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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03.23. 14:55 (2020.03.23. 14:55)

두만강가에서 꽃제비를 만나고 모아산(帽兒山)에 오르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북한에서 건너온 14세 소년 꽃제비를 만나다
두만강 원류를 답사하고 늦게 도착한 탓으로 몹시 피곤하였지만, 오늘은 북한과 중국과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문시의 두만강을 가기로 하였다. 도문행 고속도로를 타고 해란강 대교와 장안차 및 소반령 터널을 지나니 금방 도문시에 도착했다. 두만강 주차장에 주차시킨 후 유람선을 타고 두만강을 오르내렸다. 두만강은 여러 번 온 곳이다. 도문시와 맞은편에 있는 북한의 남양시와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두만강변의 사진도 찍고 가게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쉬고 있는데, 북한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꽃제비(남) 한 명이 우리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하여 각자 천원을 주었다. 조금 있다가 꽃제비가 다시 와서 천원을 미화 1달러로 바꾸어달라고 하여 3달러를 주었다. 이때 꽃제비의 신상에 대해 물어보니, 이름은 황동우이며, 나이는 14세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10살 난 여동생이 북한에 있으며, 어머니는 돈 벌러 갔다고 하였다.
 
꽃제비 황동우가 입고 있는 옷은 여름옷으로 다소 추워보였다. 한쪽의 손가락은 동상으로 인해 검게 색이 변하였으며 움직이는데 불편해 보였다. 북한에서는 옥수수를 심어 수확하지만 씨 옥수수를 남기고 모두 식량으로 해도 부족하다고 한다. 글을 읽지 못한다고 하기도 했다. 먹기도 어려운데 글을 배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한 꽃제비의 출현은 19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식량난으로 굶주림을 참지 못한 북한 주민들이 이때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밀입국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주민들이 두만강을 건너다가 깊은 물에 익사하기도 하였다. 지난 1989년 8월 도문시에 와서 본 광경이 떠오른다. 꽃제비들이 7~8명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는 모습이었다.
 
황동우에게 돈이 모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돈이 모이면 휴대하고 북한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주기도 하지만 중간에 군인에게 발견되어 돈을 모두 빼앗기기도 한다고 하였다. 꽃제비들은 밀입국자이므로 은행에 저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돈이 모이면 빈병에 돈을 모아 두만강 백사장에 묻어 숨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가면 된다고 말해 줬다. 당시 북한은 15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식량난이 나아지지 않은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오후 일찍 연길로 돌아왔다. 나의 일정상 백두산 부근 일대와 토문강ㆍ두만강 및 용정ㆍ도문까지만 일행과 동행하기로 하고 24일에는 혼자 귀국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이 피디와 촬영감독은 압록강 철교, 봉성의 변문마을, 일면산역, 본계시의 박가촌, 심양의 청나라 고궁을 답사하고 26일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에는 정영진 연변박물관장을 만나기로 사전 약속했다.
 
정영진 관장은 나와 비슷한 연배로 1989년 제1회 조선학국제학술회의 참석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16년이 지난 세월이다. 그 동안 마지막으로 본 것이 정영진 관장이 서울의 학술회의 참석차 내한했을 때이니 4~5년이 지난 것 같다. 정영진 관장은 발해사가 전공이다. 간도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만 여하튼 매우 반가웠다. ‘양반집’ 식당에 가서 삼겹살로 식사 겸 맥주를 마시고 ‘樂園’ 커피 집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그 동안의 회포를 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압록강 방향으로 떠나는 이 피디와 촬영감독의 일정은, 압록강과 봉성(鳳城)시의 변문 마을과 일면산 기차역, 그리고 가장 오래된 조선족 마을이 있는 본계시의 박가촌을 방문할 계획이다. 봉성시의 일면산(一面山) 역은 본래 고려문(高麗門) 역이었다. 1962년 경 ‘조중변계조약’ 체결시에 중국 수상이었던 주은래가 고려문(高麗門) 역을 지나 평양을 갔던 일이 있었다. 그때 주은래 수상이 고려문역이라는 명칭에 대해 한마디 한 후 부터 일면산(一面山)역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이 피디 팀은 심양의 청 고궁과 누르하치릉을 답사하고 10월 26일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반면 나는 일정상 백두산 일대와 토문강·두만강 원류 및 용정·도문 지역을 답사하고 10월 24일에 귀국하기로 했다. 그들이 출발한 후 나는 연길시가지를 구경하기 위해 나셨다. 백화점 형태의 실내 식료품과 의복을 파는 구시장은 그대로 있었다. 두 시간 넘게 연길 시내를 돌면서 시가지 사진을 찍었다. 2000년대 초에 이미 연길의 구시가지를 허물고 4~5층 건물로 획일적으로 정부가 신축한 탓으로 구시가지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연성(延盛)뚝배기 식당에서 15위안의 된장찌개를 먹었다.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여동생이 서울로 시집가는 바람에 세 번 서울을 다녀왔다고 하였다. 점심 식사 후에는 부르하통하 옆에 있는 백산호텔의 12층에 올라가서 연길시의 광경을 찍었다.
 
오후 두시에 택시를 타고 모아산(帽兒山) 입구인 민속촌까지 갔다. 40대 초의 택시기사의 이름은 곽연파(郭延波)이고 우리 동포였다. 모아산(帽兒山)은 용정과 연길시 중간에 있는 해발 517.2m이고 1992년 국가급 삼림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주변에는 ‘조석족 민속촌’과 ‘식물원’이 있다. 서쪽에는 연변의 유명한 과수원인 ‘사과배과원‘과 약수터가 있다. 모아산의 유적으로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과 발해시대의 건축지, 발해·요·금 시기의 돈대(墩臺) 등이 있다.
 
모아산은 경치도 아름답고 정상에서는 연길, 용정, 해란강, 부르하통하를 조망할 수 있다. 모아산(帽兒山)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붓 모양의 문필봉으로 보이기도 하고, 시루를 엎어놓은 시루봉처럼 보이기도 하고, 후덕한 어머니의 젖 모양의 유방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아산(帽兒山)은 신선이 떨어뜨린 모자가 변하여 산봉우리가 되었다고 해서 모자산(帽子山)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와 같은 문필봉의 모아산은 북간도지역의 용정일대의 뛰어난 인물인 윤동주 등의 문인 탄생의 바탕이 되었으며, 이상설, 정재면 등 훌륭한 항일투사들의 집합장소로 예정된 곳으로 만주 항일투쟁의 중심지가 됐다.
 
다른 전설에는 모아산이 버섯산이라고 불렸으며, 소를 모는 목동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였다. 오랜 옛날의 모아산은 버섯처럼 갓 모양의 산이었는데, 모아산 정상에 많이 있는 구멍 난 청석에서 나오는 혹독한 냉기로 인해 사람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하여 ‘독심산’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 독심산에는 농사의 수확을 해치는 등 횡폭한 곤룡포 입은 선비가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목동이 곤론포 입은 선비에게 싸움을 걸어 두 사람의 싸움으로 인해 독심산이 폭발하여 지금처럼 둥근 모아산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모아산의 주변인 연길시와 용정시의 지리를 살펴보면, 연길시 북쪽은 목단령산맥이 받쳐있고, 서북은 합이파령산맥, 황황령(黃荒嶺) 이남에는 노령산맥이 위치하였으며, 남서쪽의 청산리에서 시작하는 흑산령산맥은 남동으로 뻗어 나와 연길·용정을 감싸고 있다.
 
북쪽 산맥에서 유래하는 물줄기로는 조양천, 연길천 등의 물이 부르하통하(布尒哈通河)에 합류되어 연길시를 관통하다가, 남쪽의 두도하·2·3·4·5·6도하의 물줄기를 삼킨 해란강를 만나 북류하다가 두만강으로 유입된다. 따라서 여러 산맥들에 둘려 싸인 분지 형태의 이 지역은 부르하통하(布尒哈通河)와 해란강의 물 흐름으로 인해 기름진 평야인 서전들과 동성들을 만들었다.
 
조선족 민속촌을 지나 모아산 입구에서 등산로를 따라 잠시 오르니, 정상으로 가는 능선이 보였다. 이윽고 정상에 가까워지니 중년의 부부가 등산을 온 모양인데 우리말을 하는 것으로 보니 연변에 사는 동포부부로 보인다. 또한 어린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온 할아버지 가족도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산 정상의 밑에 있는 바위와 철제문에 빽빽이 새긴 한글 낙서들이 많이 남아 있다.
 
누군가 자신들의 모아산 등산 기념으로 이름과 소원 등을 새겼다. 글씨 모습으로 보건대 매우 오래 전에 새겨진 듯하다. 정상에서는 연길ㆍ용정 일대의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감개가 무량하였다. 특히 모아산은 사포대 영소를 두었던 이범윤 공을 잊을 수 없다. 준비해간 소주를 한잔 하면서 이범윤 공을 회상하였다.
 
문득 103년 전 간도시찰사로 부임했던 이범윤 공도 이 모아산에 여러 번 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임 후 간도 한인들의 보호를 위한 군대 파견을 수십 차례 요청하였지만,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이범윤 공의 요청을 묵살하였다.
 
우리 정부의 묵살 이유도 정부 내의 알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청(淸)은 이범윤 공의 철퇴를 거듭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내부(內部)대신, 경무(警務)대신, 원수부(元帥部)장관 등의 부패한 고위 관료들이 이범윤 공의 처리를 두고 권력다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대한제국 관료들은 간도지역 통치력 확보라는 국익보다도 자신들의 권력유지 확보가 우선이었다.
 
결국 이범윤 공은 스스로 장정을 모집하고 사포대를 편제하여 간도 한민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경비에 충당하였으며, 모자산(帽子山), 마안산(馬鞍刪), 두도구(頭道溝) 등에 영소(營所)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공은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일본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대한제국의 변방 관료들인 김명환, 최남융, 김병약, 주철준 등이 참석하여 임의로 청 관료와 ‘한청변계선후장정(韓淸邊界善後章程)’을 체결하였다.
 
한국변계관리 김명환 등은 스스로 이범윤공의 철퇴에 동의하는 등 청측에 유리한 불평등장정을 체결해 청이 바라던 이범윤과 사포대의 활동을 억제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간도통치력 약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 선후장정을 체결함으로써 변계분쟁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한국변계관리들의 입장이 타개되었다. 결국 이들은 이범윤과 사포대를 희생시키는 동시에 간도한인의 참상을 구제하지 않고 방관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대신 희생시켰다.
 
1세기 전에도 이와 같이 변계관료들조차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매국적인 친중파의 관료로서 행동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위정자들이 일삼고 있는 친중파적인 정책결정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매국적 행위의 요인이 깔려있음은 당연하다. 어느 덧 오후 4시 30분이 되니 해는 석양에 비껴있고, 쌀쌀 부는 저녁 바람에 정신이 들어 하산하기 시작했다. 산기슭 아래에는 예쁜 무덤이 보였다. 비석에는 ‘故李貞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간도개척시기에 간도 한인의 무덤으로 보였다. 시월의 낮 길이는 매우 짧아 벌써 어스름해졌다. 그리고 보니 모아산은 용정 일대 간도한인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오래전 고향을 떠난 이들에겐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나도 이 연변지역에 자주 오다 보니 이곳이 나의 고향인 양 떠나기가 싫어졌다. 다음날은 일주일간의 이곳 답사를 끝내고 귀국할 것이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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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