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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의 세상이야기오문수의 지식창고 2020.10.20. 09:03 (2020.10.20. 09:03)

근대개혁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산실이 된 임실

 
동학의 연원을 찾아나선 임실여행
 
\na-;▲ 고조선유적 답사회원들이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중 임실 출신인 박준승 기념관에서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지난 9일 고구려유적답사회원 10여 명과 함께 전라북도 임실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은 한국 근대사의 서막을 연 동학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다.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이 동학유적지 안내를 시작하면서 "임실에 동학이 한창일 때 임실 주민 80%가 동학교도였습니다"라는 말에 의아해하던 일행의 의구심은 유적지 현장과 인물 설명을 들으며 서서히 풀려나갔다.
 
"임실이 동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말에 의구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전북의 오지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평등과 개혁사상의 싹이 자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학 창도의 배경
 
양반관료국가인 조선왕조는 19세기에 접어들어 세도정치가 성행하면서 관기가 해이해지고 탐관오리가 발호하면서 농민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봉건적 착취와 탄압에 시달린 민중들은 1811년 홍경래 난, 1862년 진주민란에 뒤이어 전국 35개 지방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이 시기에 청나라에 동행했던 조선 사절 통역관들로부터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래되기 시작했고 동학 창도자 최제우도 천주교의 교리를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봉건적 위기와 서구침략에 대한 불안을 느낀 최제우는 "위대한 하느님의 가르침(천도-天道)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해야겠다"며 동학 창도 이유를 밝혔다. 최제우가 쓴 <동경대전> 논학문의 일부분이다.
 
"나는 역시 동쪽에서 나서 도(道)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天道)지만 학(學)은 동학이다. 우리 도(道)는 이 땅에서 받았으며, 이 땅에서 펼 것이니 어찌 서학이라 부르겠는가?"

 
1860년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인간중심의 교리로 봉건적 신분질서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평등주의였다.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 나라와 시대의 모순을 고민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널리 민중을 구제하라(광제창생-廣濟蒼生), 지금의 세상이 끝나고 백성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後天開闢)'이라는 사상에 신도가 늘어나자 정부는 동학을 서학으로 규정해 엄금할 방침(1864.3월)을 세웠다.
 
제2대 동학교조 최시형의 임실포교
 
동학이 전북 지방에 최초로 포교된 것은 최제우가 제자 최의중과 더불어 남원의 서공서 집에 머물며 포교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최제우는 남원 은적암에 머물며 포교를 하기도 했다. 이 무렵 전라도 지역은 동학이 급속히 전파될 수 있는 온상이 되어 있었다.
 임실읍 성가리에 있는 천도교 임실교구전경
임실읍 성가리에 있는 천도교 임실교구전경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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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제국주의 침략과 경제적 수탈로 농민 대중은 손바닥만한 경작지를 얻어 경작하고 고리대로 논밭은 처분하고 유랑민이 되어 이주하는 무산자가 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전라도 지방은 전국 조세수입의 51.7%를 부담했고 탐관오리의 수탈 대상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농민 대중은 동학에 귀의했고, 동학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안식처요 불만 해소처였다. <천도교임실교사>에 따르면 임실에 천도교가 전래된 기록이 있다.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이 임실에 와서 동학교리를 최초로 설법한 청웅면 옥석리 새목터 모습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이 임실에 와서 동학교리를 최초로 설법한 청웅면 옥석리 새목터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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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읍에서 남쪽으로 약 30리에 위치한 새목치(鳥項峙)라는 재가 있다. 이 조항치 바짝 밑에 있는 그 당시 10여호 되는(청웅면 옥석리) 새목터라는 마을이 있다. 해월신사(최시형)께서 이 마을에 포덕14년(1873년) 계유 3월에 장수 교인 김신종을 데리고 오시어 허선씨 집에 자리를 정하시고 도장(道場)을 베풀어 설법 포교하시자 이 소문이 널리 퍼져 원근 인사 운집 배알하고… 그 중에서 최봉성, 허선, 표웅삼, 최봉욱, 최봉관, 김영원, 최승우, 신명화, 김학원 등 만이 35일간 장기적 설법과 교리를 배웠다"

 
이 시점 이후로 임실 지역에서 많은 동학교도들이 입도하였으며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를 설치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동학의 재봉기 때에는 임실 농민군 1만 5천명이 다른 지역의 농민군들과 합세하여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임실 및 남원의 상황에 대해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을 보면 임실과 남원에 동학교도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
임실은 모두가 동학도이고 오수역도 또한 모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오수역에 들어가 동학당 5명을 붙잡았다. 임실에서 붙잡은 동학도도 7,8명이었다. 이와 같이 한 개의 현이 모두 통틀어 동학도인 지방은 동학도가 역적임을 알지 못하므로 인민들이 취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접주 5명을 죽임으로 해서 인민들은 비로소 동학에 가담한 것이 잘못이라고 깨닫게 된 것 같다"

 
최제우가 관군에 잡혀 처형된 후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이 도피처로 임실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동학 천도교 약사>에 의하면 "이필제 난(1871년)의 여파로 영남, 충청, 강원 경기 등 각지의 도인이 안도치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전라도만이 이필제난의 영향 밖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실이 동학교도들의 산실이 되는데 크게 일조한 최봉성 일가
 
임실에 동학을 정착시킨 이는 최봉성 일가이다. 그는 장수 출신 김신종과 함께 1873년 3월에 청웅면 조항치 허선 집에 머물며 해월신사(최시형)를 배알하고 동학의 종지(宗旨)인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 강령(降領) 포덕천하광제창생보국안민(布德天下廣濟蒼生輔國安民)과 세계 극락의 대의를 듣고 찬동 입도했다.
 
\na-;▲ 김영원 선생이 후학들을 양성한 삼요정 모습. 동학 2대 교조인 최시형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김영원은 고향인 시목동 선무봉 아래 삼요정을 세우고 인재를 키웠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박준승 양한묵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다. ⓒ 오문수
 
동행한 이는 아들 승우와 김영원이었다. 입도한 후 임실을 위시하여 진안, 장수, 무주, 용담, 순창, 남원, 구례, 곡성, 옥과 등 10여 군에 잠입 포교하니 교인이 수천에 달했다. 이 지하조직의 중심인물에는 사위인 김홍기, 김영원, 한영태와 아들 여섯 명이 결의형제의 의를 맹약하고 포교에 전력했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 때에는 대접주 신분으로 식량과 무기를 제공하고 모든 계획과 거사를 총지휘 하였고 당시 노복 10여 명을 평민이 되게 하였다. 상반 차별을 없애고 인권을 평등하게 대우하여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도를 실행해 만민평등을 주장했다.
 
\na-;▲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이 한영태 김영원 선생의 의거기념비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임실지역에서 3.1독립운동이 시작되자 일본경찰에 체포된 한영태는 시종일관 조직일체를 부인하다가 혀를 깨물고 옷을 찢어 새끼를 꼬아 목매 자결했다 ⓒ 오문수
 
갑오동학 농민혁명 실패로 한영태, 김영원, 김학원 등이 회문산으로 은거생활에 들어가자 생활비를 전담하고 일평생을 구국운동과 종교사업 및 빈민구제 운동에 헌신했다. 61세에 병을 얻어 회복 못 할 것을 예감한 그는 "나의 유산을 구국운동과 종교사업에 전용하라"는 유서를 남겼다.
 
임실 지역에서 동학이 활발하게 전파된 이유
 
당시 동학교도가 발각되면 참형에 처했으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된 이유가 있었다. 동학이 임실에서 활발하게 전파된 이유를 전북역사문화학회가 발간한 <임실동학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들고 있다.
 
▶덕망과 학식, 재력있는 최봉성이 전재산을 구국운동과 종교사업에 바쳤고 최씨 일가를 주축으로 결의형제를 맺어 비밀보호가 이뤄졌다.
 
▶동부산악권과 서부 평야지대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했다.
 
▶타 지역과 달리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청웅에 삼화학교와 전주에 창동학교를 신설해 인재를 양성했다. 이에 따라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중 임실 출신의 박준승과 양한묵(화순)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 3•1만세운동과 항일운동 유공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됐다.
 
▶최시형의 포교활동으로 타 지역보다 일찍 동학 간부들이 배출되어 탄탄한 조직력을 확보했다.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면서 신•구파 갈등 속에서도 구파의 천도교 중앙기관을 임시로 임실교회에 존치하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왜군의 신식무기인 총과 대포 앞에서 도저히 당할 수 없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봉준 김개남 김홍기 등이 처형되자 최승우, 최유하, 김영원, 한영태, 최동필, 김학원등은 회문산에 칩거해 6년간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1904년 갑진 혁신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동학교도 5천여 명이 청웅면에 모여 삭발하고 혁신운동을 전개했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지 11년째가 되던 해였다. 1905년 12월 1일 제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했다. 전국 교도들이 솔선해 생활혁신운동을 전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문학은 국문화 할 것
 
▶ 백의는 생활상 불편하니 색복을 할 것
 
▶ 장발은 위생상 해로우니 단발을 할 것
 
▶ 부모상의 3년복 제는 허례허식이니 105일로 탈상할 것
 
▶ 각종 공장을 많이 세울 것
 
\na-;▲ 운암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임실 3대운동 기념비로 왼쪽부터 3.1운동 , 갑오동학혁명, 무인멸왜운동 기념비이다. 맨오른쪽은 한영태 선생 묘비로 후일에 옮겨왔다 ⓒ 오문수
 
임실 삼화학교와 전주 창동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여러 고을의 천도교 교구장을 역임한 김영원은 배일 지하운동을 계속하며 1918년 1월 서울로 상경해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교우들 중 가장 인망이 높은 오세창, 권동진, 나용환, 홍병기, 홍기조, 최린 등과 천도교 중앙본부에서 날마다 밀의하고 선생의 문하생 박준승, 양한묵과 함께 거국적 민족궐기를 준비했다.
 
임실이 독립운동에 얼마나 열심히 참여했는가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3월 1일 자시(子時)에 봉화로 신호하여 각 지방에 선언서를 부쳤다. 다음날인 2일 각면 소재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하고 제1봉화는 운암면 국사봉, 제2봉화는 청웅면 백련산, 제3봉화는 덕치면 회문산, 제4봉화는 삼계면 원통산, 제5봉화는 성수면 생암리, 제6봉화는 신덕면 치마산으로 정해 봉화를 올리고 선언서를 낭독했다.
 
일찍부터 동학의 영향을 받은 임실지역은 민중의 의식이 깨어 있었다. 임실은 동학농민혁명 뿐만 아니라 근대개혁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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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오문수 oms114kr@daum.net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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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