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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필아저씨의 지식창고 2021.11.05. 10:53 (2021.11.04. 11:00)

서라벌(徐羅伐) - 3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왕의 십사년에, 동방나라의 종국(宗國)으로 자타가 허하는 부여나라에서 사신이 고구려로 왔다.
서라벌(徐羅伐) - 3
 
 
왕의 십사년에, 동방나라의 종국(宗國)으로 자타가 허하는 부여나라에서 사신이 고구려로 왔다.
 
부여에는 대소(帶素)왕이 재위하고 있었다. 그 대소왕과 고구려는 서로 이상한 관계가 아직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구려는 선왕인 주몽왕이 부여에 의탁하고 있었고, 대소왕은 그때 부여의 태자로서 주몽왕의 주인격이었다.
 
그 위에, 주몽왕(당시에는 명색 없는 소년)을 꺼리고 미워하여 주몽왕은 태자를 피해 도망하여 고구려나라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매 원수라면 원수인 동시에 주인이라면 또 주인이었다.
 
태자 대소가 왕으로 등극할 때는, 주몽왕의 아드님의 현 유리왕은 부여의 한 구박받는 소년에 지나지 못하였다.
 
지금 흥성하는 고구려의 임금으로 앉아서 대소왕의 대등의 친선사를 맞음에 유리왕으로서는 여러 가지 감회가 자연 마음에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소왕의 보낸 친천사는 다만 친선을 목적한 것만이 아니었다. 대소왕의 요구 조건을 전할 임무를 겸해 띤 것이었다.
 
대소왕의 요구-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부여가 친선을 서로 약속하고 보장하기 위해서 볼미〔人質〕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대소왕이 왕자를 고구려에 볼미할 터이니, 고구려에서도 부여로 왕자를 볼미 보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유리왕은 이것을 꺼리었다. 당신이 부여에 있을 때는 고구려 왕(주몽왕)의 맏아드님이라 하나, 공식-정식으로 부여에 그 신분으로 있은 배 아니니, 혹은 근본부터 성질이 다를는지는 모르나, 당신이 부여에서 겪은 천대가 회상되어 사랑하는 아드님을 부여에 보내기 싫었다. 우리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여 왕자를 바꾼다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내기 싫었다. 더우기 유리왕은 장차 좋은 기회 생기면 부여를 부수려는 계획이 있느니만치 왕자를 그 곳에 볼미로 주었다가는, 좋은 기회 올지라도 그 일을 결행할 수 없겠는지라, 이 점도 꺼리었다. 유리왕의 태자인 도절(盜竊)도 부여에 볼미가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유리왕은 좋은 말로 부여의 이번의 요구를 사절하였다.
 
부여 대소왕은 이것을 혐의하여 그 해 동짓달에 오만의 대병을 친솔하고 고구려에 침범해 왔다.
 
외국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고구려 건국 이래의 처음의 일이었다. 더우기 오만의 대병이라 하는 것은 동방 지역에는 전례가 적은 놀라운 많은 군사였다.
 
고구려의 강한 것을 아는지라, 이만저만한 병력쯤은 보내어야 쓸데없을 것이고, 지금 좋은 핑계 생긴 김에 일거에 고구려를 복멸하여, 국가의 큰 근심을 근본적으로 뽑아 버리고자, 대소왕은 움직일 수 있는 온 국력을 들어서 이번의 거조에 나온 모양이었다.
 
이 대군을 맞아 고구려 또한 이 기회에 부여와의 자웅을 결하려고, 만단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아직 고구려 부여의 자웅 결하려는 것을 때가 아니라 보았던지, 무서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사람의 키가 거진 빠질 듯, 천하는 눈 아래 깊이 잠겼다.
 
이 깊은 눈 속에 파묻히어서, 부여의 군사에는 눈에 묻혀 죽은 사람이 많이 생겼다. 싸움은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싸우지 않고 적잖은 군사를 눈에 묻어 죽이고, 대소왕은 그만 무위하게 군사를 부여로 돌이켰다.
 
장차 한번 반드시 자웅을 결쿠어, 나 넘어지든 너를 꺾든 좌우 양단간에 결말을 지어야 할 고구려와 부여는, 하늘이 허락지 않아서, 뽑았던 칼을 도로 그냥 칼집에 꽂았다.
 
그러나 이번의 사변에 있어서, 고구려는 한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즉 부여가 볼미를 교환하고자 왔던 것이 이른봄이었다. 그것을 거절당하고 가서, 동짓달에 오만 대병을 동원하여 가지고 왔던 것이었다. 열 달 미만 동안에 오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여의 실력이 얕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마주쳐서 싸워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한 강병인지는 모르지만, 오만의 군사라 하는 것은 결코 적은 군사가 아니다. 고구려로서는, 오만쯤을 상대로 싸울 자신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오만을 맞아 싸우려면 고구려로서는 지금껏 상대한 적보다는 좀 힘이 들어야 할 것이다. 그 오만이 만약 고구려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달려오면, 고구려로서도 낭패를 않을 수 없다. 장차 이 동방에 있는 적(敵)으로는 낙랑과 부여를 가장 크게 잡고 있기는 하지만, 좀더 정신을 차려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위치도 다른데 적당한 곳이 있으면 그것도 유의해 두어야 하겠다. 이 졸본 서울은 그때 임시로 잡았던 곳으로, 견고한 요새로는 적당하나, 터전이 좁고, 하도 산간이라 , 만약 적에게 오래 포위를 받는 일이 있다면 안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없는지라, 적에게 문을 열지 않을 수 없다.
 
국가 만년지계를 위해서는, 터전이 험하기도 하거니와 오곡을 생산할 밭도 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하들에게 분부하여 새 서울 터도 물색해 보도록 하였다.
 
바쁜 일이 아니라, 그저 그만치 해두었었는데 이십일년에 ‘여기면 어떻겠읍니까’ 하는 후보지가 생겼다.
 
제상 쓰려고 잡아 두었던 멧도야지가 달아났다. 유리왕은 장생(掌栍- 제관) 설지(薛支)에게 쫓겨가서 도로 잡아오기를 명하였다. 도야지는 기운 다하여 도망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그냥 도망쳤다.
 
고구려 젊은이의 기운으로도 따르기 힘들도록 그냥 도망쳤다. 도야지는 또한 이처럼 날래게 기운좋게 그냥 쫓아오는 설지의 기운에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설지로서는 책임도 책임이려니와 그 위에 제 생명까지 관계되는 일이다. 이 년전에도 제사 도야지가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왕의 분부로 제관 두 사람이 쫓아가서 장옥(長屋)까지 가서 겨우 잡았다. 두 제관은 겨우 그 도야지를 잡아서는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도야지 다리 힘줄을 칼로 끊었다. 그 말을 듣고 왕은 제사 짐승을 병신 만들단 웬일이냐고 두 제관을 땅에 묻어 죽인 일이 있다.
 
제사 도야지를 잃어도 가벼운 벌쯤으로 면치 못할 것이다. 장생 설지는 죽을 기운 다 내서 도야지를 쫓아가서 국내 위나암(國內 尉那巖)까지 가서 간신히 그 도야지를 붙들었다. 도야지는 잡아서 든든히 결박지어 어떤 민가에 맡겨서, 나라에 찾아갈 때까지 잘 간수하고 기르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졸본 서울로 발을 돌이켰다.
 
돌이키면서 이 국내(國內)땅 지형을 보았다. 산 험하고, 물 깊고, 들에는 사슴이며 노루가 많이 놀고, 강에서는 어별(魚鼈)이 많이 나고, 벌은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겠고 ― 늘 유의하는 서울 터로 쉽잖은 좋은 곳이었다.
 
임금께 돌아와서 그대로 복주하였다.
 
"만약 이도(移都)하시려면 그 땅이야말로 민리(民利)무궁하옵고 병혁(兵革)이 근심 없는 가장 적당한 땅이라고 소신은 보았읍니다."
 
그 구월에 왕은 위나암(尉那巖)에 사냥가서 그 지세를 보고 서울 터로 내정하였다.
 
도로 대궐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물택(沙勿澤)에서 왕은, 웬 한 장부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만났다.
 
보기에 하도 늠름하게 생겨서 인물이 탐났다. 왕은 가까지 가며(황급히 내려서 절하는) 그 장부에게 말을 걸었다-.
 
"무얼 하는 사람이며 지금 무얼 하는고?"
 
"신하(臣下)로 써주십시오."
 
그 사람은 다만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왜 그런지 사람이 탐나서, 왕은 곧 허락하였다. 성(姓)을 위(位)씨라 이름은 사물(沙勿)이라 하사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데리고 돌아와서 벼슬을 주었다.
 
이듬해에, 국내 위나암(지금의 만주 즙안현)에 성과 궁을 크게 짓고 그리로 이도(移都)를 하였다. 이리하여 졸본(卒本) 사십 년 뒤에 국내로 서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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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