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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수영성 수영동 수영로타리에서 북쪽으로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자리이다. 경상 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그 관할하에 1개의 첨사영(僉使營)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되었으며, 모두 65척의 전선(戰船)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영성의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은 7년 동안 약탈과 살육을 벌하였다. 이때 수영성의 수군과 성민 25명은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25인의 의용(義勇)을 기린 비문에 새겨진 이름에서 전사한 이들이 일반민들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25의용단을 비롯한 유형문화재 3종과 수영야류 등 무형문화재 3종, 수영동 곰솔, 푸조나무 등 천연기념물 2종, 안용복장군 충혼탑 등 기타 문화유적 7종이 있으며, 이를 보존·관리하고 있는 수영민속예술관이 있다. 특히, 수영 민속예술관은 왜인들에게 독도가 우리땅임을 확약 받아온 안용복장군 충혼탑을 비롯하여 송씨할매당, 할배당 등 수영사람들의 혼이 담겨있는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부산의 해양민속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 문화 유적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 안용복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양국간의 현안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현재의 상황에서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한 안용복은 일찍이 영토문제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역사적 인물이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사람으로 동래의 수군이란 기록만 전할 뿐 그의 약력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 19년(1693) 봄 안용복은 동래어민 40여 명과 울릉도 부근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일본어부들이 울릉도에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보고 에도막부에 항의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승인하는 서계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 막부는 안용복의 항의로, 다케시마는 이나바에 속했다고 하나 아직 일본인이 거주한 일이 없고 또 거리로 볼 것 같으면 이나바로부터 1백 60여리, 조선으로부터 40여 리이니 조선 땅인 것이 명백하다고 밝히고 일본인이 울릉도에 나가는 것을 금했으며 그 뜻을 조선 정부에 통고하도록 대마도주에게 명했다. 대마도주는 내심 불쾌했으나 막부의 명(命)인지라 숙종 22년(1696) 10월 우리 나라에 그 뜻을 전하고 숙종 23년 2월 정식으로 동래부사 이세재에게 서계를 보냈다. 안용복의 국가수호의 의지를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수영공원에는 그의 충혼탑이 세워져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 정서 고려 17대 인종의 동서로 내시낭중(內侍郎中)의 벼슬에 있었던 동래 정씨의 시조 정문도(鄭文道)의 증손자이다. 의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의 동생인 대령후 경(大寧候 暻)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불궤(不軌)를 꾀했다는 모함에 의해 동래로 귀향와서 여기서 6년간 유배되어 있었다. 귀양살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오이(瓜)밭에 정자(亭子)를 짓고 ‘정과정’이라 하였다. 그는 지금의 수영구 망미 2동 4-7번지 인근의 수영천변에서 오이를 심으며 거문고로 노래하며 의종의 소환을 기다렸다. 정과정곡은 부산지역에서 우리 국문학사상 가장 가치를 지닌 가요(歌謠:詩歌)이다. 이 노래는 원래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삼진작(三眞勺)이란 악보명으로 실려 있지만 뒷날 사람들이 정서의 호를 따서 가요명을 「정과정」 또는 「정과정곡」이라 일컫게 되었다. 수영천변에는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천연기념물 • 부산수영동 곰솔 - 제270호, 수영동 229-1 • 부산수영동 푸조나무 - 제311호, 수영동 271
■ 중요무형문화재 • 수영야류 - 제43호, 수영동 229-1 • 좌수영 어방놀이 - 제62호, 수영동 229-1
■ 유형문화재(이하 광역시지정) • 수영성 남문 - 제17호, 수영동 229-1
■ 무형문화재 • 수영농청놀이 - 제2호, 수영동 229-1
■ 기념물 • 좌수영 성지 - 제8호, 망미동·수영동 • 25의용단 - 제12호, 수영동 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