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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4.04.08. 09:50 (2024.04.08. 09:50)

김대황 일행, 표류 31일만에 베트남 도착...16개월 제주 귀환해

 
이익태의《지영록(知瀛錄)》
바다를 항해하려면 노련한 뱃사람의 오랜 경험과 튼튼한 배, 그리고 하늘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있어야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 제주도에 갈 때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쉽게 갈 수 있지만, 당시는 한양 도성에서 제주도 화북포구까지 가려면 족히 두 달 이상이 걸렸으니 참으로 먼 길이었다.
이익태의《지영록(知瀛錄)》
 
바다를 항해하려면 노련한 뱃사람의 오랜 경험과 튼튼한 배, 그리고 하늘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있어야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 제주도에 갈 때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쉽게 갈 수 있지만, 당시는 한양 도성에서 제주도 화북포구까지 가려면 족히 두 달 이상이 걸렸으니 참으로 먼 길이었다.
 
17세기에 큰 바다로 나가는 일은 정말 어려운 힘든 일이었다. 제주 목사 이익태(李益泰, 1633~1704)는 본관이 연안(延安), 자가 대유(大裕)로 1668년 문과에 급제하고, 1694년 제주 목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익태는 1694년 5월 8일 한양 도성을 출발하여, 한 달이나 넘게 걸려 6월 21일 해남에 도착했다. 다음날 날씨가 좋아 6월 22일 보길도를 출발하여 6월 29일 제주도에 입도했다. 그는 꼬박 두 달 남짓 걸린 여정과 약 18개월간 제주 목사로 일하며 보고 듣고 행한 내용을 모두 적어 《지영록(知瀛錄)》을 펴냈다. 지영록(知瀛錄)의 영(瀛)은 영주(瀛州)로 제주의 옛 지명이다.
 
 
▲ 이익태 영정(사진:국립제주박물관)
 
 
이익태는 《지영록(知瀛錄)》 책 서문에 영주의 열악한 생활상과 누적된 폐단을 기록했다. 이는 앞으로 나쁜 폐단을 없애려는 의미에서 적었던 것이다. 그는 낡고 오래된 관덕정, 운주당, 우연당, 향교 등을 다시 지었으며 우암 송시열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제주의 명소를 직접 찾아가고, 도민의 민정을 살피며, 공마(貢馬)에 낙인을 찍는 과정과 귤과 전복을 진상하기 위해 준비하는 해녀들의 힘든 과정을 보고는 기록을 남겼다. 제주목에 보관하던 책판은 1677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제주 사람들은 고대 기록이 모두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지영록(知瀛錄)》은 1997년 제주문화원에 의해 김익수 선생이 처음 번역하였다.
 
 
▲ 보물 제2002호 《지영록(知瀛錄)》(사진:국립제주박물관)
 
 
《지영록》에는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과 중국인, 일본인, 제주인의 표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됐다. 2002년 연안이씨 야계(冶溪)종친회에서 《지영록(知瀛錄)》 등 131건 301점의 유품을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하여 언제든지 상설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지영록(知瀛錄)》은 2018년 대한민국 보물 제2002호로 지정되었다.
 
 
▲ 한라산 중턱 목장의 제주마(천연기념물 제347호) (사진:제주축산진흥원)
 
 
제주목 제주진무(濟州鎭撫)였던 김대황(金大璜)은 조정에 말을 진상하러 가는 책임자로 선정되어 제주목사 이상전 절제사(節制使, 재직기간 1685년 4월~1688년 1월)의 명을 받고, 1687년 8월 제주 화북진(禾北鎭)을 출항했다.
 
제주도는 고려 때부터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 3성 9진을 쌓았는데, 화북진은 조선 숙종 4년(1678)에 제주 목사 최관(崔寬)이 축성하였다. 제주 화북포구를 출항할 때 뱃사공 이덕인(李德仁)이 안내하는 배에는 격군 24명과 말 3마리, 제주도 특산물을 잔뜩 실었다. 배는 제주 북쪽 바다를 항해했다.
 
화북포구에서 많은 사람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한 배는 순조롭게 추자도 해상에 이르렀다. 그런데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급변하여 거센 파도가 일어나 돛대가 기울고 키가 부러져 배는 정처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추자도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놀랐지만, 도움을 줄 방법이 전혀 없었다. 돌풍이 심하게 불고 풍랑이 거세어 일어 배는 침몰 직전까지 갔지만, 노련한 사공 이덕인의 슬기로운 대처로 배는 침몰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표류를 하기 시작했다.
 
 
▲ 〈김대황(金大璜) 표해일록(漂海日錄)〉
 
 
조선 시대 항해의 조건은 첫째가 조류이고 둘째가 바람이다. 조류가 잘 맞아서 순류(順流)를 타고 출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넓은 바다에 이르면 갑자기 하늘이 변하고 돌풍이 몰아쳐 바다가 춤추기 시작한다.
 
필자도 범선을 타고 항해하면서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경험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몹시 당황하게 된다. 황천(荒天) 항해는 짧게는 1~2시간에 끝나지만, 어떤 경우는 하루 내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여수 소호요트경기장에서 출항하여 일본 규슈 나가사키를 가면서는 황천항해를 8시간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큰 바다를 오가는 사공들은 이런 황천을 자주 경험하고 몸에 체득해 침착하게 행동한다. 뱃사공은 항해할 때 항상 사람과 짐들을 안전하게 운송하여 항구에 내려준다. 문헌에는 사공(沙工)을 선부(船夫), 주자(舟子), 선인(船人), 고공(篙工), 초공(梢工)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선인 이덕인은 힘든 항해 중에도 수증기로 마실 물을 만들고, 격군에게 생쌀을 계속 씹게 하고, 배에 탄 관리들을 안심시켰다. 배는 비록 돛대가 기울고 키가 부러졌지만, 제주해협을 자주 오갔던 뱃사공 이덕인의 놀라운 항해 실력으로 31일을 표류하여 10월 초에 월남 중부 꽝남성 연안에 있는 호이안(Hội An, 會安) 해상에 도착했다.
 
 
▲ 호이안(Hội An, 會安)(사진:THộiDAI)
 
 
호이안 해안에 기울어진 이상한 배가 나타나자 20여 척의 배들이 몰려나와 배의 상태를 확인했다, 작은 배들은 표류민들을 태워 호이안 명덕부(明德府) 관아로 데려가 식사를 주고 표류 과정을 조사했다.
 
당시 월남 중부 호이안에 있었던 안남국은 한자 문화권 나라였다. 제주진무 김대황과 사공 이덕인은 우리는 해적이 아니고 조선에서 온 표류한 사람임을 필사적으로 주장하며 한자를 써서 보여주었다.
 
당시 호이안은 투본강을 따라 기원전부터 발달한 도시로 바다의 실크로드로 불릴 정도로 호화로운 국제무역항구로 많은 배가 정박했다. 1,000여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네덜란드인, 인도인, 화교, 아랍인들이 거주해 아주 화려했다.
 
유네스코는 2천 년의 긴 항구 역사를 가진 인구 80,000명의 무역항 호이안을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호이안은 15세기에 참파(Champa) 왕국의 항구로 번창하고,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기독교가 17세기에 호이안으로 들어왔다. 응우옌(Ngunen) 왕조의 왕들이 무역을 장려하여 인근의 다낭 등 큰 항구들이 개발되어 호이안은 옛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 참파 미션 유적(사진: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김대황 일행은 안남국 호이안에 머무는 동안 물소로 밭을 갈고 코끼리를 타고 다니며, 목동이 물가에서 휘파람을 불면 물속에서 놀던 물소가 나타나 목동의 물소 등에 올라타 집으로 가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일행 중 3명은 거친 항해와 풍토병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 땅에 묻혔다. 5개월 동안 갇혀있던 김대황은 자신들의 슬픈 사정을 글로 적어 안남국(安南國) 국왕에게 올렸다. 한자로 적은 글을 읽은 안남국 왕은 이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왕은 호이안에 정박한 중국 상선 선장에게 돈과 쌀을 내주며 김대황 일행의 조선 송환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중국 상선의 선장 설자천(薛子千)은 안남국에서 많은 물자를 받았지만, 김대황 일행에게 다시 쌀 600포를 요구했다.
 
1688년 7월 안남국 호이안을 출항한 중국 상선은 광시성, 광둥성, 푸젠성을 거쳤다. 3개월 만에 중국 저장성 온주(溫州)부 해상에 도착했는데, 해상에서 무서운 해적을 만났다. 중국 상인들은 해적에게 통사정하여 김대황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중국 저장성 온주(溫州, 원저우시)에서 선주 진건(陣建)이 온주부 관리에게 배의 호송을 부탁했다.
 
4개월이 지나 김대황 일행은 영파부(寧波府) 보타산(普陀山) 항구에 도착했다. 표류민들은 중국 주산군도 보타산(普陀山) 항구를 출항해 10일 만에 1688년 12월 17일 제주도 대정현 해상에 이르렀다. 표류민들은 16개월 만에 본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김대황(金大璜) 표해일록〉 항해길
 
 
이런 내용은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2월 13일 신해년 첫번째 기사에 수록이 되어있다. 전라도 관찰사 권시경(權是經)이 청나라 상인과의 약속 이행 여부를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지영록(知瀛錄)》 말미에 제주목사 이희룡, 정의현감 박제 등이 김대황 일행을 싣고 온 중국 상인과 문답하는 대목이 있다. 중국 상인들은 쌀을 받으려고 했으나 대화가 원활하지 못해 결국 한양 도성으로 올라와 기다리며 은을 받고는 육로로 베이징으로 호송되었다.
 
1689년(淸 康熙 28)를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 조정의 내부 논의를 엿볼 수 있다. 조정에서는 김대황이 공적인 일을 수행하다가 표류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논의 끝에 저장(浙江) 상선(商船) 영파부(寧波府)의 표문(標文)을 가진 청나라 상인에게 김태황 일행이 물어주기로 했던 상환료 쌀 600포(包)를 제주진무 김대황을 대신하여 은자 2556냥을 내주었다.
 
3년 후, 1691년 9월 28일 중국 푸젠성 상인 진건(陣建)과 선장 설자천(薛子千) 등 33인이 탄 배 한 척이 제주 서귀포 앞 초도에 정박하여 3년 전의 안남국에서 김대황 일행의 송환을 도운 일을 거론하며 후추, 단목 등의 무역을 거론했다. 제주 목사는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하여 이 내용을 조정에 통보했다. 조정은 중국 상인과의 개별교역을 거절하고 쌀, 미역, 소금을 전해주고 속히 떠나가기를 요청해 중국 상인은 1692년 2월 제주를 떠났다.
 
 
▲ 고려 건국 1100주년 〈국립제주박물관-삼별초와 동아시아 특별전〉
 
 
필자는 제주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국립제주박물관과 제주민속박물관을 방문하여 제주의 문화를 돌아본다. 〈김대황 표해일록(漂海日錄)〉은 조선 시대에 베트남과 관련 기록으로 희소성이 있고, 항해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어서 국립제주박물관을 방문하면 오랜 시간에 걸 김대황의 표해일록을 들여다본다. 이 자료는 외교와 해양 문화사적으로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조선왕조실록》 원문
○ 辛亥/引見大臣備局諸臣。 先是, 全羅道觀察使權是經狀言:
濟州人金泰璜, 於丁卯九月, 領牧使李尙所進馬, 行船至楸子島前, 爲風所漂, 三十一日方到安南國 會安地, 安南國王假公廨而待之, 賜錢米以餬口, 適遇浙江商船, 以戊辰七月載歸本州, 所齎安南國公文, 是其國邊臣明德侯吳所成, 而不用印, 只用圖書, 浙江商船則持寧波府票文 【淸人行商, 皆持票文, 卽公文也。】 矣。 泰璜之得載也, 約與米六百包, 而泰璜不能償其言, 自朝家宜有以濟之。" 上下其事于廟堂。 睦來善、金德遠以爲: "此事殊可疑, 然旣約與米, 則不可不與, 而淸人漂到我界, 輒皆從陸領還, 今不領還, 則恐後日爲淸人所覺也。 須許從陸, 而且戒牧使, 毋使自逃。 上可之。 是夏自濟州押商人朱漢源等二十八口, 至都下, 計其船直、米價、糧資。 以銀與之, 仍命譯官, 領入燕京、胡皇曰: ‘何必押致也?’ 遂放遣之。 仍使我國, 凡遇漂到者, 有船則從海放遣。 無船則領付鳳城, 以爲式, 來善等請罷司憲府、刑曹、漢城府新創禁制。" 上從之。 初, 南九萬之爲相也, 更定刑曹、漢城府禁亂之法, 而犯屠牛者, 有贖布輸于戶曹, 司憲府亦然, 而自戶曹月給諸吏隷之食, 至是罷之......
 
 
《지영록》의 서양인 표류기는 네덜란드 출신 헨드릭 얀센 하멜(Hendrik Y. Hamel)과 그 일행의 표류기를 다루었다. 하멜은 1651년 동인도회사에 취직하여 1653년 7월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선원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했다.
 
 
▲ 전남 강진 병영성의 하멜 동상
 
 
이들은 한양, 남한산성, 강진 병영을 거쳐 1666년 여수에서 작은 배를 구했다. 선원 8명은 서로 연락하여 조선 탈출에 성공했다. 하멜은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와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를 거쳐 1668년에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 호르큄(Gorcum)의 헨드릭 얀센 하멜 동상(사진:위키피디아)
 
 
하멜은 1668년 《네덜란드선 제주도 난파기(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를 발표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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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