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 시대 가야문화를 꽃피우게 한 낙동강 하류에 자리잡아 양산군 동면과 경계한 금곡동에서부터 남으로는 사상구 모라동과 경계지점인 구포 2동에 이르기까지 약 8.9㎞에 걸친 대상형으로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금정산을 경계로 금정구와 동래구, 백양산을 경계로 부산진구, 낙동강을 사이에 둔 강서구와 각각 접해 있다. 이 지역은 화명·금곡·만덕권역이 주거공간으로서의 편리한 기능을 갖춘 대단위 택지가 조성되고 있고, 구포, 덕천 일대를 중심으로 유통, 서비스 업무와 금융기능이 증대되어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상업·교통의 중심지로 개발되고 있다. 구포대교의 개통으로 김해국제공항과 연계한 도시체계가 개선되었고 기존의 경부선 철도, 남해고속도로와 지하철 2호선, 현재 건설중인 지하철 3호선, 초읍터널, 다대항 배후도로, 앞으로 건설될 산성터널 등이 완공되면 광역교통망의 중심도심이 되고, 금곡청소년수련원, 덕천·백양근린공원, 낙동강둔치 등이 종합적으로 개발되면 편리하고 쾌적한 생활환경과 경쟁력 있는 도시이다.
◈김기(金琦) 공의 휘는 기이고, 자는 화경이며, 관은 광주이다. 공은 나면서 충의로움이 하늘에서 뿌리 박은 듯하였으며, 영민하고 비범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임진왜란 당시에 동래출신의 의병으로 죽은 뒤에 어회장군 훈련원첨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만덕동에 있고, 묘비에는 그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고 묘비의 규모는 높이 1.33㎡, 폭 34㎝, 두께 11㎝이다
◈권상덕(1904∼1975) 화명에서 태어나고, 교육으로서 학교와 고장을 발전시킨 애향교육자이다. 평생을 봉사정신으로 학교와 학생을 돌보며, 마을 걱정을 자신의 걱정처럼 생활하였고, 지순한 사랑과 성실한 정신으로 후진양성에 몸을 바쳤다.
◈만덕사지(萬德寺地) 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3호, 1972년 지정, 소재지 북구 만덕동 543번지(사기마을) 일원. 구포에서 동래로 넘어가는 만덕고개의 서쪽 산 중턱에 있는 이 절터의 주위에는 사기마을이 있어 옛날부터 대규모의 절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2년 절터 중앙부의 장방형 축대(동서 68m, 남북 54m, 높이 4m)가 있는 금당지(金堂址)가 부산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 축대는 금당지가 있었던 곳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축대를 중심으로 뒤편과 동북 및 서북쪽 200m 지점에도 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의 초석이 있다. 1990년과 1996년 2차에 걸쳐 부산시립박물관에서는 금당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방형 축대의 내부를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동서 길이 24.9m, 남북 길이 20.4m의 금당지가 확인되었다. 금당지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평면구조는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금당지에서는 두 개의 축대가 조사되었는데 하나는 함석을 이용한 축대이며 다른 하나는 규격화된 정방형의 화강암으로 쌓은 축대이다. 전자는 초축된 것이며 후자는 증개축시 만들어진 것이다. 증개축시의 기단은 초축 기단의 바깥쪽에 만들어졌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양한 연화문 숫막새, 당초문과 귀목문 암막새, 대규모 치미(망새), 팔각 좌대석, 연화문 좌대석, 청자와 분청사기 등의 도자기류, 화강암제 초석(礎石), 석등(石燈)의 보주(寶珠), 석탑의 노반(露盤) 등이다. 출토유물 중‘기비사(祈毗寺)’라는 명문기와가 나왔다. 이는 절터의 명칭을 알 수 있는 명문인데 문헌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절 이름이다. 기비사와 관련된 명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비현(其比峴)’이라는 현재의 만덕고개를 지칭하는 지명이 있어 한자는 다르지만 기비사와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190m 지점에 당간지주(幢竿支柱) 1기가 있으며, 금당지(金堂址) 바로 뒤편과 동북방 200m 지점 그리고 서북방 170m 지점에는 칠성당지(七星堂址)를 비롯한 여러 당지(堂址)의 축대와 주춧돌(礎石)이 남아 있다. 또한 현 만덕동 네거리 서쪽에서 국장생표(國長生標)가 발견되었다. 그뿐 아니라 사지(寺址) 주변에는 탑(塔)을 비롯한 석등(石燈)·연자방아 등의 석재(石材)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사지(寺址)에서는 지붕 끝을 장식하는 치미 모양의 기와 조각과 연화문(蓮花紋)이 있는 숫막새기와 및 무늬가 없는 방형전(方形塼)을 비롯하여 청동보살입상(靑銅菩薩立像) 등이 출토된 바 있다.
◈만덕사지(萬德寺地) 당간지주(幢竿支柱) 부산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4호, 1972년 6월 26일 지정, 소재지 북구 만덕동 470-7번지. 만덕터널의 만덕동쪽 진입로 아래에 위치하며 2개의 석주(石柱) 중 1기(基)만 남아 있다. 기단부(基壇部)는 파손되었으며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석주의 안쪽 하단에 놓여 있다. 석주(石柱)의 규모는 가로 40cm, 세로 60cm에 높이 350cm이다. 범어사 당간지주에 비하여 치석(治石)이 훨씬 잘된 편이며 장치수법도 뛰어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지주의 외측면(外側面) 중앙에는 상하로 융기된 선대를 나타내어 조각하였으며 기둥의 꼭대기 부분은 외각을 깎아 호선(弧線)을 그리면서 2단의 굴곡을 두어 공간의 미를 나타내었다. 돌기둥 상단내면(上段內面)에는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溝)를 두었으며 간공(杆孔)은 없다. 당간지주의 건립연대는 만덕사의 창건과 같이 고려 초기로 보고 있으며 주변의 만덕사 국장생표와 더불어 만덕사지의 경계를 알려 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구포동의 팽나무 천연기념물 제309호, 1982년 11월 3일에 지정, 면적 314㎡, 소재지 북구 구포동 46번지. 구포동의 팽나무는 구포역에서 동쪽으로 약 1㎞정도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하며 나무 높이 17m에 가슴둘레가 5.5m나 된다. 이 나무의 가지가 뻗어내린 폭은 약 30m에 이르며 수령은 약 5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수종(樹種)의 노거수(老巨樹)이다. 이 팽나무는 부산지방에 있는 노거수 중에서 생장이 가장 왕성하며 나무 모양은 우산 모양의 타원형으로 둥치에는 큰 혹이 달려 있다. 이 나무는 구포사람들의 당산목(堂山木)으로 신봉되고 있다. 해마다 정월 보름날이면 마을 주민 중에서 제주(祭主)를 뽑아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구포왜성(龜浦倭城) 부산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6호, 1972년 6월 26일 지정, 면적 5,940㎡, 소재지 북구 덕천동 510, 511, 산 93번지 일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김해와 양산간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김해 죽도성의 지성으로 쌓은 일본식 성이다. 일명 의성(義城), 또는 감동포성(甘同浦城)이라고 하며 상학산의 한 지맥이 끝나는 구법곡(仇法谷)의 표고 약 60m의 동산에 축조되어 있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그 밑에 선박이 정박할 수 있으며 멀리 서쪽으로 김해 죽도성(竹島城)과 북쪽으로 물금 증산성(甑山城)을 상망(相望)하고 있는 전략상의 요지에 해당되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과도군병(鍋島軍兵)이 수비하였다고 하며 일본성(日本城)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한번 보면 왜성이라고 알 수 있는 형태로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성의 상단부의 석축지(石築址)는 거의 완전하고 누각지(樓閣址) 1개소와 성벽(城壁)은 최고 높이 10m, 회전높이 8m로 남겨져 있다.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 천연기념물 제179호, 1966년 7월 13일 지정, 면적 약 127,000,000㎡(공유수면 포함 247,000,000㎡), 소재지 북구 구포동∼사하구 다대동까지의 낙동강 하구일대. 우리나라 최남단인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서 장림동, 하단동, 사상구 엄궁동, 감전동, 삼락동 등을 경유하여 북쪽으로는 북구 구포동 구포교에 이르기까지 또 서쪽으로는 강서구 명지동과 녹산동, 천가동 경상남도 김해시와 진해시 용원동 등을 포함하는 광활한 낙동강 하구 일대의 공유수면(公有水面)을 지정하여 이를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다. 특히 낙동강의 넓은 하구에는 을숙도를 비롯하여 일웅도, 사자도, 장자도, 신호도, 진우도 등의 크고 작은 삼각주(三角洲)가 발달해 있고, 이들 삼각주와 하안(河岸) 일대에 우거진 줄풀과 일대의 숲은 철새들의 좋은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또 삼각주의 주변은 수심이 얕은 개펄이 넓게 형성되고 육수와 해수가 교차하므로 많은 프랑크톤과 각종 어류, 패류, 가각류 및 수초와 조류 등 철새의 먹이가 풍부하다. 그리고 이곳 낙동강 하류는 지리적으로 대양을 향하여 돌출한 반도부의 최남단에 위치하므로 바다를 건너서 이동하는 수많은 철새들의 출입관문이 될 뿐만 아니라 기후적으로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철새들의 번식 및 월동지로서 호적(好適)하다. 이와 같이 낙동강 하류는 지리적, 기후적으로 또 먹이가 풍부하다는 점에서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철새들이 강과 삼각주를 뒤덮고 날아오르는 모습은 우리나라 외의 타 지역에서는 유례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철새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구포 대리 지신밟기 구포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구포 대리 지신밟기는 낙동향토문화원의 고증을 거쳐 낙동민속보존회가 낙동민속예술제를 통하여 재현을 하였고, 1997년 5월 25일 제26회 부산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상쇠로서 지신풀이 선소리는 손운택(낙동민속보존회 고문)씨가 맡고 있다. 지신밟기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낙동강의 하류 지역인 부산의 북구 관내에는 동네마다 당산나무가 있고 새해가 되면 정월대보름날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당산나무 중에서도 구포의 대리 마을에 있는 팽나무는 부산·경남 일대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수령 500년이 넘었는데 국가의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구포에는 금정산으로 이어지는 주지봉이 주산으로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 아래 음정골을 끼고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대리마을이 있다. 해마다 정초가 되면 다른 마을처럼 이곳 구포 대리 마을에서도 풍물을 치는 사람이 앞장서서 동네사람들과 함께 당산 앞에서 지신밟기를 시작하여 가가호호를 돌면서 지신풀이를 하던 풍습이 전해내려 온다. 지신밟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지던 민속놀이로서 잡귀잡신을 몰아 내고 각 가정의 안가태평과 무병장수, 풍농, 풍어를 기원하던 마을 사람들 전체의 놀이였다. 정초에 액을 막아야 일년 동안의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고래의 토속 신앙에서 비롯된 지신밟기는 동네마다 주산과 당산이 있어 지역마다 특색이 있으나 거의가 비슷한 순서로 치러진다. 지신밟기 풍물패는 부잣집이나, 지난해 농사를 잘 지은 집부터 찾아가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마당, 대청마루, 부엌, 우물, 소마굿간, 장독간, 칙간(변소) 등으로 돌면서 목청 좋은 선창자의 메김소리에 풍물소리를 반주 삼아 흥겹게 춤추면서 뛰어 논다. 지신밟기를 하면 주인집에서는 주식상을 차려내와 대접하고 곡식이나 돈을 내놓으면 다른 집으로 향한다. 이때 모아진 전곡은 동네를 위한 일이나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썼다. 지신밟기는 모든 액이 소멸되고 한해의 복이 보장되는 것으로 믿어 온 민중들의 기원이 담긴 민속놀이라고 할 수 있다.
◈구포 장터놀이 낙동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구포에는 조선시대 정부에서 받아들인 조세, 곡물 등을 쌓아 두는 남창이 설치되어 공물선, 상선, 어선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남창 근처의 강변일대에서 3일, 8일과 같이 닷새만에 섰던 구포장은 낙동강 유역의 생활물자를 집산하는 교역지로서 크게 번창할 수 있었다. 농어민들은 그들의 생산물인 곡물이나 가축, 생선, 소금, 수공업 제품 등을 가지고 와서 물물교환이나 또는 미포, 전화를 매개로 하여 필요한 물자를 살 수 있었다. 장터는 지방민이 하루 일을 쉬면서 물자조달을 위해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적인 기능과 함께 장날이 되면 서로 만나 교육하고 정보를 입수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원천으로서 축제적 분위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구포의 장터는 현재 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남창이 있던 강변 쪽에서 철도 건널목이 있는 구포파출소 앞의 넓직한 마당에서 장이 섰고, 부근의 골목마다 시장이 벌어졌다고 한다. 강변 쪽의 나루터에서부터 생선전, 젓갈전이 섰고 안쪽에는 짚신전, 포목전, 잡화점 등이 진열되어 매매되었으며 중국상인 골목도 있었고 쇠전, 나무전 등이 있었다. 장날이 되면 상품을 가지고 장터를 돌면서 행상을 했던 등짐, 봇짐 장수들이 찾아왔고 또 하나 밥을 빌어먹으면서 장바닥을 누비던 각설이들이 찾아와서 장타령을 부르면서 문전걸식을 하였다. 각설이들은 시장의 점포를 돌면서 노래를 부르며 문안을 드리면 주인은 무엇이든 조금씩 베풀어주었고 그러면 각설이들은 다음 집으로 찾아 나선다. 각설이타령은 서두에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는 가사를 반복하면서 갖가지 타령을 부르는데 전국에 찾아다닌 장이름을 붙여 재미있는 사설들을 늘어놓는 장타령을 부르게 된다. 장타령은 서북지방, 강원, 충청도 등지의 장타령이 있는데 구포장이 나오는 장타령은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가 섞인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구포 감동진(甘同津) 나루터와 별신굿 별신(別神)굿의 목적은 예로부터 어떤 특수한 사람이나 일정한 대상이 아닌 마을 전체의 평화를 위해 논, 밭, 산, 강, 들, 사람, 짐승, 바람, 비, 농업, 어업, 기타 사업의 흥성과 마을사람들의 건강과 장수(長壽), 화목, 안전 등을 기원하는 데에 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여 산 사람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있다. 별신굿을 하기 위해서는 마을의 단체가 중심이 되고, 그밖에 노인회, 청년회, 부인회 등의 각종 조직의 협력이 이루어진다. 마을사람들에게 별신굿은 사회관계를 확대 심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식, 비공식 조직을 통해서, 평소에 소원(疏遠)했던 사람들끼리도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또, 마을을 공개함으로써 마을을 방문한 외지인들과도 접촉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場)이 되기도 한다. 별신굿이 행해지는 기간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 온 마을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여기저기에서 구경꾼이 모이고 굿을 하는 무악(巫樂)소리가 온 마을에 울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가무음주(歌舞飮酒)가 행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의 정서적 통합이 이루어진다. 넓게 보아 별신굿도 마을의 문화행사인 만큼 이런 행사를 통해서 유대를 통한 일체감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무당이 별신굿을 하면서 여러 신(神)들을 모시고, 신에게 인간의 소망을 고하고, 신의 대답을 듣고, 신을 보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신과 인간이 일체가 되는 것으로 믿었고, 또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와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얻게 되어서 죽은 자에 대한 죄의식을 해소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넋과 신들에게 삶의 바른 인도를 기원하는 가운데 사회질서가 은연중에 회복되는 것으로서 별신굿은 결국 살아있는 사람에게 삶의 자세와 윤리를 가르치는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별신굿에는 주민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어서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는 놀이굿으로 끝내는 축제적(祝祭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감동진(甘同津) 별신굿의 유래는 낙동강 수로(水路)교통의 출발지였던 구포지역 나루터의 이름인 감동진(甘同津)에서 찾아야 한다. 감동이란 지명은 신의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정부에서 받아들인 조세(租稅)곡물과 물품을 쌓아 두는 남창(南倉)이 설치되어 감동진 나루에는 공물선, 상선, 어선 등이 많이 드나들었고 강변의 장터는 크게 번창하였다. 구포지방의 별신굿에 대해서는 일제시대에 구포출신의 손진태(孫晋泰)씨 등 민속학자들 사이에 많이 연구되어 왔으며,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여 간행한 『석전(釋奠, 기우(祈雨), 안택(安宅)』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구포에서는 매년 혹은 격년(隔年)으로 별신굿을 지낸다고 되어 있다. 만약 별신굿을 하지 않으면 마을에 화재(火災)나 수해(水害) 또는 그 밖의 재앙(災殃)이나 질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별신굿은 여러 사람의 무녀(巫女)가 맡아서 하는데 “앞 당산(堂山) 골목이 남당산(男堂山), 여당산(女堂山)님(主) 제물(祭物)을 많이 잡수시고 동네의 집집마다 부귀공명(富貴功名)이 있게 해 주시고 가뭄도 홍수(洪水)도 없으며 잡귀(雜鬼), 잡신(雜神)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 마을을 지켜주시라”는 사설(辭說)을 외우며 춤을 춘다. 별신굿은 당산제(堂山祭)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안정(生活安定)과 재화방지(災禍防止)를 위한 것으로 한해의 성사(盛事)이며, 굿의 결과로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이 초래되고 재앙(災殃)을 막자는 소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겠다. 구포에는 현재 대리(大里)에 당산이 있어 여기에서 강신(降神)의례를 치른다. 당산나무는 높이 약 10m의 소나무 2그루와 거목(巨木)인 팽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수령(樹齡)은 약 600년에 이른다고 하며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 구포에서는 별신굿을 할 때 먼저 산신(山神)을 위하고 다음에 동구(洞口) 앞에 세워진 솟대와 장승을 위하는데 제전 3일 전부터 솟대와 장승의 주위를 청소하고 황토(黃土, 일명 禁土)를 뿌리고, 금줄을 이들의 신체(身體)에 돌려 묶은 다음, 부정(不淨)을 막기 위해 그 앞에 제상(祭床)을 차리고 제물(祭物)을 갖추어 동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무녀(巫女)가 빌게 되어 있으며 이것도 같은 시간에 솟대와 장승의 양쪽을 향해 행하여졌다.
◈학사대(學士臺) 수정마을의 철길건너 강변쪽에 학성산(鶴成山)이 솟아 있다. 이 산의 정상 부위의 바위에 학사대 대명과 경관을 나타내는 글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양산군지(梁山郡誌)』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학사대 - ‘在 左耳坊水亭里 後 金載鎭 臺名 曰 一心秋月 四面春風’(좌이방 수정리 뒤에 있으니 김재진이 대명에 가로되 ‘一心秋月이요, 四面春風이라’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一心秋月 四面春風’이란 글은 금정산에 가을달이 환히 떠오르는 경치와 낙동강과 산을 끼고 사방에 봄바람이 부는 경치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선비의 근본정신인 지조(志操)와 너그러운 기풍(氣風)을 선양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예조좌랑 김재진(禮曹佐郞 金載鎭)은 과거 급제자로 『양산읍지』에 소개되어 있다. 이곳 학사대를 일명 학수대(鶴首臺)라고 하여 풍수지리상 상학산(上鶴山)에서 양 날개를 편 학(鶴)의 머리 부분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상학산에서 학이 강으로 날아가는 형상의 지형을 나타내 주고 있다. 앞쪽 수정마을이 학의 목이 되는 곳으로 수정목이라는 지명이 전해 오는데, 일제가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풍수상 명당자리인 학의 목 부분을 자르기 위해 철도에 편입시켜 공사를 벌였는데 이 곳 일대에서 피가 나오듯 붉은 물이 고였다고 전해온다.
◈조대(釣臺) 수정마을은 예로부터 양택(집터)의 명당으로서 누대승람(樓臺勝覽) 등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다. 적색(赤色)을 띤 암벽(巖壁)에는 ‘釣臺主人 林景澤’라는 글이 새겨져 내려오고 있다. 이 조대(釣臺)는 조선시대 『경상도지(慶尙道誌)』 누대승람(樓臺勝覽)편에 ‘釣臺 林景澤 所築’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양산군지』에는 임경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괄의 난 때 전사한 공신의 6대손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다감(多感)하여 영리(營利)를 도모하지 않고 만시(晩時)에 적석(赤石)의 강변에 조대(釣臺)를 쌓고 자적(自適)하였으며 천성(天性)이 독효(篤孝)하여 세평(世評)이 높았다. 그리고, 이곳 조대의 암벽 상층부에는 네모난 돌에다 ‘金之觀’ 이름을 새겨서 올려놓았다. 이곳을 마을에서는 철도가 돌아가는 모퉁이라서 돌비석의 글대로 김지관 모랭이라고 부른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수정 마을에 뿌리를 내린 집안 중에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며 살고 있다. 김지관(金之觀)은 수정 마을에 정착하여 동네를 일군 공적이 있는 인물로서 후세에 그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동네에서 조대(釣臺) 바위 위에 비명(碑銘)을 새겨 올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김씨 집안 족보에 의하면 김지관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802(순조 2) 수정 마을에서 태어났던 인물로 나와있다.
북구의 종교는 아직도 민간신앙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나,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함께 확산된 기독교의 교세가 우세한 구에 속한다. 종교단체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가 있으며, 각각 93개소, 3개소, 39개소, 1개소의 교당이 있으며, 기타가 3개소 자리잡고 있다. 성직자수는 196명, 11명, 63명, 5명 순이다.
◈대형규모의 백화점이나, 도소매점은 없지만, 일반시장이 6개 있다. 전체 부지면적은 11,060㎡, 건물면적은 15,097㎡를 차지한다. 구포1, 2동, 화명동, 덕천1, 2동, 만덕 1동에 시장이 위치하여 생활의 편리함을 돕고 있다.
◈민물장어 매일장 ☎ (051)335-1122 / 은행나무집 ☎ (051)332-2929 / 행운장 ☎ (051)334-1407 / 늘봄 ☎ (051)332-1743 / 부산집 ☎ (051)332-9569 / 삼만석 ☎ (051)332-2247 / 웅촌집 ☎ (051)332-8751 / 광양집 ☎ (051)335-4768
◈구포국수 거북제면 ☎ (051)32-2865 / 역전제면 ☎ (051)332-4259 / 천일제면 ☎ (051)332-1743
◈염소·오리불고기 녹원장 ☎ (051)332-4553/계곡산장 ☎ (051)333-9292 / 한일장 ☎ (051)332-2828 / 대림장 ☎ (051)331-6219 / 서울집 ☎ (051)332-5917 / 백운장 ☎ (051)332-9311 / 만포장 ☎ (051)333-2929/청산별장 ☎ (051)334-3807 / 동래장 ☎ (051)332-4684 / 하와이가든 ☎ (051)31-8822 / 김해집 ☎ 332-9959 / 그린가든 ☎ 342-1144 / 만덕집 ☎ (051)332-4454 / 천우장 ☎ (051)337-0007 / 성광집 ☎ (051)332-3902 / 만덕회관 ☎ (051)332-2842 / 목화장 ☎ (051) 335-3366 / 메아리산장 ☎ (051)342-8491/우리장 ☎ (051)332-1609 / 청기와집 ☎ (051)334-5200 / 정원집 ☎ (051)332-7711 / 우수가든 ☎ (051) 335-4216 / 산장집 ☎ (051)332-0797 / 오동나무집 ☎ (051)332-2506 / 오양집 ☎ (051)332-6622 / 송림공원 ☎ (051)333-3399 / 만수장 ☎ (051) 333-5252 / 오아시스 ☎ (051)334-6644 / 금하장 ☎ (051)336-1050 / 만덕별장 ☎ (051)333-3939 / 구포장 ☎ (051)337-9886 / 서라벌장 ☎ (051) 335-5454 / 부산가든 ☎ (051)342-9916
◈정월대보름 달맞이축제 매년 정월대보름. 1990년도부터 개최되어 오고 있는 지역 행사로 한해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축제 한마당 행사이다.
◈낙동민속예술제 매년 10월. 1993년도부터 개최되어 오고 있는 이 지역의 유일한 문화축제로서 주민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민속놀이 재현과 민속경연, 문예행사 등이 다채롭게 구성되어 한마당축제로 전승되고 있다. 또 별신굿은 격년제로 열리고 액운을 없애고 풍요로움을 비는 의식을 재현한다.
◈‘구포장터 3·1절 만세운동’ 재현 행사 매년 3월중.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그 당시의 만세 함성을 다시 한번 외쳐보고 북구에도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선조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기념하는 행사이다.
방송사나 신문사는 없고, 중계유선방송이 구포 2동, 화명동, 만덕 2동에 각각 1개소 있다.
◈병풍암 석불사 마애석불 만덕 고갯길을 따라 오르다가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쪽으로 바위들이 솟아있는 봉우리가 있다. 이곳에는 큰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병풍바위라고 부른다. 자연적으로 둘러 서 있는 거대한 바위들에는 마애불상(磨崖佛像)이 새겨져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60여 년 전 한 스님의 원력으로 건립한 석불사는 자연적으로 둘러앉은 거대한 바위들에 16나한(羅漢)과 29개의 불상(佛像)이 새겨져 그 위용을 드러 내놓고 있는데 국내 최대의 마애불(磨崖佛)군을 이루고 있다.
◈상계봉 예로부터 대천(大川)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금정산(고당봉)이 있고 남쪽으로 상학산(상계봉)이 있다고 했다. 깎아지른 듯한 수십 길의 직벽과 기암들이 줄줄이 늘어 서 있는 상학산의 주봉(主峰)을 상계봉(上鷄峰)으로 부르고 있다. 상계봉이란 이름은 산정(山頂)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닭의 볏을 닮았다는 데 유래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가 부근에서 가장 높아 새벽이 다른 곳보다 먼저 밝아온다는 뜻으로 상계봉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봉우리 자체를 두고 평가한 것이지만 예로부터 불러오던 이름인 상학산(상계봉)은 풍수지리상 학(鶴)의 형상에서 유래하고 있다. 지역 고로(古老)들의 이야기로는 상학산은 쌍학산으로서 학이 양 날개를 편 듯 좌우로 봉우리가 뻗어 내리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풀이하고 있다. 상학산은 학의 근본이 되는 산으로 양쪽 날개인 좌우 봉우리를 살펴보면 화명쪽으로 화산(華山) 암봉이 뻗어있고 만덕쪽으로 마애석불(磨崖石佛)로 유명한 병풍암 능선으로 뻗어 내리고 있어 풍수지리상 명산으로 꼽힌다. 이 상학산의 학의 머리 부분은 화명 수정마을의 강변쪽 학사대(學士臺)가 있는 학성산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금정산성문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금정산성은 그 축성(築城)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그 구조의 일단(一端)에서 신라식(新羅式)의 축성법(築城法)이 엿보이므로 낙동강 하류의 왜구(倭寇)를 막기 위하여 신라시대부터 쌓았던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현존(現存)하는 금정산성은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慶尙監司) 조태동(趙泰東)이 남쪽 끝에서 왜(倭)와 가까운 동래부(東萊府)에 방비가 필요하다고 하여 금정산에 축성(築城)할 것을 조정(朝廷)에 장청(狀請)하고 재가를 얻어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 주관으로 쌓은 것이다. 그러나 금정산성의 축성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 제1권 금정산성조에 나오듯이 원래 신라시대부터의 성이라는 사실은 이 성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성(城)의 4대 문(門) 가운데 동서의 양문(兩門)은 고려, 조선시대에 개수(改修)한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기법(技法)을 찾아 볼 수 있다. 문의 내외 둔병(屯兵) 사타의 양식은 신라 특유의 축성인 반원형(半圓形)의 속단(屬段)으로 그것이 세 겹 또는 다섯 겹으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금정산성은 신라 때부터 극성을 떨던 왜구(倭寇)에 대비하기 위하여 울산(蔚山)의 관문성(關文城)이나 하동(河東)의 고소성(姑蘇城)과 같이 왜구가 극심하던 낙동강 하류 연안에 쌓여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북구와 접해 있는 성문은 남문(南門)과 서문(西門)이다.
◈대천천과 애기소 대천 계곡의 중류에는 전설이 깃든 애기소(沼)가 있고 여기에 폭포수가 떨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시냇물이 가로지르는 암벽의 중간에 활 등같이 잘룩 굽은 한가운데로 위쪽 물대야처럼 생긴 앵핑이소에서 흘러내린 물이 폭포를 이루어 웅덩이가 되니 이것이 애기소이다. 옛날에는 높이가 4m로 여기서 내리 쏟아지는 물 밑 깊숙히 바위들이 앞뒤로 가려 있었는데 한가운데 수심(水深)은 어른 키의 세 길이나 될 만큼 깊었고 소(沼)의 넓이는 150여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 제방(洛東江 堤防) 낙동강 하류지역인 구포 사상과 김해 사이의 동서연안(沿岸)에 제방을 쌓기 시작한 것은 구포다리 건설과 때를 같이 한 것이다. 일제시대 낙동강의 대치수 사업으로 위로는 대동수문(大東水門)을 설치하여 강의 흐름을 구포, 사상 쪽으로 모두 흐르도록 하고 아래로는 녹산수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조수(潮水)를 막아 김해평야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수리사업을 전개하였다. 낙동강 하류지역은 강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유사(流砂)가 퇴적되었고, 김해 쪽은 충적토(充積土)지대로서 삼각주(三角洲)가 형성되어 김해평야 일대는 물론 구포, 사상지역에도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강변 저습지였다. 1931년부터 서양안의 하상(河床)을 낮추고 하폭(河幅)을 넓히기 위하여 축제용(築堤用) 토량(土量)을 강변의 둔치에서 채토(採土)하여 임시 철로(鐵路)를 가설하여 바퀴가 달린 궤짝에 담아 운반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제방은 근 5년만에 완공을 보았고 그 이후 1936년, 1940년, 1957년에 걸쳐 일어났던 대홍수에도 이 지역이 옛날의 큰 물난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포의 낙동강 제방에는 설치 당시 강변쪽의 나루터로 드나들기 위한 7개의 수문(水門)이 있었다.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겨레의 젖줄인 낙동강은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피 흘리며 항쟁했던 3·1 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유유히 흘러내리고 있다. 강물 다리 뱃길을 오르내린 큰 나루터가 있었던 강변의 장터에서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은 천여 명 장꾼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겁게 이어져, 하나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왜경의 총칼 앞에서도 맨몸으로 싸웠고, 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하다가 끝내 옥살이를 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은 이 고장에도 민족혼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참으로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구포장터 항일 투쟁의 혈맥을 후대에 길이 물려주기 위하여 8·15광복 제50주년을 맞아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둑 위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구포·덕천권 구포왜성 → 3·1운동기념비 → 철새도래지 → 이유하축은제비 → 구포팽나무 → 부산전문대민속박물관 → 운수사
◈만덕권 만덕사지 → 만덕사지 당간지주 → 석불사병풍암 및 계곡 → 만덕 산 1번지 → 상계봉 → 금정산성남문 → 향토순례코스 → 상학산절경
◈금곡·화명권 수정마을 향토비 → 조대 → 학사대 → 금곡알터유적 → 천승호효자열녀비 → 대천천애기소 → 금정산성서문
◈북구청 문화정보과 북구 구포2동 1124 -1, ☎ (051)304-7501
◈구포역 구포 2동 1060 ☎ (051)342-7788
◈어린이 위락시설 정글인(덕천 1동 소재)
◈수영장 현대 레포츠(만덕3동), 백산프라자(만덕3동 소재)
◈골프연습장 신만덕 골프연습장
◈볼링장 현대 레포츠(만덕3동 소재), 구포 볼링장(구로고가도로 옆)
◈테니스장 구포 테니스장(구에서 직영)
◈기타 어린이 공원이 49개소(765㎡), 근린공원이 10개소(9,815㎡) 있다.
◈부산전문대 민속박물관 민속자료 약 1,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구포3동 산 46-6 ☎ (051)330-7077
◈구포시립도서관 장서는 61,636권을 소유하고 있고, 열람석은 336석이다. 직원수는 19. 구포 2동 산 42-36 ☎ (051)332-0855
◈인표어린이도서관 장서는 6,500권을 소유하고 있고, 열람석은 50석이다. 구포 3동 1255-2 ☎ (051)336-7007
◈낙동문화원 대공연장 문화원 대공연장, 구포2동 1186-20 ☎ (051) 301-2710
◈낙동민속보존회 구포 1동 73-13, 대리 지신밟기 전수, ☎ (051)342-1711
◈구포장터놀이 민속보존회 구포장터놀이 보존회 및 전수, ☎ (051)301-2710
◈아시아극장 비디오소극장, 구포1동 1060-51, ☎ (051) 332-8307
◈오스카극장 비디오소극장. 덕천2동 399-1 ☎ (051) 335-3824
◈북구낙동문화원 구포2동 1186-20 ☎ (051) 301-2710 원장 백이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