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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운수지 (2012)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2018.08.05. 21:08 (2018.08.04. 10:25)

12. 충・효・열(忠・孝・烈)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중에서 뽑아 적었으며, 그 밖에는 모두 유사(有司)가 수집한 단자(單子)에 따랐다. / 1) 충절편(忠節篇) * / 박순달(朴順達) /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군자감(軍資監) 참봉벼슬을 지냈는데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목   차
[숨기기]
 

1. 운수지 상(上)

 

1.1. 12. 충・효・열(忠・孝・烈)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중에서 뽑아 적었으며, 그 밖에는 모두 유사(有司)가 수집한 단자(單子)에 따랐다.
 
 
1.1.1. 1) 충절편(忠節篇) *
* 원문 153쪽 참조.
 
박순달(朴順達)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군자감(軍資監) 참봉벼슬을 지냈는데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이었던 훈(薰)의 손자인데 어릴 때부터 정직하 고 바르고 엄숙하였으며, 성격이 호쾌(好快)하고 큰 절조(節操)가 있어 공명(功名)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1537~1593) 공이 그를 한번 보고는 예로써 존중 하였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과는 이종형제인데 임진왜란 때 김 천일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년(1597) 8월 25일에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하여 죽었다.
 
홍석방(洪碩舫)
남양(南陽)홍씨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있고 영리하여 구두점(句讀點)을 찍 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호조좌랑을 역임하고 원주(原州)목사 에 이르렀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스스로 절조(節操)를 지켜서 흔들리지 아니하였 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서쪽 의주로 거둥할 때 공(公)이 멀리서 절하고 상소 를 올렸으며, 종이와 면포(綿布) 등의 물건들을 손우경(孫宇慶)에게 주어서 행재 소(行在所)21)에 바치게 하니, 선조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가선(嘉善) 의 품계를 주었으며, 손우경에게는 4품직(品職)을 주었다. 손우경은 또 집안 노복 (奴僕)들을 시켜 군량을 제봉 고경명의 진중(陣中)에 전하였다. 갑오년(1594)에 공의 나이 87세로 세상을 마쳤다.
 
이두연(李斗然)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아호는 정리당(靜履堂)이다. 시호가 문효(文孝)이고, 아 호가 국당(菊堂)인 천(蒨)의 11대손이며, 참판에 증직된 서계(西溪) 위(緯)의 아들 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門人)으로서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갑자란(甲子亂) 때 인조 임금이 공주(公州)로 거둥하 였는데 공(公)이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1554~1632)과 힘을 합하여 난을 토평(討平)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에는 운 암(雲巖) 이흥발(李興渤:1600~1673) 등 여러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의병을 모 아 북진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임실의 성수산(聖壽山) 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한 구역을 스스로 명(明)나라의 천하로 정하고, 이후로 달력(역서:曆書)을 보지 않고 꽃잎으로 계절 (季節)을 확인하였다. 을유년(1645)에 세상을 떠났는데 심상(心喪)22)의 표시로 갓 에 삼베를 두르고 영구(靈柩)를 따른 사람이 100여 명이 되었으며, 죽었다는 소식 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였다고 창의록(倡義錄)에 보인다.
 
송경원(宋慶元)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호(號)는 둔학(遯壑)이며, 정열공(貞烈公) 송송례(宋松禮:? ~ 1289)의 6세손이다.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바가 컸다.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날 때 공(公)은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는데, 공의 재종형인 충강공(忠剛公) 간(侃)과 속세를 떠나 자취를 감추고 한평생을 보 내면서,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는 매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단종(端宗)이 세상을 떠나자 통곡하 고 백이봉(伯夷峰) 아래에 숨어 살았다. 신안서원(新安書院)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곽 도(郭 都)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호(號)는 노재(魯齋)이며, 포산군(苞山君) 부(郛)의 후 손이다.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청백(淸白)하다는 이유로 도승지에 승직 (陞職)되었다. 단종(장릉:莊陵)이 왕위에서 물러날 때 6신(六臣)과 울면서 작별하 고 감악산(紺嶽山)으로 물러나 숨어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다. 매양 소쩍새가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북녘을 향하고 통곡하였으며,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아니하고 남으로 내려와서 임실의 노산(魯山)에 머물면서 생도들과 경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오수면 주천리 삼계사(三溪祠)에 배향되어 있다.
 
조 평(趙 平)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호(號)는 운학(雲壑)이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장령 (掌令)을 역임한 순세(舜歲)의 아들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인(門人)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세마(洗馬)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때마다 모두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남원의 교룡(蛟龍)산 성으로 들어가 많은 왜적들을 섬멸하였다.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과 제 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의단(義壇) 및 700 의총(義塚)을 금산(錦山)에 축조하였다.
갑자년(1624)의 난(이괄의 란) 때 천묵(天黙) 이상형(李尙馨:1585~1645), 후촌 (後村) 윤전(尹烇:1575~1636) 등 여러 사람들과 태자(太子)를 호위하고 전주(全州)에 이르렀다. 병자호란(1636) 때에는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渤) 등 여러 동지 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상소를 올려 강화를 배척하고 세 상의 일을 완곡히 거절하였다. 앉을 때 서향(西向)을 하지 않았으니 청(淸)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는 고결한 지조가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공(公)의 죽음을 애석 하게 여겨 지평(持平)에 임명하고 교지(敎旨)에 특별히 숭정(崇禎)의 연호를 써서 명(明)나라 황실을 존중하는 의리를 밝혔다.
 
한응성(韓應聖)
한응성(韓應聖:?~1592)은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귀와(龜窩)이며, 청 성(淸城) 종손(終孫)의 현손(玄孫)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의 문인(門人)으로서 임진왜란 때 집안의 노복 수십 명을 거느리고 군중(軍中)으로 달려가서 책략(策略)을 자세히 진술하니, 한응성이 매우 기이하고 장대(壯大)하게 여겼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공(公)이 선봉(先鋒)이 되어 분격(奮擊)하여 10여 명의 적의 목을 베었으나, 적군의 포위가 매우 급박하여 700여 명의 의사(義士)들과 함께 순 절(殉節)하였는데, 노부(奴夫) 협(協)이 시체를 거두어 돌아가서 장사를 지냈다.
임진년(1592) 이후 누차 증직(贈職)하여 벼슬이 이조참의 겸 시강원(侍講院) 보 덕(輔德)에 이르렀으며, 정려(旌閭)를 세우고 그 앞에 충성스런 노부(奴夫) 협(協) 의 비를 세웠다. 참의(參議) 양주익(梁周翊)이 행장(行狀)을 짓고 노사(蘆沙) 기 정진(奇正鎭:1798~1879)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곽흥무(郭興懋)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호(號)는 반송당(伴松堂)이며, 청백리(淸白吏) 도(都)의 5세손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1534~1598)의 문인(門人)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양(梁)・박(朴) 두 장사(壯士)와 함께 집안의 노복(奴僕) 70여 명을 거느 리고, 군량(軍糧) 수백 곡(斛)을 운반하여 의주 용만(龍灣)으로 달려갔다. 선조 임금이 불러들여 만나보고는 매우 칭송하고 첨정(僉正) 벼슬을 주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23)에 기록하였다.
 
곽유번(郭維藩)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호(號)는 오암(鰲巖)이며, 노재(魯齋) 도(都)의 7세손으 로서 수직(壽職)24) 통정대부직(通政大夫職)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 을 일으켜 여산(礪山)에 이르러서 호소사(號召使) 기옹(畸翁) 정홍선(鄭弘宣)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중히 여기게 되어 함께 화성(華城)에 도착하였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각자 통곡하며 돌아갔다. 공(公)은 분하 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말을 타고서 시를 지어 가슴에 품은 생각을 밝혔다. 삼계사(三溪祠)에 배향하였다.
 
오변하(吳變夏)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號)는 귀휴정(歸休亭)이며, 이조참판을 지낸 오안기 (吳安紀)의 아들이다. 현감(縣監)을 지냈다.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그 날로 관직을 자진 사퇴하고 임실의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매일 밤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임금이 지은 시를 외우며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심곡사(深谷祠)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오정엽(吳廷曄)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는 수암당(守巖堂)이며, 귀휴정(歸休亭) 오변하(吳變夏)의 5세손이다. 여절교위(勵節校尉)25)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서귀(西歸) 이기 발(李起渤)과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코자 하였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 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심곡사(深谷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윤은주(尹殷柱)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는 일헌(逸軒)이다.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5세손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성균관 거재유생(居齋儒生)으로 공부하던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순변사(巡邊使) 윤섬(尹暹:1561~1592)과 4월 25일에 선조(宣祖) 임금을 의주까지 수행(隨行)하는 데 공로가 많았으므로 2등 공신에 녹훈(錄勳) 하고 특별히 건원릉(健元陵) 참봉에 임명하였으나 임실군 상동면으로 내려왔다.
 
심 도(沈 棹)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로 사복시정(司僕侍正)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임실 상 동면(上東面) 관전리(官前里)에 자리를 잡아 거처하였다.
 
이성임(李聖任)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이조참판에 증직(贈職)된 인홍(仁弘)의 아들이다. 무과 출신으로 군수를 지냈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여묘살이를 하였다. 선조(宣祖) 임금 때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었다. 청도(淸道)군수로 재직할 때에 어머니가 돌 아가셨는데 이때 왜적이 제멋대로 날뛰었음으로 마침내 상중(喪中)인데 벼슬길에 올라 전쟁터로 나아가서 곽재우(郭再祐:1552~1617) 등 여러 동지들과 의거(義擧) 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선조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청풍당(淸風堂) 3자(字)를 내렸다.
 
오 성(吳 誠)
본관(本貫)은 함양(咸陽)이다. 선전관(宣傳官)의 신분으로 계사년(1593)에 군 대를 거느리고 곧장 진주(晉州)로 달려가서,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1554~1593)와 서로 협력하여 왜적에 항전(抗戰)하다가 성이 함락될 때 함께 죽었다.
 
김익룡(金翼龍)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웅치(熊峙)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즉시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는데 수문장(守門將)에 임 명되었다.
 
박내성(朴乃成)
본관은 양(密陽)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의 왜적을 대파(大破)하여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홍우경(洪宇慶)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석방(碩舫)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 행재소(行在所)까지 수행하였으며, 정유재란(1597) 때에는 미곡(米穀)을 소모사 (召募使) 이정란(李廷鸞:1529~1600)의 진중(陣中)에 운송(運送)하였다.
 
최응숙(崔應淑)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 하던 때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할 때 화양(化陽)까지 수행 하였다. 왜란이 평정되고 공로를 논하여 상을 주는 날에 3등 공신에 기록되었으나 그 뒤로 세상을 피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순길(李順吉)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병조판서에 증직(贈職)된 성임(聖任)의 아들이다. 하늘 로부터 타고난 지극한 효자로서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죽을 마셨고 여묘(廬墓)살 이를 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때 논밭을 팔아서 병기를 준비하여 황정직 (黃廷稷)과 함께 군진(軍陣)으로 달려가다가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참찬(參贊)에 증직되었다.
 
이흥발(李興渤)
이흥발(1600~1673)은 본관이 한산(韓山)이다. 1636년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서울을 침범하였다. 이때 이흥발이 옥과(玉果)현감으로 있다가 남한산성의 방어가 위급하다는 소문을 듣고 동생 이기발(李起渤:1602~166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주(淸州)에 이르러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돌아와 운암(雲巖)에 숨어 살았다.
 
이득환(李得寏)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뒤에 신평면 대리에 남애사(南涯祠)를 짓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응무(金應武)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1624년의 갑자난 때 인조(仁祖) 임금을 등에 업고 공주(公州)까지 수행하였다. 인조가 말하기를 “공신 60여 인 모두 마음속으로 계산만을 하니 김응무의 공이 이서(李曙:1580~1637)의 공보다 못하지 않다.” 하였다. 인조가 지은 두 구(句)의 시(詩)에 이르기를 “하늘이 김응무를 이 땅에 내어, 나라의 중임을 맡은 내 신하로 삼았네.” 하였다. 판윤(判尹)을 증직(贈職)하였으며,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기록 하였다.
 
조 위(趙 頠)
본관은 순창(淳昌)이다. 1636년의 병자호란 때 이기발(李起渤)이 전라도 내에 의거를 알리는 격문(檄文)을 전파한다는 소식을 듣고, 종질(從姪) 극겸(克謙)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과 군량을 모아서 집안의 노복들을 거느리고 즉시 여산 (礪山)으로 달려갔으나, 강화가 이루어졌음을 알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별제(別提)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신 개(申 漑)
신개 충효비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의 문인(門人)이다. 임진란 때 임금 을 수행(隨行)한 공로가 있어 좌찬성에 증직되었 으며, 시호를 무순(武純)이라 하였고, 평원군(平原君)에 봉(封)하였다. 순조(純祖) 왕조에서 정려 (旌閭)를 내렸다.
 
유후수(柳厚壽)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문희공(文僖公) 창(敞:?~1421)의 후손이다. 1624년 갑자난(이괄의난) 때 집안의 노복(奴僕) 1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근왕(勤王)하여 완산(完山)에 이르러, 전라도 순찰사 완백(完伯)을 만나서 얘기하는 중에 말이 시사(時事)에 미쳤는데, 순찰사가 유후수의 창의(倡義)를 장열(壯烈)하게 여기고 삼영도훈도(三營都訓導)의 직임을 맡겼으므로, 드디어 군대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에 이르렀을 때, 난(亂)이 평정되었음을 알고 가지고 있던 모든 군량을 순영(巡營)에 바쳤다. 이 일이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자 유후수는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에 임명되고, 의병 10여 명에게는 모두 호역(戶役)26)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집 에 돌아온 뒤에 모두에게 노비(奴婢) 신분을 면제하여 주었다.
 
황태형(黃兌亨)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임진왜란 때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휘하(麾下)로 달려가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조원개(趙元凱)
본관은 순창(淳昌)이다. 기자전(箕子殿) 참봉으로 있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의 두목에게 적진(賊陣)으로 잡혀가서 쇠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당하였지 만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3일 동안을 피를 흘리다가 마침내 죽었다.
 
김초백(金招栢)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기록되어 있다.
 
김 삼(金 參)
계사년(1593)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최 필(崔 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금산(錦山)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춘발(李春發)
의주까지 선조 임금을 수행하였으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실직(實職)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임명되었다.
 
진종립(晉宗立)
1636년 병자호란 때 장사(壯士) 수십 명을 거느리고 수원(水原) 광교(廣橋)로 달려가서 전라감사 김준룡(金俊龍:?~1641)과 함께 산 위에 성책(城柵)을 구축하 고 청나라 장수를 사살하였다. 이로 인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
 
조극겸(趙克謙)
1636년의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는데 여산(礪山)에 이르러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김사종(金士宗)
병자호란 때 광계산(光溪山)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김효남(金孝男)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임금을 수행하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문임축(文任軸)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임금을 수행하고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어모장군훈련원첨정(禦侮將軍訓練院僉正)에 증직되었다.
 
엄대일(嚴大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임금을 수행하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희례(李希禮)
1624년 갑자란(이괄의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였다. 임금으로부터 지 팡이와 신을 하사받았다.
 
이일주(李日柱)
1624년 갑자 난에 세자가 전주(全州)로 내려갈 때 달려가 수행하였다.
 
강 열(康 說)
영조(英祖) 4년 무신년(1728)의 정희량(鄭希亮:?~1728)의 난 때, 좌수(座首)로 서 자원(自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팔량치(八良峙)에 이르러서 난이 평정되었음 을 알고 돌아왔다.
 
이태환(李台煥)
무신년(1728)의 정희량의 난 때 천총(千摠)으로서 자원하여 팔량치에 이르렀으나 난이 평정되었음을 알고 돌아왔다.
 
황우경(黃友瓊)
무신년(1728)의 정희량의 난 때 파총(把摠)으로서 이태환(李台煥)을 따라서 팔량치로 달려갔다가 돌아왔다.
 
이맹욱(李孟郁)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27)때 의병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 군진(軍陣)으로 달려갔다.
 
심필원(沈弼遠)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경학(經學)에 밝고 예법을 배워서 고을의 기강(紀綱)을 바로 세웠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28)으로 고종 임금이 피난(避難)할 때, 경기도 관찰사 심상훈(沈相薰:1854~?)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33명을 거 느리고, 즉시 북관왕묘(北關王廟)에 이르러 임금을 옆에서 모시고 경호하였다. 다음 날 임금이 환궁(還宮)한 뒤에 특별히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머리가 흰 빈한한 선비가 나라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니 이 같은 충성과 굳은 지조는 세상 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하였다. 그 뒤에 원릉(元陵) 참봉에 임명하였다.
 
김성철(金星澈)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진년(1880)의 양요(洋擾)에 앞장서서 자원하여 서울로 올라갔으나 일이 잠잠해졌으므로 싸워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송도남(宋道南)
병인년(1866) 가을에 서양의 적(賊)들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즉시 순무사(巡撫使)의 진중(陣中)으로 달려가서 공로를 세웠다. 그 뒤에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 벼슬을 주었다.
 
앞에서 충신(忠臣) 절사(節士)들을 빠짐없이 베껴 썼으며, 효자, 열녀 또 한 차례대로 기록한다.
 
 
1.1.2. 2) 효행편(孝行篇)*
* 원문 161쪽 참조.
 
박 번(朴 蕃)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인덕정(仁德亭)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문인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어버이 병환에 대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症勢)를 시험하였고, 또 들오리를 잡수기를 원하는데 추운 겨울 이라서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냇가에서 울부짖으니 죽은 오리가 물 위에 떠올라 서 가져다가 요리를 해서 드렸다. 중종 임금 때 정려(旌閭)를 허락하였으며, 학정 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다.
 
박 훈(朴 薰)
인덕정(仁德亭) 박번(朴蕃)의 종제(從弟)로서 호(號)는 수심재(收心齋)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문인으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중종(中宗) 14년 기묘년(1519)의 사화(士禍) 때 화(禍)를 당하였다.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환갑(還甲)이 되어서 소급하여 상복(喪服)을 입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중종 임금 때 정려(旌閭)를 허락하였으며,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이 경(李 經)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반우당(飯牛堂)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따랐고 상중(喪中)에는 예를 지키고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집 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두 동생 위(緯)와 강(綱)과 서로 사랑하였는 데 늙어가면서 서로 돈독하였다. 집 밖으로 나가고 들어올 때면 반드시 사당(家廟)에 절하고 빌었으며, 어버이 제삿날[忌日]이면, 비록 추운 겨울이라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어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였는데, 나이가 80세가 되어도 오히려 게을 리하지 아니하였다.
 
이 위(李 緯)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호는 서계(西溪)이며 반우당(飯牛堂) 경(經)의 아우이다. 항상 소학(小學)을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았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도 와 사랑이 매우 돈독하였다. 기축년(1589) 옥사(獄事) 때 뜻밖의 사화(士禍)를 입어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가서 멀리 어머니를 사모하며 산 고개에 올라 남녘을 바라보 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임진년(1592)에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끝내 과거 공부 를 그만두었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일 동안 한 작(勺)의 마실 것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으며, 3년간을 죽만 마셨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작산(雀山) 아 래에 터를 잡아 살았다. 예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문집 1권이 있다.
 
윤두표(尹斗杓)
윤두표 정려각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은담처사(隱潭處士)인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10대손이다. 그의 나이 겨우 7세 때의 일이다. 밤에 도적 떼들이 들어와서 공(公)의 어버이를 위협하자 공 (公)은 몸으로 가로막고 온몸으 로 칼을 받으며 죽기를 맹세하 고 피하지 않으니, 도적 떼들이 몹시 감탄하여 놓아주고 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하 늘이 낸 효자다.” 하였다. 관찰사(觀察使) 김만길(金萬吉:1645~?) 이 즉시 임금에게 아뢰어 정려 (旌閭)가 허락되었으니, 나이가 7살인 살아 있는 어린 아이의 정려(旌閭)란 세상 에 드문 일이다. 공(公)이 33세 젊은 나이에 죽으니 행장문(行狀文)에 이르기를, 은담공(隱潭公)이 다만 아버지가 있음을 알 뿐, 자기 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하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안연(顔淵)이 3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공(公) 역시 33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공(公)의 태어남이나 죽음이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문헌공(文獻公) 판서(判書) 윤행임(尹行恁:1762~1801)이 행장(行狀)을 짓고 공 (公)이 살던 마을 이름을 효촌(孝村)이라 하였으며, 지곡(芝谷) 진사 유조(柳組)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이국로(李國老)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죽천(竹泉)이며, 효령대군 보(補)의 6세손으 로 문음(門蔭)으로 참봉을 지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7세에 효경 (孝經)과 소학(小學)에 달통(達通)하였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하되 어버이의 마음과 몸을 받들어 봉양하였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정남사(征南祠)에 배향되었다.
 
심수인(沈壽寅)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풍산군(豊山君) 귀령(龜齡:1350~1413)의 10세손이다.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奉養)함에 효성이 극진하였다.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뜰에 손수 매화나무를 심었는데, 갑자기 말라 죽으니 말라 죽은 매화나무를 어루 만지며 슬퍼하고 탄식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3년 뒤에 매화가 다시 옛날과 같이 살아났다가, 수인(壽寅)이 죽자 뜰의 매화도 다시 죽었는데 한 가닥의 밝은 빛이 매화나무로부터 일어나서 하늘까지 빛을 비추자, 매화나무에서 싹이 다시 돋아났으니, 아마도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기운이 위로 하늘에까지 도달 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행동과 도의(道義)가 지극히 순수하고 재주와 학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후학(後學)들을 가르쳐서 사림(士林)들이 높이 고 우러러보는 바 되었으므로, 지방 현사(賢士)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선생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고, 오촌(梧村) 송치규(宋稚圭) 선생이 반매당(伴梅堂)의 호(號)와 서문(序文)을 써주었으며, 청풍(淸風) 김동헌(金東獻) 선생이 시집(詩集)의 서문을 썼다.
 
곽후태(郭垕泰)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호(號)는 청계당(聽溪堂)이며,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의 증손이다. 어버이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웃지 아니하였으며, 3년상을 마치고 복(服)을 벗은 뒤에도 그 해가 다하도록 향락에 빠지지 않았다. 집안의 제삿날이나 임금, 왕후의 제삿날을 당할 때마다 재계(齋戒)하고 고기반찬이 없는 밥(행소:行素)을 먹었다.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조예(造詣)가 매우 깊었다. 삼계사(三溪祠)에 배향하였다.
 
최진기(崔鎭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긍재(肯齋)이며, 고려왕조의 충신 칠석(七夕)의 후손으로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성장하여 아버지를 섬기는 데 온 정성을 다하였으며, 계모(繼母)를 받드는 데에 효성이 지 극하였으므로, 계모 역시 마음에 깊이 느끼고 깨달아 재산을 자녀들에게 분배할 때에, 진기(鎭紀)에게 후(厚)하게 하고, 자기 몸에서 낳은 자녀들에게는 그 다음으 로 하였다. 계모의 상(喪)을 당하여 예법을 준수하여 예절을 다하였고, 60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지나쳐 몸을 상하였으며, 죽을 마시며 아침저녁으 로 성묘하고 밤낮으로 여막에 엎드려 있어 처자식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정 남사(征南祠)에 배향하였다.
 
심갑현(沈甲賢)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호(號)는 화수정(花樹亭)이다. 공(公)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所任)으로 생각하였고, 일가 친족과도 친 하고 화목하였다. 항상 손에서 성리서(性理書)를 놓지 않았으며, 학문과 덕망 이 높은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문하에서 스승으로 섬기며, 연구하고 갈고 닦아서 심오한 의미를 분석하여 해석하였으며, 온화하고 부드러워 학문이 순수한 유학자의 기상(氣像)이 있었다. 일가 친족들과 함께 처음으로 누정(樓亭)을 짓고 화수(花樹)로 편액(扁額)을 걸었다. 성담 송환기선생이 특별히 당호(堂號)의 편액 을 썼으며,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선생이 중수기(重修記)를 지었다.
 
송시웅(宋時熊)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호(號)는 거묵당(拒墨堂)이며, 둔학(遯壑) 경원(慶元)의 8세손이다. 어머니를 위하여 냇물고기를 구하고자 하니 갑자기 잉어가 얼음 위로 뛰어나왔으며, 또 햇보리를 구하고자 하니 때가 아직 이른 봄인데 갑자기 한 움큼 의 보리가 저절로 누렇게 익었으므로 베어다가 어머니께 드렸다. 여묘(廬墓)살이 를 할 때에는 범과 표범이 굴을 옮겨갔으며, 뱀과 살모사가 멀리 달아나 숨었다. 신안서원(新安書院)에 배향하였다.
 
한필성(韓必聖)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만회당(晩悔堂)이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1403~1456)의 8세손이다. 어려서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익혀서 의 리(義理)의 학문에 밝았다.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 잘 섬겼으며, 어버이의 뜻과 건강을 받들어 봉양하였고, 두 번의 상(喪)을 당하여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 신안서원에 배향하였다.
 
최경성(崔景星)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희안재(希顔齋)이며, 긍재(肯齋) 진기(鎭紀)의 아 들이다.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받아 훌륭히 성취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喪) 을 당하여 6년간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고, 3년상을 마치고 복(服)을 벗은 뒤에 는 매일 새벽에 사당(祠堂)에 참배하였다. 정남사(征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한명유(韓鳴愈)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홍운정(鴻雲亭)이다. 어버이가 병환 중에 메추 라기와 꿩을 먹고자 하였으나. 때가 아니라서 울부짖으며 하늘에 비니 메추라기가 가랑이 밑으로 뛰어들고 꿩이 품속으로 들어왔다.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 (廬墓)살이를 하였으며, 냇가에 하나의 누정(樓亭)을 지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이름을 홍운정(鴻雲亭)이라고 지어 주었다. 신안서원(新安書院)에 배향 하였다.
 
최익성(崔翼星)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귀호(龜湖)인데 희안재(希顔齋) 경성(景星)의 동생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능히 아버지의 효심(孝心)을 본받아 서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6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 복(服)을 벗은 뒤에는 매일 새벽 사당(祠堂)에 참배하였다. 정남사(征南祠)에 배 향하였다.
 
유이항(柳以亢)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낙봉(駱峯) 유헌(柳軒:1462~ 1506)의 7세손이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봉양(奉養)하며, 온화하고 친애(親愛)하는 도리를 받들어 순종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였다. 어버이 상(喪)을 당하여는 한결같이 상례제도(喪禮制度)에 따 랐으며, 자신의 생부모에게도 또한 지극한 효도를 하였다.
 
윤 수(尹 琇)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영모재(永慕齋)이며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증 직되었는데, 호(號)가 은담처사(隱潭處士)이며 정려(旌閭)를 명(命)받은 두표(斗杓)의 조카이다. 아버지의 병환이 매우 심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4일간 생명을 연장하였다. 항상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을 한스러워하여 추후 (追後)에 3년 동안 복(服)을 입었다. 녹동(鹿洞) 임성주(任聖周:1711~1788) 선생 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이르기를 “호남(湖南)의 원기(元氣)가 한 집안에 다 모였 다.” 하였다.
 
양복주(梁復澍)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주운(朱雲)의 후손이다. 그의 어버이가 병에 걸려 피를 토(吐)하는 증세가 매우 심하였으므로 널리 약을 구하였 는데, 메추라기 한 마리가 옷소매 속으로 날아들었으므로 달여 드렸더니 효과가 있었다. 또 어버이가 종기를 앓으니 밤낮으로 농(膿:고름)을 입으로 빨았다. 그의 아내 박(朴)씨도 남편의 방법을 따라서 변(便)을 맛보고 고름을 빨면서 함께 상의 하며 돌보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시니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
 
송석옥(宋石玉)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둔학(遯壑) 경원(慶元)의 8세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하게 하였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아니하였으며, 3년상을 마치고 복을 벗은 뒤에는 매일 무덤에 찾아가 깨끗이 청소하고 제사를 드렸는데, 늙어서도 이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한호겸(韓好謙)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신재(新齋)이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확(確) 의 5대손이다.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대를 이은 충신 효자로서 학문에 연원 (淵源)이 있었다. 어버이의 병환에 하늘에 빌어서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신안서원에 배향하였다.
 
이시중(李時中)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힘써 논밭을 경 작하여 열심히 부모를 공양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셔서는 여묘살이를 하였고, 복 (服)을 벗은 뒤에도 화려한 의복과 고기를 멀리하였으며, 한평생을 슬퍼하며 그리 워하였다. 고종(高宗) 임금 때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의거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에 증직되었고 어사(御史)의 장계가 들어오자 승지(承旨)에 증직하였 다.
 
이 급(李 汲)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던 시중(時中)의 손자이다. 일찍이 아버 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받들었는데 항상 받들고 순종하여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변(便)을 맛보아 증상을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의를 다하였다.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매일 새벽에 사당(祠堂)에 참배하였다. 고종 임금 때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의거 하여 사헌부 감찰을 증직하였으며, 어사(御史)의 장계가 들어오자 승지(承旨)를 증직하였다.
 
이 건(李 鍵)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경녕군(敬寧君) 비(裶)의 후손이며, 성담(性潭) 송환기 (宋煥箕)의 문인(門人)이다. 어버이가 병이 들매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였다. 계모가 정신병을 가지고 있어 문 밖에 뛰쳐 나가 마구 뛰어다니면 그때마다 그의 뒤를 따라가서 앞에 엎드려 울면서 빌었다. 이같이 하기를 10년 여에 어머니의 병이 마침내 나았다.
 
이연휘(李延徽)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충경공(忠景公) 정란(廷鸞:1529~1600)의 현손(玄孫)이 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식이 넓고 깊었다. 일찍이 서울에 있었는데 꿈속에서 아버 지가 팔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종기(腫)를 앓으니 네가 반드시 급히 돌아와야겠다.”하였다. 이연휘가 놀라서 황급히 집에 돌아오니 과연 팔이 아팠는 데, 겨우 하룻밤을 지내고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는 상례(喪禮) 봉행(奉行)하기를 예절대로 하였다. 어머니 나이 80세에 종기를 앓으면서 또 설사를 하였 으므로 공(公)은 고름을 입으로 빨고 한편으로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복(服)을 입는 3년 동안 고기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어사(御史)가 표창(表彰)할 것을 아뢰는 장계를 올렸고, 또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가 올라갔으므 로, 봉훈랑(奉訓郞)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영조(英祖) 조정에서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심명철(沈命喆)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수인(壽寅)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 러웠으며,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어버이가 병에 걸려서는 변을 맛보 아 증세를 시험하며 병 낫기를 하늘에 빌었고, 상을 당하여서는 3년간을 소리 없 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으며, 매일 새벽마다 사당(祠堂)에 참배하였다. 게다가 심 경(心經) ・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모두 연구하였으니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어버이를 섬김이 모두 여기에 연원(淵源)하는 것이다.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두터 웠고, 일가 친족들과도 화목하였다. 화수정(花樹亭)을 지었는데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선생이 서문(序文)을 썼다.
 
윤상현(尹相鉉)
윤상현 정려비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효자 두표 (斗杓)의 5세손이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효경(孝經)과 예설 (禮說)에 숙달하였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추후(追後) 에 3년 동안 복(服)을 입었다. 고종(高宗)의 조정에서 교관(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허락하였다. 행장(行狀)은 효문공(孝文公) 윤병정(尹秉鼎:1822~ ?) 판서가 지었는데 임실현 감 조성희(趙性熹)가 칭송하기를 “향 선생(鄕先生)이 죽었으니 사(社)에서 제사지 냄이 마땅하다. 산은 높고 내의 흐름은 기니, 선생의 풍모(風貌)가 진실로 빈말이 아니었다.” 하였다.
 
양 집(梁 檝)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복주(復澍)의 아들이다. 그의 어버이가 머리가 난 가장자리에 종기가 났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지네(오공:蜈蚣)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때가 매섭게 추운 한겨울이었으므로 사방으로 널리 구하고 있을 때 담장에 서 2마리의 지네가 나왔으므로 찧어서 종기에 붙이니 곧 나았다. 어머니가 유방 (乳房)에 종기가 생겼는데, 의사는 홍시가 좋다고 하였으나 때가 바아흐로 봄 2월 이라서 홍시를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감나무 아래서 울면서 홍시를 구하였다. 이때 갑자기 한바탕 거센 바람이 불어 땅에 뒹굴던 나뭇잎과 오래된 나뭇가지를 거두어가니, 구멍 안에 홍시 2개가 있었음으로 종기에 붙이니 효과가 있었다. 실 적(實蹟)이 관찰사의 장계(狀啓) 중에 들어 있다.
 
양학용(梁學容)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5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므로 어려서 복(服)을 입지 않았는데 9세 때 추후(追後)로 3년 복을 입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성묘(省墓)를 하였는데 여우가 길을 막았지만 집의 개가 따라다녔으므로 요물(妖物)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였다. 그의 아내 전의(全義)이씨 또한 시부모에 효도하였다.
 
채보감(蔡寶鑑)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임진왜란 때 절의(節義)를 지키고 죽은 희연(希淵)의 현손이다. 부모가 병이 들매 그때마다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죽을 마셨고 3년 동안을 고기 없는 반찬으 로 밥을 먹었다. 여묘살이를 할 때 호랑이가 와서 앉아 있었지만 전혀 두려운 기색 이 없었다.
 
곽희겸(郭希謙)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의 손자이다. 타고난 성품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데 소학(小學) 을 좇아 행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입는 것을 가례(家禮)에 따랐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고 후학들을 권면하고 가르쳤다.
 
조경린(趙景麟)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운학(雲壑) 평(平)의 아들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서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그때마다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을 묘사화(乙卯士禍)29)때 상소(上疏)하였다가 무고(誣告)를 당하여 진도(珍島)로 귀 양을 갔었으며, 풀려난 뒤에 세 번이나 임금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곽천두(郭天斗)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희겸(希謙)의 손자이다. 14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몸소 슬퍼하다가 몸이 여윈 것이 마치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같았다.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회생(回生)케 하였으며, 상(喪)을 치르는 데 예법(禮法)을 따랐다. 매일 꼭 성묘(省墓)를 하며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이를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조 침(趙 琛)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운학(雲壑) 평(平)의 현손(玄孫)으로 수직(壽職)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타고난 성품이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 병환에 1월에 태어난 비둘기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구할 수가 없어서 울부짖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이웃집 개가 비둘기 한 마리를 물고 왔기에 복용(服用)하고 효험이 있었다.
 
홍제인(洪濟仁)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경재(敬齋) 붕(鵬)의 5세손으로 호조참의를 지냈다. 뛰 어난 품행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웠다. 어버이가 병이 들매 붕어를 구하고 약초 를 캐는 특이한 행적이 있었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머리에 빗질하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는 정성이 있었다.
 
곽재기(郭載基)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오암(鰲巖) 유번(維蕃)의 5세손이다. 그의 나이 겨우 9세 때에 어머니가 병들자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아 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을 먹었다.
 
송사명(宋思明)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거묵당(距墨堂) 시웅(時熊)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뛰 어난 자질(資質)이 있어 보통 아이들과 함께 놀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의 가르침 만을 받들었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이 돈독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여묘 (廬墓)살이를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그의 어버이가 여묘살이를 하던 옛터였으므 로 대를 잇는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윤 환(尹 瓛)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원담(源潭)이다. 기유년 식년시(式年試)에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깊고 돈독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몹시 깊어지자 자기의 살을 베어 드려서 병이 더욱 나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문장(文章)과 재지(才智)와 품행이 호남에서 뛰어난 인 재였다. 영조(英祖)왕조에서 성균관의 재생(齋生)으로 오래 있었으므로 경학(經學)에 매우 밝아서, 임금의 가까이 함을 입어 헌릉(獻陵) 참봉에 임명되었다. 그 때 유가(儒家)의 주장과 다른 학설(學說)이 있었는데 공(公)이 혼자서 상소(上疏) 하여 사설(邪說)을 배척하였다. 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 판서가 행장(行狀)을 지어 이르기를 “사(詞)・부(賦)는 초(楚)나라의 굴원(屈原)30)과 송옥(宋玉)31)처럼 능하고, 필법(筆法)은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에 견줄 만하며, 은담 (隱潭) 두표(斗杓)의 효심(孝心)이 원담(源潭)에게 미쳤으니, 숙질(叔姪)이 한 가 문의 본원(本源)을 이루었다.” 하였다. 녹동(鹿洞) 임성주(任聖周:1711~1788) 선 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이달효(李達孝)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청풍당(淸風堂) 성임(聖任)의 6세손으로,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선조(先祖) 상산군(商山君)의 묘역(墓域)을 세가(勢家)에게 빼앗기게 되자 소장(疎狀)을 안고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여 정조(正祖) 임금이 바로잡을 것을 윤허(允許)하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제사드리게 하 였다. 정승(政丞)을 지낸 이복원(李福源:1719~1792)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
 
이성석(李星錫)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청풍당(淸風堂) 성임(聖任)의 현손(玄孫)이다. 형 규석 (奎錫) 및 장령(掌令)에 증직된 정석(井錫)과 함께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 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예법을 준수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윤진승(尹晉昇)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는 하늘에 근거한 것이었다. 학문과 품행에 비범(非凡)함이 있었으며, 성담(性潭) 송환기(宋煥基)・녹동(鹿洞) 임성주(任聖周)를 스 승으로 섬기며, 그 문하에서 글을 배워 경서(經書)의 뜻과 예설(禮說)에 매우 밝았 다. 호남의 유생들이 모두 그를 스승에 대한 도리로서 존경하였으며, 전라도 관찰 사와 수령(守令)들이 선물을 보내고 문안 인사를 하였다. 그때의 문서와 장부들이 아직도 문집(文集)에 남아 있으며, 또한 향(鄕)과 도(道)의 유생들이 낸 진정서(儒狀)가 남아 있다.
 
이 섭(李 燮)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삼성재(三省齋)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 (補)의 11세손이다. 공(公)의 성품이 어질고 선(善)하며,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예 경(禮經)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지극히 두터웠으며,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시원(李時元)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영모재(永慕齋)이며, 군수(郡守)를 지낸 지번 (枝番)의 8세손이다. 아버지가 몇 달 동안 병을 앓을 때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하 였으며, 상(喪)중에 제사를 받들던 아이들이 천연두(痘)를 앓자 온 가족들이 제사 를 그만두려 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역병(疫病)에도 귀신이 있다면 당연히 상례 (喪禮)를 알 것인데, 어찌 제사를 그만둘 것인가? 하고 끝내 제물을 거두지 아니하 였는데 아이들의 천연두는 좋아졌다. 행 사복시정(行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이익진(李益鎭)
호(號)는 우재(愚齋)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낸 시원(時元)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仁慈)하여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살아 있는 풀도 밟지 아니하였다. 평소 일가 친족들에게 화목(和睦)을 평생의 일로 삼을 것 을 경계하였다. 한성부(漢城府)의 장계(狀啓)가 들어옴에 따라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제수하였다.
 
이회연(李會演)
호(號)는 솔성재(率性齋)이며, 승지(承旨)에 증직된 익진(益鎭)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孤兒)로서 홀어머니를 받들고 살면서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존중하였으며, 상(喪)을 입는 3년 동안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하였다. 제삿날을 당하면 비록 겨울날의 큰 추위에도 반드시 목욕하고 몸소 제사를 드렸다. 한평생 소학(小學)으로써 자신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방법을 삼았다. 절조 (節操)와 품행이 널리 알려지고 한성부(漢城府)의 장계(狀啓)가 조정에 들어가서 호조참판 겸 의금부사를 증직하였다.
 
이인우(李麟宇)
증직(贈職) 승지(承旨) 익진(益鎭)의 손자이며, 참판에 증직된 회연(會演)의 아 들이다. 효심(孝心)이 매우 깊었으며, 가정을 이끄는 규범이 청빈(淸貧)하였으므 로 밭갈고 나무하며 부지런히 일하여 양친을 봉양하였다. 4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 사이에 우애가 아주 두터웠으며, 온 집안이 화목하고 순종하였다. 동지돈 영부사(同知敦寧府事)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유 훤(柳 暄)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낙봉(駱峯) 유헌(柳軒)의 후손 이다. 한평생 마음을 집중하여 힘을 쏟은 곳이 소학(小學)이었다. 홀어머니를 섬 기는 데 그 효성(孝誠)이 극진하여 약시중을 드는 날에 얼음을 깨고 고기를 구하 였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그가 죽음에 다다라서 힘써 의관(衣冠)을 격식에 맞게 갖추어 입고 사당(祠堂)에 나아가 재배 하고 돌아와서 침상에 바르게 누워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한평생의 부모에 대 한 사랑이 이와 같았다.
 
이 각(李 珏)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학문과 식견 (識見)이 월등히 뛰어나고 부모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히 순후(淳厚)하여 어버이 의 마음과 건강에 유념하여 봉양하였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서는 장사지내는 모든 절차를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랐다.
 
박승혁(朴承奕)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號)는 이월당(梨月堂)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5대손이고 병조참판에 증직된 순달(順達)의 증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서 부모상을 당하여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행하였으며, 3년 동안 여묘(廬墓) 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여막(廬幕) 밖을 나간 일이 없었다. 매일 아침 사당에 참배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제물(祭物) 올리기를 한평생 게을리하지 아니하 였다. 배우고 실행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성실하였으므로 거듭 고을에서 천거하는 인재에 올랐지만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박세효(朴世孝)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8대 손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병조참판에 증직된 순달(順達)의 6대손이다. 성품이 엄격하고 강직하며 대범하여 위태로운 때 많은 사람들을 널리 구제할 큰 절조(節操)가 있었다.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에게 아부하려 하지 않고, 벼슬에서 물러나서 전원(田園)에서 쉬니 조야(朝野)가 모두 칭송하였다. 젊을 때 선전관(宣傳官)으로서 북쪽 지방[北道]의 권관 (權管)32)으로 부임하였다.
 
박필대(朴必大)
호(號)는 수졸헌(守拙軒)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10대손이고 병조참판을 증직받은 순달(順達)의 8대손이다.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심경(心經)과 성리학 서적 등을 잠시도 손에 서 놓지 아니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사당에 참배하였다. 한평생 입으로는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하지 아니하였고, 발로는 도회지에 들어서지 아니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참된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박정한(朴鼎漢)
호(號)는 눌헌(訥軒)으로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11대손이고 병조참판(兵曹參判) 순달(順達)의 9대손이다. 효성스러운 품행과 학문으로 누차 고을에서 천거 하는 인재에 올랐으며, 계묘년에 정려(旌閭)가 허락되었다. 공(公)은 성품이 지극 히 효성스러워서 나이 겨우 11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몹시 애통하다가 몸이 가시나무처럼 여위었다. 거적자리에서 잠자고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었으며, 어버이 상(喪)에 예제(禮制)를 잘 따랐으므로 고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하여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을 끊임없이 항상 제공하였으며, 그가 약을 시중 들 때면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일찍이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다. 병든 어머니가 살찐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지만, 집은 가난하고 시장은 멀어서 갑자 기 구할 수가 없었으므로 두 손을 마주잡고 하늘에 비니,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뜰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 꿩을 잡아서 요리를 해 드려서 거의 끊어지던 목숨이 다시 소생하여 천수(千壽)를 다하였다. 복(服)을 입고 장사지내고 제사드리는 의 식(儀式)에 능히 자기의 정성을 다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 가는 것을 늙도록 그만두지 않았으며, 항상 몸가짐을 엄숙하고 정연하게 하였다.
 
한 기(韓 機)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의 14세손이다.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본받아 따랐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므로 일가 친족들이 화목함에 감동하고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한규태(韓圭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의 15세손으로 호(號)는 긍오(肯梧)이다. 책을 읽고 인륜(人倫)을 밝혀 마침내 학식이 많은 선비가 되었다. 평소 어버이를 섬기는 효 성이 지극하더니 어버이의 병환이 위급하여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또 그의 어머니 소(蘇)씨가 연세가 많아서 이가 빠져 물오른 음식도 능히 먹고 마시지를 못하였으므로 말라서 딱딱해진 음식들은 잘게 씹어서 드렸다. 가까운 집안사람 중에 생활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말의 곡식과 한 병의 장(漿) 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주림을 면케 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칭찬하고 감탄 하였다.
 
박정하(朴鼎夏)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11대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강 직하고 공명(公明)하며, 언론이 정직하였는데 예경(禮經)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다. 임신년(1812)의 가산난(嘉山亂:洪景來의난-역자) 때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어버이의 분부를 받고 그만두었다. 공(公)의 효도와 우애는 온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박민헌(朴民憲)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정하(鼎夏)의 아들이다. 하늘이 낸 효성으로 부모를 봉 양하되 뜻을 받들어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문장이 화려하다는 것으로 세상에 널 리 알려졌으며, 몸을 닦고 가정을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나이 겨우 20세에 한 달 남짓 중병(重病)을 앓았는데 병이 점차 위급해져서 모든 약이 효험 이 없었다. 그의 아내 한씨(韓氏)가 매일 밤 하소연하며 하늘에 빌었는데, 어느 날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어렴풋한 상태에서 공중에서 민헌(民憲)을 부르고 말하기를, “네 아내의 정성에 감동하였기로 너의 수명(壽命)에 50년을 더하노라.” 하였다. 매우 급하게 종이를 찾아 이를 써 두었는데 과연 그 효험이 있었다.
 
김두연(金斗淵)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후손이다. 태어나서 겨우 9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면서, 뜻을 받들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하늘에 빌었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산소를 살피고 청소를 하였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와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정세문(鄭世文)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병조판서를 지낸 홍덕(弘德)의 후손으로 인조(仁祖) 조 정에서 대사간을 역임한 휴(庥)의 9대손이며, 장사랑(將仕郞)을 지내고 양무원종 공신(揚武原從功臣)에 책봉된 봉화(鳳華)의 증손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에 우애하는 것으로서 마음의 덕성(德性)을 다스리면서, 가정이 빈곤하고 어버이 가 늙었으므로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공양하고 띠로 지붕을 인 초라한 집을 지어 살면서도, 어버이를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복(服)을 입고 예절을 지키면서, 비록 바람이 불고 눈이 와도 무덤에 찾아가 묘역 을 깨끗이 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심종원(沈鍾遠)
심종원 정려비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부모를 일찍이 여의고 계모를 봉양 하면서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으며, 계모가 세상을 떠 나자 몹시 슬퍼하다가 몸을 여윈 것이 정도를 지났다. 매일 묘소에 찾아가 청소하기를 힘썼으므로 산에 오가던 길이 산길을 이루었다.
 
이우선(李禹善)
본관은 태안(泰安)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글 잘하는 것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여러 차례 승보시(陞補試) 초시(初試)에는 참가 하였으나 계속하여 회시(會試)33)에는 실패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함으로써 세상 에는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 만큼 최선을 다하였으니 붓으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의 아들 참봉 제성(濟成)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온 집안이 화목하였으므로 세상 사람 들이 모두 이를 칭송하였다.
 
한규엽(韓圭燁)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의 15대손으로 호(號)는 운계(雲溪)이 다. 말할 수 없이 곤궁한 가운데 책을 읽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 는 것을 자신의 업무(業務)로 여겼다. 스승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여 존중하였으며, 여러 차례 고을의 인재로 천거하는 데 들었다.
 
송태희(宋泰熙)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둔학(遯壑) 경원(慶元)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부모 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으로 마음과 몸을 다스렸으며, 항상 자기가 어려서 어버이를 여읜 것을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기일(忌日)을 당 할 때마다 비 통(悲痛)함이 저절로 뼈에 사무쳤다. 홀로된 형수를 섬기기를 어버이를 섬김과 다름이 없이 하였고, 자기 조카들을 사랑하기를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다름 이 없이 하였다. 일가 친족들과 화목하고 친구들을 유달리 좋아하였으며, 왕성한 원기(元氣)로 한평생을 지내었으므로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조희진(趙喜鎭)
고려 왕조에서 태사(太師) 벼슬을 지낸 원여(元璵)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의 병환이 오래되어 점차 위급하여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수명을 회생시켰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잘 지켰다. 조카를 양육하기를 자기 아들을 양육하듯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조정진(趙禎鎭)
본관은 옥천(玉川)이며 태사(太師)34)벼슬을 지낸 원여(元璵)의 후손이다. 천성 (天性)이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봉양하면서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하는 한편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고, 일가 친족과 화목하고 친구에게 신용이 있었으며 글 배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았다.
 
윤혁현(尹爀鉉)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며, 도승지(都丞旨)를 역임한 예생(禮生)의 13세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으로 심신(心身)을 다스리고, 밤에 잠자리를 펴고 새벽에 안부를 묻는 일과, 부드러운 음식과 깨끗한 음식으로 봉양한다는 점에서 고인(古人)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의 동생 풍현(豊鉉)과 밤낮으로 차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의 어버이의 병환이 위급 해질 즈음에 형제간에 손가락을 찢어 계속적으로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잠시 동안 회생(回生)하여 생존 연수(年數)를 더하였다. 실제 행적이 유장(儒狀)에 실려 있 으며, 전라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포상(褒賞)할 것을 청한 장계에 들어 있다.
 
윤풍현(尹豊鉉)
본관은 남원이며 혁현(爀鉉)의 동생이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서 그의 형과 한방에서 살면서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에 우애하는 것이 매우 돈독하였다. 그가 어버이의 병환을 시중드는 데 어버이가 운명(殞命)할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떨어뜨렸고, 피가 다하여 떨어지지 아니하자 그의 형이 또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떨어뜨리니 오래지 않아 곧 회생(回生)하였으며, 뒤를 이어 몇 해를 더 살았다. 갑자기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입고 3년상을 마치는 모든 절차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비통하 여 소리 없이 울면서 여묘살이를 하였고, 3년 동안 채소제물(素膳)로 제사를 지냈 다. 일가 친족들과 친절 화목하여 사람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풍도(風度)가 있었 으므로, 고을과 도(道)의 유림(儒林)들의 공론(公論)이 동시에 일어나서 군(郡)과 부(府)에 단자(單子)를 올렸고, 전라관찰사가 조정에 이를 보고하였다.
 
이우식(李宇植)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효자로서 지평(持平)에 증직된 연휘(延徽)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병으 로 신음하면서 메추라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갑자기 구하기가 어려웠는 데, 갑자기 메추라기 한 마리가 부엌 안으로 날아들었으므로 요리하여 드려서 효 험이 있었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서는 모두를 가례(家禮)에 따랐다. 또한 경학 (經學)으로서 고을 사람들로부터 추앙(推仰)과 존중을 받았다.
 
심낙원(沈樂遠)
본관은 풍산이며 풍산군(豊山君)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으로서 벼 슬은 선략장군행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호군(護軍)・통정대부 돈녕도정(通政大夫敦寧都正)을 지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으로써 심신(心身) 을 다스리고, 부모를 잘 봉양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가 친족과도 화목하게 지냈으므로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심병원(沈炳遠)
심병원 정려비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풍산군(豊山君) 귀령 (龜齡)의 후손이고, 도정공(都正公) 낙원(樂遠)의 동생이다. 무자년 정월에 인일제(人日製)35)에 응 시(應試)하여 소해(少解)의 방목(榜目)에 들었는 데 합격한 유생들이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謁見)한 자리에서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매우 뛰어나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 여, 밤에 잠자리를 돌보고 새벽에 문안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어버이의 병구완을 하면서 매일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밤을 이용 하여 하늘에 빌었다. 5월 더운 날씨에 벌꿀을 원하였으므로 사방으로 구하였으나 구하기가 어려울 즈음, 몸소 성수산(聖壽山) 속으로 들어가 3일 동안을 울부짖어 돌로 이루어진 통(桶)에서 벌꿀을 구하여 드려서 효험이 있었다. 유림들의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서 단자(單子)를 올리니, 판결한 글에서 “정성스런 효도에 감응(感應)하여 석청(石淸)이 솟아나왔으니,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하고 눈 속에서 죽순 을 구한 것만 어찌 미명(美名)을 독차지할 것인가!” 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의 장계 (狀啓)에 들어 있다.
 
최이항(崔以恒)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희안재(熙顔齋) 경성(景星)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 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복(服)입는 것을 예제(禮制)에 따랐 다. 매양 까마귀가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볼 때마다 남몰래 감동 하여 눈물을 흘렸다. 성장하여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는 몸에 다리 병을 앓고 있으 면서도 항상 상중(喪中)에 거처해야 할 거적자리에 엎드리고 있었는데, 나이가 80세가 넘었는데도 효성은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였다. 전라도관찰사 박우원 (朴佑源)이 포상할 것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김영학(金永學)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號)는 경암(景菴)이며, 선무원종(宣武原從) 공신 억희(億熙)의 9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행실이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었다. 은일(隱逸)로서 관찰사가 장계(狀啓)를 올려 사헌부 지평(持平)과 이조참의를 증직(贈職)하였다. 어버이의 산소가 하북(下北)면 귀노리(龜老里)에 있었는데 노년(老年)에 여묘살이를 하면서 한평생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밤낮으로 묘역(墓域)을 보살피고 청소를 하는 데 호랑이가 반드시 언덕 가에 웅크리고 앉아 지켜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호랑 이가 꿇어앉은 언덕(호궤대:虎跪臺)이라고 불렀다. 묘 아래 길의 돌이 험하였는데 그의 형 진사 영곤(永坤)이 나이가 많아 걷기 어려운 것을 생각하여 손수 돌을 주워 모아 하나의 탑을 만드니 세상 사람들이 안행탑(雁行塔)이라고 불렀다. 경전(經典) 을 연구하여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사람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풍도(風度)와 도덕을 수양하는 품행을 온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였는데 이를 붓으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조판서 김수현(金壽鉉)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
 
한홍직(韓弘直)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지은(芝隱)이며, 귀와공(龜窩公)의 9세손이다. 품행과 도의가 지극히 성실하여 소학(小學)으로써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았 으며, 항상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등의 서적을 열람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처사(處士)라고 불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행적을 전라도 유생들이 임금에게 진정하였고 전라도의 장계가 올라가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되었다.
 
한형엽(韓亨燁)
좌랑(佐郞)을 지낸 홍직(弘直)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즐겁게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였다. 어버이의 병환에 깨끗한 물(정수:淨水) 을 소반에 받들고 하늘에 빌어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몸이 여위어 앙상한 섶나무처럼 되었으므로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임진년 8월에 전라도 유생들이 임금에게 진정서를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며, 뒤를 이어 정려(旌閭)의 특전을 입었다.
 
한규성(韓圭成)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만락(晩樂)이며. 귀와공(龜窩公)의 11세손이 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형엽(亨燁)의 아들이다. 갑오년에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여 벼슬은 도정(都正)을 지냈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항상 기쁜 얼굴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였으며, 한 마디의 말이나 하나의 행동 도 어버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가정이 빈한하여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만일 한 되의 쌀이나 한 자의 베가 생겨도 몸소 이를 등에 지고 와서 드렸으며, 항상 밤에 잠자리를 돌보고 새벽에 문안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서리 내린 새벽이나 달이 뜨는 저녁이면 용감하게 혼자서 달려갔는데, 그때마다 호랑이가 항상 보호하며 따라갔다. 그의 부모가 병듦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 하였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극도로 슬퍼하다가 몸을 여윔이 보통을 넘었다. 거 적자리에서 잠을 자고 고기 없는 반찬을 먹었으며, 두건(頭巾)과 상복의 허리에 맨 삼띠(요질:腰絰)를 풀지 않은 것이 겹쳐 6년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머리에 부스럼이 생겼으며, 마침내 한쪽 눈이 상하였다. 혹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어버이가 계실 때 이런 음식을 마련해 드리지 못하였 다.’하면서 목이 메도록 우느라 음식을 삼키지 못하였다. 성품이 본래 술을 좋아하 였으나 훈계(訓戒)를 받은 이후로는 한평생 적은 양의 술도 마시지 아니하였다. 항상 어버이를 애도하고 추모하여 초하루와 보름날에 묘소에 찾아가 보살피고 청소를 하였는데, 늙도록 그만두지 아니하였으므로 절하고 꿇어앉았던 곳에 풀이 살지를 못하였다. 여러 차례 인재를 천거하는 추천 장에 올랐다. 참판 윤태일(尹泰一)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권달수(權達壽)
권달수 정려비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동흥군(東興君) 상(常)의 10세손이다. 어버이가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았을 때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내고 손가락을 찢어서 그 수명 을 연장하였으며, 냇물의 고기를 잡고 죽순을 구하 여 병든 이의 입맛을 조절하였다. 고종조(高宗朝)에 서 감찰(監察)을 증직하였으며, 정려(旌閭)를 허락하였다.
 
송운오(宋運五)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둔학(遯壑) 경원(慶元)의 후손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 할 줄을 알았으며, 효성이 순수하고 돈독하였다. 매양 어버 이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그의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 즐겨하던 꿩과 노루고기를 정성들여 준비하였는데, 꿩 한 마리가 부엌 안으로 들어와서 제물로 바칠 수 있었 고, 어머니 묘소에 찾아가 보살필 때 우연히 노루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으니, 그의 효성에 감응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박시규(朴時奎)
본관은 양(密陽)이며, 문절공(文節公) 문빈(文彬)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길 때 효성이 지극하였고, 상(喪)을 당하여는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3년상을 마치고 복(服)을 벗은 뒤에는 초하루와 보름날에 묘소에 참배하고 청소를 하였다. 홀어머 니를 봉양하면서 뜻을 받들어 순종하고 어긴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들자 제단 을 쌓고 하늘에 빌다가 닭이 울고 난 뒤에야 물러났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남짓 에 이로 인하여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었다.
 
최상익(崔相翊)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정려효자(旌閭孝子) 헌(憲)의 6세손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효성이 지극 하여 뜻을 받들고 건강을 생각하며 봉양하였다. 나이가 50세가 되었어도 집안의 모든 일을 반드시 어머니께 아뢴 뒤에 이를 행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3년간을 비 통해 하며 소리 없이 울었다. 고종 왕조에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한기필(韓基弼)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부원군(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능히 어 버이 사랑할 줄을 알았으며, 늙어서도 색동옷을 입고 어버이를 즐겁게 하였다. 어 버이가 병들면 근심과 수고를 다하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애통한 정을 다하였으 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증직되었다.
 
김선원(金善元)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계림군(雞林君) 균(稛)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이질(痢疾)로 여러 해 동안 신음하면서 냇물고기를 먹고 싶어하였으나, 시내와 연못의 물이 얼어서 구할 길이 없었으므로 강을 에워싸고 울부짖는데, 갑자기 큰 고기 한 마리가 얼음이 갈라진 틈으로부터 뛰어나와서 달여 드렸더니 매우 신속하게 소생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고, 매일 세 차례 묘소에 참배하였다. 철종(哲宗) 왕조에서 감찰(監察) 벼슬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하 였다.
 
한형태(韓亨泰)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후손이다. 어머니가 병들어 수 박을 먹고 싶어하는데 때가 10월이라서 사방으로 구하려 하여도 구할 수가 없었 다. 이때 길에서 만난 한 늙은 할머니가 그 까닭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남편 대상 (大祥) 때 수박을 쓸 생각으로 한 개를 물속에 담가 두었다.’하고 이것을 주었는데 과연 효험이 있었다.
 
한경리(韓璟履)
형태(亨泰)의 아들로 참봉 벼슬을 하였다. 9세 때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산에 제사드려 어머니의 장수를 빌었다. 그의 어머니가 종기를 앓았는데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효험이 있었으며, 후에 또 병으로 오래 앓게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을 회생케 하였다.
 
최상원(崔尙遠)
효자 이항(以恒)의 아들로 어머니가 습질(濕疾)을 앓았는데 거북을 잡아서 삶아 드렸더니 즉시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설사병에 걸리자 이웃에서 젖을 빌어다가 계속 들게 하여 효험을 얻었다. 뒤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6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호랑이가 항상 와서 호위를 하였다. 상(喪)을 마치고 복(服)을 벗은 뒤에 는 연구하고 학습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헌수(李憲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완산군(完山君) 백유(伯由:1352~1399)의 후손이다. 6세 때 이웃집에 갔다가 배와 밤을 먹으라고 주니 가슴에 품는지라, 주인이 기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육적(陸績:178~219)이 귤을 가슴에 품었다는 얘기를 내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완교(完僑)에서부터 현(縣)의 북쪽 도봉리(道峰里)까지 가난이 심하였는데, 이 지역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케 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는데 새가 상식(上食) 때를 항상 알려 주었고 밤마다 호랑이가 곁에서 호위를 하였다. 은사(隱士) 금곡(錦谷) 송내희(宋來熙)가 모와(慕窩)라고 아호를 써 주었다. 형인 호군(護軍) 헌계(憲啓)와 아우 헌익(憲翊) 또한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그 의 증손자 석용(錫庸) 또한 학업에 성실하였다.
 
한경여(韓慶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부원군(府院君) 확(確)의 7세손으로 수직(壽職) 동지중 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늙은 나이에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색동옷 을 입고 어버이를 즐겁게 하였으며, 어버이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 였다. 연구하고 학습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박정호(朴鼎鎬)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11세손이고 병조참판을 지낸 순달(順達)의 9대손이다. 어린 나이에 가정에서 좋은 영향을 받았으며, 마음속에 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은 하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부모상(喪)에 여묘살이 를 하면서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홀로 계모를 봉양하면서 집안이 비록 빈한하지만 가까이서 받들어 봉양하는 데 마음과 힘을 다하였으며, 기쁜 모습으로 항상 즐겁게 하여 드렸고,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드렸으니 가히 뜻을 받들어 즐겁게, 그리고 건강을 위해 봉양한 것이라 할 만하다. 임인년에 기영 사(耆英社)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최영환(崔榮煥)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문간공(文簡公) 철(哲)의 후손이고, 효자로서 봉사(奉事) 벼슬에 증직된 헌(憲)의 7세손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네다섯 살 때 이후로 능히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깨달아서 하루 세 끼 음식의 공양(供養)을 손수 행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여러 달 동안 위중하였을 때 그가 하늘 에 수명을 연장해 줄 것을 빌었는데,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회생하였다. 한평생 잠시도 그의 어버이 슬하를 떠나지 아니하고 일상 생활하는 곁에서 항상 부축하여 보호를 하며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효자다. 참판 윤태일 (尹泰一)이 효행장(孝行狀)을 지었다.
 
전석춘(全碩春)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통상(統相) 동흘(東屹)의 후손이며, 성담(性潭) 송환기 (宋煥箕)의 문인이다. 그의 아버지가 종기를 앓을 때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회 복시켰으며, 또 기이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약에 섞어 드려서 놀랍 게도 소생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을 너무도 비통하여 소리 없이 울었다.
 
정유복(鄭維福)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호(號)는 운곡(雲谷)이며, 익혜공(翼惠公) 난종(蘭宗:1433~1489)의 증손이다. 경학(經學)에 성실할 것을 지향(志向)하고 과거 공부 에 힘쓰지 않았다. 효경(孝經) 심경(心經) 성리서(性理書) 등의 책을 보는 데 힘을 다하였는데, 은일(隱逸)로 천거되어 예조정랑 벼슬을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이 극진하여 서울로부터 영구(靈柩)를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옥전면 (玉田面) 발산(鉢山)에 장사지내고 여묘(廬墓)살이를 하였으므로 그곳을 제청동 (祭廳洞)이라고 불렀다.
 
정기홍(鄭基弘)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익혜공(翼惠公) 난종(蘭宗)의 13세손이며, 운곡(雲谷) 유복(惟福)의 10세손이다. 천성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풍채와 몸가짐이 단 정하고 올바랐다.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모시는 데에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재산을 기울이어 베풀기를 좋아하며, 빈궁한 사람들 을 구제하였다. 일가 친족들과 화목하는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청계처사(淸溪處士)라고 불렀다.
 
심환고(沈煥高)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풍산군(豊山君)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으로서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꼭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능히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고, 몸을 수양하고 집안 다스리는 것을 자기가 해야 할 일로 생각하였다. 수양과 몸가짐의 모든 절차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으므 로 고을 사람들이 탄복하였으며, 일가 친족들과 화목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참다운 선비라고 일컬었다.
 
윤태일(尹泰一)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회묵(會黙)인데 교관(敎官)에 증직되고 정려 (旌閭)를 받은 상현(相鉉)의 아들이다. 문학으로 중앙과 지방에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차례 감시(監試)의 복시(覆試)에 참여하였다. 또 재차 도천(道薦)에 들어서 음직(蔭職) 참봉이 되었으며, 관직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행돈영부도정(行敦寧府都正)을 거쳐 동지돈영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고, 종2품 참판(參判)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그의 어머니가 오래된 병의 병 세(病勢)가 깊어짐에, 오줌과 변을 받아내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몸 소 하였는데 이같이 한 것이 10여 년이었다. 이밖에 어버이 공양하던 일들을 어떻 게 붓으로 다 기록할 것인가! 어린 나이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선생의 문 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재호(齋號)를 받았다. 늙어서 더욱 배우기를 좋아하여 연 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과 왕래하며 교유(交遊)하였다. 실제의 행적 이 유장(儒狀) 중에 있다. 그의 아들 병제(秉濟)・병희(秉禧) 또한 효자라고 세상 에 알려져 있다.
 
심극현(沈克賢)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병이 위급하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7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다.
 
박경기(朴慶基)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8세손으로 녹문(鹿門) 임성주 (任聖周)의 문인이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호랑이 가 와서 보호하여 주었으며, 기일(忌日)을 당하여 재계(齋戒)를 하면 묘지의 주인 이 쌀을 보내 주었다.
 
이지섭(李志燮)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정간공(貞簡公) 목(穆)의 후손으로 수직(壽職) 부호군 (副護軍)을 지냈다. 10세 때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비통함으로 몸이 여위도록 예제(禮制)를 준수하니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고 일컬었다. 성장하여 홀어머니 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꿈속에서 약을 구하여 쾌히 소생케 하였으 며, 또 어머니가 병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 는 지켜야 할 거적자리를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였고, 무덤을 찾아가 돌보고 깨끗 이 청소하는 일을 쉬지 아니하였다.
 
전백철(全百喆)
전백철 정려각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규암(葵菴) 계종(繼宗) 의 9세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넓적다 리 살을 베고 손가락을 찢어 살과 피 를 들게 하였고, 자신이 어버이의 병 을 대신하기를 축원하니 어버이가 기 절(氣絶) 상태에서 다시 소생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잠깐 동안 저승(명부:冥府)에 가 있었는데 우리 아 들이 나를 위하여 아버지의 병을 대신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다행스럽게 풀려났다.” 하였다.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고종(高宗)왕조에서 교관(敎官)을 증직하였으며,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이윤성(李潤性)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청풍당(淸風堂) 성임(聖任)의 8세손이다. 조상 (祖上)의 유훈(遺訓)을 능히 본받아 서 어버이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 였다. 어머니가 병들매 변이 단가 쓴 가를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으 며, 어버이가 쑥국을 원하였으나 겨 이윤성 정려각 울철이라서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갑자기 눈 속에서 쑥을 캘 수가 있어서 끓여 드려 효험이 있었다. 고종(高宗) 왕조에서 이조참의에 증직하였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이재형(李載炯)
정려(旌閭)를 허락받은 효자로서 이조참의(參議)에 증직된 윤성(潤性)의 아들이다. 어버이가 병들매 옷의 띠를 풀지 않았고, 약을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으며, 밤낮으로 곁에서 시중을 들면서 밝게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몸이 여위도록 비통해 하기를 3년이나 하였다. 고종(高宗) 왕조에서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윤태로(尹泰魯)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지헌(芝軒)인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 으로 진사(進士)인 원담공(源潭公) 헌(瓛)의 5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 고 근면하며 절개를 지키고 구차하지 아니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 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비통해 하다가 몸을 여윌 정도로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3년 동안을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으며, 아침 저녁으로 묘소를 보살피고, 청소하기를 늙도록 계속하였다. 효경(孝經)과 예설(禮說)로써 자기 자신을 다스리 는 방법을 삼고 일상생활에서 검소하였으며, 가정의 아들・조카들과 손자아이들을 경계(警戒)하되,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들을 공경할 것을 반드시 말하였다. 마을 의 사우(士友)들과는 서로 화목하여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였으며, 반드시 충성스 럽고 신실한 도리와 친절하고 화목한 풍도(風度)로써 말하니, 일가 친족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깨우쳐 인도한 은혜와 품행을 수양한 행적으로 누차 천거(薦擧)에 들 었으며, 고을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고 존중하여 소중한 본보기로 삼았다.
 
정희현(鄭羲賢)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관찰사를 역임한 잠(箴)의 후손이다. 10세 때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비록 눈이 쌓이고 폭우가 쏟아져도 항상 빈소(殯所) 곁에서 잠을 잤다. 어머니가 학질(瘧疾)을 앓았을 때 자라탕을 먹기를 원하였는데, 냇가에서 울부짖으니 자라 한 마리가 뛰어나왔으므로 끓여 드리고 효험을 보았다. 또 어머 니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여 5일 동안을 살게 하였으며, 다시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2일 동안 수명을 연장케 하였다.
 
양 식(梁 栻)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용운암(龍雲菴)인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주운(朱雲)의 후손이고 병조판서를 지낸 초(超)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의 공신으 로서 행선공감역(行繕工監役)을 지낸 천우(天遇)의 8세손이며, 제릉(齊陵) 참봉 우주(禹舟)의 현손이고, 통정대부 부호군(副護軍) 순성(順性)의 손자이다. 문장과 재능과 학문으로써 이름이 중앙과 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여러 해 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누차 응제시(應製試)36) 초시(初試)에 참여하였고, 6차례나 감 시(監試)에 합격하였으나 계속해서 회시(會試)에는 실패하였다. 또 학식으로 세 번이나 고을에서 천거하는 인재에 들었다. 대신(경상:卿相)들로부터 받은 편지가 쌓여 권축(卷軸)을 이루었으므로, 남쪽 지방의 고결한 선비로 일컬었다. 그의 손 자 진사(進士) 기형(基衡)은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자기 할아버지가 공들 여 쌓아올린 일을 해결하였다.
 
양달용(梁達容)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용운암(龍雲菴) 식(栻)의 아들로서 호(號)는 농포(農圃)이다. 어린 나이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부모를 진실한 마음으로 섬겼는데, 가정이 빈곤한 까닭으로 매일 고기를 잡고 나무하는 데 힘써서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나이 겨우 4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그가 성장하여 아버지의 용모를 보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연로(年老)하여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자, 매일 등에 업고 두세 번씩 바람을 쏘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이틀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니, 참으로 마음속에 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이 지극하였다. 그의 어버이의 묘소를 비록 바람이 불고 눈이 와도, 돌보고 청소하는 것을 거르지 아니하였다. 한평생을 이처럼 지낸 것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다. 그의 아들 진사(進士) 기형(基衡)은 선대(先代)의 음직(蔭職)을 이어받아 가문을 창대(昌大)케 하였으니 효도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석로(李錫魯)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정리당(靜履堂) 두연(斗然)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렸다. 항상 일찍 부모 를 여읜 것을 한탄하며, 그의 아우에게 우애하여 너와나의 구분이 없었으며, 유달 리 아우를 사랑하여 자기 몸보다도 더 사랑하였으니, 세상에 그와 같은 사람이 드물었다. 또 친구들을 좋아하여, 서울과 지방의 사우(士友)와 수령(守令)들로서, 심방하고 왕래하며 교유(交遊)하는 이들이 매우 많아서, 원기 왕성하게 한평생을 보내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그의 조카 종연(鍾淵) 또한 그의 발자취를 이어받았다.
 
김치태(金致泰)
김치태 정려각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참판을 지낸 효남(孝南)의 7세손이다. 그의 아버지 가 일찍이 학질(瘧疾)을 앓았을 때 넓 적다리 살을 베어 구환(救患)하였으 며, 또 이질(痢疾)병에 걸려서 여러 달 신음하는 동안에 토끼고기를 먹고 싶어하였으므로 산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정성이 부족함을 스스로 탓할 즈음, 갑자기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서 으르 렁거리고 그 앞에 토끼 한 마리가 엎드리고 있었으므로, 이를 가져다가 삶아 드려 서 병이 드디어 나았다. 다음 해 그의 아버지가 거의 운명할 무렵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비통함으로 몸을 여윔이 예제(禮制)를 뛰어넘었으며, 복(服)입고 장사(葬事)지내 는 것을 예제(禮制)에 따랐다. 3년 동안 고기 없는 반찬을 먹었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가서 곡(哭)을 하였다. 자기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후손들을 행복하게 하 며,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다스리며, 형제와 우애하고 일가 친족을 극진히 사랑 하여 보통 사람의 행실보다 뛰어난 것이 많았다. 고종(高宗) 왕조에서 교관(敎官) 을 증직하고 정려를 허락하였다. 그의 손자 석환(錫桓)・필환(弼桓) 형제들 역시 품성과 행실이 독실(篤實)하였다.
 
이헌영(李憲榮)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농재(農齋)이며, 참판에 증직(贈職)된 회연(會演)의 아들이고, 동지돈영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인우(鱗宇)의 동생이다. 그 의 아버지가 이질(痢疾)병에 걸려 물고기를 원하였으므로, 물가에 이르러 하늘에 비니 얼음이 녹고 물고기가 뛰어나왔다. 상(喪)을 당하여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비통하게 울면서 고기 없는 반찬을 먹었다. 관가(官家)에서 누차 예물(禮物)을 보내었고 또 전라도와 임실현의 유생들이 올린 진정서도 있다. 그의 아들 준의(焌儀) 또한 학문을 배우고 익히어 가문의 명망(名望)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고결한 선비라고 일컬었다.
 
김양근(金瀁根)
김양근 시혜비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선무원종(宣武原從) 공신 억희(億熙)의 10세손이며, 은일(隱逸)로 사 헌부의 지평(持平)을 거쳐 이조참의(參議)에 오 른 영학(永學)의 아들이다. 무자년 식년(式年)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관하여 참서관(參書官) 승훈랑(承訓郞) 을 역임하고, 정3품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으로 승진하였으며, 비서원(秘書院) 승(丞)에 올 랐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였고, 어버이 섬기는 데 지극히 정성스럽게 그 뜻을 받 들어 순종하였다. 밤에 이부자리를 펴고 새벽에 안후를 물었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절도(節度)가 있었다. 일가 친족들과 친절 ・ 화목하였으며, 손님들을 접대할 때면 온화한 기운이 집안에 가득하였다. 몸가짐 이 검소하고 품행을 수양하는 점에서 세상에 드물다는 공론이 있었던 바, 도회소 (都會所) 통문(通文)과 유생들의 진정서(陳情書:儒狀)가 일제히 일어났다. 여러 차례 고을 안의 인재 천거와 전라 관찰사의 천거에 들어서 그의 성명이 조정에 까지 알려졌다.
 
송낙희(宋樂禧)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호(號)는 송포(松圃)인데 통정대부 둔학공(遯壑公) 도 사(都事) 경원(慶元)의 10세손이고, 조산대부(朝散大夫) 순릉(順陵) 참봉 처명 (處明)의 8세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행용양위부호군(行龍讓衛副護軍) 운항(運恒)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7년 동안 병을 앓았을 때, 약 시중을 게을 리 하지 아니하고 울부짖으며 하늘을 향하여 비니, 얼음장 밑의 물고기가 뛰어나 와 잡아다가 달여 드렸다. 어버이 병이 심하였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회생케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초상(初喪) 이후 졸곡(卒哭)까지 일체의 절차를 모두 예제(禮制)에 따랐다.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비록 바람 이 불고 추운 날이나 더웁고 비가 오는 날에도 묘소를 돌보고 청소하는 일을 거르 지 아니하였으므로, 풀이 자랄 겨를이 없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송하였 다.
 
송인희(宋仁熙)
통정대부 낙희(樂禧)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병으로 앓자 성수산(聖壽山)에 가 서 빌다가 갑자기 좋은 약을 구하여 달여 드려서 병이 나아 20년간 수명이 연장되 었다. 그 후 병수발을 하면서 변이 단가 쓴가를 맛보았으며, 병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달여 드렸다. 어머니의 병이 위급해지자 손가락 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준수하는 데 진력 하였다. 그의 아들 진홍(鎭洪), 진백(鎭伯)과 그의 손자 창호(昌浩) 또한 효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참판 윤태일(尹泰一)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정기호(鄭祺浩)
본관은 경주(慶州)인데 선공감(繕工監) 감역관(監役官)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 랐으며, 호는 용파(溶波)이다.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 (兵曹判書), 지경연사(知經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역임한 홍덕(弘德)의 후손이며,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휴(庥)의 11세손이다. 학문과 행실로 전라도관찰사가 임금 에게 보고하는 인물에 천거되었으며, 처사(處士)로 불리었던 영간(英幹)의 6세손 이다. 장사랑(將仕郞)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던 봉화(鳳華) 의 5세손이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품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데 정성이 극진하였다. 밤에 이부자리를 펴고 새벽에 안부를 묻는 일들을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아니하였으며, 어버이의 병이 몹시 심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 게 하여 3일 동안을 소생(蘇生)케 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입고 장사지내 고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절차를 모두 예제(禮制)를 준수하니 이웃 사람들이 효자 라 칭하였다. 그의 아들 동현(東泫)은 참봉으로서 가업(家業)을 잘 이어갔다.
 
태형풍(太亨豊)
본관은 섬계(陝磎)이며 판서를 지낸 응진(應辰)의 후손이다. 문학으로 온 고을 에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와의 우애는 하늘이 낸 것이었다. 어머니가 요통(腰痛)으로 인하여 한번 누운 뒤로, 수십 년간 화장실에 다닐 수가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밥을 떠 넣어드려야 하였으므로, 형제들이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였지만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가 생선회를 좋아하였으나 가정이 빈한하여 계속 드릴 수가 없었는데, 비가 온 뒤 작은 시내에서 우연히 큰 물고기를 잡았고, 또 꿩고기를 원하였으나 갑자기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한 쌍의 꿩이 산 앞의 눈구덩이에 날아와 떨어졌다. 이것을 잡아가지고 돌아가니 이웃마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면서 효성에 감응 (感應)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종현(鍾顯)은 문학과 효행으로 세상 사람들 의 추앙과 존중을 받았다.
 
김영근(金濚根)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억희(億熙)의 10세손이며, 은사(隱士)로서 사헌부 지평과 이조참의를 지낸 영학(永學)의 아들이고, 한편 승지(丞旨)를 지낸 양근(瀁根)의 동생이다. 제중원(濟衆院) 주사(主事)로서 덕릉 (德陵) 감동(監董)을 겸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였고, 14세에 아버 지가 돌아가시자 머리털을 쑥대처럼 엉클어뜨리고 얼굴을 씻지 않아 까만 상태로 시묘(侍墓)살이를 하며, 고기 없는 반찬으로 식사를 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자 목 숨을 살려 달라고 하늘에 빌어서 마침내 몸의 원기(元氣)를 회복하였다. 그의 형 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며, 그의 아들 참봉 성희(聖熙)도 역시 효행으로써 이 웃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홍한섭(洪漢燮)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제인(濟仁)의 5세손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음사(蔭仕)로 도정(都正)에 올랐다. 효심(孝心) 이 지극히 순후(純厚)하여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환에 두 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 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예(禮)를 다하여 초하루와 보 름에 묘소를 돌보고 청소하기를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거르지 아니하였다.
 
강기수(康基壽)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후손이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비통함으로 몸이 여윈 것이 도를 넘었고,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늘리게 하였다. 가정은 빈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 므로, 비록 먼 지역의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필코 사와 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냇물고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추운 겨울철을 당하여서도 지성으로 잡아다가 요리하기를 중지하지 아니하니, 세상 사 람들이 강(康)효자라고 불렀다. 참판 윤태일(尹泰一)이 행장을 썼다. 박성근(朴成根)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후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고기반찬 없는 밥을 먹기를 변함없이 하였다.
 
최봉양(崔鳳陽)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위정공(威靖公) 칠석(七夕)의 후손이다. 어린 나이에 부 모를 모두 여의고 큰아버지에게 양자(養子)로 가서 대를 이엇는데 효성으로 봉양 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큰아버지가 학질(瘧疾)에 걸리자 눈속에서 나물을 캐고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아다가 공양하였으며, 병이 위급하여서는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들게 함으로써 효험을 보았다.
 
최석환(崔錫桓)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공조참판을 지낸 효남(孝男)의 9세손이며, 교관(敎官)을 지낸 치태(致泰)의 손자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이 특이하였고, 마음과 성품(性品)이 너그럽고 후(厚)하였다. 효성으로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혹 밖에 나가 노는 데 시일이 걸렸으면 돌아와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 기를 ‘어머님 용모와 모습이 어찌 이토록 쇠하였습니까?’ 하였다. 그가 일찍이 먼 변방지역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몸소 생선을 등에 지고 왔다. 상사(喪事)와 장사(葬事), 소상(小祥), 대상(大祥)에 예제(禮制)를 잘 준수하였고,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고 후손을 복되게 하는 데 모범을 행하였다. 또 대대로 품성과 행실을 돈독하게 행하여 사람들이 칭찬하는 바가 되었다. 그의 아들 병주(炳周)는 효성과 학문과 품행으로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여 감탄하였다.
 
심진우(沈鎭佑)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9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조객(弔客)을 맞이하고 상복을 입고 거상(居喪)하는 일들을 모 두 나이가 든 사람처럼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살피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거르지 아니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84세에 돌아가시니 진우(鎭佑) 역시 늙어 서 쇠약하였지만 여묘살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집에서 기른 개가 여막(廬幕)에 따라와서 왕래하며 집에 편지를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므로, 사람들이 효자개 [孝子犬]라고 불렀다. 묘 곁에 있는 구덩이에서 그릇을 하나 주웠는데 “천효(天孝)”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박원종(朴源鍾)
본관은 양(密陽)이며 문절공(文節公) 문빈(文彬)의 후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베 짜고 농사지어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供養)하였다. 어버이 병환이 매우 심해지자 변(便)을 맛보아 약을 시험하고 병의 증세(症勢)를 시험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통곡하기를 비통하게 하고 일체를 예제(禮制)에 따랐다. 그의 어버이의 산소가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찾아가 돌보고 청소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아들 성근(成根)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으로 칭찬을 받았다.
 
노석태(魯錫泰)
본관은 강화(江華)이며 부사(府使)를 지낸 여(輿)의 후손이다. 어린 나이 때부터 효심이 아주 뛰어나서, 그의 어버이가 이질(痢疾)을 앓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끓여 드려 하룻밤 사이에 쾌차(快差)하였다.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 이를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극진한 효심이라고 말하였으며, 두메산골에 살았 지만 손님들이 집에 가득하였다. 그의 아들 성모(聖謨)는 가정의 교훈을 받들어 이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매우 칭찬하였다.
 
박종헌(朴琮憲)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12대손이며, 병조참판을 지낸 순달(順達)의 10세손이다. 종사랑(從仕郞) 참봉을 거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에 이르렀다. 효심(孝心)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품행과 도의(道義)가 순수하고 진 실되며, 몸가짐을 삼가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비통한 나머지 3년 동안을 소리 없이 울었으며, 집의 안뜰에 들어가지 않고 거적자리에서 잠을 잤으니 다른 사람들이 본받기 어려운 일이다.
 
이정의(李廷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죽계(竹繼)인데 참판에 증직된 회연(會演)의 손자이고, 동지돈영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인우(麟宇)의 아들이다. 마음속에 서 우러나오는 효심으로 어버이를 섬기면서, 물에서 고기 잡고 산에서 나무하여 그의 어버이를 공양하였다. 또한 열심히 농사짓고 집안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엄 히 지키며, 한가한 날에 글을 읽어서 마침내 학문이 높은 선비가 되었다. 조상을 받드는 마음을 자기의 중요한 일로 여기고,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을 받게 하여 가문을 빛내었으며, 시골에 살면서 선행자(善行者)를 찬양하는 마음이 남달라서, 수고를 잊고 몸소 실행하고 효행자(孝行者)를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으니, 효 도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광석(韓光錫)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연봉(蓮峯)인데 귀와공(龜窩公) 응성(應聖)의 12대손이고, 도정(都正)을 지낸 규성(圭成)의 아들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효심(孝心)으로써 마음을 다스렸으며,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고 새벽에 안 부를 묻는 일이며, 입과 몸을 봉양(奉養)하는 일을 생략하고 절감(節減)하더라도, 그의 아버지 도정(都正)의 행적은 비록 미세(微細)한 일이라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연보(年譜)에 집대성(集大成)하였다. 여러 대에 걸쳐 증직을 받고 정려(旌閭)를 허락받은 것과 같은 중대한 일들은 자기가 소원한 것을 이룬 것이니 정성이 이르러 쇠와 돌을 뚫은 것이었다. 한가한 날에 산림처사(山林處士)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힘을 합쳐 행장(行狀)과 묘갈 문(墓碣文)을 짓고 문집을 만들었으니, 선조(先祖)를 받들고 후손을 편안하게 하 려는 그의 마음을 필적(匹敵)할 자가 세상에는 없다. 한평생 선조를 사모하는 그 의 마음은 지극한 효도라고 말할 만하다.
 
이재호(李載浩)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청풍당(淸風堂)의 9세손으로서 음직(蔭職)으로 참봉이 되었다. 효성을 다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비록 거리가 멀더라도 꼭 옷소매에 넣어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상(喪)을 당하 여 염(殮)하고 관(棺)에 넣어 빈소(殯所)에 안치(安置)하며, 매장하는 일들을 모두 예제(禮制)에 따랐다. 초하루와 보름날에 묘지를 돌보고 청소하는 일을 하루도 태만히 한 일이 없었으며,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간절하였다.
 
곽찬영(郭瓚永)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문학으로 중앙과 지방에 널리 알려졌으나, 과거에 잇달아 실패하고 실의(失意)에 빠지니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였다.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나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두 번 모두 3일씩 수명을 연장시켰다. 상(喪)을 당하여 비통해 하다가 몸이 여위도록 예제(禮制)를 준수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참다운 효자”라고 말하였다.
 
양기형(梁基衡)
양기형 선생 사진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일우재(日愚齋) 인데 갑오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용성 부원군(龍城府院君) 주운(朱雲)의 후예이고, 병조판 서를 지낸 초(超)의 후손이며, 선공감(繕工監) 감역 (監役)을 지낸 천우(天遇)의 10세손이고, 재릉참봉 (齋陵參奉) 우주(禹舟)의 6세손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 순성(順性)의 현손이고, 용운 암(龍雲菴) 식(栻)의 손자이다.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서,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는 것과 저녁에 이부자리를 깔아 드리고 아침에 안후를 묻는 일들을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다. 나이가 아직 20세가 못 되어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복(服)을 입고 장사지내는 모든 절차를 모두 예제 (禮制)를 준수하여, 마치 나이가 많은 사람과 같이 하였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 서 효심이 더욱 깊어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며, 사람을 접대하는 방법과 몸가짐을 공손히 하였으므로, 고을의 글하는 친구들로 왕래하며 교유(交遊)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의 행적은 현감(官長)과 향교의 통문(通文)과 유장(儒狀)에 남아있다.
 
이주석(李柱錫)
본관은 청해(靑海)이며 충장공(忠壯公) 중로(重老)의 7세손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 이가 병을 앓을 때, 넓적다리 살을 베어 끓여 드려서 효험을 보았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그의 어버이 머리털을 주워서 주머 니에 담아 평생 이것을 몸에 차고 다니면서, 때때로 열어보고 어버이를 그리워하 는 마음을 위로하였다.
 
이종택(李鍾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號)는 미일헌(未一軒)인데 정리당(靜履堂) 두연(斗然)의 9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자질(資質)이 뛰어나서 실없는 농담을 하지 아니하 고 소학(小學)으로 몸을 다스리고 대학(大學)에 온 마음을 기울이었으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방법과 경건한 마음을 수립하는 일들을 반드시 선배(先輩)로써 기약하였다. 더욱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중부(仲父)에게 양자로 간 이후로 항상 자신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효자들은 오로지 양친(兩親)만을 섬기는데도 오히려 하루해가 짧은 것을 근심하였는데, 하 물며 나는 양가(兩家)의 두 어버이를 봉양해야 하니 어찌 감히 느리고 게으를 것 인가.”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매 약시중을 들며 소리 내어 울었고, 변(便) 이 단가 쓴가를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다. 어버이가 냇물고기 먹기를 원하는데 때가 바야흐로 한겨울인지라 냇가에 가서 소리 내어 우니, 뱀장어가 얼음을 깨고 나왔으므로 이를 끓여 드려 효험을 보았다. 상(喪)을 당하여 비통함으로 몸을 여 윔이 정도를 넘었으며, 3년 동안 흙덩이를 베고 잤으므로 효도하고 우애하는 방법 과 두루 상세히 살피는 은혜를 마을 사람들이 공경하며 감탄하였다.
 
김광수(金光洙)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후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다.
 
김일겸(金一謙)
광수(光洙)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계승하였으며,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3년상을 마쳤다.
 
김동수(金東秀)
일겸(一謙)의 손자로서 어버이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症勢)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몸이 여위고 약해져서 거의 생명을 잃을 뻔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한 가문의 삼효자(三孝子)라고 칭하였다.
 
노정근(盧正根)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1427~1498)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질(痢疾)병에 걸리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고,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여지니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또 변비(便秘)로 고생할 때 밤낮으로 혀로 핥아주어 병이 나았다. 상(喪)을 당하여서 슬픔으로 인하여 몸 이 여윌 정도로 예제(禮制)를 지성으로 지켰다.
 
윤병필(尹秉弼)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고 진사(進士) 원담공 (源潭公) 헌(瓛)의 6세손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나이 겨우 20세에 당숙(堂叔)에게 양자로 가서, 쌀뜨물에 음식을 버무려 부드러운 음식 을 만들어 드리고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고 아침에 안후 묻기를 지극히 정성으로 하고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어버이 병에 하늘에 살려주기를 빌어 생명(生命)을 연장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응한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또 생가(生家)가 4~5리쯤의 거리에 있는데,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고 아침에 안후 묻 기를 비록 큰 추위나 더위에도 거르지 않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생각하였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나 문장의 어려운 것이건 쉬운 것이건 어버이의 분부를 어기지 아니하였다. 매양 입맛에 맞는 음식을 볼 때마다 가져다 드려 보양(保養) 케 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장사지내고 3년상을 마치기까지 몸이 여위도록 슬퍼 하였으며,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돌보고 청소 하는 일을 어떤 경우에도 거르는 일이 없었으므로, 묘소 곁길에 풀이 자랄 겨를이 없었다. 매번 기일(忌日)을 당하면 재계(齋戒)하고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었 으며, 지성으로 제물(祭物)을 준비하였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일가친족에게 돈후 (敦厚)하고 화목하였으며, 친구들과 인(仁)을 도왔으므로 다만 마을 사람들이 공 경하고 탄복할 뿐만 아니라 유림(儒林)들의 공론(公論)이 스스로 일어났는데, 아 직도 포장(褒獎)되지 않은 것은 한을 품을 만한 일이다. 그의 아들 중섭(仲燮)・용 섭(鏞燮)・광섭(光燮)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효행(孝行)과 문학과 행 실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윤병술(尹秉述)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병필(秉弼)의 동생이다. 어릴 때부터 효도하고 우애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며, 특별히 계모를 봉양하면서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 겁게 하였다. 물에서 고기 잡고 산에서 땔나무를 해서 음식 공양(供養)을 이어가 고 추위와 더위를 조절하니, 그의 어머니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비록 내 몸에서 낳은 아들이라도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는 도리가 반드시 이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 다.”하였다. 또 부모가 없는 조카가 있었는데 사랑으로 거두어 기르면서 자기 몸에 서 낳은 아들들과 다름이 없게 하였으므로 일가 친족과 마을 사람들이 탄복하며 칭찬하였다.
 
황희영(黃熙榮)
본관은 우주(紆州)이며 문숙공(文肅公) 거중(居中)의 후손이다. 아버지의 상 (喪)을 당하였는데 마침 이웃집에 불이 나서 그 불이 궤석(几席)에 미치자 희영 (熙榮)이 아버지의 관(棺)을 안고 통곡하니 바람이 불어서 도리어 불을 껐다. 효성 으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상의(李相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정려효자(旌閭孝子)로 교관(敎官)에 증직된 함영(咸榮) 의 아들이며, 극지(克趾)의 아버지이다. 효성으로 어버이의 뜻과 몸을 받들어 봉 양하여 자그마한 거스름도 없었다. 어버이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症勢)를 시험하였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6년 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 하고 예제(禮制)를 극진히 준수하였다. 그의 동생 영의(英儀)도 타고난 성품이 순후(純厚)하여 하나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박형근(朴馨根)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후손이다. 큰아버지의 집으로 양자를 가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역시 세상을 떠났으나 자신이 어려서 복(服) 을 입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다가, 그의 아버지 나이 회갑이 되어서 어버이 무덤을 옮겨 다시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오병현(吳秉賢)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현감(縣監)을 지낸 섭하(燮河)의 후손이다. 그가 태어나서 겨우 3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집을 떠나 수십 년 동안 객지에 떠돌았으므로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어머니 박씨(朴氏)는 밤낮으로 하늘에 비느라 서 리와 눈이 등을 하얗게 덮었는데, 뜻밖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북쪽지방 장진 (長津)으로부터 왔다. 이에 아들인 병현(秉賢)은 발을 싸매고 수천 리 길을 걸어 영구(靈柩)를 옮겨다가 장사를 지냈다. 그 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도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김정달(金正達)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문민공(文愍公) 일손(馹孫:1468~1498)의 후손이다. 타 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으로 학업을 닦 았다. 어버이를 섬기는데 아버지의 연세가 90세에 하는 일이 정신이 많이 흐려지 고 망령되었으나 뜻을 따르고 어기지 아니하며, 죽을 때까지 명령에 따랐다. 상 (喪)을 당하여는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며, 형제에게 우애하고 일가 친족들과도 화목하였다.
 
전완풍(全完豊)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정려(旌閭)효자로서 교관(敎官)에 증직(贈職)된 백철 (百喆)의 아들이다. 10년 동안 약시중을 들면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 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려 소생케 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송충(松蟲)이를 잡아먹어 곧 충재(蟲災)가 사라졌다. 암행어사 이교영(李敎永)이 술과 안주로써 대접하고 암행어사의 장계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한정교(韓廷敎)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다. 어려서 효경(孝經)을 읽고 경서의 뜻을 궁구(窮究)하여 깨달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시묘(侍墓)하던 초막을 벗어나지 아니하였고,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아니하 였으며, 묘소를 돌보고 깨끗이 청소하는 일을 쉬지 아니하였다.
 
한양수(韓良洙)
정교(廷敎)의 손자이다. 그의 어머니가 학질(瘧疾)을 앓을 때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고기와 섞어 끓여 드리고 효험을 보았다. 상(喪)을 당하여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거적자리에서 살았으며, 슬픔으로 몸을 여윈 것이 정도를 넘었다.
 
전홍준(全弘俊)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환성군(歡城君) 섭(聶)의 후손이다. 그의 나이 겨우 16 세에 어버이의 병환이 점차 위급해져가고 있을 때, 물고기와 나물을 먹고 싶어 하였으나 추운 겨울이라서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소리 내어 울면서 하늘에 비니 새 고사리가 동산에 싹을 틔우고, 잉어장수가 마침 마을에 도착하여 사서 끓여 드렸다.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죽을 마셨으며,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가서 곡 (哭)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호랑이가 호위를 하며 따랐다.
 
김사원(金思元)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두연(斗然)의 손자이다. 효심(孝心)이 지극히 순수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일이 있으면 자신이 몸소 아버지를 대신하여 힘썼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면서 집과는 거리가 다소 먼데도 밤에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펴 고, 아침에 안후 묻는 일을 거르지 아니하였다. 어머니가 이질(痢疾)병을 앓았을 때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고, 아버지의 병환이 점차 위급해지자 손가 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비통함으로 인하여 몸이 여윔이 정도를 넘었다.
 
송규호(宋奎浩)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둔학(遯壑) 경원(慶元)의 후손이다. 어머니 연세가 80세에 평소 가래가 끓고 숨이 찬 병으로 고생하였으므로, 뱀즙을 드리고자 하였으나 때가 겨울철이라 구할 수가 없었는데, 마침 홍사(紅蛇)가 마당으로 들어왔으므로 이를 잡아 끓여 드려 즉시 효험이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에 물을 길어다 놓고 하늘 에 비니 물동이에 이름 없는 물고기 한 마리가 나타나서 끓여 드려 3일 동안 회생 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마을 뒤에 장사지내고 아침 저녁으로 가서 곡(哭)을 하였 다.
 
이원의(李元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정려(旌閭) 효자 광한(匡漢)의 손자로서 도정(都正) 벼 슬을 하였다. 효성과 품행이 매우 뛰어나고 문학을 겸하여 갖추었다. 어버이 병환 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준수하 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성리학에 열중하여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으며, 그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은 세상을 교화(敎化)하는 데 공이 많았다.
 
이종달(李宗達)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청풍당(淸風堂) 성임(聖任)의 후손으로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매우 순수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있는 힘을 다하 였다.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였고, 3년상을 마치고는 초하루와 보 름날에 묘소에 찾아가 돌보고 청소를 하였다. 매번 얘기하다가 말이 어버이에게 미치면 피를 흘리듯 눈물을 흘렸다.
 
이 경(李 涇)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문효공(文孝公) 천(蒨)의 후손이다. 재능과 품행이 뛰어 났으며, 어버이를 섬기면서 그 뜻에 순종하였다. 정유(1597)재란(再亂) 때 어버이 를 모시고 함흥(咸興)에 피난하였고, 신축년(1601)에 상(喪)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에도 그해가 다 지나도록 향락(享樂)의 자리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윤태중(尹泰重)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어버이의 병환이 위급할 때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비통함으로 몸을 여윈 것이 정도를 넘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을 하였다.
 
윤병한(尹秉漢)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어 버이를 섬겼는데, 집안이 본래 빈한하였으므로 부지런히 농사에 힘써 맛있는 음식 을 공양(供養)하되, 그의 어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미리 준비하여 두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지극히 받들고 순종하였으며, 일가 친족들 과 화목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여 감탄하였다.
 
이인홍(李仁弘)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상산군(商山君) 민도(敏道)의 5세손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 이 병환에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며 시묘살이를 하였고, 3년 복(服)을 벗은 뒤에는 매일 새벽에 사당에 참배하였는데 늙도록 이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성리학의 학설을 깨달았다. 효도와 학문으로 써 율곡선생의 추천을 받아,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렸는데 많은 치적(治績)을 남 겼으므로 고종(高宗)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정성한(丁聖漢)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만헌(晩軒) 염(焰)의 7세손으로서 탁월(卓越)한 품행(品行)이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섬기기를 아버지를 섬기듯하여, 몸소 땔나무도 하고 밥을 짓기를 고집하여 몸에 온전한 옷이 없었다. 몸소 맛있는 음식을 찾아 구하는데, 하루는 땔나무를 하여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 오니,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서 짧은 시간 사 이에 약을 구할 겨를이 없었다. 마침내 손가락을 잘 라서 피를 마시게 하여 효험이 있었으므로 이어서 열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완전히 회복 되었다가, 80세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여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고종(高宗)때 교 관(敎官)을 증직하였고 정려(旌閭)를 허락하였다.
 
김계룡(金啓龍)
김계룡 효열비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순박하였는데 효성으로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무 위지”(無違志:뜻을 어기지 않음) 3글자를 한평생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머니 병 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며칠 동안 회생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서는 예제(禮制)를 다 지켰다. 고종(高宗) 조정에서 교관(敎官)을 증직하였으며 정려(旌閭)를 허락하였다.
 
김일채(金一采)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병조판서를 지낸 계지(繼至)의 후손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은 하늘이 낸 것이며,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는 데 힘썼다.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3일간의 수명을 연장하 였으며,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항상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였다. 고종 (高宗) 조정에서 감찰(監察)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심탁순(沈鐸淳)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풍산군(豊山君)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고, 참봉을 지낸 진표(鎭杓)의 아들이다. 효도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의 어머니의 이질병을 시중드는데 병이 점차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 며 하늘에 빌었다. 마침내 기절(氣絶)하여 통곡할 즈음에 이르러, 칼을 들어 손가 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흐르게 하여, 꼭 돌아가실 뻔한 어머니가 마침내 하늘의 감응(感應)으로 회생하여 열흘 동안 수명이 연장되었다. 만일 그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 통하지 않았던들 어찌 이 같을 수 있었겠는가!
갑자기 상(喪)을 당하여 초상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절차를 모두 가례(家禮)대로 준수(遵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생들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서 부 (府)와 군(郡)에 단자(單子)37)를 올렸는데, ‘진실로 하늘이 낸 효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에 이를 것인가.’라는 제사(題辭)38)를 내렸다. 전라도관찰사가 임금에게 아뢰는 장계(狀啓)에 들어 있다.
 
곽녹현(郭祿顯)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의 6세손이다. 아버지가 병 을 앓으면서 겨울에 푸른 마늘을 찾았으므로, 제단(祭壇)을 쌓고 하늘에 비니 갑 자기 푸른 마늘이 구름 가운데로부터 나오는지라 이것을 드려서 효험을 보았다.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니 소생(蘇生)하였으며, 상을 당하 여서는 예를 다하였다.
 
이 흡(李 洽)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정간공(貞簡公) 목(穆)의 9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도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효성이 더욱 돈독하였다. 어머니가 병을 앓은 3달 동안 매일 밤 하늘에 빌었고, 매일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다.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 게 하여 잠시 회생(回生)함을 얻자, 차례로 손가락을 씹어서 10손가락이 모두 깨어 졌다.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했는데 상서로운 기운이 그 여막(廬幕)을 둘렀다.
 
이존경(李存慶)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정간공(貞簡公) 목(穆)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병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하늘에 빌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의 지시를 받아 물가에서 자라를 얻어서 끓여 드리고 효험을 얻었 다.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조희제(趙熙濟)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세마(洗馬)를 지낸 평(平)의 9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선량하여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는 행실이 매우 뛰어났다. 어머니가 병들자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고 잠자리에 들지 아니하였으며, 병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계속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열 손가락이 모두 절단되었다. 상 (喪)을 당하여 장사지낸 후 여묘(廬墓)살이를 하였으며, 홀아버지를 봉양하는 데 효성이 더욱 돈독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윤병제(尹秉濟)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순후하며, 그의 어버이에게 효도함에 있어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그의 아우에게 우애함에 있어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으며, 홀어미인 형수와 한집에 살면 서 그의 뜻을 어긴 일이 없었다. 또 중병(重病)으로 어버이가 7, 8개월 동안 위급하 였는데, 약을 먼 지방에까지 찾아다니며 구하느라 가정의 재물을 모두 탕진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3년상(喪)을 지내면서, 예절(禮節)이 정도를 넘은 것을 마을 사람 들이 모두 아는 바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행(善行)을 칭찬하였다.
 
김성흥(金聖興)
본관은 부령(扶寧)이며,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손으로서 좌승지에 증직(贈職)되었다.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연장하였으 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묘살이를 하면서도 짚신을 삼아 곡식과 바꾸어 제물 올리는 것을 거르지 아니하였는데 호랑이가 와서 항상 호위하였다. 어머니가 병들 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하였으며, 국상(國喪)에 술과 안주를 갖추어 곡 (哭)하며 제물을 올렸다.
 
노광우(盧光禹)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1427~1498)의 후손이다. 11 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퍼함으로 몸을 여윈 것이 마치 나이 많은 사람과 같았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어머니가 설사병으로 변이 치마와 내의를 더럽히니 몸소 그것을 물에 빨았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모든 것을 예제(禮制)대로 준수하 여 친우를 접대하니 이웃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전종탁(全鍾鐸)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충건공(忠建公) 익(翊)의 후손이다.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여 3일간의 수명을 연장하였고, 아버지 상을 다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계모(繼母)의 상을 당하여 모두 이전에 준수한 예제(禮制)대로 하였는데, 성묘(省墓)를 갈 때마다 호랑이가 호위하였다.
 
유달조(劉達祖)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문희공(文僖公) 창(敞)의 후손이다. 14세에 아버지를 여 의었는데, 슬퍼함으로 몸이 여위는 것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어머니가 중 풍(中風)을 앓아 여러 해 동안 낫지 아니하므로 의술(醫術)을 공부하여 약을 써서 차도(差度)가 있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물고기와 오리고기를 원하였으므로 수달 을 풀어서 이를 구하여 드리고 효험을 보았다. 제삿날[忌日]에는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아니하였으며, 한편 문학과 덕행이 독실(篤實)하였다.
 
이규봉(李圭鳳)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좌랑(佐郞)에 증직된 익성 (益盛)의 9세손이다. 어버이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며 병 낫기를 하늘에 빌었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함으로써 수명을 연장하였다.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송진남(宋鎭南)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정렬공(貞烈公) 송례(宋禮)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학질을 앓고 있을 때 넓적다리 살을 베어 국에 섞어 들게 하였고, 아버지 병환에 오리고기를 쓰고자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오리 한 마리가 마당에 떨어졌으므로 이것을 끓여 드려 효험을 보았다. 양친(兩親)의 상(喪)을 모두 예제 (禮制)대로 준수하였다.
 
박회근(朴晦根)
본관은 양(密陽)이며, 문절공(文節公) 문빈(文彬)의 후손이다. 아버지의 병환에 변이 단가 쓴가를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그는 비통해하다가 몸이 야위어 뼈가 앙상할 정도였으 며,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윤태연(尹泰淵)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문효공(文孝公) 효손(孝孫)의 후손으로서 음직(蔭職)으로 도정(都正) 벼슬에 나아갔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왼쪽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함으로 2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비통해함으로 몸이 여윈 것이 정도 를 넘었으며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그의 아들 병학(秉鶴)도 세상에 효자라고 알려졌다.
 
박성근(朴成根)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후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준행하였다.
 
박봉근(朴鳳根)
본관은 양(密陽)이며, 응천군(凝川君) 신유(臣蕤)의 후손이다. 부모의 병환에 오른쪽 넓적다리 살을 베어 달여 드렸고, 상을 당하여서는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이인신(李寅新)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의 후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정성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매우 뛰어났다. 홀어머니 를 봉양하는 데는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신체(身體)를 보양 (保養)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동생과 우애하고 가족과는 화목하였다.
 
박진규(朴震圭)
본관은 양(密陽)이며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충원(忠元)의 후손이다. 그의 나 이 흰머리가 되도록 그의 어버이가 건강하였으므로 색동옷을 입고 장난을 하고, 어버이의 뜻을 받들고 순종하는 데 정성을 다였으며, 늙어서까지도 이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다.
 
전홍국(全弘國)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환성군(歡城君) 섭(聶)의 후손이다. 어머니가 병이 들매 고양이가 스스로 와서 약을 지어 드렸고, 잉어가 마침 도착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드렸으며, 메추라기가 품속으로 날아들고 산꿩이 처마에 떨어졌으니, 효성 에 감응하는 바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성묘(省墓)하는 날에 산불이 무덤이 있는 부근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이때 하늘을 향하여 우러러 울부짖으니 바람이 불어서 도리어 불을 껐다.
 
김성철(金星澈)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계림군(雞林君) 균(稛)의 후손으로 참봉 벼슬을 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병들자 산과 하늘에 빌었으며, 약을 받들고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다. 장사지낼 때에 어머니가 남긴 유물(遺物)들을 보며 흘리는 눈물이 마치 샘솟듯 하였다. 그것들을 묻고자 산에 들어가 빌면서 호랑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신령(神靈) 하고 오묘한 지혜를 얻었다. 또한 성리학에도 매우 깊었다.
 
유병소(劉秉劭)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문희공(文僖公) 창(敞)의 후손이다. 가정이 빈한하였으므로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물에서 고기 잡고 산에서 나무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였다.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잘 준수하였으며, 어머니의 병 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한 결과 회생하여 70세까지 살았다.
 
임남수(林南洙)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백화정(百花亭) 훤(愃)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문장의 화려함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나 누차 문과(文科) 회시(會試)에 실패하였다. 어버이 병환으로 여러 해 동안 약시중 들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 고, 산꿩과 얼음장 밑의 물고기를 잡아서 공양하였으나 점차 위태로워지자 손가락 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임현상(林顯相)
남수(南洙)의 아들이다. 어머니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병이 낫기 를 하늘에 빌었으며,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두 번씩이나 손가락을 잘라서 피 를 마시게 하여 마침내 회생하였다.
 
박태호(朴泰鎬)
본관은 양(密陽)이다. 어머니가 병을 앓을 때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고, 세상을 떠나매 3년 동안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었으며, 매일 묘소에 참배하고 청소를 하였다. 효성으로 홀아버지를 봉양하다가 병이 들어서는 변을 맛보고 약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산과 하늘에 쾌차(快差)를 비는 등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윤중섭(尹仲燮)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 하고 효성스러워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고자 항상 노 력하였으며, 비록 먼 지방의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기필코 구하여 드렸다. 또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힘써 농사지어 대대로 내려오던 가도(家道)를 잘 이어갔다. 그의 동생 용섭(鏞燮)・광섭(光燮)과 한집에 살면서 자고 먹는 것을 함 께하면서도 화목하고 즐거움이 또한 깊었다. 어버이를 위하여 묫자리를 구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으며, 안장(安葬)하고 제사를 드리는 데 정성을 다하니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이승채(李承采)
본관은 청해(靑海)이며 중로(重老)의 8세손이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을 앓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는데, 약간 차도(差度)가 있다가 다시 아프면 다시 한 손가락을 자르고 하여, 다섯 손가락이 다 잘리고야 병이 완전히 나았다. 그 뒤 상을 다하여 예제(禮制)를 지켰으며 어머니가 아플 때에도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 게 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통해하다가 몸을 여윔이 정도를 넘었다.
 
최 식(崔 埴)
정려효자(旌閭孝子) 상익(相翊)의 손자이다. 어려서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거 상(居喪) 중에 예를 지켰으며,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모시고 자고, 음식의 조리 를 감독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학질(瘧疾)을 앓을 때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으므로, 고종(高宗)의 조정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贈職)하였다.
 
심진익(沈鎭益)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효심(孝心)이 지극히 순박하여 어머니의 병환이 매우 위중하여 운명(殞命)할 지경에 이르자 손 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그의 동생 진우(鎭愚) 또한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회생하였다. ‘한 집안의 두 효자’라고 마을 사람 들이 존경하며 감탄하였다.
 
한흥교(韓興敎)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후손이며, 참봉을 지낸 경리 (璟履)의 아들이다. 문장이 화려하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면서 뜻을 받들고 신체를 보양(保養)하였으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 후에 이를 행하였다. 그의 아들 규석(圭錫) 또한 효자로 일컬 어졌다.
 
최태영(崔台永)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릴 때부터 능히 어버이 섬길 줄을 알았다. 밤에 이부자리를 펴고 새벽에 안후를 물어서 차고 따뜻 함을 조절하였고, 어버이가 식사를 할 때 곁에서 모시다가 식사 마치기를 기다려 밥을 먹었으며, 어버이가 잠자리에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어버 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 데에 온 정성을 다하였으니, 스스로 자신을 단속한 것으로 칭찬을 받을 만하다.
 
이맹욱(李孟郁)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주계군(朱溪君) 심원(沈源)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기 는 효성이 지극하여 뜻을 받들어 즐겁게 섬기면서 맛있는 음식으로 신체를 보양 (保養)하였다. 어버이 병환에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빌었고,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다. 그의 아들 기중(起仲) 또한 능히 가정의 교훈을 계승하여 지극한 효 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병을 앓을 때 꿈에 신인(神人)의 지시를 받아서 물고기 3마리를 구하여 끓여 들여서 효험이 있었다.
 
한여유(韓汝愈)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김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상을 당하여 묘지를 정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는데 꿈에 한 마리의 호랑이가 한곳을 가리켜 주는지라 지관(地官)에게 부탁하여 가보 니 마침 좋은 자리였으므로, 받들어 장사지내고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박정섭(朴鼎燮)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후손이다. 집안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신체를 보양하는 등 두 가지를 모두 힘써 봉양하였다. 어버이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박종록(朴鍾祿)
본관은 양(密陽)이며 숙민공(肅愍公) 승종(承宗)의 후손이다. 가정은 빈한하 고 어버이는 늙었으나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받들어 봉양하였다. 큰 일이나 작 은 일이나 모두 반드시 어버이에게 아뢴 뒤에 이를 행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능히 예제(禮制)를 다 준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황한길(黃漢吉)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고려 왕조에서 찬성(贊成)을 지낸 하응(河應)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눈이 멀어서 매일밤 하늘에 빌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산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이를 캐어 달여 드린 지 열흘 만에 눈이 갑자기 밝아졌다.
 
황수인(黃守仁)
한길(漢吉)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잃은 뒤 그로 인하여 눈을 못 쓰게 되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대문 앞에서 부르거늘 즉시 나아가 절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너의 집 정원에 인삼을 이미 심어 놓았는데 틀림없이 큰 뿌리가 있을 것이니 약으로 쓰면 반드시 효험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아침에 정원에 가서 과연 큰 뿌리 하나를 캐었는데 이것을 달여 드리고 효험을 보았다.
 
김선황(金善璜)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갑자공신(甲子功臣) 응무(應武)의 6세손으로서 수직 (壽職)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아버지 병환에 변을 맛보아 병세(病勢)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또 세 개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20년의 수명을 연장하였다. 상을 당하여 여묘살 이를 하는데 흰호랑이가 와서 호위하였다. 그의 아들 참봉 낙기(洛基) 또한 효자 로 알려졌다.
 
박영규(朴英奎)
본관은 양(密陽)이며 숙민공(肅愍公) 승종(承宗)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여러 달 동안 병을 앓을 때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 으로 몸이 여윈 것이 정도를 넘었다. 그의 아내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청계(淸溪) 대박(大樸)의 후손으로 시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황기원(黃基源)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방촌(厖村) 희(喜)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눈이 멀었 으므로 좌우에서 부축하여 모시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또 병이 위급하 여지자 변을 맛보아 병세(病勢)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몸을 여윔이 정도를 넘었으며, 묘지를 살피고 청소하는 것을 거르지 아니하였다. 그의 아들 하석(河錫) 또한 효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오 연(吳 淵)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덕계(德溪) 건(健)의 10세손이다. 어버이의 병환에 손가 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송하였다.
 
권문철(權文喆)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참봉(參奉)을 지냈다. 홀어머니를 섬기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을 다하였으며, 그의 동생 삼철(三喆)과 한집에 함께 살면서 우애 가 더욱 돈독하였고 일가 친족과 화목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리고 묘를 쓸 만한 땅을 사서 어버이를 매장하니 더욱 감탄하였다.
 
강기영(姜基永)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통계(通溪) 회중(淮仲)의 후손이다. 여러 해 동안 서울에 머물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병환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일 2백 리를 걸어 3일 만에 도착하니 수명이 장차 거의 다한지라,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15일간 수명을 연장하였다.
 
나경식(羅景式)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정려효자로서 교관(敎官)에 증직되었던 한정(漢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성인(成人)과 다름이 없었다. 어버이 가 병들매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들게 하여, 거의 끊어질 뻔하였던 수명을 다소 지속되게 하였다. 또 상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준수하고 산소를 돌보았다.
 
나시찬(羅時纘)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정려효자로서 교관(敎官)에 증직되었던 한정(漢井)의 손자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되 뜻을 받들 어 즐겁게 봉양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신체를 보양(保養)하였다. 그의 어머니의 병환에 변이 단가 쓴가를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예제 (禮制)를 다하였으며, 매일 반드시 산소를 돌보고 깨끗이 청소하였다.
 
박영달(朴永達)
본관은 양(密陽)이며 강수(江叟) 훈(薰)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순박하였으며, 효성으로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초상(初喪)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절차를 모두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며, 3년 복(服)을 마치고는 초하루와 보름날에 묘지에 가서 참배하고 깨끗이 청소를 하였다.
 
신영균(申永均)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정려효자 성희(聖熙)의 큰아들이다. 어버이의 병환에 꿈에 신초(神草)를 얻어 어버이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병환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하였다.
 
홍현섭(洪鉉燮)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문정공(文正公) 언박(彦博)의 후손이다. 어버이 나이 80 세에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감각을 잃었으므로 밤낮으로 약 시중을 들었으며, 변 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는데, 꿈에 신약(神藥)을 얻어 복용함으로써 뚜렷 한 효험을 얻었다.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므로 고종(高宗) 때 정려 (旌閭)를 명하였다.
 
이함영(李咸榮)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집안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므로, 몸소 산에 가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잡아서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는 데 힘을 다하였다. 아버지가 병들매 넓적다리 살을 베어 끓여 드림으로써 세 달 동안 회생하였는데, 뒤에 다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으므로 고종(高宗) 조정에서 교관(敎官)을 증직하였다.
 
이기적(李起啇)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그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그의 동생들과 우애하고 집안 사람들과 화목하며 두루 인척(姻戚)에게까지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노병양(魯柄瀁)
본관은 강화(江華)이고 부사(府使)를 지낸 여(輿)의 후손이다. 80세의 양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아들로서의 직분을 다하였다. 가정이 본래 빈한하였으므로 힘써 농사지어 간신히 가정의 살림 형편을 유지하였다. 그의 생가(生家)의 동생과 한 집에 살면서 우애가 아주 돈독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참봉(參奉) 벼슬을 했다.
 
최익권(崔益權)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만육(晩六) 양(瀁:1352~1424)의 후손이다. 부모에게 효 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렸으며, 가정이 매우 빈한하여 농사 에 힘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80세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맛있는 음식 으로 공양(供養)하였으며, 형제들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니 스스로 자기를 단속한 것으로 칭찬받을 만하다.
 
김진옥(金震玉)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계림군(雞林君) 균(稛)의 후손이다. 동생 진백(震伯)과 함께 효심(孝心)이 많아서, 그의 어머니가 병들매 형은 손가락을 자르고, 동생은 손가락을 찢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며칠 동안 회생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형은 산소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동생은 집안에서 여묘살이를 하면서 항상 물을 길어 나를 것을 걱정하였는데, 묘소 아래에서 샘물이 솟아나왔으므로 사람들이 이 샘을 효천(孝泉)이라 불렀다.
 
백사휘(白思輝)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매우 돈독하였다. 나이 겨우 12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3년 동안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는 것이 마치 성 인(成人)과 같았다.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면서 뜻을 받들고 신체를 보양(保養)하 기를 지극히 하였다.
 
곽 기(郭 璣)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의 5세손이다. 효성과 우애 가 지극히 순박하여 어버이 상을 당하여는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형 섬기기를 마 치 아버지를 섬기듯하고 재물에 너와 나의 것이 없었다.
 
하성팔(河聖八)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문효공(文孝公) 연(演:1376~1453)의 후손이다. 나이가 아직 어렸을 때부터 땔나무를 해서 어버이를 봉양하였는데, 진귀한 과일이나 색다 른 음식을 얻으면 가슴에 숨겼다가 가져다 드렸다. 어버이 병환에 변이 단가 쓴가 를 맛보아 병의 증세를 확인하고 하늘에 수명을 빌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하루의 수명을 연장하였다. 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몹시 슬퍼하여 몸이 여위었으며,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므로 고종(高宗) 조정에 서 정려(旌閭)를 허락하였다.
 
김사광(金思光)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일겸(一謙)의 증손으로 교원(敎員) 벼슬을 했다. 어버 이 병환에 제단(祭壇)을 쌓고 하늘에 빌었으며,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다 지켰 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산소를 돌보고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을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거르지 아니하였다.
 
김준상(金駿商)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정려효자 계룡(啓龍)의 손자이다. 집안이 빈한한데도 어 버이를 봉양하면서 맛있는 음식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어버이의 병환에 목욕재계 하고 하늘에 빌었고, 상을 당하여 비통함으로 인하여 몸을 여윔이 정도를 넘었다. 매양 기일(忌日)을 당하면 목욕재계하고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정기상(鄭基相)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노송정(老松亭) 지년(知年)의 후손으로 도정(都正) 벼슬을 하였다. 어버이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매일 산소를 살폈다. 그의 아들 재권(載權) 역시 효심이 돈독하였다.
 
문우현(文禹鉉)
문우현 정려비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 1329~1398)의 후손이다.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자기 동생 귀현(龜鉉)・태현(台鉉)과 함께 밤낮으로 약 수 발을 들면서 옷의 띠를 풀지 아니하였고,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그 수명을 연장하였다. 뒤에 또 수중다리(瘇)를 앓게 되자 3형제가 함께 입으로 빨아서 병이 나았다. 형제 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으며, 집안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신용희(申龍熙)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무순공(武純公) 개(漑)의 후손으로 문음(門蔭)으로 참봉(參奉)이 되어 현감을 지냈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하였다. 그가 성장하여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면서, 어머니가 병들매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였고, 뒤에 또 병에 걸리자 세 번이나 자기의 손가락 을 잘랐으며, 상을 당하여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진동욱(晉東旭)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용성군(龍城君) 석(錫)의 후손이다. 어버이의 병환에 변이 단가 쓴가를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고, 상을 당하여 슬퍼함으로 몸을 야윔이 정도를 넘었으며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형제와 우애가 돈독하여 재물에 네 것 내 것이 없었다.
 
진광욱(晉光旭)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용성군(龍城君) 석(錫)의 후손이다. 어버이의 병환에 약 수발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제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슬퍼함으로 몸이 야윈 것이 정도를 넘어서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신용균(申瑢均)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무순공(武純公) 개(漑)의 후손이다. 어버이의 병환에 밤낮으로 약시중을 들면서, 약과 음식물을 조섭(調攝)하고 옷과 이불을 세탁하는 일을 몸소 맡아 하였다. 대소변을 매일 밤낮으로 받아내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가지고 가서 드렸다.
 
오창현(吳昌鉉)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보성군(寶城君) 몽을(蒙乙)의 후손이다. 효성과 품행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일찍이 그의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마음속 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이 매우 돈독하여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고, 맛있는 음 식으로 신체를 보양(保養)하였으므로 온 마을에 칭찬이 퍼졌다.
 
김재덕(金在德)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황강(黃岡) 계휘(繼輝:1526~1582)의 후손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이 매우 뛰어나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신체를 보양하였다.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비통해하다가 몸이 야윈 것이 정도를 넘었으며, 장례(葬禮)와 제사를 모두 예(禮)로써 행하였다.
 
하임용(河任容)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상우(相雨)의 아들로서 음직(蔭職)으로 감역(監役)을 지냈다. 효성으로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 면서, 좌우에서 부축하고 보호하여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으로 인하여 몸이 많이 야위었다.
 
하병용(河丙容)
임용(任容)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어버이 병환에 옷의 띠를 풀지 아니하였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손가락을 찢어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상장(喪葬)을 예로써 하였다.
 
백치희(白致熙)
사휘(思輝)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병들어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동생 윤희 (允熙)와 함께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았으며, 제단을 쌓고 하늘에 빌었다. 상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며, 어머니가 종기(腫氣)로 고생을 할 때 형 제가 서로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었고, 두꺼비를 구하여 효험을 보았다.
 
백재옥(白在玉)
윤희(允熙)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하늘에 수명을 연장하여 줄 것을 빌었다.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며, 묘소를 돌보고 깨끗이 청소하는 일을 게을 리하지 아니하였다.
 
최광구(崔光久)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연촌(烟村) 덕지(德之:1384~1455)의 후손이다.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병환이 위급해지자 그의 아내 양천(陽川)허씨(許氏) 또한 손가락을 잘랐다.
 
이수황(李壽熀)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익재(益齋) 제현(齊賢:1287~1367)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가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을 때 물고기가 얼음을 깨고 뛰어나왔고, 꿩이 품안으로 날아들어 이것들을 삶아 드려서 효험을 보았다.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 락을 찢어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하상우(河相雨)
하상우 정려비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문효공(文孝公) 연(演:1376~1453)의 후손으로 수직(壽職)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 냈다. 장사지내기 전에 살아 있을 때의 예절로써 봉양하는 것과, 장례(葬禮)와 제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 으며, 나이 90세에 이르도록 한평생 어버 이를 애도하며 추모하였다.
 
김유성(金有聲)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백촌(白村) 문기(文起:1399~1456)의 후손이다. 어머니 의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하였으며, 장사지낼 때 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는데, 얼음이 얼어서 순조롭게 건널 수 있었다. 그의 아들 태곤(泰坤)은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물고기를 구하니 물고기가 얼음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자 경현(慶鉉)・교현(敎鉉) 역시 효도를 했으며, 증손자 정록(正祿)은 어머니 병환을 위하여, 손가락을 자르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 그 피를 마시고 고기 를 먹게 하였다.
 
백선갑(白先甲)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휴암(休菴) 인걸(人傑:1497~1579)의 후손이다. 집안이 빈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므로 품팔이를 하여 음식을 공양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였으나 가난으로 인하여 장사지내기가 어려웠으므로, 아침저녁으로 빈소(殯所)에 가서 곡(哭)하는 것을 바람이 불고 눈이 와도 거르지 아니하였다. 아들 석태 (錫台)도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하경용(河景容)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연(演)의 후손이다. 농사짓고 책을 읽으면서 봉양하였고, 상(喪)을 당하여 슬퍼함으로 몸이 야윈 것이 정도를 넘었으며, 산소를 돌보고 청소하는 일을 거르지 아니하였다.
 
신현숙(申鉉淑)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무순공(武純公) 개(漑)의 후손이다. 나이 겨우 12세 때 아버지가 여러 해 동안 학질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두꺼비와 비둘기가 스스로 날아왔으므로 약을 지어 드림으로써 병세가 호전되었 다. 상(喪)을 당하여 아침저녁으로 산중에 마련한 빈소(山殯)에 가서 곡(哭)하였 으며, 비가 올 때 옷을 벗어서 빈소를 덮어주면 비가 즉시 그쳤다.
 
박만두(朴萬斗)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인덕정(仁德亭) 번(蕃)의 9세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얼 음을 깨고 고기를 잡았으며, 변을 맛보아 병세를 시험하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 복용케 하여 열흘 동안 회생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동춘(李東春)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활계(活溪) 대유(大㽕)의 8세손이다. 어버이 섬김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형제간에 우애 또한 매우 돈독하였다. 그의 동생 동석(東碩)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한 쌍의 아름다운 옥이라 하였다.
 
이병선(李柄善)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정간공(貞簡公) 목(穆)의 후손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 오는 효성은 하늘이 낸 사람이었다.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며, 매 일 산소를 돌보고 청소하는 데 힘써서,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이를 피하지 아니하 였다.
 
최도휴(崔道休)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수성백(隋城伯) 영규(永奎)의 후손으로 오위장(五衛將) 겸 도정(都正)을 지냈다. 어버이가 병을 앓으면서 냇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였 으므로,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 삶아 드려 효험을 보았다. 거상(居喪) 중에는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세수도 하지 아니하였다.
 
김광보(金光寶)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광산군(光山君) 흥광(興光)의 후손이다. 집안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므로, 나뭇짐을 팔아서 고기를 사다가 어버이를 공양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잘 지켰다.
 
유장원(劉長源)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문희공(文僖公) 창(敞)의 후손이다. 10세 때 어머니 상 을 당하여 몸이 여위도록 슬퍼하고 모든 예제(禮制)를 준수하여, 비록 예절을 좋 아하는 사람까지도 그에게 미칠 수가 없었다. 가정이 빈한하여 30세가 되어서도 아직 장가들지 못하였으므로, 홀아비를 봉양하면서 사랑과 존경을 다 갖추었으며,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전철순(全徹淳)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효자 홍준(弘俊)의 5세손이다. 그의 효성과 우애가 지극 하여 어버이 병환에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계모(繼母)를 시중들 고 봉양하면서 정성으로 공경함이 매우 돈독하였다. 뜻을 받들어 봉양하고 신체를 보양(保養)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다섯 형제가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덮고 자면 서도 매우 화목하였으며 기쁘고 즐거웠다.
 
전석우(全錫禹)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들매 돌로 손가락을 깨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케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힘써 상례(喪禮)를 지켰다. 또 홀로된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고 새벽에 안후를 묻는 일과,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일을 하루도 빠뜨리지 아니하였다. 면회(面會)에서 상을 받았다.
 
정기영(鄭基永)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익혜공(翼惠公) 난종(蘭宗)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굳세어 흔들리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데 정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에게 맛 있는 음식을 제공키 위하여, 비록 한겨울 얼음이 얼고 눈이 오는 때에도 냇물고기 를 잡아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드렸으므로, 사람들이 효자라고 일컬었다.
 
박재길(朴在吉)
본관은 양(密陽)이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리자 일심(一心)으로 병을 구호(救護)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부부가 서로 이어가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철저히 준수하였다.
 
신병덕(申秉德)
신병덕·신성희 양효각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무순공(武純公) 개(漑)의 후손이다. 어버이의 병환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렸으며, 상을 당하 여서는 몹시 슬퍼함으로 몸이 야윔이 정 도를 넘었다. 고종(高宗) 때 정려를 명하였다.
 
신성희(申聖熙)
병덕(秉德)의 아들로 가정의 교훈을 계승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 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케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철저히 준수 하였으므로 고종(高宗) 조정에서 정려를 허락하였다.
 
신석곤(申錫崑)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무순공(武純公) 개(漑)의 후손이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기반찬 없는 밥을 먹었으며,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하였다.
 
나정기(羅廷驥)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승지(承旨)를 지낸 충좌(忠佐)의 종손(從孫)이다. 맏형, 둘째 형과 함께 효성과 우애가 아주 돈독하였는데, 아버지가 종기(疽)를 앓을때 입으로 고름을 빨았고,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였으며, 닭장의 홰(架)로 물고기를 잡고 나무 작대기로 꿩을 때려잡아서, 어버이에게 맛있 는 음식으로 공양(供養)하였다.
 
윤병묵(尹秉黙)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학문과 품행으로 향 천(鄕薦)을 받았던 진승(晉昇)의 5세손이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히 순수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비록 먼 지방이라도 구하여 왔으며,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도리를 즐겁게 실천하여 약소(約所)로부터 상을 받았다.
 
윤장섭(尹壯燮)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 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고 머리를 빗지 아니하였으며, 상례(喪禮)를 봉행하면서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홀아버지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어기지 않고 받들었으며, 비록 먼 지방의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도 구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供養)하였다. 약소(約所)로부터 상(賞)을 받았다.
 
김진태(金鎭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도로 마음을 다스렸다. 어버이 병환이 위급해질 즈음에, 다섯 손가락을 찢어 그 피를 이어 마시게 하여 마침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었다. 어버이를 섬기면서 그 뜻을 받들어 봉양하고 신체를 받들 어 보양(保養)하는 데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약소(約所)로부터 상(賞)을 받았다.
 
>+ 이상은 삼강록(三綱錄) 중에서 충신, 효자를 모두 베껴 썼다.
 
 
1.1.3. 3) 선행편(善行篇)*
* 원문 205쪽 참조.
 
이 선행편은 갑오년(1894) 이전의 옛 읍지(邑誌:舊誌)에서 모으고 여러 공적(公的)인 문서와 사적(私的)인 기록들을 상고하였으며, 향천(鄕薦)에 오른 인물과 관 찰사의 장계(狀啓)에 오른 인물들을 보고 들은 바에 따라서 베껴낸 것이다. 때문 에 이처럼 구지(舊誌)를 예전대로 빠뜨리지 않고 다시 베꼈다. 그리고 다음의 박 번(朴蕃)은 앞의 서원(書院) 조와 정려(旌閭) 조에 보이고, 박훈(朴薰)도 서원과 정려 조에 보이며, 홍붕(洪鵬)과 조평(趙平)과 이흥발(李興勃)도 다같이 위 서원 조에 보인다. 홍정붕(洪鼎鵬)의 동생 홍시희(洪時喜), 붕(鵬)의 손자 홍이원(洪履元), 최남주(崔南柱), 박승섭(朴承燮), 이수민(李修敏), 홍우주(洪禹疇), 홍서주(洪敍疇), 윤진승(尹晉昇)은 학문과 품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제자 조유원(趙有瑗)은 학문과 품행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최상원(崔常遠)도 학문과 품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도암(陶菴)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으며, 향천(鄕薦)과 관찰사(觀察使)의 장계(狀啓)에 들었다. 호산처사(湖山處士) 이달효(李達孝)와 성담(性潭) 문하에 드나들었던 홍 윤승(洪允升)도 여러 차례 향천(鄕薦)에 올랐다. 이건(李鍵)은 성담(性潭)의 문인 으로 향천(鄕薦)과 관찰사의 장계에 들었고, 복호(復戶)를 받았으며, 심위현(沈緯賢)도 성담(性潭)의 문인이다. 윤행조(尹行祚)는 학문과 품행으로 세상에 알려졌 으며, 정덕수(鄭德綏)는 성담(性潭)의 문인이라고 전한다. 윤종환(尹宗煥)은 문 학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양식(梁栻)은 문장이 화려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치순(韓致淳), 이근만(李根萬), 박춘건(朴春鍵), 곽재남(郭載南), 윤행기(尹行騏), 송연영(宋延英), 홍염조(洪念祖), 박정하(朴鼎夏) 오면수(吳冕洙), 윤상현 (尹相鉉), 홍헌섭(洪憲燮), 최준익(崔峻翼), 심환두(沈煥斗), 이식(李湜), 유훤(柳暄), 조재학(趙載學), 이각(李珏), 한승(韓乘), 이봉기(李鳳基), 이석하(李錫賀), 이태영(李泰榮), 이회덕(李會德), 심필원(沈弼遠), 박정한(朴鼎漢), 한규성(韓圭成), 심병원(沈炳遠), 이현의(李賢儀), 윤태일(尹泰一)은 관찰사(觀察使)가 임금 에게 추천하는 장계(狀啓)에 들어있고, 윤태로(尹泰魯), 한기필(韓基弼), 이병의 (李炳儀)는 모두 향천(鄕薦)에 들어 있다.
 

 
 

2. 원문

 

2.1. 忠孝烈

湖南三綱錄中抄出而又其外一從有司收單
 
 
2.1.1. 忠節篇
 
朴順達
咸陽人行軍資監參奉贈兵曹參判己卯名賢收心齋薰之孫自幼正直方嚴慷慨有大節不以功名爲意倡義使金公千鎰一見禮重焉與高霽峯姨從兄弟也壬辰亂與金千鎰高霽峯同擧義兵丁酉八月二十五日殉節
 
洪碩舫
南陽人自幼時聦明點59)句人多異之官戶曹佐郞至原州牧使居官莅職自守不撓壬辰亂大駕西幸公拜陳疏以紙布物件資孫宇慶進獻于行在上嘉之特授嘉善加孫宇慶四品職孫宇慶使家僮且資糧于高霽峯陣中甲午公年八十七卒
 
李斗然
慶州人號靜履堂文孝公菊堂蒨十一代孫贈參判號西溪緯子鄭寒岡門人中司馬官大司憲甲子亂上幸公州公與同志倡義與副元帥守一合勢討平丙子亂與雲巖李興渤諸公倡義募兵進至果川聞和成痛哭而歸於雲水聖壽山中以一區自作大明之地自後不見曆書以花葉驗時乙酉卒加麻從葬者百有餘人訃聞于朝上震悼不己見倡義錄
 
宋慶元
礪山人號遯壑貞烈公六世孫文章道德爲世所稱端廟遜位公在未官與再從兄忠剛公侃謝世遯跡以歿其身與南秋江金梅月爲切友端廟賓天痛哭而隱於伯夷峯下享新安院
 
郭 都
玄風人號魯齋苞山君郛後官府使以淸白陞都丞㫖莊陵遜位時泣別六臣退隱于紺嶽山杜門晦跡每聞子規北向痛哭莊陵遜位屢徵不起因南下止于任實魯山與生徒討論經籍亨三溪祠
 
趙 平
咸安人號雲壑逸60)掌令舜歲子沙溪門人中司馬除洗馬內外艱皆廬墓壬辰亂擧義兵入南原蛟龍城多殲賊徒築重峯霽峯義壇及七百義塚於錦山甲子亂與李天默尙馨尹後村烇諸公扈鶴駕至全州丙子亂與李雲巖興渤諸公倡義和成抗疏斥和謝絶世事坐不向西有蹈海之志朝廷惜其去而拜持平傳㫖特書崇禎年號以明尊周之義
 
韓應聖
淸州人號龜窩淸城終孫之玄孫重峯趙先生門人壬辰亂公率家僮數十馳赴軍中僃陳方畧先生奇壯之錦山之戰公爲先鋒遂奮擊斬十餘級賊圍甚急與七百義士同殉奴夫協61)収屍歸葬壬辰後屢贈至吏曹參議兼待講院輔德旌閭前立忠奴夫協碑參議梁周翊撰狀蘆沙奇正鎭撰碣銘淵齋宋秉璿撰墓表
 
郭興懋
玄風人號伴松堂淸白吏都五世孫牛溪門人壬辰亂與梁朴二壯士率家僮七十餘人62)運糧數百斛赴龍灣上引見深加奘歎除僉正錄扈 聖勳
 
郭維藩
玄風人號鰲巖魯齋都七世孫壽職通政丙子難倡義至礪山見號召使鄭畸翁弘宣公與語而噐之同到華城聞和成各自痛哭而歸不勝憤惋於馬上作詩述懷享三溪祠
 
吳變夏
咸陽人號歸休亭吏參安紀子官縣監又莊陵遜位卽日投紱隱于任實伯夷山下每夜聞子規輒誦御製詩終夜痛哭享深谷祠
 
吳廷曄
咸陽人號守巖堂歸休亭五世孫官勵節校尉丙子與李西歸起浡擧義兵勤王聞和成痛哭而歸享㴱谷祠
 
尹殷柱
南原人號逸63)軒忠 簡公璜五世孫中司馬居齋時當壬辰亂與邊巡使暹四月二十五日 扈駕于龍灣多有勳勞入二等功臣特除健元陵參奉南下任實上東
 
沈 棹
豊山人靖襄公龜齡后以壬辰功臣官司僕寺正囙以不仕卜居于上東官前里
 
李聖任
商山人贈吏參仁弘子武郡守父喪廬墓宣廟朝以孝行登剡丁內憂於淸道任所時倭亂猖獗遂起復從軍與郭再祐諸公抗義討賊 宣廟嘉之書賜淸風堂三字
 
吳 誠
咸陽人以宣傳官癸巳率兵馬直赴晉州與復讐將高從厚同力拒戰城陷同死
 
金翼龍
慶州人登武科壬辰亂戰熊峙卽赴龍灣 行在除守門將
 
朴乃成
密陽人壬辰隨 天將李提督如松大破平壤賊除部將
 
洪宇慶
南陽人碩舫孫壬辰扈 駕行在丁酉送米穀于召募使李廷鸞陣
 
崔應淑
全州人中進士居齋時當壬亂大駕西狩扈駕至和陽平亂酬功之日入三等功臣自其後遯世晦跡
 
李順吉
商山人贈兵判聖任子孝根天賦內外艱啜粥守墓丙子亂賣田庄以備軍器與黃廷稷同赴陣至光敎山聞和痛哭 贈參贊
 
李興渤
韓山人丙子亂淸兵犯京以玉果倅聞南漢圍急與弟起渤擧義兵到淸州聞和成痛哭遯居雲巖
 
李得寏
韓山人丙子倡義後退居南涯
 
金應武
金海人武宣傳甲子難負玉體扈駕公州上曰功臣六十餘人擧而黙數則金應武之功不在李曙之下御製二句詩曰天生金應武爲我柱石臣贈判尹錄振武原從勳
 
趙 頠
淳昌人丙子難聞李起渤傳檄道內與從姪克謙倡義募兵粟率家僮直赴礪山聞講和痛哭而歸 除別提不就
 
申 漑
平山人李一齋門人壬辰難扈駕有功勞贈左贊成諡武純封平原君純廟朝旌閭
 
劉厚壽
江陵人文僖公敞后甲子難率家僮十餘人倡義勤王行到完見完伯語及時事巡使壯其義授以三營都訓導之任遂領兵馬到礪山聞亂靖悉以所帶兵糧納于巡營事 聞除訓練判官義旅十人皆給復還家皆許贖良
 
黃兌亨
昌原人壬辰赴高霽峯幕多有功勞陞通政
 
趙元凱
淳昌人以箕子殿參奉當壬亂賊酋拿致陣中以鐵鞭亂打終不屈流血三日竟死
 
金招栢
宣武原從功臣
 
金 參
癸巳戰亡晉州
 
崔 弼
壬辰以義兵將官赴錦山與高霽峯同死
 
李春發
扈駕龍灣登武科除實職嘉善
 
晉宗立
丙子率壯士數十名赴水原廣橋與全羅監司金俊龍結柵山上射殺胡將卽陞通政
 
趙克謙
丙子擧義兵至礪山聞和成歸
 
金士宗
丙子戰亡光溪山
 
金孝男
丙子扈駕南漢囙爲戰死
 
文任軸
丙子扈駕南漢力戰因死贈禦侮將軍訓練僉正
 
嚴大一
丙子扈駕南漢因爲戰死
 
李希禮
甲子亂擧義兵平難 御賜杖屨
 
李日柱
甲子亂64)東殿下全州時赴扈從
 
康 說
英廟戊申希亮難以座首自願領軍到八良峙聞平難歸
 
李台煥
戊申以千摠自願到八良峙聞平亂歸
 
黃友瓊
戊申以把摠從李台煥赴八良峙而歸
 
李孟郁
丙寅洋亂率義兵直抵江華陣中
 
沈弼遠
豊山人明經習禮立正鄕綱甲申亂大駕播遷與畿伯沈相薰謀議倡義率三十三人卽至北關王廟侍從扈衛翌日大駕還位後特書下曰白首寒士爲國擧義如此忠亮罕世之事其後除元陵參奉
 
金星澈
慶州人庚辰洋擾挺身自願上京事寢未果
 
宋道南
礪山人丙寅秋洋賊之陷江華也卽赴巡撫陣中有功勞其後特除通政
 
此以上忠節無漏謄書而孝烈亦爲序次登書
 
 
 
2.1.2. 孝行篇
 
朴 蕃
咸陽人號仁德亭靜菴門人中司馬親病嘗糞驗症願食野鴨冬寒難求號泣川邊死鴨浮水持以供進中廟朝旌閭享鶴亭書65)
 
朴 薰
仁德亭蕃從弟號收心齋靜菴門人中進士被己卯禍母喪廬墓三年冲年喪父周甲追服居廬中廟朝旌閭享鶴亭書66)
 
李 經
慶州人號飯牛堂事親順志居喪執禮廬於墓側因廢科居家與緯綱二弟相愛老而彌篤凡出入必拜家廟親忌雖冬月沐浴齋戒年八十猶不怠
 
李 緯
慶州人號西溪飯牛堂弟常以小學爲律身之具奉養偏母孝愛尤篤己丑橫被士禍謫會寧遠慕慈闈登嶺南望涕淚不絶壬辰蒙宥而還遂絶科業及母喪三日勺飮不入口啜粥三年嘗愛山水卜居雀山之下贈禮曹參判有集一卷
 
尹斗杓
南原人號隱潭處士忠簡公璜十代孫年甫七歲夜有貨賊來刦其親公以身遮之渾身受刃矢死不避羣盜嗟嘆捨去曰此眞出天之孝觀察使金萬吉卽爲啓聞旌閭七歲生旌閭世所罕有公三十三而卒行狀文曰隱潭公只知有父未知有身且曰顔淵三十三而卒公亦死於是豈非其生也不偶而其死也亦不偶也文獻公尹判書行恁撰狀名其居曰孝村芝谷柳進士組撰墓碣銘
 
李國老
全州人號竹泉孝寧大君補六世孫蔭參奉栗谷門人七歲通孝經小學事親至孝養志養軆丁憂廬墓三年享征南祠
 
沈壽寅
豊山人豊山君龜齡十世孫奉其老親極盡孝養丁憂其親手植庭梅因忽枯死撫摩枯梅悲歡不己三年後還生如前壽寅之歿也庭梅又死一條明光起自梅樹光燭于天孽芽復生無乃剛正之氣上徹于天而然耶行義純至文章著世敎誨後學士林宗仰有鄕賢祠之議宋先生性潭換箕撰墓碣宋先生梧村稚圭書贈伴梅堂號且序文淸風金參判東獻序詩集
 
郭垕泰
玄風人號聽溪堂伴松堂興懋曾孫親喪三年未見齒服闋終歲不與宴樂每當私忌與 國忌致齋67)行素硏究性理造詣精深享三溪祠
 
崔鎭紀
全州人號肯齋麗朝忠臣七夕后中進士七歲失恃及長事怙盡誠奉繼母極其孝母亦感悟分財時厚鎭紀而次己出丁憂遵禮盡節六十遭外艱哀毁啜粥朝夕省墓晝賓㐲廬妻孥罕見面目享征南祠
 
沈甲賢
豊山人號花樹亭公以孝友爲己任敦睦宗族手不釋性理之學摳衣丈席性潭門下講究刮磨剖釋奧義藹然有醇儒氣像與宗族始搆亭而以花樹扁額性潭宋先生特扁堂額守宗齋宋先生達洙製重修記
 
宋時熊
礪山人號拒墨堂遯壑慶元八世孫慈母欲求川魚忽有錦鱗躍出氷上又思新麥時當早春忽有掬麥自黃取而進供居廬虎豹移窟蛇虺遠跡享新安院
 
韓必聖
淸州人號晩悔堂府院君確八世孫幼習庭訓講明義理事親克孝養志養軆前後喪一遵朱子禮制享新安院
 
崔景星
全州人號希顔齋肯齋鎭紀子克濟68)庭訓內外艱侍墓六年服闋每晨謁廟享征南祠
 
韓鳴愈
淸州人號鴻雲亭親病思食鶉雉而非時呼泣祝天鶉投跨下雉入懐中丁憂廬墓三年搆一亭于川邊夢有神人賜名曰鴻雲亭享69)新安院
 
崔翼星
全州人號龜湖希顔齋景星弟中司馬克趾父孝前後喪六年廬墓服闋每晨謁廟享征南祠
 
柳以亢
全州人大司諫駱峯七世孫孝奉其親承順愉婉之道瀡滌溫凊之節靡不用極及喪一遵禮制其於本生親亦爲至孝
 
尹 琇
南原人號永慕齋 贈 嘉義大夫隱潭處士旌閭斗杓姪其親喪廬墓三年親患孔劇斷指注血以延四日之命常恨其母早喪追喪三年鹿洞任先生聖周撰行狀曰湖南元氣萃于一家
 
梁復澍
南原人龍城府院君朱雲后其親癠吐血之症甚劇傍求藥餌有一鶉飛入䄂中煎進奏效又爲病疽晝宵吮膿其妻朴氏亦遵夫道嘗糞吮膿同議周旋遭艱一遵朱子家禮
 
宋碩玉
礪山人遯壑慶元八世孫親病裂指注血復穌三日丁憂三年廬墓不食菜果服闋每日省掃至老 靡懈
 
韓好謙
淸州人號新齋府院君確五代孫贈戶參世襲忠孝學有淵源親病祝天連壽丁憂廬墓三年享新安院
 
李時中
全州人孝寧大君補後竭力耕田以供菽水丁憂廬墓服闋不帛不肉終身哀慕今上朝登道啓贈監察入御史啓 贈丞旨
 
李 汲
全州人贈丞旨時中孫早孤奉母承順無違及病嘗糞斷指居喪盡禮年踰七旬每晨謁廟今上朝登道啓贈監察入繡衣啓贈丞旨
 
李 鍵
全州人敬寧君后宋性潭門人親病嘗糞斷指繼母有心疾出門亂走輒隨其後㐲前泣祝如是十餘年母疾遂止
 
李延徽
全義人忠景公廷鸞玄孫純孝博學嘗在京夢父示臂曰吾方病腫汝須急還驚惶歸家果患臂纔經一夕因歿執喪如禮母年八耋病疽又泄因吮膿嘗糞居喪三年行素入繡衣褒又登道啓 除奉訓郞不就 英廟朝贈持平
 
沈命喆
豊山人壽寅子賦性純孝自幼異凡親癠嘗糞祝天丁憂泣血三年每晨謁廟又致力於心經近思等書莫不硏究律己事親皆源於此友愛尤篤敦其宗族又作花樹亭守宗齋達洙宋先生序
 
尹相鉉
南原人孝子斗杓五世孫早廢擧業工於孝經禮說早喪其父追喪三年今上朝贈敎官旌閭行狀孝文公尹判書秉鼎撰本官趙性憙贊曰鄕先生没可祭於社山高水長先生之風誠非虛語也
 
梁 檝
南原人復澍子其親髮際之腫醫云蜈蚣最良然方隆冬雪寒傍求之際雞舍二蚣而來搗而附瘇輒效母病乳朣醫云紅杮爲好然方春二月難求之時泣求於柿木下忽有一陣風捲地葉枯70)査穴中有紅柿二介附腫得效實蹟入道狀中
 
梁學容
南原人五歲喪母幼未服喪九歲始追服三年晨夕省墓有狐當路家狗隨行妖不能逼焉其妻全義李氏亦孝於舅姑
 
蔡寶鑑
平康人壬辰殉節希淵玄孫父母病皆爲裂指以延三日之命丁憂啜粥行素三年廬墓虎來蹲踞了無怖色
 
郭希謙
玄風人伴松堂興懋孫天性孝友律己遵小學居喪依家禮不事擧業獎訓後學
 
趙景麟
咸安人雲壑平子尤庵門人內外艱皆廬墓乙卯士禍上疏被誣謫珎島蒙宥三徵不起
 
郭天斗
玄風人希謙孫十四丁外艱哀毁如老成母病斷指回甦三日居喪遵禮日必省墓風雨不廢
 
趙 琛
咸安人雲壑平玄孫壽職中樞性本至孝母病欲求正月鳩而不得號泣不己隣狗含一首而來服而見效
 
洪濟仁
南陽人敬齋鵬五世孫官戶議至行純篤親癠有得鮒採藥之異及喪有不梳不肉之誠
 
郭載基
玄風人鰲巖維藩五世孫年甫九歲母病嘗糞血指及遭外艱啜粥三年
 
宋思明
礪山人距墨堂時熊子生有異質不與凡兒戲只奉父訓事親篤孝丁憂廬墓乃其親居廬之舊趾也稱世孝
 
尹 瓛
南原人號源潭己酉式中司馬孝友彌篤父病孔劇割肉進之病猶差效文章才行湖南翹楚英宗朝公居齋多年以通明經學際遇密邇除獻陵參奉其時有異端之說公獨以上疏斥邪碩齋尹判書行恁撰行狀曰詞賦屈宋筆法右軍隱潭之孝及于源潭乃叔乃姪一家淵原鹿洞任先生聖周撰墓碣銘
 
李達孝
商山人淸風堂聖任六世孫內艱廬墓先祖商山君墳墓局內爲勢家所奪抱疏呌閽正廟朝判下歸正命方伯致祭李相公福源撰墓碣
 
李星錫
商山人淸風堂玄孫與兄奎錫及贈掌令井錫事親極孝內外艱遵禮友愛尤篤
 
尹晉昇
南原人忠簡公璜后自在幼時孝友根天學行有異摳衣於宋性潭任鹿洞之門通明經義與禮說湖南章甫擧皆以師道尊之方伯守宰送膳物問安其時文蹟尙今畱在文集中且有鄕道儒狀
 
李 爕
全州人號三省齋孝寧大君補十一世孫公之性仁善自少至老講學禮經極篤孝友及親喪居廬三年
 
李時元
全州人號永慕齋郡守枝番八世孫父病數月剖氷得鯉居喪侍奠兒曹患痘家人撤奠公曰疫有神則應知喪禮豈能廢乎終不掇兒善痘行司㒒 寺正
 
李益鎭
號愚齋司僕寺正時元子天性慈仁愛親敬長不履生草常戒宗族以敦睦爲平生事入漢啓贈丞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李會演
號率性齋贈丞旨益鎭子幼喪外親孤奉偏母承順其志居喪三年一遵禮制遇忌日雖冬月雪冷必沐浴親祭平生以小學爲律身之方操行攸及入漢啓贈戶曹參判兼義禁府事
 
李麟宇
贈承旨益鎭孫贈參判會演子孝心至功家道淸寒以耕樵勤業奉其兩親與四弟二妹友愛尤篤一門和順官同敦寧中樞府事
 
柳 暄
全州人大司諫駱峯軒后平生精力在於小學事其偏母極其誠孝得氷魚於侍湯之日因居廬三年其臨終時强整衣冠負進廟再拜還正寢而逝其永慕如此
 
李 珏
全州人孝寧大君補后學識高明孝行純至養志養軆丁憂送終之節一遵禮制
 
朴承奕
咸陽人號梨月堂收心齋五代孫贈兵曹參判順達曾孫性至孝居喪一遵家禮三年不出廬外每朝拜廟朔望必奠終身不懈以勤實學行荐登鄕薦終不出仕
 
朴世孝
收心齋薰八代孫壬辰倡義兵曹參判順達六代孫性嚴直慷慨有濟衆大節不肯阿附權貴之門休退邱園朝野稱頌早年以宣傳官赴任北道權 管71)
 
朴必大
號守拙軒收心齋薰十代孫兵曹參判順達八代孫以文學名於世屢登鄕試心經性理朱書䒭書暫不釋手朔望謁廟平生口不道非理足不踏城市世皆稱眞儒
 
朴鼎漢
號訥軒收心齋十一代孫兵參順達九代孫以孝行學術屢登鄕薦癸卯旌閭公性至孝年甫十一遭外艱泣72)血柴毁寢苫行素克遵哀禮鄕隣莫不悅服稱歎奉養偏慈殫竭心力甘旨常供不絶其侍湯夜不解帶嘗糞驗症病母思食雉膏家貧市遠猝難求拱手祝天忽有一雉飛入庭中得以供進幾絶復穌以終天年喪葬祭儀克盡其誠朔望省楸至老不廢操身矜飭
 
韓 機
淸州人 安襄公十四世孫式遵庭訓克篤孝友宗黨感睦鄕隣欽服
 
韓圭泰
安襄公十五世孫號肯梧讀書明人倫遂成碩儒事親至孝及其疾革裂指血注得甦且其母蘇氏年高齒脫水陞之味不能飮啖取其乾硬73)者細嚼以進門內食貧者多以斗粟壷漿均分免飢鄕里稱歎
 
朴鼎夏
咸陽人收心齋薰十一代孫禀性剛明言論正直專工禮經壬申嘉山亂以白衣欲倡義聞親命而止之孝友之行一鄕誦道
 
朴民憲
咸陽人鼎夏子誠孝根天奉父母養志文華著世修齊勤儉年才二十沉病月餘漸至危劇百藥無效其婦韓氏每夜呼訴74)祝天似夢非間空中招民憲曰以汝婦誠感加壽五十年蒼 黃中索紙書之果有其驗
 
金斗淵
延安人文靖公自知后生甫九歲其父見背孝奉偏母養志無違及病設壇祝天遭艱居廬朔望省掃風雨不廢
 
鄭世文
慶州人兵曹判書諱弘德后仁祖朝大司諫諱庥九代孫將仕郞揚武原從功臣鳳華曾孫也以孝友爲心家貧親老耕田而供搆茅而息奉養之道靡不用極親沒居喪執禮雖風雪省掃不廢
 
沈鍾遠
豊山人靖襄公龜齡后早失怙恃奉養繼母極盡誠孝遭艱哀毁踰節課日省掃山蹊成路
 
李禹善
泰安人以孝友文章著於京鄕屢參陞補初試連屈會闈75)奉養其親承順其志世罕其儔靡不用極筆不盡記其子參奉濟成承襲庭訓孝友彌篤家門之雍和世皆稱誦
 
韓圭燁
淸州人安襄公十五代孫號雲溪固窮讀書以孝友爲業就正師門世皆推重屢入鄕薦
 
宋泰熙
礪山人遯壑慶元後天性以孝友爲心而常恨歎其早孤每當忌日悲痛自切事其寡兄嫂無異於事親偏愛其侄無異於己子敦睦宗族偏好親友繁華過平生鄕隣稱道
 
趙喜鎭
玉川人太師公諱元璵之後也其母病沉漸革裂指注血回甦三日之命居喪執禮養育其姪如己子人皆稱之
 
趙禎鎭
玉川人太師公元璵后天性仁孝奉父母養志養口睦族信友以學文爲日事
 
尹爀鉉
南原人忠簡公璜后都丞旨禮生十三世孫孝友爲心定省之節瀡滌之養無愧於古人與其弟豊鉉晝宵相居及其親病危劇之際兄裂弟斷繼注其血有頃回穌有享年實行載儒狀入於道伯 褒啓
 
尹豊鉉
南原人爀鉉之弟自在髫齡天禀卓異與其兄同居一室無物我之分孝友尤篤侍其親 癠至於殞命之境斷指垂血血盡未繼其兄亦爲斷指垂血有頃乃甦仍爲享年奄遭艱喪終凡節一遵家禮泣血居廬三年奠素親睦宗族有汲引之風鄕道儒林公議齊發呈單郡府八於道啓
 
李宇植
全義人孝子贈持平延徽子早失怙奉母至孝母病思鶉肉猝難求得忽有一鶉飛八㕑中供進得效丁憂一遵家禮又以經學爲鄕所推重
 
沈樂遠
豊山人豊山君靖襄公龜齡后官宣畧將軍行龍驤衛副司果護軍通政大夫敦寧都正以孝爲心善養父母篤友兄弟及敦宗族鄕隣莫不恱服
 
沈炳遠
豊山人豊山君龜齡后都正公樂遠弟戊子春正人日應製參少解榜八格儒生入侍因爲不中自幼天性卓異以孝爲己任晨昏定省少不解弛侍其親疾逐日嘗糞乘夜祝天五月炎天所願淸蜜四求難得之際躬徃聖壽山中號泣三日石桶得蜜歸進奏效儒林公議齊發呈單題敎誠孝所感石蜜76)湧出氷鯉雪筍豈獨專美入道啓
 
崔以恒
全州人希顔齋景星子自幼誠孝遭母艱執喪依禮每見烏反哺潜然感泣及長丁外憂身有脚疾常伏苫次年過八旬誠孝不衰道伯朴祐源褒啓
 
金永學
金海人號景菴宣武原從功臣億熙九世孫天稟之性異於凡類孝友之行罕於今世以隱逸入於道啓贈南臺持平吏曹參議其親山在於下北龜老里晩而居廬終老不懈日夕省掃虎必蹲守臺畔人皆謂虎跪臺墓下路石崎嶇爲其兄進士永坤年老步艱手自聚成一塔世稱鴈行塔講究經傳深造蘊奧汲引之風操修之行京鄕稱道筆不盡記吏曹判書金壽鉉撰墓碣文
 
韓弘直
淸州人號芝隱龜窩公九世孫行義純慤以小學爲律身之工而常閱近思錄心經䒭書人號曰處士以孝友之行道儒上言八啓贈戶曹佐郞
 
韓亨燁
佐郞弘直子天性至孝怡愉養志親病淨水奉盤祝天延壽丁憂侍廬三年毁瘠成柴77)扶杖而後起壬辰八月道儒上言贈童蒙敎官繼蒙旌典
 
韓圭成
淸州人號晩樂龜窩公十一世孫敎官亨燁之子甲午中司馬官都正天性至孝愉色養志一言一行親訓不違家貧贅居如有得升米尺布身自擔負而獻之常恨不得其定省霜晨月夕挺身獨往虎常護行及其親病嘗糞
驗症丁憂哀毁過常寢苫行素不脫巾絰疊至六年仍成頭風竟傷一眼或有珎饌則輒流涕曰親在不能供此嗚咽不敢吞下性本嗜酒而受訓以後平生不飮一勺終身孺慕之朔望省掃至老不廢拜跪處草爲之不生屢登剡薦 尹參判泰一撰行狀
 
權達壽
安東人東興君常十世孫親病累年割股裂指以延其命捕魚求筍以調病口今上朝贈監察旌閭
 
宋運五
礪山人遯壑慶元后自在孩提能知敬愛父母孝誠純篤每當親忌以其親生時所嗜之雉獐肉至誠供備而一雉入㕑中遂得薦省妣墓時偶得獐行祀孝感所致
 
朴時奎
密陽人文節公文彬后事親至孝丁憂廬墓服闋朔望省掃奉養偏母承順無違母病設壇祝天雞鳴而退如是月餘病因回穌
 
崔相翊
全州人旌閭孝子憲六世孫中司馬早喪父奉母至孝養志養軆年當五旬家事凡百必禀而行之丁憂泣血三年今上朝旌閭
 
韓基弼
淸州人府院君確后自幼能知愛親到老戲彩悅親病致其憂喪致其哀文學名於世贈童蒙敎官
 
金善元
慶州人雞林君稛后父痢屢年沈痼思食江魚川澤氷堅無路求得繞江號泣忽有一大魚從氷開處躍出煮進快蘇遭艱一遵家禮日三省墓哲廟朝贈監察旌閭
 
韓亨泰
淸州人襄節公確后母病思食西瓜時惟十月四求難得路逢一老嫗聞其故而言曰我夫大祥時將用西瓜78)之意一介沉於水中因以與之果得效
 
韓璟履
亨泰子官參奉九歲遭父喪居廬奉養偏母祭山祝壽其母病疽吮膿得效後又沈病裂指注血回甦三日
 
崔尙遠
孝子以恒子母患濕疾得龜於水烹進卽瘳父病泄痢借乳於隣連進見效後遭兩艱廬墓六年虎常來衛服闋講學不倦
 
李憲秀
全州人完城君伯由后六歲往隣家得梨栗懷之主恠問故對曰陸績懷橘吾己聞知自完僑縣北道峯貧甚敎授鄕里資其月俸以給養丁艱居墓三年有一禽上食時必報夜常有虎衛側錦谷宋山長79)書贈慕窩號兄護軍憲啓弟憲翊亦篤孝友其曾孫錫庸亦篤學業
 
韓慶餘
淸州人府院君確七世孫壽職同中樞老年奉親班衣爲戲戲親喪三年居廬講學不倦
 
朴鼎鎬
咸陽人收心齋薰之十一世孫兵曹參判順達之九代孫自髫齡濡染家庭誠孝根天內外居廬一遵家禮偏奉繼慈家雖貧寒左右就養罄竭心力和貌怡愉供甘適口可謂養志養體也壬寅陞耆英社通政大夫
 
崔榮煥
全州人文簡公哲之後孝子贈奉事憲之七世孫中司馬自四五歲以後克解事親之道三時旨供躬自行之其父以時染屢月危重祈天乞命感誠孝回穌平生暫不離其親膝下起居左右恒時扶護承順其志眞出天之孝也尹參判泰一製孝行狀
 
全碩春
天安人綂相東屹后宋性潭門人其父病疽吮膿得蘇又嬰奇疾斷指和藥怳然復甦及喪三年泣血
 
鄭惟福
東萊人號雲谷翼恵公蘭宗曾孫志篤經學不事科業着力於孝經心經性理䒭書而逸官禮曹正郞事親至孝自京奉柩南下葬於玉田鉢山居廬其號曰祭廳洞
 
鄭基弘
東萊人翼恵公十三世孫雲谷公十世孫天性純厚風儀端懿孝事兩親克竭養志傾財好施以濟貧窮尙睦宗族世稱淸溪處士
 
沈煥高
豊山人豊山君靖襄公龜齡后文學著於世自幼時便若老成人克盡事親之道以修身齊家爲自巳事業修操凡節與他有異鄕隣歎服宗族咸睦世皆稱眞儒
 
尹泰一
南原人號會默贈敎官旌閭相鉉子以文學著於京鄕屢參監覆試且再入於道薦蔭參奉官至通政大夫行敦寧府都正歷同敦寧陞從二品參判自孩提時天性至孝其慈親宿病沉吟溲糞之棄不使人代之躬自行之如是者十有餘年外他供養之節筆何記之早年樞衣於梅山洪先生之門書贈齋號晩尤好學從遊於淵齋宋山長80)實行在於儒狀中其子秉濟秉禧亦以孝稱於世
 
沈克賢
豊山人靖襄公龜齡后親病嘗糞驗症及革斫指注血以延七日之命
 
朴慶基
咸陽人收心齋薰八世孫任鹿洞門人親喪三年廬墓於莵來護忌辰致齋81)地主饋米
 
李志燮
全州人貞簡公穆后壽職副護軍十歲遭父喪哀毁遵禮人稱孝童及長孝養偏慈其母有病藥得夢中因以快穌後又遘疾斷指注血遭艱不離苫次省掃不廢
 
全百喆
天安人壬辰殉節葵菴繼宗九世孫親癠割股裂指祝願代病親絶而復甦謂家人曰俄至冥府爲吾兒苦請代父幸蒙放還及遭艱三年廬墓有虎來守今上朝贈敎官旌閭
 
李潤性
商山人淸風堂聖任八世孫克趾祖訓事親竭誠母病嘗糞甛苦親思艾羹冬月難求忽然採得於雪中進供得效今上朝 贈吏議旌閭
 
李載炯
旌閭孝子贈吏議潤性子親病衣不解帶藥必先嘗晝宵侍側洞屬靡懈丁憂哀毁三年今上朝贈吏參
 
尹泰魯
南原人號芝軒忠簡公璜后進士源潭公諱瓛五世孫天稟孝勤狷介事親竭誠丁憂哀毁執禮三年行素晨夕省掃終老不廢以孝經禮說爲律身之方居家儉約戒門子姪與孫兒軰必稱孝悌及其鄕閭士友則和雍正眞必以言忠信之道敦睦之風宗族咸服汲引之恵操修之行屢登剡薦鄕黨皆爲推重矜式焉
 
鄭羲賢
草溪人觀察使箴后十歲遭父喪雖積雪暴雨恒宿殯側母病瘧思食鰲湯號泣川邊一鰲躍出供進見效母病斷指得生五日又割股更延二日
 
梁 栻
南原人號 龍雲菴 龍城府院君 朱雲后兵曹判書超後壬辰功臣行繕工監役天遇八世孫齊陵參奉禹舟玄孫通政大夫副護軍順性孫以文章才學名著京鄕多年居齋屢參應製初試六次監試參榜連屈會闈82)且以學識三八鄕薦卿宰之札積成簡軸南州高士稱之其孫進士基衡早年登科以解其祖父積累之功矣
 
梁達容
南原人號龍雲菴栻之子號農圃自在髫齡天賦之性事父母實心家貧之致日事漁樵以供甘旨年才四歲當嚴親喪其於年長未見先君儀容自歡而其慈年老不得行步每日擔負擧風二三次也及其病劇裂指注血以延二日之命眞誠孝之至也其親山雖風雪不廢省掃如是過平生隣里所共知其子進士基衡承襲先世之蔭昌大門戶孝之至也
 
李錫魯
慶州人靜履堂斗然后天賦之性以孝友爲心常恨嘆其早孤友於其弟無物我之分偏愛其弟逾於自家之身世罕其儔又好親友京鄕士友守宰尋訪従遊者許多繁華過平生鄕隣稱道其侄鍾淵亦繩其趾云
 
金致泰
慶州人參判孝南七世孫其父嘗苦痁疾割股救之又遘病痢累月沈痼而欲咬兎83)肉入山號位自罪誠薄忽見猛虎咆哮一兎俯㐲持以供之遂得瘳焉越明年將終裂指注血延三日命旣没哀毁踰制喪葬如禮三年㗖 素朝夕哭墓其奉先裕後修己御家友于兄弟篤于宗族多有過人行今上朝 贈敎官旌閭其孫錫桓弼桓兄弟亦篤質行
 
李憲榮
全州人號農齋贈參判會演之子同敦寧麟宇之弟也其父病痢思魚臨水祝天冰解魚出丁憂衰絰不脫泣血行素自官累送禮饋又有營邑儒狀其子焌儀亦爲遊芸選望人稱高士
 
金瀁根
金海人宣武原從功臣億熙十世孫逸南臺持平吏議永學之子戊子式進士行義禁府都事歷 參書官承訓郞陞正三品中樞院議官至秘書院 丞自在髫齡天性純至事親至誠承順其志定省晨昏處家有度敦睦宗族酬接賓客和氣满堂持身儉約修操罕世公議攸在都84)會所通文與儒狀齊發屢八於鄕道薦姓名登聞天陛
 
宋樂禧
礪山人號松圃官通政大夫遯壑公都事慶元十世孫朝散大夫順陵參奉處明八世孫同知中樞府事瑛五世孫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行龍驤衛副護軍運恒之子父病七年侍湯不懈號泣祝天氷魚躍出親病孔劇斷指注血回穌三日丁憂初終凡節一遵禮制居廬三年雖風寒暑雨不廢省掃草不暇生鄕黨稱孝子
 
宋仁熙
通政大夫樂禧之子父病祈于聖壽山忽得良藥煎進得差延壽二十年其后侍病嘗糞甜苦及其危急之境割股其慈病危急之際裂指注血丁憂克盡禮制其子鎭洪鎭伯其孫昌浩亦以孝行稱於世尹參判泰一撰狀
 
鄭祺浩
慶州人官繕工監役通政大夫號溶波世宗朝行正憲大夫兵曹判書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諱弘德之后行司諫院大司諫諱庥之十一世孫也以學行薦入於道啓號處士諱英幹之六世孫也行將仕郞揚武原從功臣諱鳳華之五世孫也自幼時天性純孝事親至誠而昏定晨省之節暫不解弛其親病孔劇斷指注血回甦三日丁憂初終凡節克盡禮制鄕隣稱孝子其子參奉東泫克繩其趾云
 
太亨豊
陜磎人判書諱應辰后文學著一省孝友根天母患腰痛一卧數十年不能大便行朝夕必代匙兄弟不離左右小無倦色母嗜魚膾貧無以繼雨後小澗偶得尺鱗且願雉肉猝難求怱有雙雉飛墜山前雪坑中攫取而歸隣里異之以爲孝感其子鍾顯文學孝行爲世推重
 
金濚根
金海人宣武原從功臣億熙十世孫逸南臺持平吏議永學之子丞旨瀁根之弟也官濟衆院主事行德陵監董事親盡誠十四丁外憂頭蓬面墨侍墓行素母病祝天乞命竟得天和與其兄友愛尤篤其子參奉聖熙亦以孝行鄕隣稱之
 
洪漢燮
南陽人戶議濟仁五世孫中司馬蔭都正孝心純至盡誠養志父母病兩次斷指居廬盡禮朔望省掃雨雪不廢
 
康基壽
信川人象山府院君允成后丁外艱哀毁逾制母病裂指注血因以享年壽家貧親老雖逺方難得之物不分晝夜期於貿來以供甘旨其母嗜川魚當冰寒大冬之節至誠獵得不絶於㕑世謂康孝子尹參判泰一序狀
 
朴成根
咸陽人收心齋薰后親病斫指注血丁憂三年行素終始如一
 
崔鳳陽
全州人威靖公七夕后早失怙恃出繼伯父孝養盡誠病瘧雪菜氷鱗供進調味病革割股見效
 
金錫桓
慶州人工曺參判孝男九世孫敎官致泰孫誠孝有異心性寬厚孝養偏慈親或出遊曠日則反必下淚曰慈主容觀何衰至此嘗遊海外躬負魚鮮而喪葬練祥克遵禮制奉先裕後必有模範世篤質行人所稱揚其子炳周以孝學之行鄕隣稱歎
 
沈鎭佑
豊山人靖襄85)公龜齡后九歲遭外艱受弔服喪一如老成晨夕省墓風雨不廢其母享年八十四而沒鎭佑亦以衰老矣猶能廬墓畜犬隨廬能往來傳書子家人稱孝子犬墓傍抗坎處得一表器有天孝二字
 
朴源鍾
密陽人文節公文彬後事親誠孝捆織耕鑿以供甘旨親病孔劇嘗糞試藥以驗其症丁憂哭泣悲痛一遵禮制其親山在於近地省掃不懈其子成根以誠孝稱譽
 
魯錫泰
江華人府使輿後自在髫齡孝心卓異其親病痢疾割股煎進一夜之間快差丁憂廬墓三年世云至孝居在峽村賓客滿堂其子聖謨承襲庭訓鄕隣稱誦
 
朴琮憲
咸陽人收心齋薰十二代孫兵曺參判順達十世孫官従仕郞參奉至中樞院議官以孝爲心行義粹實操身謹勅承襲庭訓名於文詞遭其父母之喪泣血三年不入內庭枕苫而宿人難效之
 
李廷儀
全州人號竹繼贈參判會演之孫同敦寧麟宇之子事親誠孝漁水樵山以供其親且耕田勤業謹守家道暇日讀書遂成巨儒以爲先之心自家事業累代贈職以光門戶居鄕彰善之心與他有異忘勞躬行集聚一冊孝者百行之源於斯人謂也
 
韓光錫
淸州人號蓮峯龜窩公應聖十二代孫都正圭成之子自在小兒時天禀之性以孝爲心昏定晨省養口體之事付之于略節其親都正行蹟雖細微之事無一遺漏集成年譜也屢代贈職旌閭如此重大之事以遂自家所願誠心所到金石可透暇日摳衣於淵齋宋山長86)之門聯代行狀墓碣文撰成文集爲先貽后之心世無其儔終身慕先之心可謂至孝
 
李載浩
商山人淸風堂聖任九世孫蔭參奉孝養偏母每逢美味雖遠必䄂而獻之丁憂殮殯窀穸克盡禮制朔望省掃日無曠課思慕愈切
 
郭瓚永
玄風人以文學著於京鄕連屈落拓人皆嗟嘆而父病斷指注血母病裂指幷延三日之命丁憂哀毁盡禮鄕里皆曰眞孝子
 
梁基衡
南原人號日愚齋甲午中司馬龍城府院君朱雲后兵曺判書超後壬辰功臣行繕工監役天遇十世孫齋陵參奉禹舟六世孫通政大夫副護軍順性玄孫龍雲菴栻孫自在幼兒時誠孝之心異於凡類甘旨之供定省之節承順其志年未弱冠丁外憂初終之節一遵禮制便如老成人奉養偏母孝心彌篤小不懈弛也接人之道恭勤持身鄕隣土友従遊者許多實行在於長館通文儒狀
 
李柱錫
靑海人忠壯公重老七世孫中司馬贈戶參自幼至孝親病割股得效及喪盡禮其親毛髮拾而盛囊終身佩之時時開見以慰思親之心
 
李鍾澤
慶州人號未一軒靜履堂九代孫幼有異質戲言不出口律身於小學潛心於大學窮理之道立敬之節必以先軰爲期尤孝於事親一自出繼於仲父之後常言自戒曰古之孝子專事兩親尙有日短之憂况此身則兼奉兩庭之人也其敢緩乎及其父病侍湯號泣嘗糞甜苦親思川魚時惟隆冬號泣川邊冰開鰻鱺躍出供進見效丁憂哀毁逾節三年枕塊孝友之道周窮之惠鄕里敬歎
 
金光洙
延安人文靖公自知后親病斷指連命居喪一遵家禮
 
金一謙
光洙子承襲庭訓內外艱居廬終制
 
金東秀
一謙之孫親病嘗糞裂指巨喪毁瘠幾至滅性世稱一門三孝
 
盧正根
交河人文匡公思愼后其祖患痢嘗糞驗症其父病亟裂指注血又患便塞晝宵吮之病乃得瘳遭艱哀毁盡禮
 
尹秉弼
南原人忠簡公璜后進士源潭公瓛六世孫自在孩提孝友彌篤年纔弱冠出系於堂叔后瀡氵修87)定省至誠不懈侍親病祈天乞命以益享年人稱格天孝感且生庭居在四五里許晨昏定省雖祁寒暑雨不廢爲巳任家事之巨細文字難易無違親命每見適口之味齎進怡養遭艱喪終哀毁一遵家禮朝夕省掃無或間斷墓路草不暇生每當忌日致齋行素至誠供需友于兄弟篤于宗族輔仁朋友非但鄕里欽服儒林公議自在尙今未褒齎恨矣其子仲燮鏞燮光燮亦襲家訓以孝文行稱於世
 
尹秉述
南原人秉弼之弟自幼孝友爲心偏奉繼母怡愉養志漁水樵山以繼供旨以調寒溫其母感歎曰雖有己88)出之子孝養之道必不及於此矣且有無怙恃孤侄慈愛收鞠無異己出宗族鄕里欽誦焉
 
黃熙榮
紆州人文肅公居中后父喪隣家失火延及几筵熙榮抱棺痛哭風反火滅孝養偏母壽職陞通政
 
李相儀
全州人旌閭孝子贈敎官咸榮子克趾父孝養志養體無一毫之忤親病嘗糞驗症丁內外艱六年不御酒肉極盡禮制其弟英儀天性純厚一亦遵禮
 
朴馨根
咸陽人收心齋薰后出系伯父而父歿母亦見背恨其幼而未服其父回甲緬禮親山廬墓三年
 
吳秉賢
咸陽人縣監燮夏后生甫三歲其父客遊數十年莫知其所其母朴氏晝宵祝天霜雪盈背意外凶音自北道長津來秉賢裹足數千里返喪安葬後丁母憂廬墓
 
金正達
金海人文愍公馹孫后賦性純厚以小學孝經爲業事親父年九耋事多昏妄順志無違至死奉承丁憂遵禮友于兄弟睦於宗族
 
全完豊
天安人旌閭孝子贈敎官百喆子十年侍湯晝宵靡懈刲股回蘇丁憂廬墓掬吞松䖝䖝災旋滅 繡 衣李敎永饋以酒饌登繡啓未蒙
 
韓廷敎
淸州人府院君 確后幼讀孝經究得經義內外艱不出堊廬未嘗見齒省掃不廢
 
韓良洙
廷敎之孫其母患瘧割股和肉煎進見效丁憂涕泣㐲苫哀毁逾節
 
全弘俊
天安人歡城君聶后年甫十六親病漸亟思食魚菜冬寒難求號泣祝天新蕨抽園鯉商89)適到丁憂歠粥三年晨昏哭墓猛虎護行
 
金思元
延安人斗淵孫孝心純至其父有事躬自代勞就傅讀書相距稍遠不廢定省母患痢症嘗糞驗症父病漸亟裂指注血內外艱哀毁逾節
 
宋奎浩
礪山人遯壑慶元后母年八旬常患痰喘欲用蛇汁時冬難得適有紅蛇入場用進卽效汲水祝天而水盆中有一無名魚煎進回甦三日葬於村後晨夕徃哭
 
李元儀
全州人旌閭孝子匡漢孫官都正孝行卓異文學兼備親病斷指居喪盡禮潛心性理多有著述有衛正斥邪90)之論有功世敎
 
李宗達
商山人淸風堂聖任七世孫贈參議天性醇一事親能竭其力丁憂克遵禮制服闋朔望省掃每語及親淚如血流
 
李 涇
慶州人文孝公蒨后才行卓異事親順志丁酉再亂侍親避地咸興辛丑遭艱廬墓服闋終歲不參宴樂
 
尹泰重
南原人忠簡公璜後事親誠孝親病危劇之時斷指注血以延三日之命遭艱哀毁遵禮鄕隣稱歎
 
尹秉漢
南原人忠簡公璜後天性仁孝事親至誠家本貧寒勤力耕田以供甘旨其親所嗜之物豫爲辦備不爲乏絶奉養偏母尤極承順宗族敦睦鄕隣稱嘆
 
李仁弘
商山人商山君敏道五世孫進士文科天性至孝親病晝不離側夜不交睫前後喪歠粥侍墓服闋每晨謁廟至老靡懈往遊栗谷門下得聞性理之說而以孝學因先生薦累典郡邑多有治蹟今上朝贈吏參
 
丁聖漢
昌原人晩軒焔七世孫有至行早喪父事母如事父躬執樵爨軆無完衣親極滋味一日採樵驚心歸家其母暴疾晷刻之際藥餌未暇遂斫一指有效連斫十指因得快復享年八旬而卒廬墓虎來相守今上朝 贈敎官旌閭
 
金啓龍
慶州人天性純至孝奉其親以無違志三字爲平生珮符母病斷指注血回甦數日丁憂盡禮今上朝 贈敎官旌閭
 
金一采
光山人兵判繼至后誠孝根天養志爲務父病裂指注血以延91)三日丁憂廬墓虎常來衛今上朝 贈監察旌閭
 
沈鐸淳
豊山人豊山君靖襄公龜齡后參奉鎭杓之子以孝爲心侍其慈病痢癠也漸至危劇之境嘗糞禱天竟至氣絶呼服92)之際擧刀斫指注血母口巳没之親竟得感天之回甦以延十日之命若非至孝格天其能如是乎奄其遭艱初終凡節一遵家禮此由儒論齊發呈單府郡題敎苟非根天之孝何以及此八於道臣啓聞
 
郭祿顯
玄風人伴松堂興懋六世孫父病冬索靑蒜築壇祈天忽有靑蒜出自雲中供進見效母疾裂指得蘇丁憂盡禮
 
李 洽
全州人貞簡公穆九世孫自幼而孝及長彌篤母疾病三朔每夜祝天逐日嘗糞斷指注血暫得回穌又嚼次指十指俱破丁憂廬墓每有瑞氣繞於其廬
 
李存慶
全州人貞簡公穆後事親至孝父病設壇祝天夢得神人指示得鱉於水涯歸供得效居喪遵禮
 
趙熙濟
咸安人洗馬平九世孫天性溫良孝行卓異母病不解帶不就寢其亟也搗指陸續進血十旨俱斫遭艱葬後廬墓奉其偏父誠孝尤篤鄕隣稱誦
 
尹秉濟
南原人忠簡公璜后天性仁厚孝於其親克盡奉養之道友於其弟無物我之分與寡兄嫂同居一室無違其志且以重病七八朔危劇藥餌之物遠方求得傾盡家財三年之喪禮節逾度隣里所共知人皆稱善行
 
金聖興
扶寧人文貞公坵后贈左承旨父病斷指延93)壽丁憂廬墓捆屨易粟不廢供奠猛虎來衛母疾血指 國恤備酒饌哭奠
 
盧光禹
交河人文匡公思愼后十一遭父喪哀毁如老成奉養偏母而母患泄便中裳厠牏躬自澣濯丁憂執喪一遵禮制接待親友鄕隣稱誦
 
全鍾鐸
天安人忠建公翊後母病斷指注血以延94)三日父喪三年居廬不御酒肉遭繼母艱一如前制省掃行虎衛
 
劉達祖
江陵人文僖公敞後十四遭外艱哀毁如成人母患風疾積年不愈學究醫方用藥得差母病思魚鴨有㺚驅之得用見效忌辰通宵不寐又篤文行
 
李圭鳳
慶州人 壬辰殉節 贈佐郞益盛九世孫親癠嘗糞祈天血指延95)命丁憂不脫衰麻不御酒肉
 
宋鎭南
礪山人貞烈公松禮后其母病瘧割股和羹父病欲用鳧肉而未得忽有一鳧墬庭取供見效內外艱依禮
 
朴晦根
密陽人文節公文彬后父病嘗糞甘苦丁憂一遵禮制哀毁骨立幾至滅性以文學名於世
 
尹泰淵
南原人文孝公孝孫後蔭都正丁外憂居喪遵禮母病斫左指注血以延二日之命丁憂哀毁逾制居廬三年其子秉鶴以孝稱
 
朴成根
咸陽人收心齋薰後親病斫指注血丁憂行禮制
 
朴鳳根
密陽人凝川君臣蕤后父母病刲右股丁憂行素
 
李寅新
全州人懷安大君芳幹後孝友之誠與他有異奉養偏母養志養軆靡不庸極友於其弟家門雍和
 
朴震圭
密陽人大提學忠元后年至白首其親無恙班斕之戲承順之誠老而靡懈友愛兄弟無物我之分
 
全弘國
天安人歡城君聶后母親病猫自來而供藥鯉適到而具旨飛鶉投懷生雉落詹簷誠孝所感物無不格省楸之日火延營域仰天號泣風反火滅
 
金星澈
慶州人雞林君稛后官參奉早喪父養其偏母母病禱山祝天供藥嘗糞及葬見母遺跡淚如湧泉爲其襄奉入山祈祝不畏猛虎因得神惠又篤於性理之學
 
劉秉劭
江陵人文僖公敞後家貧養親漁樵供旨外艱克遵禮制慈病斷指垂血果得回蘇享年七旬
 
林南洙
羅州人百花亭愃八世孫通政大夫以文華名於世累屈會闈96)親病積年侍湯靡懈山雉氷魚得而供進漸至危亟斫指注血
 
林顯相
南洙子母病嘗糞祝天及至危亟再斷其指竟得回穌
 
朴泰鎬
密陽人母病搗指遭憂三年行索逐日省掃孝奉偏父及病嘗糞嘗藥祈山祝天靡不庸極
 
尹仲燮
南原人忠簡公璜后天禀仁孝奉養偏母甘旨之供雖遠方難得之物期於求進而且以早孤勤力耕農守成家道與其弟鏞燮光燮居同一室寢食不離和樂且湛爲親求山殫力安葬至於祭祀靡不用誠鄕隣稱歎
 
李承采
靑海人重老八世孫親病長疾斷指注血微效且痛又割一指五皆破裂因得快差其後居喪執禮母病斫指注血遭艱哀毁逾制
 
崔 埴
旌閭孝子相翊孫幼遭內艱居喪以禮奉養老父侍寢監飯其父患瘧血指得甦今上朝 贈童蒙敎官
 
沈鎭益
豊山人靖襄公龜齡后孝心純至母病沉劇至於殞命之境裂指注血而其弟鎭愚亦爲斫指繼以注血竟得回蘇一門雙孝鄕里欽歎
 
韓興敎
淸州人襄節公確后參奉璟履之子以文華名於世中司馬事親養志養軆有事則必禀以後行之其子圭錫亦以孝稱
 
崔台永
和順人天性誠孝自兒時克知愛親昏定晨省以調寒溫對飯侍側俟其親撤飯後食待其親就枕後宿怡愉養志而至於甘旨之需靡不用誠自約所受賞
 
李孟郁
全州人朱溪君深源后事親至孝養志養體親癠設壇祝天嘗糞驗症其子起仲克襲庭訓至誠奉養父疾夢得神人之指示得三魚供進得效
 
韓汝愈
淸州人府院君確后事親至孝丁憂以未卜幽宅爲憂夢有一虎指示一處乃請地師往視乃佳壤也因以襄奉而廬墓
 
朴鼎燮
咸陽人收心齋薰后家貧親老志體俱養親病嘗糞斷指丁憂三年居廬
 
朴鍾祿
密陽人肅愍公承宗後家貧親老竭誠奉養事無大少必告而行丁憂克盡禮制人皆稱歎
 
黃漢吉
昌寧人麗朝贊成河應后其母眼盲每夜禱天夢一老人指視蔘處採而煎用一旬眼忽復明
 
黃守仁
漢吉子其母喪子後因爲眼廢夢有一老人呼於門前卽出拜謁老人曰君之家園旣巳種蔘必有大根用必見效及朝往採果得一大根供進見效
 
金善璜
金海人甲子功臣應武六世孫壽職嘉善父病嘗糞斫指母病又斫三指加壽二十年丁憂廬墓白虎來護其子參奉洛基亦以孝稱
 
朴英奎
密陽人肅愍公承宗后父病數朔斷指注血丁憂哀毁逾節其妻南原梁氏淸溪大樸后姑病斷指
 
黃基源
長水人厖村喜后其母眼盲左右扶持暫不離側病劇嘗糞搗指丁憂哀毁逾制省掃不廢其子河錫亦孝聞於世
 
吳 淵
咸陽人德溪健十世孫親病裂指注血遭艱三年居廬遵禮人皆稱之
 
權文喆
安東人官參奉事其偏母克盡誠孝與其弟三喆同居一室友愛彌篤敦睦宗族隣里稱譽且買得山地爲親安葬尤爲欽歎
 
姜基永
晉州人通溪淮仲后畱京幾年忽聞母病日行二百里三日抵到則命將垂盡割指注血延十五日命
 
羅景式
羅州人旌閭孝子贈敎官漢井子自幼事親無異老成親癠嚼指刲股少連幾絶之命丁憂遵禮省墓
 
羅時纘
羅州人旌閭孝子贈敎官漢井孫中司馬以孝事親養志養軆其慈病嘗糞甘苦居喪盡禮日必省掃
 
朴永達
密陽人江叟薰後天性純至孝奉其親遭艱初終凡節一遵禮制服闋朔望省掃
 
申永均
平山人旌閭孝子聖熙長子親疾夢得神草以延97)其壽病亟斷指垂血得甦
 
洪鉉燮
南陽人文正公彦博后親年八耋四肢不仁晝宵侍湯嘗便驗症夢得神藥快得顯效丁憂盡禮今上朝旌閭
 
李咸榮
全州人孝寧大君補後家貧親老樵山漁水竭力供旨父病割股煮進得甦三月後又遘疾斷指血注丁憂廬墓三年今上朝 贈敎官
 
李起啇
全州人孝寧大君補後奉養偏母承順其志友愛其弟家門雍睦周及姻婭人皆稱誦
 
魯柄瀁
江華人府使輿後奉養八十養母以供子職家本貧寒勤力耕田僅守家道與其生家弟居同一室友愛尤篤隣里稱誦官參奉
 
崔益權
全州人晩六後孝友爲心家甚貧寒力農爲業奉養八十老父以供甘旨友篤兄弟自約所受賞
 
金震玉
慶州人雞林君稛后與弟震伯並有孝心其母疾兄則斷指弟則裂指回蘇數日丁憂兄廬于墓弟廬于家常患汲水泉湧墓下人曰孝泉
 
白思輝
水原人自幼純孝年甫十二遭祖父喪三年行素如老成孝事父母極志體養
 
郭 璣
玄風人伴松堂興懋五世孫孝友醇至親喪守墓事兄如父財無物我
 
河聖八
晉州人文孝公演後年未及長負薪養親得珎果異味懷而進之親病嘗糞甘苦禱天乞齡斷指注血以延98)一日丁憂擗踊哀毁送終以禮今上朝旌閭
 
金思光
延安人一謙曾孫官敎員親病設壇祝天丁憂盡禮朔望省掃不避風雨
 
金駿商
慶州人旌閭孝子啓龍孫家貧養親甘旨不匱及其有疾齋沐祝天遭艱哀毁逾制每當忌辰致齋行素
 
鄭基相
慶州人老松亭知年后官都正親病嘗糞斷指丁憂日往省墓其子載權亦篤孝
 
文禹鉉
南平人江城君益漸后母病與弟龜鉉台鉉晝宵侍湯衣不解帶嘗糞斫指以延其命又病瘇兄弟三人幷吮得瘳友愛彌篤庭無間言
 
申龍熙
平山人武純公漑后蔭參奉至縣監三歲遭父喪三日不食及其長成孝奉偏母母病血指後又遘疾三斷其指丁憂三年居廬
 
晉東旭
南原人龍城君錫後親病嘗糞甘苦丁艱哀毁盡禮友於昆季財無物我
 
晉光旭
南原人龍城君錫后親癠侍湯靡懈設壇禱天丁艱99)哀毁逾節幾至滅性
 
申瑢均
平山人武純公漑后親病晝宵侍湯藥餌之調衣衾之濯躬執其勞大小便日夜受出得美味必䄂而獻之
 
吳昌鉉
寶城人寶城君蒙乙后孝行卓異早喪其父奉其偏母誠孝尤篤養志養軆鄕里稱聞
 
金在德
光山人黃岡繼輝後誠孝卓異養其志體及喪哀瘠踰制葬祭以禮
 
河在容
晋州人同中樞相雨子蔭監役孝奉老父左右扶護暫不離側病篤斫指遭艱哀毁
 
河丙容
任容弟中司馬親病衣不解帶藥必先嘗裂指注血丁憂以禮
 
白致熙
思輝子父疾思魚與弟允熙叩冰得魚設壇祝天及喪盡禮母腫兄弟相與吮?膿得蟾見效
 
白在玉
允熙子天性至孝親病嘗糞驗症祝天乞齡遭艱一遵禮制省掃不懈
 
崔光久
全州人 烟村德之后父病斷指及亟妻陽川許氏亦爲斷指
 
李壽熀
慶州人益齋齊賢後父病累年錦鱗躍氷華䖝入懷供進見效嘗糞裂指丁憂盡禮
 
河相雨
晉州人文孝公演后壽職同中樞生事葬祭一遵禮制享年九耋終身孺慕
 
金有聲
金海人白村文起後母病斫指回蘇及葬水漲難渡氷合利涉其子泰坤母疾思魚魚出氷上其孫慶鉉敎鉉亦孝曾孫正祿母病斷指刲股
 
白先甲
水原人休菴仁傑后家貧親老賃庸供旨親喪貧而未葬晨昏哭殯風雪不廢子錫台繼以孝聞
 
河景容
晋州人領相演后家貧親老耕讀以養遭艱哀毁逾制省掃不廢
 
申鉉淑
平山人武純公漑后年纔十二父瘧屢年斫指注血蟾鳩自至調藥減證丁憂朝夕往哭山殯雨則解衣覆殯雨卽止
 
朴萬斗
咸陽人仁德亭蕃九世孫親疾剖氷得魚嘗糞割股回蘇一旬丁憂居廬
 
李東春
慶州人活溪大㽕八世孫事親至孝尤篤友愛其弟東碩亦孝於親世稱二連
 
李柄善
全州人貞簡公穆后誠孝根天丁憂盡禮課日省掃不避風雨
 
崔道休
水原人隋城伯永奎后官五衛將兼都正親癠願食江魚剖氷得鯉供進見效居喪不梳 不洗
 
金光寶
光山人光山君興光后家貧親老賣薪買肉以供親旨丁憂執禮
 
劉長源
江陵人文僖公敞後十歲丁內憂哀毁執禮雖好禮家亦莫之及家貧三十未娶養其偏親愛敬兩至及喪廬墓三年
 
全徹淳
天安人孝子弘俊五世孫孝友出天親病嘗糞驗症且侍繼母誠敬尤篤養志養軆靡不用極兄弟五人長枕大被隆和湛樂
 
全錫禹
天安人天性至孝母病石破指血回蘇終至其喪勤執喪禮且侍偏親定省之節適口之味日無曠焉面會受賞
 
鄭基永
東萊人翼惠公蘭宗後天性堅固事親至誠供親甘旨雖大冬氷雪獵得川魚以爲適口人稱孝子
 
朴在吉
密陽人三歲失怙孝奉偏母母患惡疾一心救護靡不用極夫婦相繼斷指丁憂盡禮
 
申秉德
平山人武純公漑後親病封股丁憂哀毁逾節今上朝旌閭
申聖熙
秉德子承襲庭訓父病血指得穌居喪盡禮今上朝旌閭
 
申錫崑
平山人武純公漑后內艱行素父病血指得甦
 
羅廷驥
羅州人承旨忠佐従孫與伯仲孝友彌篤父疽吮膿母病血指雞架掩魚樵杖擊雉以供親旨
 
尹秉黙
南原人忠簡公璜後入學行薦晉昇五世孫自兒時孝心純至奉養偏母適口之味雖遠方求得養志之道怡愉無違自約所受賞
 
尹壯燮
南原人忠簡公璜后天性至孝遭內艱歠粥不梳執喪遵禮奉養偏父無違其志雖遠方難求之物求而供甘旨自約所受賞
 
金鎭泰
金海人天性以孝爲心親病危劇之際裂其五指繼以注血竟得享年事親養志養體靡不至誠自約所受賞
 
以上三綱錄中忠孝盡爲謄書
 
 
2.1.3. 善行篇
此善行甲午以前類聚舊誌考諸公蹟私記入鄕薦道啓之員隨見聞抄出故如是依舊誌無漏更騰次朴蕃見書院旌閭朴薰見上同洪鵬見上書院趙平見上書院李興勃見上書院洪鼎鵬弟洪時喜鵬之孫洪履元崔南柱朴承燮李修敏洪禹疇洪敍疇尹晉昇學行顯世性潭門人趙有瑗學行著世崔尙遠學行著世出入陶菴門入鄕薦道啓李達孝湖山處士屢入鄕薦洪允升出入性潭門屢入鄕薦李鍵性潭門人入鄕薦道啓受復戶沈緯賢性潭門人尹行祚學行著世鄭德綏性潭門人云尹宗煥文學顯世梁栻以文華顯世
 
韓致淳 李根萬 朴春鍵 郭載南 尹行騏 宋延英 洪念祖 朴鼎夏 吳冕洙 尹相鉉 洪憲燮 崔峻翼 沈煥斗 李 湜 柳 暄 趙載學 李 珏 韓乘100) 李鳳基 李錫賀 李泰榮 李會德 沈弼遠 朴鼎漢 韓圭成 沈炳遠李賢儀 尹泰一八道啓 尹泰魯 韓基弼 李炳儀
 
皆八鄕薦
 

 
21) 임금이 거둥하여 임시로 머무는 곳.
22) 복(服)을 입을 친족이 아닌 사람이 망인의 죽음을 슬퍼하여 상제처럼 근신하는 일.
23) 임진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린 공신의 명칭.
24)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 및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내리던 벼슬.
25) 종 6품의 서반직(西班職)이다
26) 집집마다 부과 되는 전세(田稅)와 요역(徭役).
27) 프랑스 함대가 인천・서울 근교까지 쳐들어온 사건.
28) 수구당(守舊党)과 개화당(開化党) 사이에 일어난 정변.
29) 명종 즉위년(1545)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화(士禍).
30) 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원(原)은 자(字)이고 이름은 평(平)이다. 어부사(漁父詞) 등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31) 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이다.
32) 변경의 작은 진(鎭)에 설치하였던 종 9품 무관.
33) 초시 합격자들이 응시하는 제2차 시험인 복시(覆試)를 말한다.
34) 삼공(三公)과 함께 고려시대 임금의 고문이었던 삼사(三師)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실무가 없었 던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다.
35) 인일(人日)인 음력 정월 7일에 보던 과거시험으로 성균관 유생이 주대상이었다.
36) 임금의 특명에 의하여 임시로 설행(設行)하는 과거.
37) 일의 경위에 대하여 적은 종이.
38) 백성들의 청원(請願)에 대하여 관청이 내린 판결이나 지휘 명령.
 
59) ‘占’ ‘點’으로 바로잡았다.
60) ‘稅’자를 ‘逸’로 바로잡았다.
61) ‘脅’자를 역자가 ‘協’자로 바로잡았다.
62) ‘八’자를 역자가 ‘人’자로 바로잡았다.
63) ‘稅’자를 역자가 ‘逸’로 바로잡았다.
64) ‘難’을 역자가 ‘亂’으로 바로잡았다.
65) 역자가 ‘書’자를 보완하였다.
66) 역자가 ‘書’자를 보완하였다.
67) ‘齎’자를 역자가 ‘齋’로 바로잡았다.
68) ‘躋’를 역자가 ‘濟’로 바로잡았다.
69) ‘亨’자를 역자가 ‘享’자로 바로잡았다.
70) ‘古’자를 역자가 ‘枯’로 바로잡았다.
71) ‘官’자를 ‘管’으로 바로잡았다.
72) ‘位’자를 역자가 ‘泣’자로 바로잡았다.
73) ‘梗’자를 역자가 ‘硬’자로 바로잡았다.
74) ‘訢’자를 역자가 ‘訴’자로 바로잡았다.
75)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76) ‘密’자를 역자가 ‘蜜’자로 바로잡았다.
77) ‘祟’자를 역자가 ‘柴’자로 바로잡았다.
78) ‘爪’자를 역자가 ‘瓜’자로 바로잡았다.
79) ‘丈’자를 역자가 ‘長’자로 바로잡았다.
80) ‘丈’자를 역자가 ‘長’으로 바로잡았다.
81) ‘齎’자를 역자가 ‘齋’자로 바로잡았다.
82)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83) ‘免’자를 역자가 ‘兎’자로 바로잡았다.
84) ‘道’자를 역자가 ‘都’자로 바로잡았다.
85) ‘讓’자를 역자가 ‘襄’으로 바로잡았다.
86) ‘丈’자를 역자가 ‘長’으로 바로잡았다.
87) ‘氵條 ’ 자를 역자가 ‘氵 修 ’ 로 바로잡았다.
88) ‘巳’자를 역자가 ‘己’자로 바로잡았다.
89) ‘啇’자를 역자가 ‘商’자로 바로잡았다.
90) ‘私’자를 역자가 ‘邪’자로 바로잡았다.
91) ‘連’자를 역자가 ‘延’자로 바로잡았다
92) ‘復’자를 역자가 ‘服’자로 바로잡았다.
93) ‘連’자를 역자가 ‘延’으로 바로잡았다.
94) ‘連’자를 역자가 ‘延’으로 바로잡았다.
95) ‘連’자를 역자가 ‘延’으로 바로잡았다.
96) ‘圍’자를 역자가 ‘闈’으로 바로잡았다.
97) ‘連’자를 역자가 ‘延’으로 바로잡았다.
98) ‘連’자를 역자가 ‘延’으로 바로잡았다.
99) ‘丁艱’ 2자를 역자가 보완하였다.
100) ‘㮚’자를 역자가 ‘乘’자로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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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