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북구는 금호강을 끼고 형성된 지역이기 때문에 취락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북구지역에 편입되어 있는 금호강 유역에 크고 많은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이 대구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북구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동천동 집터와 연암산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 침산 유물산포지, 검단 유물산포지, 서변동 청동유물 출토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유적지는 팔계천 유역의 동천동 집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호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선사시대부터 금호강 유역에 크고 작은 취락이 형성되어 생활무대가 되어 왔음을 뜻한다.
지금의 북구지역이 기원전후를 시점으로 성립하기 시작한 초기 삼국시대의 읍락국가 중 어느 국가에 속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기원전 3∼2세기경에 이르러 대구지역에 강한 권력을 가진 여러 지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대구분지를 나누어 지배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통합과정이 이루어지면서 사회집단들간에 세력의 격차가 발생하고 주도적인 지배세력이 대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팔달동·만촌동의 금호강변 구릉과 신천동 구릉, 와룡산 기슭의 평리동, 비산동 그리고 두산동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발견된 유적을 통해서 볼 때, 이 지역에 풍부한 청동기와 철기를 소유한 정치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 이 시기에 존재한 토성을 미루어 보아도 주도세력이 대소집단을 통합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대구지역의 토성으로는 봉덕동의 용두산, 북구 금호강변의 검단, 달성동의 달성공원이 대표적인데, 용두산성은 대명동 고분군, 달성은 비산동 고분군, 검단토성은 복현동 고분군과 관련이 있다.
기원후 3세기경에는 달성공원과 비산동, 평리동 고분군의 주인공들이 대구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읍락국가를 성립시키는 주도적 세력으로 군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석실분의 규모와 출토되는 유물의 양과 질이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북구지역은 3세기를 전후하여 검단토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집단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나중에 현재의 비산동과 평리동 지역을 근거로 하는 지배세력의 영역에 포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삼국사기』 권 34 상주조(尙州條)에 의하면, 8세기경 북구지역은 대구현(大丘縣)과 팔리현(八里縣)에 속하였다. 당시 대구지역은 수창군과 그에 영속된 대구현,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 등 도합 다섯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구현은 신천의 중하류 지역으로, 오늘날 대구의 중심지역이다. 팔리현은 원래 칠곡군 칠곡면이었으나,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지역에 편입되어 있다.
이들 지역에는 모두 5, 6세기의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다. 대구현에는 내당동, 비산동, 대명동 고분군, 팔리현에는 구암동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주변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지금의 북구 칠곡동 지역은 구암동 고분지역을 포함하여 팔리현의 성읍영성(城邑領城)으로 간주된다.
대구광역시 북구는 1938년 12월 2일 대구부 조례 제22호에 의해 원래 경북 달성군 성북면에 속했던 4개 동(洞)을 관할하는 북부출장소 신설이 근원이 되었다. 그후 1988년 5월 1일 자치구로 승격되었으며 1991년 4월 15일 제1대 북구의회가 개원되었고 1995년 1월 1일 대구광역시 북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금의 북구는 총면적 95.46㎢로 4개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대륙교통의 요충지이자 대구의 관문 금호강을 축으로 강북 신개발지와 옛시가가 혼재된 지역이며 대규모 종합유통, 물류단지 및 택지지구 조성 등의 개발지역, 공업지역, 주거지역, 농촌지역의 문화가 뚜렷이 구분하여 공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