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단(先農壇) 개설 농사신인 제신농씨와 곡식신인 후직씨에 대한 제사인 선농제(先農祭)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위치에 선농단이 설단된 것은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천도를 끝낸 후로 추정된다. 태조 때 적전단(籍田壇)을 설단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의 방법과 의식, 예절에 관한 일체를 관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성종 6년(1475)에 선농단 남쪽 10보(步) 밖에 관경대(觀耕臺)를 쌓고 왕이 친히 선농단에 나와 제사를 지내고 몸소 논갈이를 하는 시범을 보이는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을미사변과 홍릉(洪陵) 일본공사(公使) 미우라의 흉계로 일본군과 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명성황후 시해사건(乙未事變)이 터진 후 일본측은 처음에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을 내리는 등 사태를 은폐하려 하였으나 사건 당시 궁궐 내에서 현장을 목격한 미국인과 러시아인에 의해 전말이 폭로되자 약 2개월이 지난 1895년 음력 10월 15일에 고종으로 하여금 명성황후가 동년 음력 8월 20일 묘(卯)시에 승하했다고 반포했다.
명성황후의 국장은 광무 원년(1897) 음력 10월 28일(양력 11월 22일)에 치러졌으며 능 이름을 홍릉이라 했다. 홍릉에는 그 후 순헌귀비 엄비(嚴妃) 유해가 안장되어 영휘원(永徽園)으로 호칭되어 현존하고 있으며 영친왕의 맏아들 진(晋)의 묘소인 숭인원(崇仁園)도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홍릉이란 이름의 기원인 명성황후의 묘는 고종 승하 후인 1919년 음력 정월 16일에 현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소재한 홍릉(洪陵, 고종왕릉)에 합장되어 이곳을 떠났다.
◈ 조선조 청백리의 표상 하정(夏亭) 유관(柳寬) 고려 충목왕 6년(1346)에 태어남. 26세가 되던 해인 공민왕 20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비서교감으로 벼슬길에 나서 조선조 세종 9년(1427) 82세로 벼슬을 마칠 때까지 57년 동안 관직에 봉사하며 성균관대사성, 강원도 전라도의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세종15년(1433) 88세로 세상을 뜨자 연회를 베풀던 세종대왕께서 즉시 연회를 파하고 백관들을 거느리고 친히 문상을 했다고 한다. 공께서는 생활이 극히 청렴하여 집에 바깥 대문과 담이 없어 태종께서 선공감을 시켜 밤에 몰래가서 담을 쳐주었으며 공의 집이 낡아 장마철에 방에 비가 새므로 공께서 우산을 펼쳐 부인과 함께 방안에서 비를 피하며 서민들을 걱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후일 공께서 살았던 마을을 우산골, 우산각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정 유관선생은 같은 시대 정승을 지낸 황희 선생과 더불어 조선조 청백리의 표상으로 후세에 높이 기려지고 있다.
■ 천연기념물
◈ 선농단 향나무 제240호, 제기동 274-1
■ 사적
◈ 영휘원과 숭인원 제361호, 청량리동 204-2
■ 보물
◈ 능엄경언해 제763호, 청량리동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제769호,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금강반야바라밀경 제772호,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석각천상열차분야지도 제837호,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수표석 제838호,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숭정구년명신법지평일구 제839호,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신법지평일구 제840호,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간평일구·혼개일구 제841호,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내
■ 중요무형문화재
◈ 김학석(송파산대놀이) 제49호, 이문2동 거주
■ 유형문화재(시지정)
◈ 선농단 제15호, 제기동 274-1 ◈ 세종대왕신도비 제42호, 세종대왕기념관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