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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4.04.27. 11:05 (2024.04.27. 10:58)

1만2천봉의 환상적인 풍광에 매료되어 속세를 벗어나는 욕망 가져

 
만덕과 금강산 단발령
만덕의 선행은 소문이 나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선비들이 나와 환영을 해주었다. 만덕은 정조가 내린 왕명 덕분에 식량과 편안한 숙소를 받았다. 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이 멀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날씨가 봄날이기는 하지만 밤이 되면 춥고 썰렁했다.
만덕과 금강산 단발령
 
 
만덕의 선행은 소문이 나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선비들이 나와 환영을 해주었다. 만덕은 정조가 내린 왕명 덕분에 식량과 편안한 숙소를 받았다. 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이 멀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날씨가 봄날이기는 하지만 밤이 되면 춥고 썰렁했다.
 
만덕은 가마를 타고 가다 가마꾼이 힘든 장소를 지날 때면 가마에서 내려 걸어갔다. 선비처럼 말을 타고 빨리 갈 수가 없어 느리게 갔다. 금강산 가는 길은 고려 시대에도 활발하게 사람들이 왕래하여 큰길에 역과 원, 관아, 절 등이 있어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금강산 가는 사람들은 역이나 관아를 많이 이용하고, 승려들은 인근에는 사찰을 찾아가고, 상인들은 마을에서 머물렀다.
 
 
▲ 정선 作 금강산 피금정(사진:국립중앙박물관)
 
 
만덕은 금강산으로 가면서 간단한 음식을 장만했다. 쌀과 반찬, 술, 곡식 가루, 말린 고기, 떡, 과일 등이었다. 만덕은 금강산 가는 길에 가마꾼들을 격려하면서 가지고 간 금강산유람록을 읽었다.
 
만덕은 철원 김화를 거쳐 피금정에서 잠시 쉬고 강원도 창도군(昌道郡)과 금강군 사이에 있는 단발령(斷髮嶺, 834m)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단발령은 마의태자가 고개를 넘으며 삭발하고 입산(入山)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辛卯年 風樂圖帖》(사진:국립중앙박물관)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 風樂圖帖)》은 정선(鄭歚, 1676~1759)이 피금령을 지나 단발령 고개 중턱에서 백석공(白石公) 일행과 금강산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2012년 겸재정선기념관에서 제3회 학술논문 현상공모를 하였다.
 
이때 서울대 미술고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경화 선생이 풍악도첩에 나오는 백석공의 존재를 논문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 風樂圖帖)- 1711 금강산 여행과 진경산수 화풍의 형성」에서 밝혔다. 이경화 선생은 백석공을 겸재와 같은 마을에 사는 신태동(辛泰東, 1659~1729)의 호라고 주장했다.
 
신태동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계형(季亨)으로 부제학을 지낸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1532~1585)의 후손으로, 고조는 대사헌 신경진(辛慶晋, 1554~1619)이고, 증조부는 영월군수 신희손(辛喜孫)이다. 신태동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시가에 뛰어나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우암 송시열이 화를 당하자 신원(伸冤)을 위해 애썼다.
 
신태동은 자연을 좋아하는 성품이라 삼연(三淵) 김창흡과 함께 어울려 자연 속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1722년 9월부터 1725년 8월까지 용담현령(龍潭縣令, 진안) 재직 시 홍수와 큰 가뭄이 들자 이를 잘 해결하여 신태동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가 진안군에 남아있다.
 
 
▲ 신태동 휼민선정비(사진:디지털진안문화대전)
 
 
이경화 선생은 학술논문에서 백석공의 존재를 김창흡의 기록을 통해 밝혀냈다. 백성공이 금강산을 두 번째 방문할 때 겸재를 동행시켜 금강산도(金剛山圖)를 제작하게 했다는 발문을 찾아냈다. 이경화 선생은 논문에서 정선의 금강산 행로를 전혀 다르게 주장했다. 피금정→ 단발령→백천교→해산정→문암관→옹천→총석정→시중대가 아닌 시중대에서 피금정까지 정반대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 정선 36세 작품 해산정(사진:국립중앙박물관)
 
 
단발령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금강산의 멋진 풍모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김시습처럼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속세를 떠돌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유래되었다. 금강산 풍경에 얼마나 강한 충격을 받았으면 살기 좋다는 속세를 벗어나 힘들게 수행하는 절로 가고 싶었을까 상상이 안 된다.
 
필자는 오랜 기간 기른 머리를 박박 밀고 다른 세계로 들어간 본 적이 있어 정선이 그린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단발령에서 구름 너머로 보이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은 환상적인 장면이라 만덕 일행도 단발령 고개에서 머물며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 정선 作 문암관 일출(사진:국립중앙박물관)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 風樂圖帖)》은 정선이 1711년에 금강산을 처음 가서 보고 느낀 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도첩 안에 금강산 풍경 13점이 수록됐다.
 
금강산은 강원도 회양군과 통천군, 고성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계절마다 금강산이 보여주는 풍경이 각각 달라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렀다. 눈이 내렸을 때는 설봉산(雪峰山), 묏부리가 서릿발 같다고 상악산(霜嶽山),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등으로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 개골, 열반, 풍악, 기달(怾怛)의 다섯 가지 이름을 들고 있다. 봄에는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이므로 금강이라 하고,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라 하고,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풍악이라 하고,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지고 나면 암석만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이라고 하였다.
 
 
▲ 봉래산(蓬萊山)
 
 
금강산 입구에 도착한 만덕은 남여(藍輿)를 준비하여 만덕을 기다리고 있는 승려들을 만나 인사를 하였다. 처음에 만덕은 승려들이 시키는 대로 남여에 올랐다. 그러나 금강산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자 만덕은 승려들이 메는 남여를 사양하고 걸어서 금강산을 탐방하며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유점사, 보덕굴 등의 사찰을 방문하고 시주(施主)를 하였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명승 만폭동, 명연, 은선대, 삼일포 등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방문했다.
 
 
▲ 남녀(藍輿)(사진:국립민속박물관)
 
 
조선 중기 이후에 금강산을 유람하는 데는 가마의 일종인 남여(藍輿)를 사용했다. 승려들은 선비들을 산에 안내하며 남여를 메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금강산을 찾는 선비들이 많아져 힘들었다. 금강산에 들어와서는 취사는 동행한 종이나 승려가 도맡았다.
 
금강산에서는 사찰별로 일정한 구역을 정해 남여를 나누어 메고, 일정한 장소에서 교대하였다. 금강산 사찰에 넉넉하게 시주를 하는 선비들도 있었지만, 무례하게 승려들을 차별하여 절을 떠나는 승려가 늘어나 조선왕조 후기에는 금강산 절이 텅텅 비는 일도 생겼다.
 
 
▲ 금강산 표훈사(사진:이지범)
 
 
만덕은 눈앞에 훤히 펼쳐진 1만 2000봉에 하염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라가 부강하고, 제주에 흉년이 없기를 기도했다. 만덕은 금강산에서 이곡(李穀, 1298~1351)이 1349년 가을에 금강산을 보고 적은 《동유기(東遊記)》를 여러 번 읽었다.
 
이곡은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금강산 배점(拜岾)을 거쳐 내금강에서 시작하여 외금강에까지 탐승했다. 만덕은 채제공이 일러준 성현(成俔)의 《동행기》와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도 읽었다.
 
 
조선 후기 문인 농재(儂齋) 홍백창(洪百昌, 1702~1742)은 아버지를 모시고 금강산을 다녀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친구들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유기실(東遊記實)》를 남겨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전했다.
 
숙종 때 김창협의 《東遊記》는 일기체로 된 금강산 기행문이다. 김창협은 전 노정을 몇 개의 단락으로 갈라서 서술했다. 그 노정은 경성, 회양, 장안사, 표훈사 등 모두 12개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내금강에서 시작하여 외금강으로 빠져 통천의 총석정을 보고, 추지령(楸地嶺, 645m)을 넘어 서울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 추지령(楸地嶺, 645m)
 
금강산을 찾는 선비들은 여행에 붓, 벼루, 먹, 종이 등을 지참하고 시상이 떠오르면 글을 남기고 시를 지을 때 참고하기 위한 시통(詩筒)을 지녔다. 종이는 시를 쓰기 편리하도록 미리 잘라서 책으로 묶어서 가지고 다녔고, 시통은 한시의 운두(韻頭)를 얇은 대나무 조각에 써넣은 조그마한 통으로 쓴 글을 보호하기도 하고,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했다.
 
▲ 시통규전(詩筒葵箋)(사진:국립중앙박물관)
 
 
선비들은 금강산에서 친구와의 만남을 기뻐하고 또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시를 많이 남겼고, 산행을 안내하고 숙식을 제공해 준 승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시문을 지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승려들은 유명한 선비에게 시를 부탁해서 보관하였다가 사찰을 방문하는 다른 선비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만덕은 금강산 사찰의 주지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내려오는 보물들과 당대 유명화가 정선,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애꾸눈이 된 화가 최북(崔北) 등이 그린 금강산 화첩과 12폭 병풍을 천천히 감상(鑑賞)했다. (계속)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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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