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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풍암 석불사 마애석불 만덕 고갯길을 따라 오르다가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쪽으로 바위들이 솟아있는 봉우리가 있다. 이곳에는 큰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병풍바위라고 부른다. 자연적으로 둘러 서 있는 거대한 바위들에는 마애불상(磨崖佛像)이 새겨져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60여 년 전 한 스님의 원력으로 건립한 석불사는 자연적으로 둘러앉은 거대한 바위들에 16나한(羅漢)과 29개의 불상(佛像)이 새겨져 그 위용을 드러 내놓고 있는데 국내 최대의 마애불(磨崖佛)군을 이루고 있다.
◈ 상계봉 예로부터 대천(大川)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금정산(고당봉)이 있고 남쪽으로 상학산(상계봉)이 있다고 했다. 깎아지른 듯한 수십 길의 직벽과 기암들이 줄줄이 늘어 서 있는 상학산의 주봉(主峰)을 상계봉(上鷄峰)으로 부르고 있다.
상계봉이란 이름은 산정(山頂)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닭의 볏을 닮았다는 데 유래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가 부근에서 가장 높아 새벽이 다른 곳보다 먼저 밝아온다는 뜻으로 상계봉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봉우리 자체를 두고 평가한 것이지만 예로부터 불러오던 이름인 상학산(상계봉)은 풍수지리상 학(鶴)의 형상에서 유래하고 있다. 지역 고로(古老)들의 이야기로는 상학산은 쌍학산으로서 학이 양 날개를 편 듯 좌우로 봉우리가 뻗어 내리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풀이하고 있다. 상학산은 학의 근본이 되는 산으로 양쪽 날개인 좌우 봉우리를 살펴보면 화명쪽으로 화산(華山) 암봉이 뻗어있고 만덕쪽으로 마애석불(磨崖石佛)로 유명한 병풍암 능선으로 뻗어 내리고 있어 풍수지리상 명산으로 꼽힌다. 이 상학산의 학의 머리 부분은 화명 수정마을의 강변쪽 학사대(學士臺)가 있는 학성산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금정산성문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금정산성은 그 축성(築城)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그 구조의 일단(一端)에서 신라식(新羅式)의 축성법(築城法)이 엿보이므로 낙동강 하류의 왜구(倭寇)를 막기 위하여 신라시대부터 쌓았던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현존(現存)하는 금정산성은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慶尙監司) 조태동(趙泰東)이 남쪽 끝에서 왜(倭)와 가까운 동래부(東萊府)에 방비가 필요하다고 하여 금정산에 축성(築城)할 것을 조정(朝廷)에 장청(狀請)하고 재가를 얻어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 주관으로 쌓은 것이다. 그러나 금정산성의 축성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 제1권 금정산성조에 나오듯이 원래 신라시대부터의 성이라는 사실은 이 성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성(城)의 4대 문(門) 가운데 동서의 양문(兩門)은 고려, 조선시대에 개수(改修)한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기법(技法)을 찾아 볼 수 있다.
문의 내외 둔병(屯兵) 사타의 양식은 신라 특유의 축성인 반원형(半圓形)의 속단(屬段)으로 그것이 세 겹 또는 다섯 겹으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금정산성은 신라 때부터 극성을 떨던 왜구(倭寇)에 대비하기 위하여 울산(蔚山)의 관문성(關文城)이나 하동(河東)의 고소성(姑蘇城)과 같이 왜구가 극심하던 낙동강 하류 연안에 쌓여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북구와 접해 있는 성문은 남문(南門)과 서문(西門)이다.
◈ 대천천과 애기소 대천 계곡의 중류에는 전설이 깃든 애기소(沼)가 있고 여기에 폭포수가 떨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시냇물이 가로지르는 암벽의 중간에 활 등같이 잘룩 굽은 한가운데로 위쪽 물대야처럼 생긴 앵핑이소에서 흘러내린 물이 폭포를 이루어 웅덩이가 되니 이것이 애기소이다. 옛날에는 높이가 4m로 여기서 내리 쏟아지는 물 밑 깊숙히 바위들이 앞뒤로 가려 있었는데 한가운데 수심(水深)은 어른 키의 세 길이나 될 만큼 깊었고 소(沼)의 넓이는 150여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 낙동강 제방(洛東江 堤防) 낙동강 하류지역인 구포 사상과 김해 사이의 동서연안(沿岸)에 제방을 쌓기 시작한 것은 구포다리 건설과 때를 같이 한 것이다.
일제시대 낙동강의 대치수 사업으로 위로는 대동수문(大東水門)을 설치하여 강의 흐름을 구포, 사상 쪽으로 모두 흐르도록 하고 아래로는 녹산수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조수(潮水)를 막아 김해평야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수리사업을 전개하였다. 낙동강 하류지역은 강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유사(流砂)가 퇴적되었고, 김해 쪽은 충적토(充積土)지대로서 삼각주(三角洲)가 형성되어 김해평야 일대는 물론 구포, 사상지역에도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강변 저습지였다. 1931년부터 서양안의 하상(河床)을 낮추고 하폭(河幅)을 넓히기 위하여 축제용(築堤用) 토량(土量)을 강변의 둔치에서 채토(採土)하여 임시 철로(鐵路)를 가설하여 바퀴가 달린 궤짝에 담아 운반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제방은 근 5년만에 완공을 보았고 그 이후 1936년, 1940년, 1957년에 걸쳐 일어났던 대홍수에도 이 지역이 옛날의 큰 물난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포의 낙동강 제방에는 설치 당시 강변쪽의 나루터로 드나들기 위한 7개의 수문(水門)이 있었다.
◈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겨레의 젖줄인 낙동강은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피 흘리며 항쟁했던 3·1 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유유히 흘러내리고 있다. 강물 다리 뱃길을 오르내린 큰 나루터가 있었던 강변의 장터에서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은 천여 명 장꾼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겁게 이어져, 하나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왜경의 총칼 앞에서도 맨몸으로 싸웠고, 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하다가 끝내 옥살이를 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은 이 고장에도 민족혼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참으로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구포장터 항일 투쟁의 혈맥을 후대에 길이 물려주기 위하여 8·15광복 제50주년을 맞아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둑 위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 구포·덕천권 구포왜성 → 3·1운동기념비 → 철새도래지 → 이유하축은제비 → 구포팽나무 → 부산전문대민속박물관 → 운수사
◈ 만덕권 만덕사지 → 만덕사지 당간지주 → 석불사병풍암 및 계곡 → 만덕 산 1번지 → 상계봉 → 금정산성남문 → 향토순례코스 → 상학산절경
◈ 금곡·화명권 수정마을 향토비 → 조대 → 학사대 → 금곡알터유적 → 천승호효자열녀비 → 대천천애기소 → 금정산성서문
• 북구청 문화정보과 - 북구 구포2동 1124 -1, ☎ (051)304-7501 • 구포역 - 구포 2동 1060 ☎ (051)342-7788
◈ 어린이위락시설 정글인(덕천 1동 소재)
◈ 수영장 현대 레포츠(만덕3동), 백산프라자(만덕3동 소재)
◈ 골프연습장 신만덕 골프연습장
◈ 볼링장 현대 레포츠(만덕3동 소재), 구포 볼링장(구로고가도로 옆)
◈ 테니스장 구포 테니스장(구에서 직영)
◈ 기타 어린이 공원이 49개소(765㎡), 근린공원이 10개소(9,815㎡)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