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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고재완의 지식창고 2017.12.23. 12:20 (2017.12.23. 12:20)

북한산 승가사 방문기 3 (약수, 승가대사좌상과 사라진 장수옥불) (2017. 5. 8)

 
북한산 승가사에 대하여 연속하여 포스팅 중으로, 오늘은 승가사 약사전과 석굴에 모셔진 보물 제1000호 승가사 석조 승가 대사 좌상(僧伽寺 石造 僧伽大師座像)에 대해 알아봅니다.
북한산 승가사에 대하여 연속하여 포스팅 중으로, 천년고찰이지만 남은 유물은 석굴, 승가대사 좌상과 마애 여래 좌상뿐입니다. 오늘은 승가사 약사전과 석굴에 모셔진 보물 제1000호 승가사 석조 승가 대사 좌상(僧伽寺 石造 僧伽大師座像)에 대해 알아봅니다. 좌상의 높이는 76㎝, 광배(光背) 높이는 130㎝이며, 승가석굴은 삼국시대부터 불승들이 수도하던 굴로서 이 석굴 안에 석상(石像)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승가사 중수기(僧伽寺 重修記)」에 따르면 승가대사(僧伽大師)의 상으로 인도의 고승으로 당나라에 와서 전도에 전념하여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까지 추앙받았던 승가대사를 돌로 형상화하여 석굴에 봉안, 신앙하였던 것입니다. 부처나 보살이 아니면서 승려상에 광배를 부착한 것은 평범한 승려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석굴 위의 바위에 추사 글씨로 알려진 영천(靈泉)이라 새긴 글씨가 보이며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가 병에 걸렸는데 이 약사전 승가대사상 뒤편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먹고 나았다고 해서 그 뒤로 신령스러운 샘물이란 뜻으로 영천으로 불린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2년 7월 세종의 명을 받아 맹사성(孟思誠)이 승가사에서 재(齋)를 올려 부처님께 기도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 약사전 위 바위에 새긴 영천
 
 
▼ 약사전(藥師殿) 안에 약사여래상은 보이지 않고 특이하게 승가 대사 좌상이 있습니다.
 
▼ 불보살이 아닌 승가대사의 상을 조성해 모신 특이한 경우이며 승가 대사 좌상은 이르면 통일시대,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광배는 1024년에 제작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석상과 광배의 조각 스타일은 차이가 있어 보이므로 동시에 제작했다고 보기엔 그렇습니다.
 
 
승가 대사 좌상은 앉은키 76cm, 어깨 폭 44cm, 무릎 폭 92cm로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고,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광대뼈가 튀어나와 전형적인 시골 노인 같다고 말합니다.(실학자 이덕무의 "청전관저서"). 이러한 특징은 독특한 손모양과 긴 상체에 비해서 유난히 넓은 하체는 고려 초기의 철불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주름선이 굵으면서도 간결해 당시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배(舟) 모양의 광배(光背)는 대사상에 비해서 넓고 큼지막하며, 광배 뒷면에는 태평 4년(고려 현종 15년, 1024)에 지광스님이 중심이 되어 광유 등이 조각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 중국 돈황 석굴의 승가상 - 남동신 자료-
 
▼ 약사전 약수(藥水)는 세종대왕 왕비의 질병을 치료했다 하여 찾는 분이 많습니다. 저도 몸과 마음이 병들지 말고 아프지 않도록 생수병에 약수를 담아 왔습니다.
 
 
▼ 안내판
 
▼ 가양심신(可養心神)
약사전 앞의 바위글씨 '가양심신(可養心神)' 으로 마음을 수양하기에 좋은 명당길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승가사 성지 -일붕 서경보 스님-
 
 
▼사라진 장수옥불(長壽玉佛)
 
다산 정약용의 <승가사를 지나며>라는 시에 "용사(龍師)가 북으로 가자 큰 비석이 우뚝하고, 옥불이 동으로 오니 보전(寶殿)이 드높구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뜻인즉, 신라 진흥왕의 군대가 백제의 영토인 한강 일원을 점령하고 북방으로 진출하면서 승가사 위쪽, 오늘날의 비봉에 북한산순수비를 세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조선 정조 때 청나라 황제로 부터 받은 옥으로 만든 불상이 들어왔는데 이것이 승가사에 안치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산이 승가사를 방문했을 당시 승가사에는 청나라 황제가 하사한 장수불이라는 옥불이 있었는데 장수전(長壽殿)은 바로 그 옥불을 안치하기 위해 새로 지은 전각이지요. 사연은 효의왕후와의 사이에 자손이 없었던 정조는 나인 출신인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마침내 문효세자를 얻습니다.
 
1782년 9월의 일이니 정조의 나이 31세 때 일로 의빈성씨는 더구나 정조를 15년 동안이나 애타게 만든 여인이었으니 아들을 얻은 기쁨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만 22개월째인 1784년 7월 세자책례를 올리니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 책봉에 해당합니다.
 
자손이 없던 조선 정조가 아들을 낳아 세자 책례를 올린다는 사실을 안 청나라 조정에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지요.
 
 
"황제(皇帝)는 9월 26일 원명원(圓明園)에서 돌아와 명하기를, ‘특별히 정사(正使) 서명(西明)과 부사(副使) 아숙(阿肅)을 임명하고, 이어서 빨리 길을 떠나도록 하라. 모든 예물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함부로 받지 말아서 짐이 동번(東藩,조선)을 애휼(愛恤,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품)하는 지극한 뜻을 본받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조선에서 제후의 법도를 각별히 지켜온 것에 대하여 짐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번에 내려 주는 것은 의당 특별한 예물로써 짐의 뜻을 표시하고, 겸하여 장수(長壽)하기를 기약한다. 내고(內庫)로 하여금 봉지(奉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상(加賞)하는 별단(別單)을 뜯어 보았더니, 대전(大殿)에게는 옥여의(玉如意) 1병(柄), 편금(片金) 2필(匹), 금단(錦緞) 2필, 대채(大彩) 2필, 장융(漳絨) 2필, 대단(大緞) 2필, 영주(寧紬) 2필, 홍양전(紅洋氈) 1판(板)이었고, 세자궁(世子宮)에게는 장수 옥불(長壽玉佛) 1존(尊), 옥여의 1병, 호필(湖筆) 2갑(匣), 공묵(貢墨) 2갑, 흡연(歙硯) 2존, 견전(絹箋) 12속(束), 옥삽 화기(玉揷花器) 1건(件), 금단(錦緞) 4필, 이단(裏緞) 4필, 사라(紗羅) 4필이었습니다." -1784년 11월 조선왕조실록 정조편 -
 
 
<일성록> 1784년(정조 8) 12월 24일 조에 정조와 영의정 서명선의 대화가 나옵니다.
 
청나라에서 보내온 옥불의 처리 문제에 관한 것으로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청나라 황실에서 보내온 옥불을 아무리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도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터, 정조는 마침내 예전부터 왕실의 원찰로 명성이 높았으나 장희빈 때 무충의 옥으로 인하여 폐사가 되다시피 한 승가사를 중건하여 옥불을 안치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옥불은 오늘날의 미얀마 산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조공된 것이었으며 청나라 황제는 이를 다시 문효세자를 위한 장수불로 하사한 것이지요. 어쨌거나 폐사 직전의 승가사는 청나라 황실에서 하사한 옥불의 안치소로 으리으리하게 중건되었고, 여기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이 바로 성월당대선사로 현재도 승가사에는 성월당대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남아있습니다.
 
아무튼 당시 승가사는 이 미얀마 산 옥불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며 1785년 승가사를 방문하여 이 광경을 목격한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의 시를 보면 이 같은 사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수전(長壽殿)은 몇 백 척 높이의 층층대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단청이 얼마나 화려한지 사람의 눈길을 빼앗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 내부에는 천정에 황금 구슬을 아로새겼고 한 쌍의 침향등과 술 장식을 드리웠으며 황제가 하사한 시가 적혀 있고 그 아래 유리로 된 상자 안에 옥불이 안치되어 있다고 했다. 구경꾼이 얼마나 많은지 흡사 시장바닥처럼 시끄럽다고도 했다."
 
이곳을 방문한 성균관 유생이며 문체반정으로 유명한 이옥(李鈺, 1760~ 1815)도 장수불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당시 장수전이 장안의 기도처로 또 유람지로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황실의 기대와는 달리 문효세자는 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무덤은 원래 효창공원 자리였으나 서삼릉의 효자원으로 옮김)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단명한 세자가 되고 말았으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입니까? 오늘날 장수전은 흔적도 없고 유리갑 속에 들어있다는 장수불 또한 그 행방이 묘연합니다. -오마이 뉴스-
 
 
▼중국 상해 옥불사 옥불상(玉佛像)
 
 
출처: 조선왕조실록, 오마이뉴스,민족문화대백과, 서울시,네이버지도,구글, 네이버,다음,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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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