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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면 향토사 (2018)null 2018.07.11. 17:21 (2018.07.11. 02:38)

제18장 국립나주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國立羅州博物館, Naju National Museum)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속기관이다. 2013년 9월 3일 발족하였으며 2013년 11월 22일에 개관했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고분로 747에 위치한다.
 
‘발굴 100주년’ 국보 295호 나주 신촌 금동관 국제학술대회
 
전남 나주시와 국립나주박물관은 2017년 11월17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박물관 강당에서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재조명’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신촌리 금동관’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12월 23일 조선총독부 조사원 야스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조선인을 동원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했다. 이 유물은 전남지역 영산강 고대문화의 상징물이지만 일제강점기 암흑기에 발굴됐다는 사실이 약점이 돼 그동안 고고학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나주시 등이 특별전 ‘신촌리 금동관, 그 시대를 만나다’와 연계한 학술대회를 열고, 금동관의 고고학적 가치를 집중적으로 살피고 그동안 연구 성과를 소개했다. 학술대회 1부 ‘신촌리 금동관과 동북아시아의 금관·금동관’에서는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기조강연 ‘나주 신촌리 금동관 발굴의 의의와 100년의 발자취’를,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1917년 나주 반남면 고분 발굴이야기’로 일제강점기 신촌리 9호분의 발굴과정을 회고했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과 마한 정치체제의 성격’을 주제로 한 2부에서는 한반도 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금동관인 신촌리 금동관의 제작기법, 장식문양의 조형성과 그 의미 등을 짚고, 한반도 내 다른 지역 금동관들과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그 의미도 살펴보았다.
 
국립나주박물관 관계자는 “금동관 발굴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전남지역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신촌리 금동관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남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과 장식대도
 
이 시기 옹관무덤은 고분(高塚)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게 되었지만 초기부터 유지되어 왔던 다장제(多葬制)의 전통이 남아 있어서 추가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고분형태도 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원형, 타원형, 제형 등이 계속 나타나지만 나주 신촌리 9호분과 같은 최상위의 고분은 방대형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옹관은 고분의 정상부에만 옹기종기 모아 안장하였는데, 좁은 면적을 극복하기 위해 분구를 덧쌓은 후 옹관을 추가장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 시기 옹관고분에서 주목되는 점은 위세적인 유물과 함께 백제계, 왜계 유물의 빈도가 급격히 늘어난다는 점이다.
 
또한 일본의 하니와와 유사한 원통형토기로 분구를 장식하는 새로운 묘제요소도 나타나며, 꺽쇠와 같은 쇠로 결구한 목관의 요소, 즉 백제적인 요소도 일부 확인된다. 이 시기에는 규모상으로나 밀도상으로나 신촌리 9호분을 대표로 하는 나주 반남지역이 최고 정점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변지역, 특히 나주 왕곡, 동강, 이창동, 무안 몽탄 등 영산강 강남이나 강서일대는 고분 크기의 제약을 받았던 듯 하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분은 분구의 규모가 훨씬 작다.
 
영산강유역의 고대사회 이정호(​동신대학교 교수)
 
 
 
 
 
한국 목간 발굴현황
 
중국은 2세기초 채륜蔡倫이 제지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이전부터 종이가 대중화된 이후에도 죽간竹簡(대나무)과 목독木牘(나무)을 사용하여 왔는데, 확인된 예가 수십만 점에 달한다. 이웃 일본은 백제의 박사博士 왕인王仁과 그 이후의 활발했던 한반도와의 교류를 통해 문자와 목간이 전달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630년대의 것이 대체로 가장 오래된 목간에 속하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말까지가 목간의 최성기最盛期이다. 모두 35만 여점(글자를 나무에 썼다가 재활용하기 위해서 깎아내어 묵서가 확인된 부스러기 목간削屑木簡 포함)에 달하는 목간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목간이 일본에 비해 적은 이유는 목간의 보존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토양의 성질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 외에는 마땅한 사료가 없는 한국고대사 그중에서도 백제의 사료는 매우 빈약하다. 따라서 백제의 역사 규명과 복원을 위하여는 새로운 목간의 출토가 가뭄 끝의 단비 같은 해결책이요 백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부문에 대한 신연구의 지평을 여는 장을 마련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의 성격
 
이와 같은 상황에서 2008년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의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주변 유적에서 31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31점의 목간은 직경 5.6m, 깊이 4.8m에 달하는 대형의 원형으로 된 수혈(웅덩이) 유구에서 솔방울·밤·살구씨앗·동물 뼈·멍에형태의 목기木器 등과 같은 유기물에 속하는 유물을 비롯하여 백제의 금동제 귀걸이金銅耳飾·선문기와線文瓦·토기·숫돌 등과 함께 일괄로 출토되었는데, 일괄 출토품이라는 점에서 고고학적으로는 더욱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이들 공반유물共伴遺物은 목간과 함께 7세기 초初대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또한 같은 유구는 아니지만 바로 곁에서 백제시대에 유행했던 토제土製의 벼루가 여러 점 출토되어 이 지역에서 목간을 작성했던 것임을 알려주는 유물도 발견되었다. 31점의 목간 중 묵서가 잘 남아 있어 판독이 가능한 목간은 13점이며, 우리나라 목간 출토 유적 중 가장 많은 목간이 출토된 것은 아니지만 목간의 형태나 용도별로 분류해 보았을 때 가장 다양한 목간들이 출토된 점이 괄목할 만한 성과이다. 형태나 묵서 판독의 결과로 보면, 문서목간, 꼬리표목간付札木簡, 봉함목간封緘木簡, 다면목간多面木簡, 습자목간習字木簡 등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목간의 여러 형태가 다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발견된 예도 적지 않다. 목간의 다양한 형태만으로도 국내 학자는 물론, 일본의 목간 전문가들도 매우 놀라워하고 부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우선, 목간 중 길이 60.8㎝, 너비 5.2㎝, 두께 1㎝의 크기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목간 중 가장 길고, 가장 큰 목간이 있어 주목된다. 이 목간에는 총 57자의 묵서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묵서 내용 중 ‘수미지受米之’, ‘공지貢之’ 등이 있다. 이는 지방 관청에서 공납과 그 과정을 기록한 행정문서 목간으로 판단된다.
 
한편, 국내에서 최초로 출토된 봉함목간(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일컫는 용어이고, 중국에서는 ‘검檢’ 또는 ‘봉검封檢’이라 부른다)은 주로 관청에서 문서나 물건을 운송하는데 사용되는 목간의 한 형태로 봉투의 기능 또는 기밀을 요하는 문서 꾸러미나 물건을 우송할 때 쓰이는 것이다. 또, 백제의 촌村 명칭과 함께 촌락의 실상을 전해 주는 촌락문서격인 목간이 처음으로 확인되어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향후 백제 촌락사 연구의 새 장을 열기에 충분한 자료라 판단하고 있다. 묵서에는 ‘대사촌大祀村’이라는 촌락의 인명·가축의 실태와 ‘수전水田’·‘백전白田’·‘맥전麥田’ 등의 토지 경작형태와 ‘형形’이라는 토지 단위 및 ‘72석石’등의 소출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출토 목간의 내용과 용도
 
이외에 일반적인 목간의 형태가 아니고 주걱형태인 목간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목간으로 사용하다가 용도가 폐기된 이후 별도의 목기木器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목간에는 백제 사비시기 도성都城 편제編制 단위인 ‘항巷’과 백제 고위 관등인 ‘덕솔德率 4등급’, ‘한솔率 5등급’, ‘나솔奈率 6등급’을 가진 인명이 적혀 있어 백제의 중앙정부와 영산강 유역이라는 지방세력과의 정치·사회적 맥락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겠는데,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泗 즉 부여가 아닌 지방에서 귀족계층의 관등명이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이다.
 
양면묵서가 되어 있는 또 다른 목간의 한쪽 면에는 ‘병지幷之’라고 쓰여져 있는데, ‘之’는 ‘~하다’라는 백제의 이두식 표현으로, 이두가 이미 백제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또한, 백제시대의 지명(‘군나軍那’ : 또는 ‘굴나屈奈’·‘굴내屈乃’로 표기, 지금의 전남 함평)과 행정편제 단위인 ‘州’가 기록된 목간 외에도 ‘도道’, ‘의衣’, ‘호乎’ 등의 글자를 여러 번 썼다가 다시 쓴 소위 습자목간 1점과 여러 면에 글씨를 쓰게 되어 있어 ‘고’라고 형식분류하여 부르는 다면목간(4면목간) 3점이 출토되어 흥미롭고 목간 종류의 다양성을 더해 주고 있다.
 
영산강 고대문화권역의 중심지인 나주에서 목간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백제의 도성都城이 아닌 지방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문헌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내 최대·최장 목간, 최초의 봉함목간, 백제사 최초의 촌락명이 기록된 촌락문서村落文書의 발견, 백제 토지 경작의 형태, 토지 단위(조선시대의 ‘결結’과 같은 토지 면적 단위로서 백제에서는 ‘형形’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 및 단위당 소출량, 지방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관등명官等名이 묵서된 목간 등은 한국 고대 정치·사회·경제·문화·농업·생활사 연구 분야에 획기적 자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다종다양한 형태와 풍부한 묵서 내용을 지닌 나주 복암리 목간은 국내외 목간 연구는 물론, 이두 연구 등 국문학사 연구에도 더없이 소중한 자료이다.
 
가장 오래된 백제 태극문양 발굴
 
한편, 31점의 목간과 함께 3점의 묵흔이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중 2점은 태극문양이 선명한 목제 장식품으로 1쌍을 이룬다. 우리나라 국가상징물 중 하나인 ‘태극기’의 원형이랄 수 있는 태극문은 682년에 건설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경주慶州 감포甘浦의 감은사感恩寺 터에 지금도 남아있는 장대석長大石의 태극장식 문양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하여 왔었다. 금번, 7세기 초경의 태극문양이 있는 이 목제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태극기의 원조 문양은 이제 70여년을 앞당겨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된 셈이다.
 
태극문은 『주역周易』과 관련되었고, 후에 도교적道敎的 신앙의 소산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 백제의 중앙 왕실에서 신앙했던 불교와는 대비되게 영산강의 본류 중 중류지역의 거점 및 중심도시로서의 나주와 그 일대 세력집단·주민들의 종교에 대한 일단면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부언하면, 백제는 일찍이 침류왕대에 불교를 수용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도교도 수용하였음은, 수도 부여에 궁남지宮南池를 축조할 때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조성했다’거나 국보 제287호인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扶餘陵山里出土百濟金銅大香爐’에 표현된 신선사상 등으로 미루어 백제에 도교적인 신앙관습이 만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적극적 증거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전라북도 익산지방의 이남에는 백제의 사찰유적이 전무한데, 이는 관련 학계의 숙제 중 하나였다. 익산지방에 있는 ‘미륵사彌勒寺’, ‘제석사帝釋寺’ 등 백제의 불교사원 유적을 남방한계南方限界로 하여 이상하게도 그 이남지방에는 종교관련 유적이 확인되지 않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대사회에서 지금의 호남지역에 살던 고대인들은 종교나 신앙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인가?’ 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그 숙제중 하나를 풀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된 유물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금번 목간과 태극문양의 목제 유물의 출토는, 마한馬韓의 고토故土 지역 즉 후에 백제에 편입·융화된 영산강유역 지방의 잃어버린 역사를 일부나마 문자기록과 문양을 통해 처음으로 찾을 수 있게 해준 뜻깊은 의의가 있다고 정리해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들 유물은 나주 복암리 일대가 지금의 호남지역을 아우르는 백제의 지방거점 지역으로서 당시 농업과 산업 등 경제적 물류 집산지였음은 물론, 정치·사회·문화적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장을 마련한 국보급 문화유산이라 생각하고 있다.
 
글·사진 | 김성범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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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