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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07.20. 09:47 (2020.07.20. 09:47)

중원지역의 서안(西安)을 답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김 씨의 선조로 여겨지는 김일제(金日磾)의 묘를 가다
나와 친한 친구들과 지인 8명은 고조선유적답사회(답사회)가 추진한 ‘중국의 중원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7박 8일(7.3~7.10), 총거리 1400km의 중원지역 답사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답사지역 주요 도시는 서안, 낙양, 정주, 학벽, 안양, 곡부, 태안, 제남시였다. 참가인원 34명의 단장은 이선영 총재가 맡았고, 안동립 답사회장이 제반업무를 총괄하였다.
 
우리 일행은 7월 3일 7시에 인천공항에 집합하였다. 8시에 출국수속을 밟고 KE807호에 탑승하여 9시 15분에 출발하였다. 서안공항에는 11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지난 1993년 서안 일대 답사 당시에 서안공항을 밟은 지 27년만이었다. 감개가 무량하였다. 당시의 서안공항은 볼품이 없는 매우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현재의 서안공항은 거대한 규모의 큰 공항으로 변한 상태였다.
 
버스를 타고 13시 10분경에 공항부근의 ‘GTC용초수찬청(龍抄手餐廳)’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14시 30분에 승차하여 김일제(金日磾·서기전 134~86)묘를 향했으며 50분 후에 무릉(茂陵)에 도착하였다. 김일제는 흉노 출신의 휴저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휴저왕은 진시황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곽거병(郭去病)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자 혼야왕과 휴저왕은 한(漢)에 투항하기로 하였지만, 휴저왕이 이에 반대하자 혼야왕이 휴저왕을 급습하여 휴저왕을 살해하고 4만여명의 흉노족을 이끌고 곽거병에게 투항하였다.
 
서한으로 끌려왔던 김일제는 무제(武帝)의 신임을 받았으며 제천금인(祭天金人·금가면을 쓰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을 하였다고 김씨 성을 하사받고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문무왕릉비에 의하면 신라의 왕족은 김일제의 후손으로 보인다.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김알지가 되고, 김일제의 동생 윤의 5대손인 탕(湯)이 가야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문무왕릉비문에 나오는 주요 단어들에 대해 금문학(金文學)의 대가인 소남자 김재섭은 화관지후(火官之后)를 순(舜)으로, 진백(秦伯)을 진(秦)의 목공(穆公)으로, 파경진시(派鯨津氏)를 진이 망하자 경주 일대에 파견한 휴저왕 세력인 박혁거세 거서간의 선인(先人)으로 보았다. 또 투후는 김일제임을 밝혔다.
 
김일제 묘가 있는 무릉은 한의 무제의 능원이다. 이곳에 배장(陪葬)된 인물은 김일제를 비롯하여 곽거병, 위청(韋靑), 곽광(霍光), 이부인(李夫人), 공손홍(公孫弘), 상관걸(上官桀),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 등이다. 2천여년 전 진·한 시기의 두 명의 유명한 황제는 진시황과 한무제이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제를 확립시킨 반면 한무제는 그 광역을 확장시켰으며 국가를 안전하게 통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두 황제의 위업을 찬미한 이는 모택동이다.
 
모택동은 “한무제와 진시황의 위대함은 서로 필적한다”고 하였으며 송(宋) 시인 왕십붕(王十朋)은 ‘한무제’를 읊은 시에서 “무제는 진시황과 같은 영웅이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두 황제는 재위 시기에 쌓은 업적도 서로 비슷하며 죽은 후의 호화로운 무덤도 막상막하이다.
 
진시황의 무덤은 병마총이 그 증거이며 능의 규모와 물자의 소모량 역시 거대하였다. 한무제의 무릉은 배장한 묘군(墓群)을 근거로 볼 때 그 규모와 물자의 낭비가 거대하여 진시황의 무덤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진·한 두 왕조는 호화롭게 매장하는 풍속이 유행하여 두 황제의 능의 규모를 능가하는 무덤은 없었다. 한무제는 16세에 즉위하였는데 재위 기간 54년 중에 무릉의 공사는 53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답사단은 먼저 곽거병의 묘로 향했다. 곽거병은 하동군 평양현(지금의 산서성 임분) 출신으로 한무제가 가장 편애한 장군이었다. 한무제는 곽거병을 향해 “그대는 짐의 장성(長城)이다”고 칭찬하였다. 표기장군대사마관군후(驃騎將軍大司馬冠軍侯)였던 곽거병은 24세로 요절하였다.
 
무덤 앞에는 마답흉노(馬踏匈奴)라는 말(馬) 석상이 있었는데 이 석상을 두고 회원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다. 말이 흉노를 내리누르는 형상으로 보인다는 회원이 있는 반면 말이 흉노를 겁간하고 있다는 등의 의견도 있었지만 전자가 옳다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곽거병은 한무제 시기에 최초로 흉노를 제압한 장군이기에 이와 같은 석상을 세워놓았다고 했다. 한무제 시기에 흉노와는 15차례의 전쟁이 있었지만 비교적 큰 흉노와의 전쟁은 세 개가 꼽힌다. 첫째는 서기전 127년 대장군 위청이 흉노가 점거하던 내몽고 지역을 탈환한 것이고, 둘째는 서기전 121년 곽거병이 휴저왕과 혼야왕과의 전투에서 이겨 돈황 등 4군을 내지화시켜 한의 중앙과 서역을 통하는 도로를 개통시킨 것이다. 셋째는 서기전 119년 곽거병의 2차 정벌로 흉노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어 일부의 흉노 군대가 한의 조정에 귀부하고 대부분의 흉노족이 중원 내지로 이주한 것이다.
 
일행은 김일제 묘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곽거병이 흉노를 격퇴한 연산대첩 때에 김일제는 14세의 소년이었다. 이때 어머니와 동생까지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묘의 크기는 곽거병의 묘보다 다소 작은 편이었다. 모양은 원형으로 크기는 높이 11.93m, 동쪽 폭 41.2m, 서쪽 폭 41.9m, 남쪽 길이 35.5m, 북쪽 길이 36.3m이다. 봉토는 1만8748㎥, 점유 면적은 약 1479㎡이다. 우리 일행은 김일제 묘 앞에서 묵념을 올렸으며 답사 회원 중에 김씨 성을 가진 회원들은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우리나라 김 씨의 대부분은 김일제의 후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후 서안 시내로 진입하여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되는 지역으로 가서 기념 유적을 관람하였다. 시내 중심가에서 다소 벗어난 지역에는 낙타를 타고 있는 서역인들로 구성된 상인 무리의 모습을 돌로 새겨 놓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한무제가 개통시킨 서역을 통하는 비단길의 시작이 되는 곳이었다.
 
서녘 하늘에서 해가 곧 지려고 해서 기념사진을 찍고 7층 대안탑(大雁塔)과 소안탑(小雁塔)으로 향했다. 높이 64m의 웅장한 대안탑은 세워진 지 천년이 훨씬 넘었다. 서기 625년 당 고종 시기에 현장법사가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하여 건립했다. 소안탑은 707년 고종의 아들인 예종이 천복사 경내에 세운 탑으로 원래는 15층인데 1556년 지진 당시 훼손되어 13층만 남았다. 의정(義淨)은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가지고 와서 이곳에서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남성적인 대안탑과는 반대로 소안탑은 여성적인 모습으로 대비되었다. 소안탑은 측천무후가 세웠다는 설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 두 탑을 구경한 후 몽고대영고전양(蒙古大營烤全羊)이라는 양(羊)구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숙박지인 호텔에 짐을 풀고 우리 일행은 서안의 야시장으로 향했다. 밤이 제법 깊었는데도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야시장을 구경하면서 맥주와 양꼬치 등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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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