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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 – 모든 기억을 잊게 하는 강
레테는 명계에 흐르는 망각의 강으로, 그 물을 마신 영혼은 지난 삶의 기억을 잊는다고 전한다. 아이네이아스는 명계에서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 레테의 강가에 모인 영혼들을 보았고, 전사 에르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망각의 물을 마시고 다시 태어나는 영혼들을 목격했다. 한편 기억의 샘을 찾아가는 길을 새긴 황금판에는 망각을 피하려는 또 다른 영혼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세 전승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영혼의 여정을 들려준다.
1.1 시빌라의 안내로 명계에 들어가다
트로이의 멸망을 피해 오랜 항해를 이어 온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의 쿠마이에 닿았다. 그는 아폴론의 신전에서 예언자 시빌라를 찾아가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간청했다. 시빌라는 명계로 내려가는 길은 열려 있지만 살아 돌아오는 길은 어렵다며, 먼저 숲속에 숨겨진 황금 가지를 찾아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일이 많았던 아이네이아스는 그 위험한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시빌라의 말에 따라 황금 가지를 찾아냈고, 죽은 동료 미세누스의 장례도 치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두 사람은 아베르누스 호숫가의 어두운 동굴로 향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설수록 지상의 바람과 빛은 멀어졌다. 시빌라가 앞장서자 아이네이아스는 칼을 쥔 채 그 뒤를 따랐다. 길가에는 온갖 두려운 형상과 죽은 자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그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승의 강가에서 뱃사공 카론을 만나 황금 가지를 보이고 배에 올랐다. 건너편에서는 머리가 셋 달린 케르베로스가 길을 지키고 있었다. 시빌라는 약을 섞은 먹이를 던져 괴물을 잠재운 뒤 아이네이아스를 이끌고 지나갔다. 그들은 여러 혼령과 슬픔의 장소를 거쳐 마침내 평온한 빛이 깃든 엘리시온으로 향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 어딘가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었다.
황금 가지를 든 아이네이아스와 시빌라가 명계의 동굴로 들어가는 모습
1.2 엘리시온에서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다
긴 명계의 길 끝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엘리시온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고결했던 사람들의 혼령이 밝은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넓은 들판 어디에도 안키세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빌라는 영혼들 가운데 있던 음유시인 무사이오스에게 길을 물었다. 무사이오스는 높은 언덕을 가리키며 그 너머의 푸른 골짜기로 가 보라고 일러 주었다.
언덕을 내려간 아이네이아스의 눈앞에 마침내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안키세스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의 영혼을 바라보다가 아들의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살아 있는 아들이 저승의 먼 길을 헤치고 자신을 찾아오자 노인은 기쁨에 겨워 두 팔을 벌렸다. 아이네이아스도 달려가 아버지를 껴안으려 했지만, 그의 두 팔은 가벼운 그림자만을 통과했다. 세 번이나 시도해도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지난 이별과 힘겨운 여정을 떠올렸다. 안키세스는 아들이 겪은 바다의 고난을 알고 있다며, 신들의 뜻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말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새 조국과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물으려 했다. 그때 골짜기 아래로 끝없이 움직이는 영혼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안키세스는 아들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름 모를 강이 숲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안키세스를 껴안으려 하지만 두 팔이 혼령을 통과하는 아이네이아스
1.3 레테의 강가에 모인 수많은 영혼을 보다
골짜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혼이 모여 있었다. 맑은 물줄기는 푸른 숲 사이를 조용히 굽이쳤고, 영혼들은 강변의 풀과 꽃 사이를 오가며 차례를 기다렸다. 여름날 들판에 핀 꽃 주위를 벌 떼가 맴도는 것처럼, 그 수많은 모습이 물가를 끊임없이 채웠다. 아이네이아스는 고요하면서도 분주한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저 강이 무엇이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영혼이 물가에 모여 있는지 물었다. 안키세스는 강의 이름이 레테라고 알려 주었다. 그곳에 모인 영혼들은 영원히 명계에 머물 이들이 아니라, 다시 지상에 태어날 때를 기다리는 존재들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놀라서 되물었다. 이미 죽음과 고통을 겪은 이들이 어째서 다시 육신을 입고 세상으로 돌아가려 한단 말인가.
안키세스는 모든 영혼이 지상에서 겪은 일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저 강의 물을 마시면 지난 삶의 기억과 슬픔을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강가의 영혼들은 서로 다른 과거를 지녔지만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아직 알지 못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들이 마실 물을 오래 바라보았다. 전쟁에서 잃은 고향과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까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레테강을 내려다보며 수많은 영혼을 바라보는 아이네이아스와 안키세스
1.4 안키세스가 다시 태어날 영혼들의 운명을 알려 주다
안키세스는 죽은 영혼에도 지난 삶의 욕망과 고통이 남는다고 말했다. 그 흔적을 씻으려고 영혼들은 바람과 물, 불의 시련을 거쳤다. 오랜 세월 정화의 시간을 보낸 뒤 천 년이 흐르면, 다시 태어날 영혼들이 레테의 강가로 불려 나왔다. 그들은 망각의 물을 마시고 지난 삶을 잊은 다음 새로운 육신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안키세스는 강가의 영혼들 가운데 아들의 후손도 있다고 말했다. 먼저 가리킨 이는 장차 아이네이아스와 라비니아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 실비우스였다. 그 뒤에는 알바 롱가를 다스릴 왕들이 있었고, 훗날 로마를 세울 로물루스도 보였다. 안키세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물들을 차례로 가리키며 앞으로 그들이 이룰 일들을 들려주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먼 훗날 자신이 찾는 땅에 거대한 나라가 서리라는 말에 놀랐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앞으로 닥칠 전쟁과 시련을 견디고 새로운 터전을 세우라고 당부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 말을 새기고 시빌라와 함께 돌아갈 채비를 했다. 작별하며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그를 껴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떠난 뒤에도 레테의 강물은 조용히 흘렀다. 강가에 모인 영혼들은 지난 삶을 잊게 할 물을 마실 차례를 기다리며,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레테강가의 영혼들 가운데 미래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안키세스
2.1 전장에서 죽은 에르가 사후 세계를 목격하다
팜필리아 출신의 전사 에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날 목숨을 잃었다. 열흘 뒤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썩지 않은 에르의 몸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기이한 일이라 여기며 시신을 고향으로 옮기고 장례를 준비했다. 그동안 몸을 떠난 에르의 영혼은 다른 죽은 이들과 함께 낯선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물을 상대조차 없었다.
긴 길 끝에 이른 곳에는 땅에 두 개, 하늘에 두 개의 거대한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심판관들이 앉아 생전에 행한 일을 따라 영혼들의 길을 정해 주었다. 올바르게 살아온 영혼은 하늘로 오르는 길을, 악행을 저지른 영혼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향했다. 위쪽의 문에서는 밝고 맑은 모습의 영혼들이 내려왔고, 아래쪽의 문에서는 지치고 먼지투성이가 된 영혼들이 올라왔다.
차례가 되어 에르가 심판관들 앞에 서자 예상과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다른 영혼들처럼 하늘이나 땅속으로 향하지 않았다. 심판관들은 에르에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빠짐없이 보고 들은 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했다. 에르는 놀라면서도 그 말을 따랐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혼들이 기쁘게 웃고, 땅속에서 돌아온 영혼들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앞에서 죽음 뒤의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네 갈래 통로 앞에서 영혼들을 심판하는 재판관들
2.2 영혼들이 저마다 다음 생을 선택하다
긴 심판과 보상의 시간을 마친 영혼들이 다음 생을 고르는 자리에 모였다. 운명의 여신 라케시스의 전령은 제비를 던지고 인간과 짐승이 살아갈 갖가지 삶을 펼쳐 놓았다. 제비로 순서를 정했지만 삶은 자신이 골라야 했다. 첫 차례를 얻은 영혼은 눈앞의 권세에 홀려 폭군의 삶을 집어 들었다. 그 삶에 자식을 해칠 운명이 있음을 뒤늦게 알자 그는 신들과 운명을 원망했다.
에르는 다른 영혼들이 무엇을 택하는지도 지켜보았다. 오르페우스는 여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기억 때문에 다시 여인에게서 태어나기를 거부하여 백조의 삶을 골랐다.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얻지 못한 아이아스는 인간을 거부하고 사자를 택했다. 아가멤논은 지난 생의 고통을 떠올리며 독수리로 태어나려 했다. 아탈란테는 뛰어난 경기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를 보고 그 삶을 붙잡았다. 영혼들은 지난 생의 원한과 욕망에 이끌렸다.
마지막 차례를 얻은 영혼은 오디세우스였다. 그는 전쟁과 긴 방랑에서 겪은 고통을 떠올리며 명예와 권력을 바라지 않았다. 남들이 지나쳐 버린 삶들을 오래 살피던 그는 한쪽에 남겨진 평범하고 조용한 사람의 삶을 찾아냈다. 오디세우스는 첫 번째 차례가 주어졌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에르는 지난 삶의 기억이 새로운 운명을 고르는 손끝까지 따라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간과 동물의 다양한 삶을 선택하는 영혼들과 이를 지켜보는 에르
2.3 망각의 벌판에서 강물을 마시고 모든 것을 잊다
모든 영혼이 다음 생을 정하자 그들은 다시 라케시스 앞으로 나아갔다. 여신은 각자가 선택한 삶을 지켜볼 수호령을 붙여 주었다. 수호령들은 영혼을 데리고 운명의 물레를 돌리는 클로토에게 갔고, 이어 그 운명을 되돌릴 수 없게 하는 아트로포스에게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영혼들은 필연의 왕좌 아래를 지나 자신이 택한 삶을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지상으로 돌아갈 길만 남아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나무도 풀도 없는 뜨거운 벌판이었다. 그곳은 레테, 곧 망각의 벌판이라고 불렸다. 하루 종일 메마른 땅을 걸은 영혼들은 저녁 무렵 강가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곳을 흐르는 강의 이름은 아멜레스였다. 강물은 어떤 그릇에도 담아 둘 수 없었지만, 영혼들은 목을 축이기 위해 정해진 만큼의 물을 마셔야 했다. 영혼들이 물가로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필요한 만큼만 물을 마셨고, 누군가는 갈증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많은 물을 들이켰다. 물이 목을 넘어가자 영혼들의 표정이 하나둘 달라졌다. 자신이 어느 길을 지나왔는지, 생전에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와 다투었는지, 방금 어떤 삶을 골랐는지조차 기억에서 사라졌다. 한때 왕이었던 이도 이름 없는 사람이었던 이도 더는 지난 생을 붙잡지 못했다. 망각의 강가에는 곧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영혼들만 남았다.
황량한 망각의 벌판에서 아멜레스강의 물을 마시는 수많은 영혼
2.4 망각의 물을 마시지 않은 에르가 살아 돌아오다
망각의 벌판에 도착한 영혼들은 저마다 아멜레스강의 물을 마셨지만, 에르만은 그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산 사람들에게 명계의 일을 전해야 했다. 다른 영혼들은 물가에서 목을 축인 뒤 하나둘 잠들었다. 자신이 고른 삶을 이야기하던 이들도 잠잠해졌다. 에르는 물가에 남아 밤이 깊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밤중이 되자 갑작스러운 천둥소리가 벌판을 뒤흔들었다. 땅이 요동치고 눈부신 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잠들어 있던 영혼들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들은 별똥별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새로운 탄생을 향했다. 누군가는 인간으로, 누군가는 새나 짐승으로 태어날 운명을 따라 사라졌다. 에르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새벽녘 에르가 갑자기 눈을 뜨자 그의 몸 아래로 쌓아 놓은 장작이 보였다. 죽은 지 열이틀째, 그는 장례를 위해 마련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죽었다고 믿었던 전사가 몸을 일으키자 주위 사람들은 놀랐다. 에르는 곧 자신이 본 심판관들과 영혼들의 선택, 망각의 강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영혼들이 모두 잊은 세계의 광경을 그만은 기억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화장용 장작더미에서 깨어나 놀란 사람들과 마주하는 에르
제3장. 망각을 거부한 영혼이 기억의 샘을 찾다
3.1 죽은 사람의 곁에 명계의 길을 알려 주는 황금판을 묻다
먼 옛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 가운데에는 죽은 뒤에도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특별한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손바닥보다 작은 얇은 금판에 명계에서 따라야 할 말을 새겼다. 글에는 어느 샘을 피해야 하는지, 어느 곳에서 물을 청해야 하는지, 문지기들이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는지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외운 가르침이면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떠올려야 할 길잡이였다.
어느 신자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 가족들은 죽은 이의 몸을 정성껏 수습했다. 무덤을 닫기 전 그들은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판을 죽은 이 곁에 놓았다. 한 줄 한 줄 새겨진 글은 떠나는 이에게 명계의 두려운 풍경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첫 번째 샘을 가까이하지 말고, 더 먼 곳의 기억의 물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장례를 마친 뒤 산 사람들은 무덤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죽은 이의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몸을 떠난 영혼은 아무도 동행하지 않는 길에 들어서고, 익숙했던 집과 얼굴들은 점점 멀어졌다. 그는 자신이 배웠던 짧은 말들을 되새겼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금판은 무덤 안에 있었지만, 거기에 새겨졌던 길의 순서만큼은 잊어서는 안 되었다. 이제 그 말이 맞는지 직접 확인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은 신자의 무덤에 명계의 길을 새긴 작은 황금판을 놓는 가족들
3.2 하얀 사이프러스 나무 곁의 샘을 지나치다
영혼이 하데스의 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자 어둠 속에 하얀 사이프러스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곁에는 맑은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영혼에게는 물소리만으로도 참기 어려운 갈증이 일었다. 샘가에는 먼저 도착한 다른 영혼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곳에서 물을 마시면 지친 걸음을 잠시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혼은 무심코 샘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 순간 생전에 들었던 경고가 떠올랐다. 하얀 사이프러스가 서 있는 첫 번째 샘에는 다가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와 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은 여전히 맑게 빛났지만, 그것이 자신이 찾아야 할 물은 아니었다. 다른 영혼들이 어느 길로 향하든 따라가지 말고, 더 멀리 있는 기억의 샘을 찾아야 했다. 영혼은 마른 입술을 다문 채 샘에서 몸을 돌렸다.
물을 마시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힘겨웠다. 목은 타들어 갔고, 길은 어둡고 낯설었다. 그러나 영혼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짧은 지침을 되풀이했다. 이곳에서 갈증을 달래면 다시는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끝내 멈추지 않았다. 하얀 나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앞쪽에서 또 다른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 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하얀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의 샘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영혼
3.3 므네모시네의 샘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만나다
첫 번째 샘을 지나 더 깊이 들어간 영혼은 새로운 물소리를 들었다. 바위 사이로 므네모시네의 호수에서 나온 차가운 물이 흘렀다. 영혼은 목이 타들어 갔지만 곧장 달려가지 않았다. 물가 앞에는 문지기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다가오는 영혼의 발걸음을 살피더니 길을 막아섰다. 영혼은 생전에 배웠던, 기억의 샘 앞에서 해야 할 말을 떠올렸다.
“너는 이 어두운 하데스의 나라에서 무엇을 찾느냐?” 문지기의 물음에 영혼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똑똑히 대답했다. “나는 대지와 별이 가득한 하늘의 자손이며, 나의 혈통은 하늘에 속한다. 목이 타들어 가 죽을 지경이니 므네모시네의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물을 마시게 해 달라.” 말을 마친 영혼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물이었지만, 허락을 받기 전에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문지기들은 그의 대답을 듣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곳을 찾아온 영혼은 길을 잘못 들어선 방랑자가 아니었다. 첫 번째 샘을 지나쳐 왔고, 기억의 물 앞에서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한 문지기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바로 길을 열어 주지는 않았다. 그는 저승의 지배자에게 영혼의 청을 전하러 물가를 떠났다. 남은 문지기는 자리를 지켰다. 영혼은 눈앞의 물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기억의 샘 앞에서 두 문지기에게 자신의 혈통을 밝히는 영혼
3.4 기억의 물을 마시고 신성한 길로 나아가다
문지기는 저승의 지배자에게 영혼의 청을 전한 뒤 돌아왔다. 마침내 문지기들이 길을 열어 주자 영혼은 므네모시네의 물이 흐르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맑게 흐르는 물을 두 손에 받아 입술로 가져갔다. 차가운 물이 목을 적시자 하얀 사이프러스 나무 곁에서부터 참아 온 갈증이 가라앉았다. 마침내 찾아야 할 샘에 이른 것이었다.
그가 마신 것은 다른 영혼들이 목을 축이던 첫 번째 샘의 물이 아니었다. 므네모시네의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물이었다. 영혼은 자신이 어떤 말을 외웠으며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잊지 않은 채 물가에서 일어섰다. 문지기들은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켰다. 저 멀리 명계의 어둠 속으로 길이 이어졌다. 영혼은 뒤를 돌아 하얀 나무가 있던 방향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 길은 앞서 신성한 의식을 치른 사람들과 디오니소스를 따르던 이들이 걸어간 길이라고 전해졌다. 영혼은 누구의 손에도 이끌리지 않고 그들을 따라 나아갔다. 산 사람들이 무덤에 넣어 준 황금판은 지상에 남아 있었지만, 그 위에 새겼던 말은 이곳에서 길을 찾는 데 쓰였다. 명계의 다른 영혼들이 망각의 물을 마시고 새 생을 향해 떠날 때, 그는 기억의 물을 마신 뒤 또 다른 신성한 길로 걸어갔다.
므네모시네의 호숫가에서 두 손으로 기억의 물을 떠 마시는 영혼
제1장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6권 아이네이아스의 명계 여행, 안키세스와의 재회, 레테강과 영혼들의 재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제2장 – 플라톤, 『국가』 제10권, 614b~621d 에르의 사후 세계 여행과 영혼들의 새로운 삶 선택, 망각의 벌판과 아멜레스강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제3장 – 오르페우스교 관련 황금판 전승 페텔리아·히포니온 등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의 황금판에 기록된 명계의 길, 피해야 할 샘, 므네모시네의 물과 신성한 길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각 황금판의 내용에는 차이가 있으며, 이름 없는 영혼의 행동과 주변 장면 일부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재구성했다. 첫 번째 샘은 원전에서 레테라고 직접 명시하지 않으므로 본문에서도 그 이름을 단정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