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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08.18. 19:59 (2020.08.18. 19:59)

하남성 박물관·악비묘(岳飛廟) 및 은허박물관를 가다

 
[스카이데일리 연재]남송의 민족 영웅이었던 악비가 쓴 제갈량의 전후출사표(前後出師表)를 만나다
오늘의 정주(鄭州) 지역의 첫 답사일정은 하남성박물관 견학이다. 1993년도에 정주를 답사했지만 하필 박물관의 휴일 날 도착하는 바람에 관람을 허탕 친 ‘하남성박물관’이다. 호텔에서 8시에 출발했지만 교통체증으로 인해 박물관에 10시 경에 도착하여 입장하였다.
 
이 일대는 정주(定住·한 지역에 정착함)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의 8천년 화하(華夏)문명의 핵심적인 구역이며, 무수한 선조들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축적했다고 하였다. 또한 큰 규모의 현대화된 박물관으로써 8000년 화하문명의 찬란한 발전사를 해독했다고 하였다.
 
하남성박물관의 전시 대주제는 “황하문명의 근원적 맥락(華夏根脈)”이며, 개별 주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조광윤이 세운 송(宋) 때까지의 중원 문화의 시기별 특징과 역대 왕조별로 나타난 공통적인 형태를 8자구(八字句)로 표현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신화승체(薪火承遞) △하도상성(夏都商城) 고고성지(考古聖地) △택자중국(宅玆中國) 제례작락(制禮作樂) △군웅쟁패(群雄爭覇) 축록중원(逐鹿中原) △백천회류(百川滙流) 천하일가(天下一家) △수당동도(隋唐東都) 팔방함집(八方咸集) △동경몽화(東京夢華) 유광일채(流光溢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지리적인 요소와 문화적인 특징 및 음식문화의 특성과 종교, 천문학, 비석에 새긴 금석문, 청동기 문화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것은 △산천정영(山川精英) 인문령온(人文靈蘊) △종명정식(鍾鳴鼎食) 왕자기도(王者氣度) △집세유진(集世遺珍) 이양교공(以揚巧工) △비지증사(碑志證史) 불상전신(佛像傳神) △성한찬란(星漢燦爛) 진락금고(震락今古) 등이다.
 
하남성박물관은 원시시대 이후 시기별 역사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인류가 창조해낸 일상적인 생활상은 물론 형이상학적인 중원의 문화를 전시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관심이 있는 삼족 토기류와 삼족 청동기 유물 중에서도 서기전 20세기 이전의 금문(金文)이 새겨진 청동기에 대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역시 하남성박물관은 중원문화의 중심지라 할 만큼 유물 자료의 질과 양의 면에서 매우 우수한 편이다.
 
우리 답사단은 11시에 승차하여 악비묘(岳飛廟)로 향했다. 도중에 휴게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2시 경에 악비묘에 도착하였다. 악비(1103~1142)는 남송의 명장으로 금(金)에 대항했던 충신이자 민족 영웅이었다. 그는 탕음현(현재의 안양시 탕음현) 출신으로 역사상 유명한 전략가이자 서예가이기도 하였다. 남송을 중흥시킨 한세충, 장준, 유광세 등과 4인 중의 한 명이었다.
 
악비는 군에 들어가서 요나라 정벌에 참여했고, 1128년부터 13년 동안 악가군을 이끌고 금과 수백 차례 전투를 하였다. 특히 금이 남송과의 맹약을 파기하고 공격하니, 이에 악비는 정주·낙양 등의 땅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금과 화친을 원했던 고종과 진회(秦檜)는 악비에게 철수령을 내렸고, 1142년 진회와 장준 등이 악비를 무고하여 처형하였다. 20여년이 지난 후 효종 때 악비의 누명은 벗겨졌으며, 1204년에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었고 1225년에 시호가 충무(忠武)로 바뀌었다.
 
현재의 악비의 묘우(廟宇)는 명 시기인 1459년에 백여 칸으로 중건된 것이고, 1978년과 2010년에 각각 전체적으로 수리하여 개방하였다. 악비의 무덤은 항주(杭州)에 있으며 악비묘에는 그를 모함한 진회와 그의 부인 왕 씨의 상이 있는데 관광객들이 이들에게 침을 뱉는다고 하였다. 진회상은 손이 뒤로 묶여 무릎이 꿇려진 형태이다.
 
그러나 송과 금의 치열했던 전투에 대한 관점이 변한지는 오래인 것 같다. 중국이 ‘통일다민족 국가이론’에 근거하여 추진했던 ‘동북공정’ 이후 송과 금의 전쟁을 외적을 막는 전쟁이 아닌 통일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관광해설사들조차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고 하였다.
 
짧은 시간 내 악비묘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지만, 특히 악비가 쓴 제갈량의 ‘전후출사표(前後出師表)’의 글씨가 마음에 들었다. 꾸밈이 없고 시원스런 필획이 무더위에 피곤한 마음을 씻어주었다. 전후출사표는 적인 위나라를 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제갈량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한 글로써 읽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명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무장(武將)인 악비가 글로 남겼다. 서안(西安)의 비림(碑林)에 이 악비의 글씨가 있는 것을 볼 때 악비묘의 글은 돌에 새긴 각석을 탁본한 것으로 보인다.
 
섬서성명비각석(陜西省名碑欽賞)을 지은 무천합(武天合)은 악비를 중국 역사상 문무(文武)를 겸전한 명장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비의 서법을 ”풍채가 뛰어나고 훌륭해서 구슬옥처럼 찬란하고 눈부시다(風采俊逸 瓘燦奪目)“고 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악비의 글씨를 존경하고 귀중히 여겼다고 하였다.
 
우리 답사단은 3시 무렵에 안양(安陽) 은허박물관으로 향했다. 30분 후에 은허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은허박물관은 야외에 유적이 많아서 발굴지 전체가 박물관인 셈이다. 은허 유적지는 지난해 10월에 친구들과 왔던 곳이며, 이번이 두 번째 답사라서 내가 안내인 역할을 하였다. 각 발굴 유적지를 돌면서 일행들에게 설명을 하였다. 특히 중국학계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청동기 주조 시기의 오류와 ‘노예제사갱(奴隸祭祀坑)’에 숨겨진 실상을 말해주었다.
 
박물관 건물 앞에는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모무는 제우(帝禹)의 정비(正妃·정실왕비)이다. 차비(次妃·둘째왕후)는 사모신(司母辛)이다. 사모무방정은 1939년 안양 무관촌에서, 사모신방정은 안양 부호(婦好)묘에서 출토되었다. 사모신방정의 형태는 사모무방정과 비슷하나 크기는 사모무방정 보다 다소 작은 편이다. 안양 부호묘에서 출토된 부이방정(阜夷方鼎)의 좌에는 사모무가, 우에는 사모신이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에는 부이가 위치하고 있다. 부이는 하우(夏禹)인 제우를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 학계에선 사모무와 사모신을 모두 상왕(商王) 무정(武丁)의 배우자 중의 한 명으로 보았다. 상(商)의 22대 왕 무정은 중국 고고학계가 2000년 공표한 ‘하상주연표’에 의하면 서기전 1250년에 태어나서 1192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따라서 사모무방정과 사모신방정의 주조 시기를 13세기 후기로 보고 있는 중국학계의 입장은 오류이며, 이는 ‘고사부정론’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모무방정과 사모신방정의 주조는 제우의 즉위년인 서기전 2311년 이후라야 가능하므로 두 방정의 실제 주조 시기는 서기전 24세기 초기임이 확실하다.
 
우리 일행은 거마갱(車馬坑)을 관람하였다. 20여 개가 넘는 마차들과 말들의 시신 뼈가 보존된 거대한 거마갱 역시 서기전 2297년 제우의 아들인 하계(夏啓)가 쿠데타를 일으켜 남긴 현장의 하나였다. 아버지 제우의 제삿날에 참여하기 위해 곡부에서 온 어머니인 사모무와 매형인 제익(帝益) 및 귀족과 병사들을 살해해버린 현장은 야외 광장에 유리로 덮은 채 전시하고 있었다.
 
거마갱 등이 묻힌 이런 현장을 은허궁전종묘제사갱유적(殷墟宮殿宗廟祭祀坑遺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한 병사들의 시신을 묻은 곳은 북조종묘제사갱(北組宗廟祭祀坑)이라 명칭을 붙이고서 은인(殷人)들이 조상에게 전례(典禮)에 따라 제사를 지낸 유적으로 노예제 사회의 잔혹한 살순(殺殉)제도를 형상화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날씨가 무더운 야외 답사로 인해 큰 나무가 있는 동쪽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 깜짝 수박파티를 열면서 짧은 시간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 유적지인 부이방정이 발견된 부호묘를 관람하였다. 묘의 규모도 크고 깊이도 매우 깊은 무덤이다. 이 부호묘에서는 엄청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거의 세 시간의 은허박물관 답사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관람을 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넓은 유적지라는 점도 있지만 무더운 날씨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6시 20분에 다시 승차하여 숙소가 있는 학벽(鶴壁)시의 학벽금강지성(鶴壁錦江之星)으로 향했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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