지진 규모 최대 8.0 수준의 강진이나 진도 7.0 이상, 파고 1.0m 이상 지진해일 경보가 발령되면 즉시 수문이 가동되어 월류를 방지한다. 방호벽과 방호문은 지상으로부터 약 1.5m 높이로 침수 피해에 대비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삼척항 지진해일 안전타워 수문 공사는 2014년에 착공해 총 499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2022년 3월 준공했다. 공사 초기 수문을 건설할 때 어민들의 원만한 협조 덕분에 통항하는 항로를 7일간 차단하며 공사를 무사히 설치를 마쳤다. 2022년 9월 5일 태풍 한남노가 동해를 스치고 지나갈 대 주민들이 강원도에 요청해 환동해본부가 이를 수용해 수문을 닫았다. 어민들은 이때 효용성을 크게 느겼다. 거대한 수문은 완공 이후에 너울성 파도와 해일을 차단하기 위해 20여 차례 가동되어 삼척항의 안전과 주민을 보호했다.
 
안전타워 전망대(사진;삼척시)
 
안전타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이효웅 사진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는 교육계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고 고향 지역의 사진을 찍었다. 현재 강원도 지진해일 안전타워 관리 및 홍보를 위한 명예 교육홍보관으로 위촉받아 봉사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정라항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데, 경북 해양경찰 간부 7명이 전망대를 방문했다.
 
삼척항 지진해일 안전타워 명예 교육홍보관(사진;궁인창)
 
그들은 안전타워 전망대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사진들을 감상했다. 이효웅 지진해일 안전타워 명예 교육홍보관이 지진해일 사진을 설명하자, 간부들은 과거 삼척항의 해일 피해가 상당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무척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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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