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신밟기 음력 정월초에 지신을 진압함으로써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강과 다복을 축원하는 벽사진경(邪進慶)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적 행사로 약전골목을 중심으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지신밟기패가 집에 도착하면 주인은 주·과·포의 고사상을 차리고 대접하며, 구성은 꽹과리, 징, 북, 장구 등으로 구성된다.
◈ 달성공원과 잉어샘 지금의 달성공원 자리는 옛날 달구벌(達句伐)의 성터였다. 이곳은 이 지방의 토착호족이었던 달성서씨(達成徐氏)의 세거지로서 집터로 다른 것은 모두 좋으나 식수(食水)가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일일이 성 밖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불편을 겪고 있던 중 신령의 점지로 우물을 팠더니 맛이 좋고 찬물이 나와서 신령이 가르쳐 주어서 찾은 샘이라 하여 영천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고 이곳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 수효만큼의 잉어가 두레박에 담겨나와서 그 이름을 잉어샘이라고 고쳐 불렀다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잉어샘의 자리는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된 아쉬움이 남는다.
◈ 달성판관의 명판결 옛날에는 신임사또가 임명되면 그 고을 육방관속이 사또의 본집까지 가서 모시고 오는 것이 관례였다. 서울 사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달성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달성의 육방관속들은 관례에 따라 사또를 모시러 찾아갔더니 기대와는 딴판으로 사또의 키는 5척도 못되는 단구요, 거기다 얼굴조차 빡빡 얽은 곰보요, 나이는 겨우 스물이 넘을락 말락한 애숭이로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달성으로 내려오다가 문경새재에서 판관과 그 일행이 피곤한 몸을 쉬고 있을 때 찢어진 갓을 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어린 상주가 울면서 사또에게 딱한 사정을 하소연했다.
하소연의 내용인즉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비용을 마련키 위해 상주의 몸인데도 닭 다섯 마리를 팔러 시장에 나왔다가 어느 못된 닭장수에게 닭 다섯 마리를 가로채여 닭값도 못 받고 닭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젊은 판관은 닭에 먹였던 모이를 가지고 닭 주인을 찾아내는 명판결을 내리고, 닭장수로부터 닭값의 열 배를 배상금으로 받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청어샘 달성공원 앞을 흘러 금호강으로 들어가는 달서천 부근 마을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마음씨 곱고 인정 많은 과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과부의 집에 하루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왔지만 집안 형편이 가난하니 맛있는 반찬을 구할 수는 없고 따뜻한 밥이라도 정성껏 지어 대접하자는 생각을 하며 샘으로 물을 길으러 갔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다른 때보다 두레박이 한결 묵직하다. 웬일인가 해서 바삐 끌어올려보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두레박 속에는 큰 청어 한 마리가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게 아닌가! 과부는 그 청어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귀한 손님을 대접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도 기적은 되풀이되었다. 어떤 집에 손님이 와서 그 주인이 이 샘에 물을 길으러 가면 두레박 속에는 손님의 수효대로 청어가 담겨 올라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뒤부터 이 샘을 청어샘이라 불렀는데 샘에서 청어가 나오는 것은 이 샘의 물길이 땅속에서 동해바다와 연결되어 있는데 동해 용왕이 대구사람의 후덕한 마음씨를 기쁘게 여겨 청어를 보내준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 경상감사의 아내 옛날 경상도 어느 산골에 양반집 후예로서 청춘에 홀로 된 과부가 어린 딸자식 하나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고 농사짓고 길쌈하는 가운데도 딸에게는 글을 가르치고 예의범절을 익히게 했다. 어머니는 딸이 혼기에 접어 들고부터는 틈날 때마다 뒷산에 있는 절에 올라가 부처 앞에 “그저 우리 딸 경상감사 마누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축원했다.
이와 같은 어머니의 소원 내용을 알게 된 그 절의 중이 간계를 부려 딸을 뒤주 속에 가두어 넣고 절로 데리고 가려 했다. 때마침 조령(새재)부근에서 호랑이를 잡아오던 경상감사의 행차를 만나게 되자 중은 뒤주를 길가에 팽개치고 달아나고 말았다. 이상하게 여긴 감사일행이 뒤주를 열어보니 기품 있고 아리따운 처녀가 들어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감사는 뒤주속에 처녀 대신 호랑이를 넣어두고 처녀는 감영으로 데리고 가서 감사의 아내가 되었고, 중은 뒤주 속에 있던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돼지골목(서성로 주변) 중구 서성로는 본 명칭보다는 ‘돼지골목’이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해방을 전후하여 지금의 인교주차장 부근의 떡전골목과 동산철물 부근인 말전골목에는 짐을 실어 나르는 마차가 많인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 곳에 모인 마부들은 요기를 하기 위해 서성로 골목에 있는 식당을 주로 이용하였는데 그들은 값싼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그러자 돼지고기만을 취급하는 음식점이 한 집, 두 집 늘기 시작했다. 그후 시대가 변하여 택시기사들이 그 옛날 마부들을 대신해서 이 곳 돼지국밥을 즐겨 찾자 돼지고기집이 더욱 번창하게 되었으며 이름도 ‘돼지골목’으로 불려지고 있다.
◈ 오토바이 골목(동산파출소∼대자연예식장 주변) 인교동 오토바이 골목은 본래 하천이었다. 1953년의 하천 복개로 교통에 편익을 가져오게 되고, 좌우로 상점이 조성되었다. 1961년 인교동 154번지 서울오토바이상회를 효시로 점차 확산, 오늘날 오토바이 골목으로 칭하게 되었다.
◈ 책방 거리(달구로 시청주변) 달구로는 도시의 중심지로서 유동인구가 많은 상가지역으로 6·25동란 후 시청 부근에 헌책을 사고 파는 서점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만이서점 외 8개 업소가 영업을 시작하여 1970년경 도로확장이래 현 공무원교육원까지 생겨나서 현재 영업중에 있다.
◈ 국수 골목(문화동 옛 국세청뒤) 1977년 문화동 10번지 주변 골목이 주택가로 있을 때 현재의 별미식당이 실비로 칼국수 장사를 시작하게 됨으로 주변 회사직원, 상인, 시민들이 애용하게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주변에 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업소가 생겨나게 되고 현재는 국수와 삶은 돼지고기를 취급하며 영업중이다.
◈ 실가게 골목(달성공원 앞) 일제시대 때 화장품 가게에서 잡화상 형태로 판매하게 된 것이 효시가 되었으며 해방 이후 대구에 방직공장이 생기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전문적인 실 판매는 1965년 이후 현재와 같은 전문상가가 생기면서부터이다.
◈ 가구점 거리(이천로 주변) 1960년대 중반에 소년원이 타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봉산동 208-16번지 일대에 중고 가구를 수리하는 가구점이 하나, 둘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81년 이천로가 개통되면서 도로변을 중심으로 가구점들이 생겨나서 영업중이다.
◈ 함석점 거리(깡통골목, 서성로 일원) 6·25동란 이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깡통, 드럼통 등 고물들의 재생, 활용을 위해 점포가 생겨나기 시작하여 깡통골목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1965년경 함석이 상실되면서 고물을 활용하는 것이 점차 줄어들자 1978년경부터는 보일러상, 철물상, 함석상 등이 들어선 상가가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자동차 부속상 골목(남문시장∼명덕네거리 일원) 1968년경부터 명덕로터리 주변에 자동차 중고 부속상이 생겨나서 판매 및 자동차 수리를 하였으며 1978년도 도로가 확장 개통되면서 골목을 중심으로 자동차 부속상, 배터리 등 자동차 관련 점포들이 모여들어 상가가 형성되었다.
◈ 타올 거리(서신로 섬유회관 건너편) 1968년경 서문시장 상권인 현 동산약국 부근에 타올상회가 생겨났으며 그 후 점차적으로 증가되어 1980년경 서문시장 내 산재한 타올상회 및 신규 타올 전문점이 현 위치로 모여 영업중이다.
◈ 갈비찜 골목(동인동 파출소 뒷편) 1972년경 동인 1가 323-3번지 실비식당인 대포집에서 술안주 및 반찬으로 갈비찜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자 점차 손님이 많아졌으며 그 후 영업이 잘 된다는 소문이 번지자 1975년경부터 한 집, 두 집 갈비찜 식당이 생기면서 동인동 찜골목으로 통하고 있다.
◈ 공구상 골목(인교동 달성공원 입구) 국산공구가 생산되지 않던 1947년경 지금의 인교동 골목(당시 푸른다리)에서 미군부대로부터 불하된 폐공구를 수집, 11명이 영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 시초가 되어 그후 1950년대에는 23개 점포가 되었으며 기계공업의 발달로 계속 늘어나 집단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는 국산공구가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14년 전부터 공구상우회를 조직하여 정기총회 및 회원단합을 위한 야유회(년 1회)를 갖고 있으며 도시 환경정비에도 앞장서고 있다.
◈ 금은방 거리(대신 네거리∼큰장 네거리) 1960년부터 서문시장 포목부의 활성화로 인하여 금은방 점포가 20개정도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 후 결혼 혼수, 예물 등을 동시에 마련하는 전문업소의 규모도 커졌으며 많은 금은방들이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용하는 시민도 증가되면서 금은방 거리로 칭하게 되었다.
◈ 미싱 골목(북성로) 1970년도 말 서문시장과 달성공원 사이의 황폐한 골목으로 땅값이 싸서 임대료 부담이 적기 때문에 일부 사업자가 이주하여 영업해 왔으나 1985년도부터 한 집, 두 집 모이기 시작하면서 현재 상태의 미싱골목이 조성되었다.
◈ 양말 골목(신남네거리주변) 약 20년 전 원일상회 박정원 씨가 최초로 양말 소매상을 경영하였고, 2년 후 동영회 회장인 이태봉 씨 외 4세대가 양말 소매상을 시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상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현재의 양말 골목이 형성되었다. 약 13년 전 대서로가 확장됨에 따라 대신 2동과 남산 4동으로 분리되어 영업하게 되었다.
◈ 약전 골목(남성로)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이름난 국내 제일의 약재시장이었다. 1650년대에 개설된 약령시는 매년 음력 2월과 10월 춘추 2회에 걸쳐 개시되었다. 대구 약령시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조정에서 중국에 대한 조공용과 무역용 등을 사들였기 때문에 상인들은 약재 중에도 가장 정선된 것을 출시하였고, 따라서 약령시를 통과한 약재는 산약으로서 세상의 신용도 두터울 뿐 아니라 영시의 권위를 높여 주었다. 오늘날의 약령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쇠퇴하였으나 지금도 대구시 남성로 일대에는 건재상 한약방, 한의원이 모여 있어 약전골목이란 이름과 함께 옛 약령시의 잔영을 간직하고 있다.
◈ 동성로 야시 골목 코리아 헤럴드 학원 뒷골목. 고려양봉원 앞, 옛 데레사소비센터 옆 골목을 따라 신세대 패션의 필수품인 각종 의류, 악세서리, 신발, 화장품 등을 갖춘 미니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갤러리존과 같은 대형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가장 잦은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 따로국밥 한국전쟁 직후 구 한일극장 옆 옛 소방서 근처에 육개장으로 유명한 국일식당에서 ‘따로’가 처음 시작되었다. 이 무렵 육개장이 많이 팔렸는데, 심부름하는 아이가 손님에게 육개장에 말아 드릴까요 아니면 따로 드릴까요 묻는다. 그러면 손님이 ‘따로’라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따로국밥의 비법은 육개장 국물에 있다. 소뼈를 13∼14시간 곤다. 그 곤 물에 고춧가루 등 양념을 배합하여 맛을 낸다. 이른 새벽부터 야근자와 술꾼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다.
◈ 해장국 중구 종로와 향촌동 일대는 늘 새벽손님이 붐빈다. 1940년대부터 생겨난 해장국집은 골목 주막집에서 시작해 주위 건물이 늘어나면서 「청도식당」을 중심으로 독특한 맛 개발로 번성해 왔다. 해장국을 만들 때 넣는 채소는 계절에 따라 우거지, 배추, 냉이 등을 넣고 고기는 소의 엉덩이뼈와 종지뼈를 14시간 정도 곤다.
◈ 동인동 갈비찜 중구 동인동 동인파출소 옆 골목길은 일반 갈비찜과 다른 벌겋게 양념된 갈비찜 집들이 늘어서 있다. 지난 1974년부터 갈비찜을 주종으로 한 집들이 생기면서 10여개 업소가 성업중이다. 동인동 갈비찜 맛의 비법은 열전도율이 낮은 양은냄비로 양념이 골고루 배이면서 익히도록 하는데 있다.
◈ 약령시 한약재 대구 약령시는 한방의(漢方醫)에서 사용하는 약재를 매매하던 큰 시장이다. 조선시대 약령시는 대구, 원주, 전주, 공주에서 열렸으며 수백년의 역사를 가졌다. 그 무렵 일본으로 수출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