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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생을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 유전적 요인? 아니면 환경적 요인? 무엇이 앞선다고 확답할 수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아! 그거였구나!" 하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다. 30년 이상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낀 생각은 유전적 요인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값진 결과를 쌓은 학생을 볼 때면 더 큰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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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학생들만 그런가? 어른도, 교사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근무했던 학교는 초중학교가 한 캠퍼스에 있는 사립학교였다. 초중학교 교직원이 모두 모일 때는 100여 명이 됐지만 모두 얼굴을 알고 지냈다. 필자는 중학교에 근무했지만 초등학교에서 유독 눈에 띄는 교사 한 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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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과 등산에 심취한 이종만 교사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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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59세) 교사! 여도초등학교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작곡을 하는 교사다. 그가 내 이목을 사로잡은 건 30여 년 전 그와 함께 동남아시아 여행을 했을 때였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날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 중앙에는 대나무로 된 인도네시아 전통악기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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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식사를 마친 이종만 교사가 실로폰 채처럼 생긴 막대로 대나무를 두드려 보더니 곧바로 세계 명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호텔직원들은 손을 놓고 음악을 들으며 깜짝 놀랐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식당에 모인 관광객들은 큰소리로 환호하며 여러번 "앙코르!"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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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의 첫 번째 길... 20세부터 40세까지는 음악인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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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빈필연주홀에서 여도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이종만 교사 ⓒ 이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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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여도초등학교를 방문해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가인 줄로만 알았던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가 등산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전국 100대 명산을 등정하고 500개 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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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은 음악과 등산의 두 가지 길로 나뉜다. 20세 이전에는 음악과 무관했지만 교대에 진학한 이후에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했다. 음악을 시작하자 담당교수가 "남다른 재능이 있다"며 음악인의 길로 가라고 추천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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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 졸업 후 9년간 초등학교에 재직한 후 30세에 경희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해 36세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 후 여러 대학에 강사로 재직하다 여수에 있는 여도초등학교 교사로 새출발했다(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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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초등학교에 재직하면서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를 19번 하는 틈틈이 200곡을 작곡했고 편곡은 1000곡도 넘는다. 2007년에는 여도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고 유럽 8개국 순회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1987년 제5회MBC 창작동요제에서는 <고향길>로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노래 중에서 자부심을 갖는 노래는 <청석포>이다. 그의 음악적 재능이 궁금해 "언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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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뉴스를 제외한 시간에는 24시간 음악방송을 들었어요. 그 영향인지 저는 지금도 KBS TV 가요무대를 매주 봅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감이 뇌리에 새겨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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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이 고향인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오르간을 연주하지 못하는 교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운좋게도 그의 담임교사는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인이었다. 그의 음감이 뛰어난 것을 안 담임교사는 오르간 한 곡을 가르쳐준 후 3학년에 불과한 이종만 학생을 조수로 데리고 다니며 학생들을 지도하게 했다. 당시 담임교사는 "너는 청음력과 시창력이 뛰어나니 음악을 한 번 해봐라"고 격려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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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부터는 등산인의 길로... 혼자서 묵상하며 전국 산 500개 이상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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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정상에 선 이종만 교사 모습. 그는 "음악과 등산이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 이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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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두 번째 길은 등산이다. 베토벤이 그랬듯이 그는 혼자 묵상하며 걷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 시작한 게 등산이다. 산의 매력에 빠진 그는 지리산부터 시작해 전국 100대 명산을 등정했다. 매 주말이나 방학 때 혼자서 산을 오른 숫자가 500개가 넘는다. "혼자 등산에 나선 이유와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았는가?"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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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 가입하는 게 싫었고 내가 편한 시간에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어서요. 외로웠냐고요? 전혀 외롭지 않았어요. 남들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코로나 사태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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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까지 음악과 등산을 계속하겠다는 그는 지금도 영상을 통해 트럼본과 오보에 레슨을 받고 있다. 그는 BTS나 한류 문화의 성공 요인을 한글의 우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언어로는 한글의 '표정연기'를 그려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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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나라 노랫말도 한글로 개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그는 미국 작곡가 포스터의 <주인은 차디찬 땅속에>라는 곡을 작사가 윤석중씨가 "~고단한 날개 쉬어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를 예로 들었다. '높은 하늘에 떠있는 기러기를 부른다' 는 의미의 가사는 '~저어~' 선율에 맞게 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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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배인숙의 노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는 프랑스 샹송 를 개사했는데 원곡보다 더 어울리게 개사했어요. 한류 문화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것은 한글의 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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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려는 데 곧바로 영상을 통해 트럼본 연주를 시작하는 그를 보며 이종만의 음악사랑은 아버지가 은연중 보여준 음악 사랑과 그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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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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