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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1.03.02. 10:08 (2021.03.02. 10:08)

숨겨진 허구의 기자조선, 평양비정의 실상

 
[스카이데일리 연재]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차지하려는 中 영토공정
홍산 유적지인 객좌현에서 발견된 세칭 기후(㠱侯)와 고죽(孤竹) 명문(銘文)으로 인해 벌어진 기자동래설을 중국 학계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고조선을 처음 건국한 자를 한국 학계에선 천신(天神)의 후손인 단군(檀君)으로 보고 있는 반면 중국 학계에서는 은(殷)의 유민이자 주(周)의 분봉을 받은 기자(箕子)를 부각시켜, 고조선과 한국의 정체성의 단절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학계의 기자조선을 통해 고조선과 한국의 정체성을 단절시키려는 의도는 만주지역 즉 간도지역을 차지하려는 영유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는 중국이 2002년 2월부터 시작한 ‘동북공정’의 일련의 후속 조치였다. 기자(箕子) 관련 논문이 2002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것도 동북공정의 영향이다. 중국은 발해에 이어 고구려, 부여까지 역사 및 영토공정을 2007년 1월에 끝내려고 하였지만 2년을 더 연장하였다. 그리고 2012년에는 고구려성과 발해의 성곽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의 길이를 2만1196.18km라고 발표하였다. 서쪽 가욕관에서 산해관에 끝나는 만리장성을 흑룡강성까지 이어 만든 ‘만리장성 연장론’이다.
 
‘만리장성 연장론’ 선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지역, 즉 간도지역을 차지하려는 숨겨진 전략인 것이다. 중국이 선언한 만리장성 연장론은 만주의 주인이었던 고구려와 발해마저도 중국의 역사라고 왜곡시키더니, 우리 선조들이 쌓은 성곽마저 자신들의 성(城)이라고 우기는 오만하고 무례한 행태는 결국 우리 자신이 만들어준 결과일 뿐이다. 본래 만리장성의 동단에 연(燕)이 쌓은 장성(長城)이 난하 부근의 낙랑군 수성(遂城)현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이 장성이 명칭도 전혀 다른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여 만리장성의 동단을 황해도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일부 학자의 낙랑군 수성(遂城)현에 대한 엉뚱한 거짓 추측은 50년도 안되어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가져온다. 엉뚱한 지도 한 장으로 인해 우리의 고토인 만주 아래 부분과 평안도 서쪽 및 황해도 윗부분이 남의 땅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중국의 담기양이 낙랑군 수성(遂城)현을 황해도에 비정한 일부 학자 학설을 따라, 그가 제작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만리장성의 동단을 황해도에 그려놓았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어 중국은 1992년 고구려의 박작성을 허물고 1000m 길이의 호산장성을 신축하고 우리 국민에게 관광사업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나 역사학계 누군가 중국의 불법 행위에 대한 항의 한마디 했다는 보도는 없었다. 몇 해 전 한 재단이 만들려고 했던 『동북아역사지도첩』이 담기양이 만든 『중국역사지도집』 처럼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그려놓았다가 퇴짜를 맞았다. 수 십 명의 지도첩 편찬위원들이 있었지만 일부 학자의 학설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으니 이들이야말로 식민사학자의 수괴들의 영웅스러운 제자들이었다. 고작 학문을 익혀 중국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민족의 혼을 팔고 말았으니 통탄스럽지 아니한가.
 
을사칠적의 이완용은 나라 땅이나 팔아먹었지만 이들은 민족의 역사와 혼을 단숨에 팔았으니 매국노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와 같이 민족의 혼을 팔아먹은 자들이 이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두 재단에 15년 동안 수천억 원 혈세를 투자하였지만 얻은 이름은 중국의 앞잡이 노릇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으로 우리 국민의 원성이 높았던 2004년 8월 방한하여 한·중간에 외교적 관례도 없는 “5개항의 구두합의”를 성사시킨 우다웨이(武大偉)는 우리 관료들에게 ‘학술적 해결’이라는 실체 없는 공약(空約)을 했던 당사자이다. 우다웨이의 ‘학술적 해결’이라는 미사여구(美辭麗句)에 현혹된 어리석은 위정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동북공정7적’으로 2005년도에 명명하고 말았다.
 
저들의 역사왜곡 추진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고 쉽게 합의해준 “5개항의 구두합의”야 말로 오히려 ‘동북공정’을 중지시키기는커녕 백두산공정, 요하문명론, 장백산문화론, 만리장성 연장론까지 추진하는 결과를 초래하도록 묵인하였으니 매국노가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민족의 역사와 혼마저 빼앗기는 기틀을 이들이 만들었으니,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온 선조들께 뵈올 면목이 없다.
 
중국의 역사는 주(周) 공화 원년인 서기전 841년부터 시작하였다. 그들의 짧은 역사마저 늘이기 위해 ‘중화문명탐원공정’에 이어 ‘하상주단대공정’까지 추진하였어도, 우리의 역사보다 천년이 부족한 그들이었다. 이제 그들이 ‘기자조선’의 문제를 왜곡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정체성을 왜곡시키려는 전략이다. 그들의 역사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신화로 여겼던 ‘3황5제’시기의 ‘고조선’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역사 조작도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에는 「무왕위은초정(武王爲殷初定)ⵈ 명소석공기자지수(命召釋公箕子之囚)」, 「무왕이(武王已) 극은(克殷) 후이년(後二年) 문기자은소이망(問箕子殷所以亡) 기자불언은악(箕子不言殷惡)」, 즉 “무왕이 은을 토벌한 직후 소공에게 명하여 옥에 갇힌 기자를 풀어주다” 하였으며, “무왕이 은을 이미 점령한지 2년 후에 기자에게 은이 망한 까닭을 물으니, 기자는 차마 은의 죄악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송(宋) 미자(微子) 세가전(世家傳)에는 「무왕기극은(武王旣克殷) 방문기자(訪問箕子) 어시무왕내봉기자어조선(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 이불신야(而不臣也)」, “무왕이 은을 멸망시킨 후 기자를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지만 신하로 여기지 않았다.”
 
위의 사기(史記) 기사에는 ‘기자(箕子)를 무왕이 봉했다’는 말은 있지만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사기보다 180년 후에 나온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에는 「은도쇠(殷道衰) 기자거지조선(箕子去之朝鮮) 교기민이예의(敎其民而禮義) ⵈ 낙랑조선민범금팔조(樂浪朝鮮民犯禁八條)」, “은(殷)이 도(道)가 쇠하고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백성을 예와 의로 가르치니 ⵈ 낙랑조선 인민에 대하여 팔개조의 금법을 제정 실시하였다”고 하였으니, 반고(班固)는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백성을 교화시켰다’고 왜곡시켰다. 서기 450년 경 남송의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서』에는 「무왕봉기자어조선(武王封箕子於朝鮮) 기자교이예의전잠(箕子敎以禮義田蠶) ⵈ 기후(其後) 사십세(四十世) 지조선후준(至朝鮮侯準) 자칭왕(自稱王)」이라 하여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며, 기자는 예와 의로써 누에치기를 가르쳤다. 그 후 40세에 이르러 조선후 준(準)이 스스로 왕으로 칭하였다.” 지금까지 신하로 여기지 않았던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며, 기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선후 준(準)을 기자의 40세 후손으로 왜곡시켰다. 서기 3세기 초에 쓴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서는 “기자의 후손을 조선후로 만들고 그리하여 조선후를 주(周) 왕실의 충신으로 만들었다(석기자지후‧昔箕子之侯 조선후견주쇠‧朝鮮侯見周衰 연자존위왕‧燕自尊爲王 ⵈ 조선후역‧朝鮮侯亦 자칭위왕‧自稱爲王 욕흥병역격‧欲興兵逆擊 연‧燕 이어존조주실‧以於尊朝周室)”
 
이와 같이 기자(箕子)에 대한 중국의 문헌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록하여 진실을 덮은 채, 존재하지 않았던 기자조선의 행적을 환상적인 한(漢) 왕조의 문화적 시책(施策)인양 꾸며놓았다. 심지어 서기전 12세기의 기자(箕子)의 기사와 천년 후 다시 나타나는 조작된 한(漢) 무제(武帝) 이후의 기자(箕子) 기사는 전형적인 저들이 자랑하는 춘추필법으로 윤색하는 기록들이다. 이러한 수법을 몰랐던 일부 학자는 어환(魚豢)의 위략(魏略) 기사를 믿고, 조기(早期) 기자조선(B.C. 12세기~)과 만기(晩期) 기자조선(B.C. 4세기~ B.C. 2세기)으로 구분지었다.
 
동북공정 추진을 끝낸 중국은 고조선의 정체성을 혼란시키기 위하여 왜곡된 기자(箕子)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새로운 기자조선을 평양에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펴낸 책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기자조선은 하나의 실존의 역사이며, 중국 동북문명사를 여는 단초(端初)이다. 은상(殷商)의 후예인 기자(箕子)는 상말주초에 조선으로 달아나서, 조선반도 한강 이북지역에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후 주(周)의 신하였으며, 또한 진(秦)에 경략당하여 복속하였다. 한(漢) 초기(B.C. 194~ B.C. 180년)에는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 집단이 음모로 왕위를 빼앗고 그리고 멸망하였다. 기자조선의 전후 시기가 천년이며, 주(周)·진(秦)·한(漢) 시기에는 조선반도의 지방정권이었다. 공자는 이 기자조선을 동방의 군자지국(君子之國)으로 칭찬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은 기자조선을 평양일대를 비정하여 당초부터 중원정권의 후국(侯國)으로 규정하였으며,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건립하고 더불어 천여 년이나 제사(祭祀)를 지냈다고 하였다. 이미 중국은 암암리에 고조선 공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가공의 기자조선을 평양에 비정한 의도도 동북공정을 공식화시킨 중국의 역사공정의 일환인 동시에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차지하려는 영토공정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고조선연구 경향’에 대해, 한국고대사학계 중심으로 조법종 등 한국의 학자들도 비판적인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2017년 4월 트럼프와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의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발언 의도는 허구의 기자조선을 평양에 비정한 중국의 전략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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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